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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1.

18. 니체유고

17. 니체유고

16. 니체유고

15. 이 사람을 보라/반시대적 고찰

*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니체전집 15. 바그너의 경우ㆍ우상의 황혼ㆍ안티크리스트ㆍ이 사람을 보라ㆍ디오니소스 송가ㆍ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책세상, 2002.
 

* 「이 사람을 보라.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 Ecce Homo」, 1889.
  
서문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바그너의 경우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 서문

 
2. [...] 인류를 ‘개선’한다는 따위는 나는 결코 약속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떠한 새로운 우상도 일으켜 세우지 않는다: 옛 우상들은 진흙으로 만든 다리가 무엇인지 알게될 것이다. 우상(‘이상’을 표현하는 내 단어)의 파괴 - 이것은 이미 내 작업의 일부이다. 이상적 세계가 날조되었던 바로 그 정도만큼, 실재와 가치와 의미와 진실성은 사라져버렸다 ...... ‘참된 세계’와 ‘가상 세계’ - 사실대로 말하자면: 날조된 세계와 실재 ...... 이상이라는 거짓말은 이제껏 실재에 대한 저주였고, 이 거짓에 의해 인류의 가장 심층적인 본성마저도 부정직해지고 그릇되어버려 - 인류는 그들의 성장과 미래와 미래에 대한 고도의 권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가치와는 정반대되는 가치를 숭배하기에 이르렀다(324).
 

3. [...]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얼음과 높은 산에서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삶의 낯설고 의문스러운 모든 것을, 이제껏 도덕에 의해 추방당해왔던 모든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금지된 것들 사이에서 그렇게 방랑했던 내 오랜 경험에 의해, 나는 지금까지 도덕화와 이상화를 행했던 원인들을 그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 철학의 숨겨진 역사, 철학이라는 위대한 이름의 심리가 내게 분명해졌다. - 어떤 정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 이것이 나에게는 점점 진정한 가치 기준이 되었다. 오류(-이상에 대한 믿음-)는 맹목이 아니다. 오류는 비겁이다. ...... 인식의 모든 성과와 발전은 용기에서, 자신에 대한 엄격과 순수함에서 나온다... [...] (325).
  
4. - 내 작품 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독보적이다. 이 책으로 나는 인류에게 지금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 여기서는 광신자가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설교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믿음이 요구되지 않는다 [...] 그는 다르게 말할 뿐만이 아니다. 그는 다른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홀로 가련다! 너희도 각각 홀로 길을 떠나라!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 맞서라! 더 바람직한 것은: 그의 존재를 부끄러워 하라! 그가 너희를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인식하는 인간은 자신의 적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벗을 미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 하지 않는가?
너희는 나를 숭배한다: 하지만 어느 날 너희의 숭배가 뒤집히게 되면 어찌할 것인가? 신상에 깔려죽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너희는 차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하는가?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뭐 중요하단 말인가! 너희는 나의 신도다. 하지만 신도가 뭐 중요하단 말인가!
너희는 너희 자신을 아직도 찾아내지 않고 있었다: 그때 너희는 나를 발견했다.
신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모양이다: 그러니 신앙이란 것이 하나같이 그렇고 그럴 수밖에.
이제 너희에게 말하니, 나를 버리고 너희를 찾도록 ㅎ라; 그리고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할 때에야 나는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
 

프리드리히 니체 (326-328)
  
* 어찌 내가 나의 온 생애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나의 삶을 이야기한다(330).
 

*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1. [...] 내 독자들은 내가 어떤 점에서 변증법을 데카당스(頹廢, decadence)의 징후로 고찰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가장 유명한 경우를 예로 들면서: 즉 소크라테스의 경우를. 지성의 온갖 병적인 장해, 심지어는 열광을 수반하는 반마취 상태는 나에게는 오늘까지도 철저히 낯설며 [...].


병자의 광학으로부터 좀 더 건강한 개념들과 가치들을 바라본다든지, 그 역으로 풍부한 삶의 충만과 자기 확신으로부터 데카당스 본능의 은밀한 작업을 내려다본다는 것 - 이것이 나의 가장 오랜 연습이었고, 진정한 경험이었다. 어딘가에서 내가 대가가 되었다면, 바로 여기서다. 이제 나는 관점을 전환할 근거를 가지고 있고, 관점을 전환할 도구를 가지고 있다: 왜 오로지 나에게만 ‘가치의 전환’이 도대체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첫 번째 이유이다. - (332-333)
 

2. 내가 데카당(decadent)이라는 사실은 별도로 하고, 나는 데카당의 반대이기도 하다. [...] 나는 총체로서 건강했으나, 특정한 각도로서나 특수한 면에서는 데카당이었다. [...] 나는 내 자신을 떠맡아, 내 스스로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었다: 그럴 수 있었던 전제 조건은 - 모든 생리학자가 인정할 것이지만 - 사람들은 근본적으로는 건강하다는 사실이었다. [...] 내 건강에의 의지와 삶에의 의지를 나는 나의 철학으로 만들었다. [...] 그[제대로 잘된(Wohlgerathenheit) 인간]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 그가 선택의 원칙이고, 그는 많은 것을 버려버린다. 그가 교제하는 것이 책이든 사람이든 지역이든 그는 언제나 자기의 사회 안에 처해 있다: 선택하면서, 용인하면서, 신뢰하면서 그는 경의를 표한다. [...] 그는 ‘불행’도 ‘죄’도 믿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잘 조절하며, 잊어버릴 줄도 안다 - 그에게는 모든 것이 최대한 제공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는 충분히 강하다. - 자, 나는 데카당의 반대이다: 다름 아닌 나 자신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진술한 것이니(334-335).
 

3. [...] 여기서 나는 혈통 문제를 언급하려 한다. 나는 나쁜 피는 하나도 섞이지 않고 독일 피는 거의 섞여 있지 않은 폴란드 정통 귀족이다. 나와 가장 철저하게 대립하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스러운 본능을 찾아보게 되면, 언젠가 나는 내 어머니와 여동생을 발견한다 - 이런 천민들과 내가 친족이라고 믿는 것은 나의 신성함에 대한 하나의 불경이리라. 내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를 대했던 것에 관한 내 경험은 지금 이 순간에까지도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공포를 내게 불러일으킨다: 이럴 때, 하나의 완벽한 시한폭탄이 작동을 시작한다. 그것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람들을 피투성이로 만들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 내 최고의 순간에 말이다 ... 내게는 독벌레에 저항할 힘이 없기에 ... 그들과 나와의 생리적인 근접이 그런 예정된 부조화를 가능케 했다 ... 하지만 고백하거니와 나의 진정한 심연적 사유인 ‘영원회귀’에 대한 철저한 반박은 언제나 어머니와 여동생이다. [...] 사람들은 자기 부모를 가장 적게 닮는다: 자기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비천함을 표현해주는 가장 강력한 표시이다(336-337).
 

6. 원한에서 해방되고, 원한의 진상을 규명했다는 것 - 결국 내가 이런 점 때문에 내 오랜 병에 얼마나 감사해야만 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 병들어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일종의 원한이다. [...] 원한은 병자에게는 그 자체로 금물이다 - 이것은 그에게는 악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가장 자연적인 성향이기도 하다. - 심오한 생리학자인 부처는 이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종교’를 그리스도교 같은 비참한 것들과 섞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생법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불교의 효력과 원한에 대한 승리는 상호 의존적이다: 불교는 영혼을 원한으로부터 아예 해방시켜버린다 -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회복에 이르는 첫걸음인 것이다. “적대는 적대를 통해서는 종결되지 않고, 우호를 통해서 종결된다”: 이것이 부처의 가르침에서 서두를 차지하고 있다 - 도덕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리학이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341-342)
 

8. 내게 인간과의 교제는 내 인내심에 대한 작지 않은 시험인 것이다: 내 인간애는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내가 그들과 공감한다는 것을 참아내는 데 있다 ... 내 인간애는 끊임없는 자기 극복이다. - 하지만 나는 고독이 필요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게는 회복, 내 자신에게로 되돌아옴, 자유롭고 가볍게 유희하는 공기의 숨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346).
 

*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1. [...] 양심의 가책에 대해 들리는 말에 의거해보면, 그것은 별 주목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것 같다 ... 나는 어떤 행위를 취한 다음 그 행위를 돌보지 않은 채 그냥 떠나버리고 싶지 않다. 나는 어떤 행동의 나쁜 결과나 귀결들을 가치문제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것을 선호한다. 나쁜 결과들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너무나 쉽사리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이란 내가 보기에는 일종의 ‘사악한 시선’인 것 같다. 실패한 것을 그것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인해 더욱 중히 여긴다는 것 - 오히려 이것이 내 도덕에 속한다. - ‘신’, ‘영혼불멸’, ‘구원’, ‘피안’은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조차도 주목하지도 시간을 투자하지도 않았던 개념들이다 - 내가 정녕 어린아이답지 않았던 것일까? - 나는 무신론을 결코 결과라고는 이해하지 않는다. 사건으로서는 더더욱 아니다: 무신론은 내게서는 즉각적으로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너무 호기심이 많고, 의문이 많으며, 오만하여 조야한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다. 신이란 하나의 조야한 대답이며, 우리 생각하는 사람들의 구미에는 맞지 않는다 - 심지어 그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조야한 금지를 하는 것일 뿐이다: 너희는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를 말이다 ... 나는 완전히 다른 문제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데, 그것은 ‘인류의 구원’이 신학자의 어떤 기묘함에 보다도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문제이다: 영양 섭취라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사용할 수 있게끔 정식화시켜보면: “네 힘의 극대화에, 르네상스 양식의 덕의 극대화에, 허위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운 덕의 극대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너는 어떤 영양 섭취를 해야 하는가?”(349-350) [...] (1866년이 나의 전환점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 (351)
  
2. 영양 섭취의 문제는 장소풍토 문제와 가장 유사하다. 어디서든지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풍토는 신진대사에, 그 방해와 촉진이라는 면에서 아주 큰 영향을 끼친다. 장소와 풍토 선택에 실패하는 자는 자기 과제에서 멀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아예 과제가 억류당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그 과제가 그에게 알려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 ‘정신’ 자체가 진정 신진대사의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353-354)
 

3. 영양 섭취의 선택; 풍토와 장소의 선택; -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결코 실책을 범해서는 안 되는 세 번째 선택은 자기 자신의 휴양을 취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356)
 

4. [...] 나는 세익스피어보다 더 가슴을 찢는 비통한 작품을 알지 못한다: 어릿광대에야 할 필요가 있었던 그 인간은 어떤 고통을 겪어야 했단 말인가! - 햄릿을 이해하겠는가? [인간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이다 .... 하지만 그렇게 느낄 수 있으려면 깊이가 있어야만 하고, 심연이어야만 하며, 철학자여야만 한다 ... 우리 모두는 진실을 두려워 한다 ... (360-361)
 

8. 이 모든 것에서 - 영양 섭취, 장소와 풍토, 휴양의 선택에서 - 자기 방어 본능으로서 스스로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자기 보존 본능이 명령을 내린다. (366)
 

9. 이 대목에서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진정한 대답을 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로써 나는 자기 보존 기술의 걸작을 잠시 언급하게 된다 - 즉 이기적임을 ... 자기의 과제, 천명, 과제의 운명이 평균적인 대중을 넘어서고 있다고 상정해보면, 이 과제를 지니고 있는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은 자기 모습이 되는가는 자기가 본래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희미하게라도 예측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삶의 실책들마저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369).
 

