2015. 10. 17.

잠언 17



0. 어떤 이들은 잘못된 믿음을 위하여 순교한다.


1. "올바른 일을 올바른 동기로 행해라!" - 칸트


2. 카뮈는 자신의 희곡 <칼리굴라>에 대한 노트에서 '여동생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던 칼리굴라가 죽음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적었다. 이는 깊은 고통을 품은 자들에게는 실로 당연하게 가히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통의 사유를 자신의 개별 경험을 넘어선, 심지어는 보편적인 것마저도 넘어선 곳까지 밀고 나가는 이는 드물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사회가 깔아준 정상적 도덕감정의 한도 곧 '정상성'의 한도 내에 머무르고야 만다. 물론 정상성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나, 두려움에 떨며 사회가 설정해준 틀 안에서 생각하고 사는 인간을 성숙한 인간이라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사유란 참으로 존재에의 용기와 관련된 것이라 말해야 한다.


3. 모든 남자는 자신만의 매력을 갖는다.


4. 사랑이 구원과 고향을 찾기 시작하는 순간, 그 사랑은 사랑에서 어긋난다.


5. 글쓰기 혹은 삶 - 담백한 실력으로 채워야 할 자리를 노력의 양으로 메꾸려는 경우가 있다.


6. 모든 것을 자기가 받은 인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실제로 그 대상이 어떤지 또는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관심이 없으며 오직 자신의 주관적 확신 구조에 의거해 모든 것을 심판한다. 이들에게 이런 사실을 지적하면 이들은 자기 사정을 대며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강변하는데, 자기 자신과의 거리두기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극히 명확한 형태로 보여주는 이런 대답이야말로 이들의 끔찍함을 배가 시킬 뿐이다.


7.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해 철학을 한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상식'만 빼고.


8. 철학함이란 내가 학습받은 모든 당연함, 정상성, 상식의 안팎에서 스스로 생각하는것인 것만큼 '불온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부모에서 선생님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자들이 철학을 반기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철학은 고분고분하고 길들여진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9.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 수줍어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야기의 모순이나 한계보다 그 선의와 순수함을 알아주며 호응해준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말이 옳은 말이어서 타인들이 공감하고 호응해준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타인의 너그러운 공감과 호의를 옳고 그름의 문제와 뒤섞어서는 안 된다.




10. 말라르메의 언어와 시 - 해설을 대신하여 옮긴이가 아들에게 보내는 네 통의 편지

네게 보내는 편지를, 또는 이 번역에 붙이는 해설을, 여기서  끝낸다. 네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은 말라르메나 그의 <시집>과는 크게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내가 이 시집을 번역하면서 시인에게 바쳤던 존경심을 네가 기억해주기 바란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리라. 생각한다는 것의 끝에까지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적인 삶은 없다.  게다가 지금 인간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항상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극도로 비정한 삶을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시는, 패배를 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정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이 행복과 윤리가 너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2005년 겨울, 아버지

- 스테판 말라르메, <시집>, 문학과지성사, 45쪽.



11. 유년의 끝 - 철학에 입문한다는 것, 곧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로 마음 먹는다는 것은 자신이 이제까지 그 안에서 커왔으며 따라서 바로 오늘의 자기 자신이기도 한 자신의 '순수'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일, 그것을 검토해보는 일이다. 이러한 거리두기와 검토 행위는 실로 자신의 존재 기반을 뒤흔드는 두려운 일이며, 바로 이것이 참다운 철학자와 소설가가 그토록 드문 이유이다.



12. 완벽히 멸균된 세계 - 순수란 글자 그대로 '순수하지 못한 것'을 제거하는 배제와 거부의 장치이다. 순수는 허구적인 동일자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불순한 타자성'을 솎아내는 권력기제이다. 순수는 '순수한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내 주변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로부터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선별의 기제이다.



13. 다른 사람은 다른 삶을 산다(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이 다 다르다는 말이다).



14. 자신이 해야만 하지만 감당할 수 없어서 '못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병, 강박관념일 뿐이다.



15. 내가 인류학적 코드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을 때 나는 이른바 '합리성'만이 옳교 그름의 유일한 기준인 줄로만 알았다. 이러한 관점 아래에서 젊은 날의 나는 나와 다른 합리성의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줄로만 알았다. 그 결과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일을 하고 관계를 맺게 될 때 나의 말이 그들의 신뢰를 얻지도 설득력을 갖지도 못한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훗날 푸코를 공부하게 되었을 때 나는 에피스테메가 바로 이러한 주어진 특정 시점에 있어서의 한 사회가 작동시키고 있는 인식 가능조건들의 집합, 곧 인식론적 장임을 바로 이해했다. 이러한 에피스테메의 이해가 중요한 이유는 마치 패션 디자이너가 소비자의 (자신이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만 심지어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무의식적 심성구조, 행동패턴을 정확히 이해하면 옷이 잘 팔릴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같다.