10. [...] 나는 위대한 과제를 대하는 방법으로 유희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위대함의 징표이자, 본질적인 전제 조건이다. [...] 인간에게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운명애(amor fati)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필연적인 것을 단순히 감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은폐는 더더욱 하지 않으며 -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는 허위다 -,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 ...... (373-374)
 

*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1. 나와 내 작품들은 별개다. - 내 작품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기서 나는 그것들이 이해되고 있다는, 혹은 그것들이 이해되지 못한다는 문제를 다루어본다. [...] 나 자신의 때도 아직은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 언제가는 내가 이해하는 사람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살도록 하고 가르치게 될 기관들이 필요할 것이다: 심지어는 『차라투스트라』를 해석해내는 일을 하는 교수직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진리들을 위한 귀와 손들을 벌써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리라. 오늘날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일일 뿐만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정당한 것 같다. 나는 혼동되고 싶지 않다 - 나 자신에 의해서도. [...]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 단계에 ‘현대’ 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거리감을 느끼면서 내가 어찌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 읽히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나의 승리는 쇼펜하우어의 승리와는 정반대다. - 나는 “나는 읽히지 않는다, 나는 읽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내 작품을 부정하는 순수함이 내게 여러 번 주었던 즐거움을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무게 있는, 너무나 무게 있는 나의 작품에 의해 작품들 전체의 평형 상태를 깨버릴 수 있었던 이 여름에도, 베를린 대학의 한 교수는 내가 다른 형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호의적으로 암시했었다: 그런 것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이 얻어들을 수는 없는 것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 가장 단적인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책에서 자주 일어나거나 아니면 드물게라도 일어나는 경험의 가능성에서 전적으로 벗어나 있는 경험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치자 - 일련의 새로운 경험들에 대해 처음으로 말하고 잇다고 치자. 이런 경우에는 전혀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착각이 인다 ... 이것이 결국 내 평균적인 경험이며, 원한다면 내 경험의 독창적인 면이라고 불러도 좋다. 나에 대해서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믿던 자가 했던 일은, 나에게서 자기의 상에 맞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 나와는 반대되는 것을, 이를테면 ‘이상주의자’를 만들어내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375-377).
 

5. 내 작품들에서 는 비교할 만한 상대가 없는 심리학자 한 명이 말하고 있다는 통찰. [...] 통속 철학자들이나 도덕주의자들이나 여타의 속이 텅 빈 자들이나 바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근본적으로 온 세상이 동의하는 명제들이 - 내 작품 안에서는 순진한 실책으로 드러난다: ‘이기적’과 ‘비이기적’이 반대라는 명제는 그 예이다. 자아 자체는 ‘고등 사기’의 하나이자 ‘이상’일 뿐이니까 ... 그래서 이기적 행동이란 것은 없으며, 비이기적인 행동도 없다: 두 개념이 다 심리적인 자가당착인 것이다. 또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명제 ... “행복은 덕에 대한 보상이다”는 명제 ... 또는 “쾌와 불쾌는 반대다”는 명제도 마찬가지다 ... 인류의 키르케(Kirke)인 도덕이 모든 심리적인 것들을 철저히 왜곡해버린 것이다 - 도덕화시켜버린 것이다 - 사랑이란 것이 ‘비이기적’이어야 한다는 섬뜩한 난센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 내 도덕 법전으로부터 악덕에 관한 한 항을 옮겨보겠다: 악덕이란 말로 나는 모든 종류의 반자연에 대한 싸움을 벌인다. 아름다운 말을 더 좋아한다면 이상주의에 대한 싸움을 벌인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아무튼 그 항의 구절은 이러하다: “순결에 대한 설교는 반자연으로의 공공연한 도발이다. 성생활에 대한 모든 경멸, 성생활을 ‘불결하다’는 개념으로 것은 다 삶에 대한 범죄 자체다 - 삶의 성령에 대한 진정한 죄이다.” - (386)
 

* 비극의 탄생(1872)
 

1. [...] 사람들은 그 책에서 바그너의 예술과 의도와 과제에 대한 하나의 정식을 듣는 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 그 책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으로 가치 있는 점은 흘려듣고 만다. “그리스 정신과 염세주의”: 이것이야말로 그 책에 대한 좀더 명료한 제목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그리스인들이 염세주의를 잘 해결했는지를 최초로 알려주는 가르침으로써 - 무엇을 가지고 그들이 염세주의를 극복했는지에 대한 가르침으로써 말이다 ... 비극이야말로 그리스인들이 염세주의자들이 아니었다는 점에 대한 증거이다. [...] 거기서는 하나의 ‘이념’이 - 디오니소스적과 아폴론적이라는 대립이 -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옮겨졌다; 역사 자체가 이 ‘이념’의 전개 과정이며; 비극에서 그 대립이 통일로 지향된다 [...] 이 책에는 결정적으로 두 가지 새로운 점이 있다. 그 하나는 그리스인들에게서의 디오니소스적 현상에 대한 이해이다: 이 책은 그것에 대한 최초의 심리학이며, 그 현상을 그리스 예술 전채의 한 가지 뿌리로 본다. 또 다른 새로운 점은 소크라테스주의에 대한 이해이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를 그리스 용해의 도구이자, 전형적인 데카당으로 최초로 파악해냈다. 본능 ‘이성’. 그 어떤 대가를 치르든 ‘이성!’ 이라는 것이 위험하고도 삶을 파괴해버리는 힘이라는 것. 그 책 전체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적 침묵이 흐른다. 그리스도교는 아폴론적이지도 않고 디오니소스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미적 가치를 부정한다 - 『비극의 탄생』이 인정하는 유일한 가치를 말이다: 그리스도교는 가장 심층적인 의미에서 허무적이다. 디오니소스적 상징 안에서는 긍정이 그 궁극적인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는 반면 말이다. (389-391)
 

2. [...] 도덕 자체가 데카당의 징후라는 것은 인식의 역사에서 새롭고도 유일한 제1급 인식이다. [...] 나는 진정한 대립을 최초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 삶에 대해 가장 지하적인 복수욕을 가지고 저항하는 퇴화하는 본능(- 그리스도교, 쇼펜하우어의 철학, 어떤 의미로는 이미 플라톤 철학도 그렇고, 이상주의 전체가 그 전형적 형태다), 그리고 충만과 과잉에서 태어난 최고의 긍정 형식, 고통 자체와 죄 자체와 삶 자체의 모든 의문스럽고 낯선 것들에 대한 아무런 유보 없는 긍정이라는 대립을 말이다 ... 이 두 번째 것, 즉 삶에 대한 가장 즐겁고도 가장 충일하면서도 들뜬 긍정은 최고의 통찰일 뿐만 아니라, 진리와 학문에 의해 가장 엄격하게 확인되고 유지되는 가장 심오한 통찰이다. 존재하는 것에서 빼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없다. (391-392)
 

3. 이렇게 해서 내가 어느 정도로 ‘비극적’이란 개념을, 비극의 심리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결정적인 인식을 발견했는지에 대해서는 『우상의 황혼』, 139쪽[184-185쪽]에서 표명한 바 있다.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 - 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나는 비극 시인의 심리에 이르는 다리로 이해했다. 공포와 동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아니고, 위험한 감정을 격렬히 방출시켜 그 감정에서 자기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공포와 동정을 넘어서서 파괴시의 기쁨도 포함하고 있는 생성에 대한 영원한 기쁨 그 자체이기 위해서이다 ...” 이런 의미에서 나느 나 자신을 최초의 비극적 철학자로서 - 말하자면 염세적 철학자에 대한 극단적 대립이자 대척자로서 이해할 권리가 있다. 나 이전에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이렇게 철학적 파토스로 변형시키지는 않았었다: 비극적 지혜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 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두 세기 간의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 그런 지혜를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내가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그의 곁에서 더 따뜻하고 좋은 기분을 느끼는 헤라클레이토스만큼은 약간의 의문점이 남아있다. 디오니소스적 철학의 결정적인 면, 즉 유전과 파괴에 대한 긍정, 대립과 싸움에 대한 긍정, 생성, ‘존재’ 개념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까지 - 이런 점에서 나와 그는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가장 유사하다는 점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원회귀’에 대한 가르침, 즉 무조건적이고 무한히 반복되는 만사의 순환에 대한 가르침 - 차라투스트라의 이 가르침은 결국 헤라클레이토스가 먼저 가르쳤을 수도 있었으리라.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그들의 거의 모든 근본적인 생각들을 물려받았던 스토아학파는 적어도 그 흔적은 갖고 있다. -”(393-394)
 

4. 이 에세이[『비극의 탄생』]에서 심리학적으로 결정적인 곳에서는 전부 내가 그 이야기의 대상이며 - 그 텍스트에서 바그너라는 단어가 나오면, 거기에 내 이름이나 ‘차라투스트라’라는 단어를 한 점 주저함이 없이 세워도 무방하다. [...] 그 에세이에서 미리 고지되고 있는 것들은: 그리스 정신의 회귀가 가까이 있다는 것, 알렉산더가 풀어놓았던 그리스 문화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다시 묶는 알렉산더의 반대자들이 필연적이라는 것 등이다 ... (395)
 

* 반시대적 고찰
 

1. 네 편으로 된 『반시대적 고찰』은 전적으로 호전적이다. [...] 첫 번째 공격(1873)은 내가
그 당시 이미 사정없이 경멸하며 얕보았던 독일 교양으로 향했다. [...] 두 번째 반시대적 고찰(1874)은 우리 학문 경영 방식의 위험한 요소, 삶을 갉아먹는 요소, 삶을 독살하는 요소를 백일하에 폭로하고 있다 - : 거기서의 탈인간적인 톱니바퀴와 메커니즘으로 인해, 노동자의 ‘인격화’로 인해, ‘노동분업’이라는 잘못된 경제학으로 인해 삶은 병이 든다. 목적이 상실되고, 문화가 상실되어 간다: - 이렇게 만드는 수단이 현대적 학문 경영은 야만화된다 ... 이 에세이는 금세기의 긍지인 ‘역사적 감각’이 최초로 병증으로서, 퇴락의 전형적 징후로서 간파되었다. - 세 번째네 번째 반시대적 고찰은 고급한 문화 개념을 향한, ‘문화’ 개념의 재건을 향한 힌트로서 가장 엄격한 자기 사랑자기 도야라는 두 가지 상을 제시한다. 이것들은 전형적인 반시대적 유형들로, 이것들을 둘러싸고 있던 ‘독일제국’, ‘교양’, ‘그리스도교’, ‘비스마르크’, ‘성공’ 등으로 불리던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 경멸로 가득 차있다. - 쇼펜하우어와 바그너 혹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니체이다 ... (397-398)
 

2. 교양 속물(Bildungsphilister) [...] 맥줏집 복음. [...] 나는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이다 -. (398, 401)
 

3. 근본적으로 나는 이 에세이를 가지고 심리학과는 다른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다: - 그래서 비할 바 없이 중요한 교육 문제, 가혹할 정도의 자기 도야자기 방어라는 새로운 개념, 위대함과 세계사적 과제로 향하는 길에 대한 표현이 최초로 요청되었던 것이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두 속편들.
 

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어떤 위기의 기념비이다. 이 책은 자유정신들을 위한 책이라고 자칭한다: 그 책의 거의 모든 문장이 승리를 표현하고 있다 - 나는 이 책을 통해 내 본성에 속하지 않는 것들에서 나를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 제목은 “너희가 이상적인 것들을 보는 곳에서, 나는 - 인간적인, 아아, 인간적인 것만을 본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인간을 더 잘 알고 있다 ... ‘자유정신’이라는 말은 여기서 어떤 다른 의미로도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유정신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시 소유하는 자유롭게 된 정신인 것이다. [...] 이것이 진정 진보였다 - 나로의 진보다. (404-405)
 

4. 병증이 서서히 나를 분리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를 격렬하지 않게, 모든 난폭하고도 충돌적인 행보를 하나도 하지 않게 만들었다. 당시 나는 호의를 잃지 않았고, 더 많은 호의를 얻었다. 마찬가지로 내 병은 내게 나의 모든 습관으로 완전히 되돌아갈 권리를 주었다: 내 병은 망각을 허락했고, 망각하라고 명령했다: 내 병은 내게 조용히 누워 있는 것, 하가로움, 기다림과 인내의 필요를 선사했다 ...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 내 눈이 온갖 책벌레들에 안녕을 고했다. 꾸미지 않고 말하자면: 문헌학에 안녕을 고했다; 나는 ‘책’에서 구제되었으며, 몇 년간 더 이상 독서하지 않았다 - 이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베푼 최고의 은혜였다! - 다른 자아(-즉 독서하는!)의 말을 끊임없이 들어야만 해서, 말하자면 그 밑에 파묻혀 버리고 말이 없어져버렸던, 가장 밑바닥의 자아가 서서히 수줍어하고 미심쩍어 하면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 그리고 마침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삶에서 가장 아팠고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에 내가 느꼈던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나는 결코 가져보지 못했다: 이러한 ‘나로의 귀환’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면 『아침놀』이나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를 보면 된다: 그것은 최상의 회복 그 자체이다! ... 다른 것들은 여기서 파생되는 것들일 뿐이다. - (409-410)
 

6. 그 당시(1876)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어떤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내가 내 과제와 내 과제의 세계사적인 면을 명백히 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 전체가, 특히 아주 명쾌한 몇 부분들이 증언하고 있다. [...] 『도덕의 계보』 서문을 다시 읽어보라. - 거기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대담하고 냉철한 사유가 중의 하나인 『도덕감의 기원에 관하여』의 저자가(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인 니체라고 읽을 것) 인간 행동에 대한 자기의 결정적이고도 통렬한 분석에 의해 이른 자기의 핵심 명제는 무엇인가? “도덕적 인간은 생리적인 인간보다 예지계(睿智界)에 더 근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왜냐하면 예지계란 없기 때문이다 ...” 이 명제가 역사적인 인식의 망치질(가치의 전도라고 읽을 것)에 의해 단단해지고 날카로워지면 언젠가는, 아마도 미래의 언젠가는 - 1890년에는! - 인류의 ‘형이상학적 욕구’의 뿌리를 발본색원하는 도끼가 될 것이다. - 이것이 인류에게 더 많은 축복일지 더 많은 저주일지,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어쨌든 가장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명제로서, 많은 결실을 맺으면서도 동시에 공포스러운 명제이자, 모든 위대한 인식이 갖고 있는 이중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명제이다 ... (411-412)
 

* 아침놀. 편견으로서의 도덕에 관한 사유들.
 

1. 이 책으로 도덕에 대한 나의 전투가 시작된다. “아직은 빛을 발하지 않은 수많은 아침놀이 있다” - 이 인도의 비문이 이 책 출입구에 적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어디서 새로운 아침을, 다시 새로운 아침을 여는 이제껏 발견되지 않았던 은근한 붉은 빛을 찾는가? - 아아, 새로운 날들의 연속과 새로운 날들의 세상 전체를 여는! 그것은 모든 가치의 전도에서이다. 모든 도덕 가치들로부터의 해방에서, 지금까지 부정되고 의심되며 저주받아왔던 모든 것에 대한 신뢰와 긍정에서이다. 이 긍정하는 책은 자기의 빛과 사랑과 부드러움을 순전히 나쁘기만 한 것들에 대한 고도의 권리와 특권을 다시 되돌려준다. (414-415)
 

2. 내 과제는 인류 최고의 자기 성찰의 순간인 위대한 정오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 때 인류는 과거를 회고하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우연과 사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왜?, 무슨 목적으로? 라는 질문을 최초로 전체적으로 제기할 것이다. [...] 도덕 가치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에 도덕 가치의 기원이라는 문제는 내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가장 확실한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성서라는 책 한 권이 인류의 운명에 대한 신의 지배와 지혜에 관해 우리를 최종적으로 안심시켜준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요구는, 의지가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비참한 진리를 등장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다시 번역할 수 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인류는 가장 나쁜 것의 수중에 있었다는 사실로, 인류가 좋은 처우를 받지 못한 자들, 교활하고 복수욕에 불타는 자들, 소위 말하는 ‘성자들’의 세계 비방자와 인간 모독자에 의해 지배당해왔다는 사실로 말이다. 사제가(- 사제가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 철학자도 포함하여) 특정한 종교 집단의 내부에서만 있지 않고, 전반적인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데카당스 도덕, 종말에의 의지가 도덕 그 자체로 간주된다는 것. 이에 대한 결정적 표시는 바로 비이기적인 자에게 어디서든 부여되는 무조건적인 가치와 이기적인 자에게 어디서든 표출되는 적대감이다. [...] - 중심의 상실, 자연적 본능에 대한 저항, 한마디로 ‘무사(無私, Selbstlosigkeit) - 이것이 이제까지 도덕이라고 일컬어졌다 .... 『아침놀』과 더불어 나는 먼저 탈아(脫我, Entselbstung)의 도덕에 대한 전투를 시작했다. - (416-417)
 

* 즐거운 학문. (La gaya scienza)
 

『아침놀』이 긍정을 말하는 책이며, 심오하지만 밝고 호의적이다. 이와 똑같은 말이 『즐거운 학문』에도 최고 의미에서 다시 적용된다: 이 책의 거의 모든 문장에는 심오함과 장난기 어린 좋은 기분이 정겹게 손을 맞잡고 있다. [...] 특히 「미스트랄에게 부침」이라는 마지막 시는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도덕을 넘어서 춤을 추게 하는 자유로운 춤곡으로, 완벽한 프로방시즘이다.. - (417-418)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1. 이 책의 근본 사상인 영원회귀 사유라는 그 도달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은 - 1881년 8월의 것이다. [...] 결국 『즐거운 학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 자체이고, 그 4부의 끝에서 두 번째 장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근본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 그 사이에 또한 「삶의 찬가」가 씌어졌다(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그 악보는 2년 전에 라이프치히의 프리취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것은 그해, 즉 내가 비극적 파토스라고 불렀던 파토스 중의 파토스인 긍정의 파토스가 내 안에 최고로 깃들어 있던 그해의 상태를 알려주는 의미심장한 징후일 것이다. [...] 그 노래는 고통을 삶에 대한 반박으로 여기지 않는다: “네가 내게 줄 행복이 더 이상 없는가. 자, 보라! 아직 네 고통을 갖고 있지 않은가 ...” (419-420)
 

2. 차라투스트라라는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생리적 조건들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그 조건은 내가 위대한 건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개념에 대한 가장 훌륭하고도 개인적인 해명은 『즐거운 학문』 마지막 5부의 한 장에서 해놓았다. (422-423)
 

5. 세 가지 위대함의 원한 (427-428)
 

8. 그[차라투스트라]는 과거의 모든 것들도 긍정하고 정당화하며 구제하기에 이른다. [...] 그리고 만일 인간이 창조하는 자나 수수께끼를 푸는 자가 아니며, 우연을 구제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점을 견뎌낼 것인가? / 과거를 구제하고 일체의 “그랬었다”를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변형시키는 것 - 이것이 내게 구제인 것이다.
 