16. '현실'로 보이는 것이 가장 비현실적인 관습적 관념이다.



17.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해 철학을 한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진실'만 빼고.






18.


「바다의 미풍」 - 스테판 말라르메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구나.
달아나리! 저곳으로 달아나리! 미지의 거품과 하늘 가운데서
새들 도취하여 있음을 내 느끼겠구나!
어느 것도, 눈에 비치는 낡은 정원도,
바다에 젖어드는 이 마음 붙잡을 수 없으리,
오, 밤이여! 백색이 지키는 빈 종이 위
내 등잔의 황량한 불빛도,
제 아이를 젖먹이는 젊은 아내도.
나는 떠나리라! 그대 돛대를 흔드는 기선이여
이국의 자연을 향해 닻을 올려라!
한 권태 있어, 잔인한 희망에 시달리고도,
손수건들의 마지막 이별을 아직 믿는구나!
그리고, 필경, 돛대들은, 폭풍우를 불러들이니,
바람이 난파에 넘어뜨리는 그런 돛대들인가
종적을 잃고, 돛대도 없이, 돛대도 없이, 풍요로운 섬도 없이……
그러나, 오 내 마음이여, 저 수부들의 노래를 들어라!

                                                                               번역: 황현산


19. 한 사회에서 작동하는 인류학적 코드를 모르고 혼자 생각하는 사람과 이러한 코드를 정확히 알고 더하여 생각하는 사람은 큰 차이를 보인다. 단적으로 전자는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한다. 후자가 주의해야 할 점은 코드의 작용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구분하는 일이다.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자신의 속한 사회의 인류학적 코드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그러한 코드에 대한 복종과 타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포함된 이 세계의 작동원리를 모른 채 학교에서 배운 서양적 합리성으로 한국사회가 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는 자는 가장 좋게 보아 순진한 자에 지나지 않으며 실상 대화가 불가능한 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뜻한 바를 실제로 이루어 내려는 긴 호흡 혹은 새로운 합리성을 만들어가는 화이부동은 다만 비겁한 자기 합리화로만 비칠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타인들을 자신의 합리성에 입각한 도덕적 심판구조 내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실상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다만 자신이 홀로 외롭고 힘겨우나 '올바른' 싸움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이들은 현재 자신의 합리성이 합리성의 유일하고도 보편타당한 형식이라고 진지하게 믿는다.


20.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해 철학을 한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현실'만 빼고.


21. 가령 세 사람이 있고 그들이 대화를 한다고 하자.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오직 자신의 사정과 관심에 대해서 말할 뿐 셋 모두를 위한 대화의 주제나 공통의 관심을 찾으려는 생각조차 못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과는 즉물적 현상에 대한 감상의 토로만이 가능할 뿐, 어떤 공통의 관심과 미래에 대한 차분한 대화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최악은, 그런 이야기가 나올 경우 자신의 자격지심과 열등감으로 대화를 가로 막으며 다시 예의 그 자기 중심적 세계관으로 돌아가고 마는 경우이다. 쉽게 말해 그들과는 그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이 가능할 뿐, 나 혹은 더 나아가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도대체 이들에게는 무엇이 결여된 것일까? 나는 그것이 모두 곧 공통의 이익에 대한 감각, 공공선에 대한 관심, 한 마디로 보편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결여라고 말하겠다.

나는 물론 그들을 다만 아직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여길 뿐 미워하거나 단죄하지는 않는다. 악의도 없이, 몰라서, 자기 열등감 때문에, 자기보호, 자존감 유지 차원에서, 안 돼서, 못해서 못한 일에 화를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과의 친교는 실로 '일방적'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의 컨디션이 좋아 내가 그들의 관심에 맞추어줄 수 있으면 우리 사이는 좋다. 그러나 내가 피곤하고 괴로운 인생의 날에 나는 그들로부터 내가 필요한 지지와 이해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이는 대등한 두 인격의 만남이 아니라, 어처구니 없게도 일방적 '보살핌'의 관계에 가까워진다. 이건 당연히 친구가 아니다. 사람은 너무 어린아이와 놀아줄 수는 있어도 같이 '친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2. 나이가 어리면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좁을 수밖에 없도록 젊은이들을 키우는 사회에서 자란 젊은이들의 거의 대부분은 나이가 어릴 경우 실제로 이해의 폭이 좁다.



2015.10.19.-201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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