* 선악의 저편. 미래 철학의 서곡
 

2. 이 책은 본질적으로 현대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은 현대 학문, 현대 예술, 심지어는 현대 정치마저도 제외시키지 않으며, 그 밖에도 현대적이지 않은 현대의 반대 유형인 고귀하고도 긍정하는 유형에 대한 암시 또한 포함하고 있다. 후자의 의미로 보면 이 책은 일종의 귀족학교이다. [...] 여기서는 이 시대가 긍지를 갖는 모든 것을 그런 유형과는 반대의 것이자 거의 무례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유명한 ‘객관성’, ‘고통받는 자에 대한 동정’, 낯선 취향에 대해 굴복해버리고 사소한 사실 앞에서 허리를 굽히는 ‘역사적 감각’, ‘학문성’ 등은 그 예이다. - 이 책이 『차라투스트라』를 뒤따라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책을 생겨나게 한 섭생법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는 엄청난 필요성 때문에 나쁜 습관이 들어버린 눈은 - 차라투스트라는 차르보다 더 멀리 바라본다 - 여기서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것, 우리 시대, 우리 주변을 예리하게 파악하라는 강요를 받는다.
 

* 도덕의 계보. 하나의 논쟁서.
 

이 『도덕의 계보』를 구성하고 있는 세 편의 논문들은 그 표현과 의도와 놀라게 하는 기술면에서 지금까지 쓰인 것들 중 가장 섬뜩한 것이다. [...] 첫 번째 논문의 진리는 그리스도교의 심리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 ‘정신’에서가 아니라, 원한 정신에서 탄생한 것이다 - 그것의 본성상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반동이며, 고귀한 가치의 지배에 맞선 대봉기이다. 두 번째 논문은 양심의 심리를 제공한다: 양심이란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 ‘인간 내부의 신의 음성’이 아니다. - 양심은 더 이상 외부를 향해 폭발할 수 없게 된 다음에 자기를 향해 반전하는 잔인함의 본능이다. 잔인함이 가장 오래되고 가장 떨쳐버릴 수 없는, 문화의 하부 토대라는 것이 여기서 최초로 밝혀지고 있다. 세 번째 논문은 금욕적 이상, 사제적인 이상이 전형적인 해로운 이상이고 종말의지이며 데카당스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이 갖고 있는 거대한이 어디서 유래하는지라는 질문에 답해준다. 그 대답: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 신이 사제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이상보다 더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 그 이상이 지금까지의 유일한 이상이어서 그것의 경쟁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를 원하기 때문이다” ... 무엇보다도 그 이상에 반대되는 반대-이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 차라투스트라를 제외하고는. - 사람들은 나를 이해했을 것이다. 모든 가치의 전도를 위한 한 심리학자의 결정적인 세 가지 준비를. - 이 책은 최초의 사제 심리학을 포함하고 있다. (442-443)
 

* 우상의 황혼. 어떻게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지.
 

1. 그 표지에 쓰인 우상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이제까지 진리라고 불리어오던 것이다. 우상의 황혼 - 치장하지 않고 말한다면: 낡은 진리가 종말에 다가간다 ... (443) 선한 인간이란 다름 아닌 옳은 길에 대해 가장 무지했던 자였던 것이다 ... 아주 진지하게 말해서 내 이전에는 누구도 옳은 길을, 즉 위로 향하는 길을 알지 못했다: 나로부터야 비로소 문화의 희망들과 과제들과 예정된 길이 다시 존재하게 되었다 - 나는 그러한 복음을 전파하는 자이다 ... 바로 이 때문에 나는 하나의 운명인 것이다. -- (444)
 

* 바그너의 경우. 한 악사의 문제.
 

1. 음악의 운명으로 인한 괴로움이라고 말했는데, 과연 나는 음악의 어떤 운명 때문에 괴로워한 것일까? 음악이 세계를 미화하고 긍정하는 자기의 특성을 빼앗겨버리고 말았다는 점 - 음악이 데카당스 음악이며 더 이상은 디오니소스의 피리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446)
 

*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1. 나는 내 운명을 안다. [...]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나마이트다. 그렇다고 해도 내 안에는 종교 창시자의 그 무엇도 들어있지 않다 - 종교는 천민의 사건이다. 종교적 인간과 접촉하고 난 후에는 나는 내 손을 닦을 필요를 느낀다 ... 나는 ‘신자’를 원치 않으며, 나 자신을 믿기에는 내가 너무 악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결코 대중을 상대로 말하지 않는다 ... 내가 언젠가 신성하다는 말을 듣게 될까봐 나는 매우 불안하다. [...] 나는 성자이기를 원치 않는다. 차라리 어릿광대이고 싶다 ... 아마도 나는 어릿광대일지도 모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오히려 - 성자들보다 더한 거짓말쟁이들은 없었기에 - 나를 통해 진리가 말을 한다. - 하지만 내 진리는 끔찍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거짓이 진리라고 불리었기 때문이다. - 모든 가치의 전도: 이것이 내 안에서 살이 되고 천재가 되어 있는 인류 최고의 자기 성찰에 대한 내 정식이다. (456-457)
 

3. 바로 내 입에서 나온,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의 입에서 나온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내게 질문이 던져졌어야 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페르시아인의 역사상의 엄청난 독특성을 이루고 있는 것과 내가 말한 차라투스트라는 바로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투쟁에서 사물의 움직임의 본연적인 바퀴를 처음으로 본 사람이며 - 도덕을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즉 힘, 원인, 목적 그 자체라고 옮긴 것이 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본질적으로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숙명적인 액운인 도덕이라는 오류를 창조해냈으며; 따라서 그 오류를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도덕에 대해서 그 어떤 사유가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많이 경험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 역사 전체는 진정 소위 말하는 ‘도덕적 세계질서’라는 명제에 대한 실험적 반박인 것이다 - :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어떤 사유가보다 더 진실하다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의 가르침만이 진실성을 최고의 덕으로 삼았다 - 즉 실재성 앞에서 도피하는 ‘이상주의자들’의 비겁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사유가 전체를 모아놓은 것보다도 더 많은 용기를 지니고 있다. 진리를 말하고 활을 잘 쏘는 것. 이것이 페르시아적 덕이다. - 내가 이해되는가? ... 진실성에서 나오는 도덕의 자기 극복, 도덕주의자들의 자기의 대립물로의 자기 극복 - 내 안으로의 자기 극복 -. 이것이 내 입에서 나온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이다. (459)
 

4. 비도덕주의자라는 내 말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부정을 내포한다. 첫째, 나는 이제껏 최고라고 여겨졌던 인간 유형, 즉 선한 인간, 호의적인 인간, 선행하는 인간을 부정한다; 둘째, 나는 도덕 그 자체로서 행사되고 지배적이 되었던 도덕 유형을 부정한다 - 즉 데카당스 도덕,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교 도덕을. 두 번째 부인을 좀더 결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선의와 호의에 대한 과대평가는 크게 보면 이미 데카당스의 결과로, 약함의 징후로, 상승하고 긍정하는 삶과는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정과 파괴는 긍정의 조건이다. [...] 선한 인간의 존재 조건은 거짓이다 -: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은 현실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보려고-하지-않는다. [...] 선한 인간은 결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선한 인간은 거짓 해안(海岸)과 거짓 안전을 너희에게 가르쳤다; 선한 인간의 거짓 속에서 너희는 태어났고 보호받았다. 모든 것이 선한 인간에 의해 그 근본에 이르기까지 기만되고 비틀렸다. 다행히도 세계는 호의적일 뿐인 무리동물이 자기의 작은 행복을 발견해낼 만한 본능에 기초해서는 건축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무리동물이 되어야 한다고, 푸른 눈을 가지고 호의적이 되어야 한다고, ‘아름다운 영혼’이 도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 - 또는 허버트 스펜서 씨가 바라는 것처럼 이타적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삶에서 그 위대한 특성을 빼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인류를 거세하는 것을 의미하며, 인류를 비참한 중국인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데 바로 그런 것이 추구되어 왔던 것이다! ... 바로 그런 것이 도덕이라 불리었던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선한 인간을 때로는 ‘종말인’이라고, 때로는 ‘종말의 발단’이라고 불렀다; 특히 그는 선한 인간을 가장 해로운 인간 유형으로 여긴다. 이들이 진리미래를 희생시켜 자기네 존재를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460-461)
 

7. 나를 이해했는가? - 나를 구별짓고, 나를 나머지 인류 전체에 대한 예외로 만드는 것은 바로 내가 그리스도교적 도덕을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 그리스도교에 대한 맹목은 범죄 중의 범죄이다 - 에 대한 범죄인 것이다. [...] 그리스도교적 도덕 - 이것은 가장 악의에 찬 형식의 거짓 의지이며, 인류에 대한 진정한 키르케이다: 이것이 인류를 망쳐버린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교를 바라볼 때 나를 경악하게 하는 오류로서의 오류는 그리스도교의 승리가 알게 해주는 바, 즉 정신적인 것에서의 수천 년간의 ‘선의지’와 사육과 분별과 용기의 결여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성의 결여인 것이다. 그리고 반자연 자체가 도덕으로서 최고의 명예를 부여받고, 법칙이자 정언명법으로서 인류 위에 결려 있었다는 완전히 전율스러운 사실이다! ... 한 개인이 아니고 한 민족도 아니라, 인류가 이 정도로 잘못 짚고 있었다니! ... 삶의 최고 본능을 경멸하라고 가르쳤다는 것; 육체를 모독하기 위해서 ‘영혼’과 ‘정신’을 날조해냈다는 것; 삶의 전제인 성에서 어떤 불결한 것을 느끼도록 가르쳤다는 것; 성장을 위해 가장 필요 불가결한 강력한 이기심(- 이 말이 벌써 비방적이다! -)에서 악의 원칙을 찾는 것; 그 반대로 ‘무사’(無私)와 무게중심의 상실과 ‘탈개인화’와 ‘이웃 사랑’(- 이웃 중독!)이라는 하강과 반본능의 전형적 징후에서 더욱 높은 가치를, 아니! 가치 그 자체를 본다는 것! ... 뭐라고! 인류 자신이 데카당이었단 말인가? 인류는 항상 데카당이었단 말인가? - 확실한 사실은 그들에게 데카당스만이 최고의 가치로 가르쳐져 왔다는 것이다. 탈아의 도덕은 전형적인 하강의 도덕이며, ‘나는 몰락한다’는 사실을 ‘너희 모두는 몰락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옮기는 도덕이다 - 그리고 명령으로 옮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 지금까지 가르쳐진 유일한 도덕인 탈아의 도덕은 종말 의지를 누설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심층적으로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인류의 퇴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직자라는 기생충 같은 인간만이 퇴화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런데 이들은 도덕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자기들이 인류의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속였다 - 이들은 그리스도교 도덕에서 그들을 권력에 이르게 해주는 순간을 간파해냈던 것이다 ... 그리고 실제로 통찰은 이러하다: 인류의 교사와 지도자, 신학자 전체가 통틀어 데카당이었다: 그래서 모든 가치를 삶에 적대적인 것으로 전도시켰고, 그래서 도덕인 것이다 ... 도덕의 정의: 도덕 - 에 보복하려는 숨은 의도를 갖고 있는 데카당의 특이한 성질 - 그리고 성공적이었다. 나는 정의에 가치를 부여한다. (464-466)
 

8. 이제껏 진리라고 불리어 온 모든 것이 가장 해롭고 음험하며 가장 지하적인 형식의 거짓임을 깨닫는 것; 인류를 ‘개선’한다는 신성한 구실이 삶 자체의 피를 빨아 삶을 빈혈증을 앓게 만드는 책략임을 깨닫는 것. 흡혈귀로서의 도덕 ... 도덕을 알아차리는 자는, 신뢰받고 있고 또 신뢰받았던 모든 가치가 무가치하다는 것도 더불어 알아차린다; 그는 가장 경외되었던 인간, 심지어는 성스럽다고 말해졌던 인간 유형에서도 더 이상은 존경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 그는 거기서 비할 바 없는 액운과도 같은 불구들만을 본다. 그들이 액운과도 같은 이유는 그들이 현혹했기 때문이다 ... ‘신’ 개념은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 고안되었다 - 이 개념 안에서 해롭고 독성 있고 비방적인 모든 것이, 삶에 대한 불구대천의 적개심 전체가 하나의 경악스러운 단일체가 되었다! ‘피안’ 개념이. ‘참된 세계’ 개념이 고안되었다.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이 세상을 탈 가치화 하기 위해 - 우리 지상의 현실을 위한 아무런 목표도, 아무런 이성도, 아무런 과제도 남기지 않기 위해! ‘영혼’ 개념, ‘정신’ 개념, 결국에는 ‘영혼의 불멸’ 개념도 고안되었다. 몸을 경멸하고, 몸을 병들게 - ‘성스럽게’ - 만들기 위해, 그리고 삶에서 당연히 중요한 것들 모두를, 즉 영양 섭취, 주거지, 정신적인 섭생, 벼의 치료, 청결, 기후 등의 문제들에 형편없이 경솔하게 대처하도록 하기 위해서! 건강 대신 ‘영혼의 구원’ - 이것은 참회의 경련과 구원의 히스테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조울증적 광기이다! ‘죄’ 개념은 그에 따르는 ‘자유의지’ 개념이라는 고문 기구와 함께 본능을 혼란시키기 위해, 본능에 대한 불신을 제2의 본성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기적이지 않은 인간’이라는 개념이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자’라는 개념 안에서는 진정한 데카당스의 표지가, 즉 해로운 것들에 의해 현혹됨, 자기에게-이로운 것을-더 이상-찾을 수-없음, 자기-파괴가 가치의 표시 일반으로, 인간의 ‘의무’와 ‘성스러움’과 ‘신적인 것’으로 되었다! 결국에는 - 이것이 가장 끔찍한 일인데 - 선한 인간이라는 개념은 약자와 병자와 실패자와 자기 스스로 고통받는 자, 즉 몰락해야만 하는 모든 것의 편을 들고 -, 도태의 법칙이 여기서는 어긋난다. 이상은 긍지에 차있고 제대로 잘 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반박에서, 긍정하는 인간과 미래를 확신하며 미래를 보증하는 인간에 대한 반박에서 나왔다 - 이런 인간을 지금은 악인이라고 부른다 ...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도덕으로서 믿어져왔다! - 이 파렴치한 것을 분쇄하라! -- (466-468)
 

9. - 나를 이해했는가? -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 (468)
 
 
 
 

14. 선악의 저편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니체전집 14. 선악의 저편ㆍ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
 

192.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예술가이다.





14. 도덕의 계보

*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 하나의 논박서』, 1887(『니체전집 14. 선악의 저편ㆍ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

 

서문
  
1.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 337
  
2. 우리의 도덕적 편견의 기원에 관한 나의 사상 - 338
  
3.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 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 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제까지 인간의 성장을 저지했던 것일까 아니면 촉진했던 것일까? - 340
 

5. 이 현대 철학자들[영국의 심리학자들]이 동정을 선호하고 과대평가하는 것은 말하자면 새로운 현상이다 :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바로 동정이 가치가 없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해 있었다. 나는 플라톤, 스피노자, 라 로슈푸코와 칸트의 이름만을 들겠다. - 344
 

* 제1논문 : ‘선과 악’, ‘좋음과 나쁨’
  
2. 그들[도덕의 역사학자들] 모두는 낡은 철학자들의 관습이 그러하듯이, 본질적으로 비역사적으로 생각한다. [...] 고귀함과 거리의 파토스 Pathos der Distanz, 좀더 높은 지배 종족이 좀더 하위의 종족, 즉 ‘하층민’에게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고 지배적인 전체 감정과 근본 감정 - 이것이야말로 ‘좋음’과 ‘나쁨’이라는 대립의 기원이다. (이름을 부여하는 지배권은 멀리까지 미쳐서, 언어 자체의 기원을 지배자의 권력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허용해야만 하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그들은 ‘이것은 이러이러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든 사물과 사건을 한 마디 소리로 봉인하고, 말하자면 이러한 행위를 통해 그것을 점유해버린다.) - 352~354
 

4. 어느 언어에서나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고귀한’, ‘귀족적인’이 기본 개념이며,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정신적으로 고귀한’, ‘귀족적인’, ‘정신적으로 고귀한 기질의’, ‘정신적으로 특권을 지닌’이라는 의미를 지닌 ‘좋음’이 발전해 나오는 것이다 : 언제나 저 다른 발전과 평행해 진행되는 또 하나의 발전이 있는데, 이는 ‘비속한’, ‘천민의’, ‘저급한’이라는 개념을 결국 ‘나쁨’이라는 개념으로 이행하도록 만든다. - 356
 

7. 이 지상에서 ‘고귀한 자’, ‘강력한 자’, ‘지배자’, ‘권력자’에 대항해 행해진 어떤 것도 유대인들이 이들에 반항하며 행했던 것에 비교하면 말할 만한 가치가 없을 정도이다 : 성직자 민족인 유대인, 이들은 자신의 적과 압제자에게 결국 오직 그들의 가치를 철저하게 전도시킴으로써, 즉 가장 정신적인 복수 행위로 명예회복을 할 줄 알았다. 오직 이렇게 하는 것만이 성직자적 민족에게, 가장 퇴보한 성직자적 복수욕을 지닌 민족에게 적합한 것이었다. 유대인은 두렴움을 일으키는 정연한 논리로 귀족적 가치등식(좋은=고귀한=강력한=아름다운=행복한=신의 사랑을 받는)을 역전하고자 감행했으며, 가장 깊은 증오(무력감의 증오)의 이빨을 갈며 이를 고집했던 것이다. 즉, “비참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오직 착한 자다. 고통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 또한 유일하게 경건한 자이며 신에 귀의한 자이고, 오직 그들에게만 축복이 있다. - 이에 대해 그대, 그대 고귀하고 강력한 자들, 그대들은 영원히 사악한 자, 잔인한 자, 음란한 자, 탐욕스러운 자, 무신론자이며, 그대들이야말로 또한 영원히 축복받지 못할 자, 저주받을 자, 망할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 [...] 즉 유대인과 더불어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 시작된다. - 363~364
 

11. ‘인간’이라는 맹수를 온순하고 개화된 동물, 즉 가축으로 길들이는데 모든 문화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 어찌 되었든 오늘날 진리로 믿어지고 있는데,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고귀한 종족과 그들의 이상을 결국 모욕하고 제압하게 된 저 반응 본능과 원한 본능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본래의 문화의 도구라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 이러한 ‘문화의 도구’는 인류의 치욕이며, 오히려 ‘문화’ 일반에 대한 회의(懷疑)이며 반론인 것이다! - 374
 

12. 유럽인의 왜소화와 평균화는 우리의 최대 위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모습이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좀 더 위대해지려는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더욱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좀 더 빈약한 것, 좀 더 선량한 것, 좀 더 영리하고 안락한 것, 좀 더 평범하고 무관심한 것, 좀 더 중국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것을 예감하고 있다 - 인간은 의심의 여지없이 ‘더 좋게’ 된다 ...... 여기에 바로 유럽의 운명이 있다 - 인간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우리는 또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 인간에 대한 희망, 아니 인간에 대한 의지도 잃어버렸다. 이제 인간의 모습은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 이것이 허무주의가 아니라면, 오늘날 무엇이 허무주의란 말인가? ... 우리는 인간에게 지쳐 있다 ...... - 376~377
 

* 니체의 주. “도덕 개념의 발달사에 대해서 언어학, 특히 어원학적 연구는 어떤 시사점을 주는가?” - 390
 

제2논문: ‘죄’, ‘양심의 가책’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
 

1.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르는 것 [...] 이러한 망각이 필요한 동물[인간]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지만, 이 동물은 이제 그 반대 능력, 즉 기억의 도움을 받아 어떤 경우, 말하자면 약속해야 하는 경우에 망각을 제거하는 능력을 길렀던 것이다. [...] 이와 같이 미래를 마음대로 처리하기 위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우연적인 사건과 구분하고 인과적으로 사고하며 먼 앞날의 일을 현재의 일처럼 보고 예견하며,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그 목적의 수단인지 확실히 결정하고 대략 게산하며 산출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어야만 하지 않는가! - 약속하는 인간이 그렇게 행동하듯이, 결국 그러한 방식으로 스스로의 미래를 보증할 수 있기 위해서, 인간 자신은 우선 스스로 자기 자신의 관념에 대해서조차 예측할 수 있고 규칙적이며 필연적인 존재가 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 395~397
 

2. 바로 이것이야말로 책임의 유래에 관한 오랜 역사이다. [...] 책임이라는 이상한 특권에 대한 자랑스러운 인식, 이 희한한 자유에 대한 의식, 자기 자신과 운명을 지배하는 이 힘에 대한 의식은 그의 가장 밑바닥 심연까지 내려앉아 본능이, 지배적인 본능이 되어버렸다: [...] 이 주권적 인간은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 397~399
 

3. 양심 [...]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달구어 찍어야 한다: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 이것은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유감스럽게도 가장 오래 지속된) 심리학의 주요 명제다. [...] 모든 종교는 그 가장 깊은 근거에서 잔인성의 체계다. [...] 그러한 모습이나 전례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마침내 사회 생활의 편익을 누리고 살기 위해 약속했던 일에 관해 대여섯 가지의 “나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 속에 담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실제로, 이와 같은 기억 덕분에 사람들은 마침내 ‘이성’에 이르렀다! - 아, 이성, 진지함, 감정의 통제, 숙고라 불리는 이러한 음울한 일 전체, 인간의 이러한 모든 특권과 사치: 이것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단 말인가! 모든 ‘좋은 것’의 근저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전율이 있단 말인가! ...... - 399~402
 

4. 그러나 죄의식, 전체적인 ‘양심의 가책’이라는 저 다른 ‘음울한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세상에 나타났단 말인가? [...] 예를 들어 ‘죄 Schuld’라는 저 도덕의 주요 개념이 ‘부채 Schulden’라는 극히 물질적인 개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형벌이 일종의 보복으로 의지의 자유와 부자유에 관한 어떤 전제와도 전혀 무관하게 발전해왔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 형벌은, 오늘날 역시 부모가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피해에 대해 가해자에게 표출하는 분노로 가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분노는, 모든 손해에는 그 어딘가에 등가물이 있으며, 심지어 가해자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실제로 배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관념에 의해 억제되고 변용되었다. 이 원시적으로 뿌리 깊은, 아마 이제는 더 이상 그 뿌리를 뽑을 수 없을 것인 관념, 즉 손해와 고통은 등가라는 관념은 어디서 힘을 얻었던 것일까? 나는 이것이 채권자채무자 사이의 계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다. 이 계약 관계는 대체로 ‘권리의 주체’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것이며, 그 입장에서 보면 다시 매매, 교환, 통상, 왕래라는 근본 형식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 402~404
 

6.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영역, 즉 채무법이다. [...] 다시 한번 물어보건대, 고통은 어느 정도까지 ‘부채’를 보상할 수 있는 것일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최고로 만족을 주는 정도까지이며, 피해자가 손해에 대한 불쾌감을 함께 염두에 두면서, 손해를 이상한 반대의 쾌감으로 바꾸는 정도까지이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 이것은 진정한 축제였으며, 이미 말했듯이, 채권자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위배되면 될수록 더 높은 값을 지닌 어떤 것이었다. [...] 어느 정도까지 잔인함이 고대인의 성대한 축제의 환락을 이루고 있었는지, 그들의 거의 모든 환락의 구성 요소로 뒤섞여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성을 향한 욕망이 얼마나 소박하고 순진하게 나타났는지, 바로 ‘사심 없는 악의’(또는 스피노자의 말로 하면, 악의 있는 동정)를 그들은 얼마나 근본적으로 인간의 정상적인 속성으로 여겼고 - 따라서 양심을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긍정하는 것으로 여겼는지, 이러한 사실을 온 힘을 다해 생각해보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잘 길들여진 가축(말하자면 현대인, 말하자면 우리)의 섬세한 감각에, 더욱이 위선에 거스르는 일이다. [...] (- 공작부인의 궁정에서 읽히고 있는 『돈키호테 Don Quixote』를 떠올려보라: 우리는 오늘날 『돈키호테』의 어느 부분을 읽어도 혀에 쓰디쓴 맛을 느끼며 거의 고문당하는 듯한 가책을 갖는데, 이는 저작자나 동시대인에게는 대단히 이상한 일이며 이해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 그들은 이것을 책 가운데 가장 명랑한 책으로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읽었으며, 이 책을 읽고 거의 죽도록 웃었다). 고통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더욱 쾌감을 준다. - 이것은 하나의 냉혹한 명제이다. 하지만 그밖에도 아마 이미 원숭이도 시인하게 될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근본 명제이다: 왜냐하면 원숭이는 기이한 잔인함을 생각해냄으로써 인간을 이미 충분하게 예고하고 있으며, 마치 인간의 ‘서곡을 연주하는 것’ 같다고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잔인함이 없는 축제란 없다: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긴 역사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 그리고 실로 형벌에서도 축제적인 것이 많이 있다! -
- 406~408
 

7. 사실 고통에 대해 사람을 분격하게 만드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다: 그러나 고통 속으로 비밀스러운 구원 장치 전체를 집어넣어 해석한 그리스도교에게도, 모든 고통을 방고나자의 입장이나 고통스럽게 만드는 자의 입장에서 해석할 줄 알았던 고대의 소박한 인간에게도 그러한 무의미한 고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 “신이 그거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재난은 모두 정당하다” : 선사적 감정의 논리는 이렇게 울려퍼진다. - 이것은 진정 선사적인 논리였을 뿐인가? 잔인한 광경을 즐기는 친구로 생각된 신들 - 오, 이 태고의 관념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 유럽의 인간화에도 파고들어와 있는 것일까! 이 점에 관해서는 칼뱅이나 루터와 상의해보아도 좋다. 어쨌든 그리스인들 역시 그들 자신의 신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잔인함의 즐거움보다 더 좋은 간식을 바칠 줄 몰랐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신은 도대체 호메로스가 자신의 신들로 하여금 인간의 운명을 내려다보게 한 것은 어떤 눈이었다고 생각하는가? 근본적으로 트로이전쟁과 그와 유사한 비극적이고 무서운 사건들은 어떤 궁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들은 신들을 위한 축제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대해서 시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신적인’ 속성이 있는 한, 시인들을 위한 축제극이기도 했다 ...... 후에 그리스의 도덕 철학자들이 도덕적인 논쟁이나 유덕자의 영웅주의나 자기 가책을 신의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의무를 진 헤라클레스’는 무대 위에 올려졌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목격자 없는 덕행이란 이 배우의 민족에게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 고대 인간은 모두 연극과 축제 없이는 행복을 생각할 수 없었던, 근본적으로 공개적이고 근본적으로 명백한 세계로 ‘관중’을 세심하게 고려했던 것이다. -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대단한 형벌에도 실로 축제적인 것이 많이 있다! ...... - 410~412
 

8. 값을 정하고 가치를 측정하고 등가물을 생각해내며 교환하는 것 -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유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인간의 원초적 사유를 미리 지배하고 있었다. [...] 아마 ‘인간 manas’이라는 우리의 용어도 바로 이러한 자기 감정의 그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이리라: 인간이란 가치를 재고 평가하고 측정하는 존재, ‘평가하는 동물 자체’로 묘사된다. [...] 고대인의 사유에 특유한 저 둔중한 일관성으로, 곧 “어느 사물이나 가격을 지닌다. 모든 것은 대가로 지불될 수 있다”는 중요한 일반화에 이른 것이다. - 이것이 정의의 가장 오래되고 소박한 도덕의 규준이며, 지상에서의 모든 ‘호의’, 모든 ‘공정’, 모든 ‘선한 의지’, 모든 ‘객관성’의 발단이다. - 412~413
 

9. 계속해서 선사시대의 척도로 재보면 (덧붙여 말하자면, 선사시대란 어느 시대나 존재하고 있거나 다시 존재할 수 있다): 공동체와 구성원의 관계 역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라고 하는 저 중요한 근본 관계 속에 있다. 사람은 공동체 속에 살고 있으며, 공동체의 이익을 누리고 있다 [...] 직접적인 소해를 도외시하더라도, 범죄자는 이제까지 그가 관계해온 공동체 생활의 모든 재산과 편리에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파괴자, 전체를 거역하며 계약을 파괴한 자, 약속을 파괴한 자인 것이다. 범죄자는 그가 받은 것으로 드러난 이익과 가불(假拂)을 상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채권자에게 폭력을 가하기까지 하는 채무자인 것이다. - 413~414
 

11. [...] 도대체 양심에다 ‘양심의 가책’을 발명한 자는 누구인가 - 그는 원한의 인간이다! [...] 따라서 법률이 제정되고 나서야 ‘옳음(법)’과 ‘옳지 않음(불법)’이 있게 된다(이것은 오이겐 뒤링 Eugen Dühring이 주장하는 것처럼, 침해 행위가 있고 난 후의 것이 아니다). 법과 불법을 그 자체로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삶이란 본질적으로, 즉 그 근본 기능에서 다치기 쉽고 폭력적이며 착취적이고 파괴적으로 작용하며, 이러한 성격 없이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인 한, 당연히 침해, 폭력, 착취, 파괴란 그 자체로 ‘불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심지어 더욱 의심스러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최고의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법률 상태란 힘을 목적으로 하는 본래의 삶의 의지를 부분적으로 제약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전체 목적에 예속된 개별적 수단으로, 즉 더 거대한 힘의 단위를 창조하는 수단으로 언제나 예외적인 상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 418~420
 

14. 오늘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형벌에 대한 믿음은 바로 그와 같은 효용성에서 언제나 가장 강력한 발판을 발견하고 있다. 형벌은 죄지은 사람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이나 ‘회한’이라 불리는 저 정신적 반응을 일으키는 고유한 도구를 형벌에서 찾는 것이다. [...] 진정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바로 범죄자나 수형자 사이에서는 대단히 드문 일이며, 감옥이나 교도소는 이러한 집게벌레 종족이 번식하기 좋은 온상이 아니다. - 427
 

15. 형벌은 인간을 길들이는 것이지만,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지는 않는다. - 오히려 반대로 주장하는 것이 더 옳을 수도 있을 것이다. - 430
 

16. ‘양심의 가책’의 기원에 관한 나 자신의 가설 [...] 나는 양심의 가책을 인간이 일반적으로 경험했던 모든 변화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저 변화의 압력 때문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심각한 병이라고 간주한다. [...] 밖으로 발산되지 않은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향하게 된다. - 이것이 내가 인간의 내면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 이것으로 인해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이 인간에게서 자라난다. [...]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해 국가 조직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저 무서운 방어벽은 - 특히 형벌도 이러한 방어벽에 속한다 - 거칠고 자유롭게 방황하는 인간의 저 본능을 모두 거꾸로 돌려 인간 자신을 향하게 하는 일을 해냈다. 적의, 잔인함과 박해, 습격이나 변혁이나 파괴에 대한 쾌감 - 그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에게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 이와 더불어 인류가 오늘날까지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크고도 무시무시한 병, 즉 인간의 인간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고통이라는 병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 사실 그때 시작하여 결말의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연극의 진가를 평가하기 위하여 신과 같은 관객이 필요했다. - 430~432
 

17. 내가 ‘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 그것은 전투적으로 조직되어 있고 조직력이 있으며, 수적으로 아마 어마어마하게 우세할 것이지만 아직은 형태를 짓지 못하면서 여전히 유랑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주저없이 무서운 발톱을 들이댄 어떤 금발의 맹수 무리, 정복자 종족, 지배자 종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로 ‘국가’가 지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국가가 ‘계약’으로 시작되었다는 저 몽상은 정리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명령할 수 있는 자, 천성적으로 ‘지배자’인 자, 일에서나 몸짓에서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자 - 이러한 사람들에게 계약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 433~434
 

18. 자기 없는 자,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자,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자가 느끼는 쾌감은 처음에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쾌감은 잔인함이다. [...] 양심의 가책이야말로, 자기 학대를 하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를 낳는 전제가 된다. -
- 436
 

19. 양심의 가책이란 하나의 병이다. [...] 이렇게 가장 강력한 종족의 선조는 자라나는 공포 자체의 상상으로 마침내 어마어마한 존재로 커가고, 신적인 무서움과 상상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밀려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 선조는 마침내 필연적으로 하나의 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 신들의 기원 자체, 공포로부터의 기원이 있을 것이다! - 436~438
 

20. 마침내 우리는 고통받는 인간이 일시적으로 위안을 찾은 역설적이고 무시무시한 방책인 저 그리스도교의 천재적 장난 앞에 갑자기 서게 된 것이다: 즉 신 스스로가 인간의 죄 때문에 자기를 희생한다. 신 스스로가 자신을 자신에게 지불한다. 신이란 인간이 상환할 수 없게 된 것을 인간에게서 벗어나 상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 사랑에서(이것을 믿어야만 할까?), 자신의 채무자에 대한 사랑에서, 채권자가 자신의 채무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 - 441
 

21. 에 대한 죄책감: 이 사상은 인간에게는 고문의 도구가 된다. [...] 그[인간]는 이러한 동물적 본능 자체를 신에 대한 죄로(‘주님’, ‘아버지’, 세계의 시조와 태초에 대한 적의, 반역, 반란으로) 고쳐 해석한다. [...] 대지는 너무 오랫동안 이미 정신병원이었다! ...... - 442~443
 

22. 수세기 동안 고귀한 그리스인은 그의 무리 가운데 누군가가 범한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온갖 만행과 악행을 볼 때마다 스스로 물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마침내 자신에게 “아마도 이 그를 우롱했음에 틀림없어”라고 말했다 ...... 이러한 해결책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전형적이다 ... 이와 같이 그 당시에는 어느 정도까지 나쁜 일에서도 인간을 변호하는데 신이 이용되었다. 신은 악의 원인으로 이용되었다 - 그 당시에는 신들은 벌주는 것을 맡은 것이 아니라, 더 고귀한 것, 즉 죄를 맡은 것이다 ...... - 445
 

24. 우리 현대인들, 우리는 수천 년간 양심의 해부와 자기 동물성의 학대의 상속인이다. [...] 안티크리스트이자 반(反)허무주의자, 신과 허무를 초극한 이 자, - 그는 언젠가 올 수밖에 없다 ...... - 446~448
 

제3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일반적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이 인간에게 그렇게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 안에는 인간 의지의 근본 사실, 즉 인간 의지가 지닌 공허의 공포가 표현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가 필요하다. - 이 의지는 아무 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는 것이다. - 내 말을 이해하겠는가? ...... 내 말을 이해했는가? ...... “전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 그럼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 451~452
 

2.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452
 

6. 칸트는 “미란 무관심하게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관심하게! 미를 일찍이 행복의 약속이라고 부른 진정한 관람자이자 예술가인 스탕달이 내린 저 다른 정의와 이것을 비교해보자. 어쨌든 여기서는 칸트가 오직 미적 상태라고 강조했던 바로 그 무관심이라는 것이 거부되고 삭제되었다. 누가 옳단 말인가? 칸트인가 아니면 스탕달인가? [...] “한 철학자가 금욕주의적 이상을 신봉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우리의 최초의 물음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적어도 하나의 힌트를 얻게 된다: 그 철학자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
- 461~463
 

7. 지상에 철학자가 있다면, 그리고 철학자들이 있었던 곳에서는 어디서나 (철학을 하기 위한 천부적인 재능의 대립된 양극을 말하자면, 인도에서 영국에 이르기까지) 관능에 대한 철학자 특유의 과민함과 악 감정이 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 결혼한 철학자란 코미디에 속한다. - 464~465
 

8. 금욕주의적 이상의 세 가지 거창한 수식어가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즉 이것은 청빈, 겸손, 순결이다. [...]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가 회피했던 것은 우리가 지금 피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에페소스 사람들의 소란스러움과 민주주의자들의 잡담, 그들의 정치, 그들의 ‘제국’(알다시피 페르시아를 말한다)에 관한 새로운 소식, ‘오늘날’에 관한 그들이 모은 시장의 잡동사니가 그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 철학자는 먼저 한 가지, 즉 ‘오늘날’에 관계되는 모든 것에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 철학자는 세 가지 현란하고 요란한 것, 즉 명예, 제후, 여성을 회피한다는 점에서 인정받게 된다. [...] 결국 이 철학자들은 아주 미미한 것을 요구한다. 그들의 표어는 “소유하는 자는 소유당한다”는 것이다. [...] 미학의 생리학 - 467~472
 

9. 오만이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동물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실험을 우리 자신에게 하며, 살아 있는 몸에 깃들인 영혼을 호기심에서 기꺼이 해부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필연적으로 매일 더욱 의심을 품는 자, 물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가 되어야만 하며, 따라서 아마도 또한 더욱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자가 되어야만 하지 않는가? [...] 오늘날 우리가 자부하고 있는 약간의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 감정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은 없다. - 474~475
 

10. 금욕주의적 이상은 오랫동안 철학자에게 그 출현의 형식으로, 실존의 전제로 도움이 되었다. - 그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금욕주의적 이상을 표명해야만 했다. 그가 그것을 할 수 있으려면 그와 같은 것을 믿어야만 했다. 철학자들에게 특유한 세계 부정적인, 삶을 적대시하는, 감각을 믿지 않고 관능에서 벗어난 초탈(超脫)의 태도는 최근까지 견지되어왔으며, 이것이 거의 철학자들의 태도 자체로 간주되었는데, - 이것은 무엇보다도 철학이 일반적으로 발생하고 유지되어왔던 긴급한 조건들의 결과이다: 즉 아주 오랫동안 철학은 금욕주의의 외투나 피복이 아니라면, 금욕주의의 자기 오해가 아니라면, 지상에 전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목요연하고도 명백히 표현해본다면,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최근에 이르도록 불쾌하고 어두운 애벌레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형태에서만 철학은 살 수 있었으며 기어다녔던 것이다 ...... - 477~478
 

11. “모든 진지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금욕주의적 삶이란 하나의 자기 모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견줄 데 없는 원한이, 즉 삶에서의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 그 가장 깊고, 강력하며, 가장 기저에 있는 조건들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기갈 들린 본능과 힘 의지의 원한이 지배하고 있다. - 478~481
 

12. 오직 관점주의적으로 보는 것만이, 오직 관점주의적인 ‘인식’만이 존재한다. - 483
 

13. ‘삶에 거스르는 삶’이라는 금욕주의자들에게서 표현되는 것처럼 보이는 자기 모순이란 - 이것은 우선 명백하다 - 심리학적으로가 아니라, 생리학적으로 생각해볼 때, 단지 무의미할 뿐이다. 이것은 단지 외견상 그럴 수 있을 뿐이다. [...] 금욕주의적 이상은 퇴화되어가는 삶의 방어 본능과 구원 본능에서 생겨난 것이다. [...] 금욕주의적 이상은 그러한 수단이다. [...] 삶은 이 이상 속에서 그러한 이성을 통해 죽음과 싸우며 죽음에 대항하여 싸운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사람을 보존하기 위한 기교인 것이다. [...] 이 금욕주의적 성직자, 이 외견상 삶이 적대자, 이 부정하는 자 - 그는 바로 삶의 아주 거대한 보존하는 힘과 긍정하는 힘에 속하는 것이다. [...] 파괴와 자기 파괴의 거장인 인간이 스스로에게 상처를 준다 할지라도 - 훗날 이 상처 자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살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 - 483~486
 

14.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인간의 문화권이나 바로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유럽’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위험은 병자이다: 악인이나 맹수가 아니다. [...] 모든 가족, 모든 단체, 모든 공동체의 배경을 살펴보라: 그 어느 곳에서든지 건강한 사람에 대한 병자들의 싸움이 있다. [...] 그들[원한의 인간들]은 도대체 언제 최후의 가장 세련되고 가장 섬세한 복수의 승리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 자신의 불행을, 모든 불행 일반을 행복한 자들의 양심에 밀어 넣는 데 성공할 때인 것이다: 그러면 이들 행복한 자들은 어느 날엔가는 자신들의 행복을 수치스럽게 여기기 시작할 것이고, 아마 서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것이다: “행복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너무 많은 불행이 있다!” - 487~490
 

15.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우리에게 병든 무리의 예정된 구원자, 목자, 변호인으로 생각된다. [...] 성직자적 실존의 가치를 가장 간결한 형식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직자란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킨 자이다. 즉 모든 고통받는 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찾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통을 일으킨 행위자를, 더 확실히 말하자면, 고통에 민감한 죄 있는 행위자를 찾는다. 간단히 말하면, 그가 자신의 감정을 행위에 의해서나 어떤 구실을 붙여 그 초상(肖像)에 배출할 수 있는 어떤 살아 있는 자를 찾는다: 왜냐하면 감정을 배출한다는 것은 고통받는 자의 가장 큰 진통에의 시도, 즉 마비의 시도이며, 어떤 종류의 진통에 맞서 본의 아니게 갈구하는 마취제이기 때문이다. [...] “내가 불쾌한 것은 그 누군가에게 틀림없이 책임이 있다” - 이러한 방식으로 추론하는 것은 모든 병자의 특징이며, 실상 그들이 느끼는 불쾌함의 참다운 원인, 즉 생리학적인 원인은 더욱 그들에게 감추어진 채 있게 된다(- 이 원인은 교감신경의 병에 있거나, 담증의 지나친 분비나, 혈액 중의 유황알칼리나 인산칼리의 결핍이나, 혈액순환을 방해하는 하복부의 압박 상태에 있거나, 아니면 난소나 그와 같은 기관의 퇴화에 있을 수도 있다). 고통스러운 자는 모두 고통스러운 감정의 구실을 꾸미는 데 놀라울 정도로 열중하며 독창적이다. 그들은 의심을 즐기고 있으며, 좋지 않은 일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상해 사건을 파헤치는 일을 즐긴다. [...] 그들은 친구와 아내와 아이들과 그 밖에 그들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악인으로 만든다. “나는 괴롭다 : 그 누군가가 이것에 대해 틀림없이 책임이 있다” - 병든 양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목자인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이렇게 말한다 : “맞다. [...] 그러나 너 자신이 이러한 그 누군가이며, 오로지 너 자신이야말로 이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 - 너 자신오로지 네 스스로에 대해 책임이 있다!” ...... 이것은 무척 뻔뻔스럽고 그릇된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으로 적어도 한 가지는 이루어졌다. 이것으로, 이미 말했듯이, 원한의 방향이 변경되었다. - 492~495
 

16. 인간에 대한 ‘죄스러움’이란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실, 즉 생리적 장애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 생리적 장애란 우리에게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않는 도덕적 종교적 관점에서 본 것일 뿐이다. - 그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다’든지, ‘죄가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는, 그가 건강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가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처럼, 그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럼 그 유명한 마녀 재판을 상기해보라 : 당시 가장 예리한 통찰력을 지녔고, 가장 인자한 재판관도 이 경우에 죄가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마녀들’ 스스로도 그것을 의심치 않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죄도 없었다. 저 전제를 좀더 확장된 형식으로 표현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정신적 고통’ 자체도 나에게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 지금까지 정확히 형식화할 수 없었던 사실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인과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 496~497
 

17. 그러나 이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진정 의사란 말인가? - 우리는 그가 아무리 스스로를 ‘구원자’로 느끼고, ‘구원자’로 존경받고자 한다 해도, 그를 의사로 부르는 것이 어째서 허용되지 않는지를 이미 이해하고 있다. 그가 싸우는 것은 단지 고통 자체일 뿐이며, 고통받는 자의 불쾌일 뿐이지, 그 원인이나 진정한 병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거대한 종교의 주요한 문제는 유행이 되어버린 어떤 피로나 중압감과 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지상의 특정한 장소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생리적인 장애 감정이 광범위한 대중을 지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장애 감정은 생리학적 지식의 결핍 때문에 그 자체로 의식되지 못하고, 따라서 그 ‘원인’이나 치료도 단지 심리적ㆍ도덕적으로만 추구하고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보통 ‘종교’라 불리는 것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다). - 497~499
 

20. 인간의 영혼을 갈가리 찢으며 환희에 넘치는 온갖 종류의 음악을 울리게 하는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사용한 주된 조작법은 -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바이지만 -, 죄책감을 이용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자신에 대해 괴로워하며, 어쨌든 생리적으로는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동물처럼, 왜, 무엇 때문에를 잘 알지 못한 채 인간은 절실히 그 이유를 찾기를 바라며 - 이유는 고통을 경감해준다 -, 또한 절실하게 치료제나 마취제를 갈구하고, 마침내는 비밀을 알고 있는 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한다 - 보라! 그는 어떤 암시를 받는다. 그는 자신의 마법사인 금욕주의적 성직자에게서 자신의 고통의 ‘원인’에 대한 최초의 암시를 받는다. 그는 그 원인을 자기 자신 안에서, 죄책감 안에서, 과거의 한 단편에서 구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의 고통 자체를 벌의 상태로 이해해야만 한다 ... 불행한 자인 그는 이것을 들었고, 이해했다: 이제 그는 주변에 줄이 그어진 암탉처럼 된다. 그는 줄로 그어진 이러한 원에서 다시 나오지 못한다: 병자는 죄인이 되어버렸다 ...... [...] 불쾌와의 싸움에서 늙은 대마법사인 금욕주의적 성직자-그는 명백히 승리했고, 그의 왕국이 도래했다: 이미 사람들은 고통에 대항해 더 이상 탄식하지 않았고, 고통을 갈망했다. “더 많은 고통을! 더 많은 고통을!” 이렇게 그의 제자들이나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의 갈망은 수세기 동안 외쳐왔던 것이다. 고통을 주는 모든 감정의 무절제함, 부숴버리고, 망가뜨리고, 으스러뜨리고, 넋을 잃고, 황홀하게 했던 모든 것, 고문실의 비밀, 지옥 자체의 발명 - 이 모든 것이 이제부터 발견되었고, 알아맞히게 되었고, 이용되었다. - 511~514
 

24. 아직까지 오랫동안 자유정신이란 없었다 :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진리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 [...] “진리란 없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 이제 이것은 정신의 자유였다. 그것에 의해 신앙은 진리 그 자체에도 파산선고를 내렸다. [...] - 한 가지 일에만 무조건 매달리는 이러한 자들, 이른바 이러한 ‘자유정신’에게는 저러한 의미의 자유와 해방처럼 낯선 것도 없다. 그들은 어떤 관점에서도 그렇게 굳게 구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로 진리에 대한 믿음에서는 다른 구에게서도 볼 수 없을 만큼 무조건적으로 구속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모든 것을 아마 너무 정확히 잘 알고 있다: 그러한 신앙 때문에 존경할 만한 저 철학자들의 절제, 마침내는 부정도 긍정도 똑같이 엄하게 금하게 되는 저 지성의 스토아주의, 사실 앞에, 어리석은 사실 앞에 서 있고자 하는 저 의욕, 오늘날 프랑스 과학이 독일의 과학에 대해 일종의 도덕적 우월성을 찾고 있는 저 ‘작은 사실’의 숙명론(내가 명명하기로는 이 작은 사실주의), 해석 일반에 대한 (폭력, 수정, 약축, 생략, 변조, 날조, 위조, 그 밖의 모든 해석의 본질에 속하는 것에 대한) 저 단념, 이것은 대체로 말해서, 어떤 관능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덕의 금욕주의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이것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부정의 한 양태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금욕주의를 강제하는 것, 즉 진리를 향한 무조건적인 의지란 금욕주의적 이상 자체에 대한 신앙인 것이다. 비록 이 신앙의 무의식적인 명법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렇다. 이 점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가치, 진리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신앙이며, 또한 이 가치는 저 이상 속에서 보증되고 확인된다(이 가치는 저 이상과 더불어 흥망을 같이 한다). 엄격히 판단해서, ‘무전제’의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터무니없는 일이다: 과학이 신앙에서 하나의 방향, 하나의 의미, 하나의 한계, 하나의 방법, 하나의 생존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의 철학, 하나의 ‘신앙’이 항상 먼저 거기 있어야만 한다(이것과 반대로 이해하는 자, 예를 들어 철학을 ‘엄밀한 학적 토대 위에’ 세우려고 하는 자는 그 때문에 먼저 철학뿐만 아니라, 진리 자체를 뒤집어놓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존경할만한 두 여자를 배려하는 데서 있을 수 없는 불쾌한 예의의 손상이다). 그렇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이점에 대해 나는 나의 『즐거운 학문』에서 말했다. 이 책 제5장 344절을 참조하라. - 과학에 대한 신앙이 전제로 하고 있듯이, 저 대담하고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진실한 인간은 그 신앙에 의해 삶의 세계, 자연의 세계, 역사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긍정한다. 그가 이러한 ‘다른 세계’를 긍정하는 한, 어떻게 되는가? 그는 바로 그것에 의해 그 세계와는 다른 것, 즉 이 세계, 우리의 세계를 - 부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의 과학에 대한 신앙이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형이상학적 신앙이다. - 오늘날 우리 인식하는 자들, 우리 무신론자들이며 반(反)형이상학자들, 우리 역시 천 년 간이나 낡은 신앙이 불붙여왔던 저 불길에서, 신은 진리이며, 진리는 신적인 것이라는 저 그리스도교의 신앙 - 이것은 플라톤의 믿음이기도 하다 -에서 또한 우리의 불을 얻는다. 그러나 바로 이 신앙이 점점 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된다면, 오류나 맹목이나 거짓 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신적인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없다면 - 신 자체가 우리의 가장 오래된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 어떻게 되는가? - 이 자리에서 멈추고 오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학 자체는 이제 변명이 필요하다(그렇다고 해서 과학을 위한 그러한 변명이 있다고 아직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가장 오래전부터 최근에 이르는 철학을 살펴보자: 이 모든 철학 안에는 진리를 향한 의지 자체가 어느 정도나 먼저 변명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빠져 있다. 이 점에서 모든 철학에는 어떤 결점이 있는 것이다. - 이 원인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금욕주의적 이상이 지금까지 지배했기 때문이며, 진리가 존재로, 신으로, 최고의 법정 자체로 세워졌기 때문이며, 진리를 문제 삼는 것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허용된다’는 말을 이해하는가? - 금욕주의적 이상의 신이 부정되는 그 순간부터, 또한 어떤 새로운 문제가 있게 된다: 그것은 진리의 가치에 대한 문제이다. - 진리를 향한 의지는 비판이 필요하다 - 여기에서 우리의 과제를 규정해보자 -. 즉 시험삼아 한번은 진리의 가치를 문제 삼아야만 한다 ...... (이것이 너무 간략히 이야기되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까지 우리 역시 아직 경건한가’라는 제목의 『즐거운 학문』의 저 단락, 344절을 읽을 것을 권한다. 가장 좋은 것은 그 책의 5장 전체와 또한 『아침놀』의 머리말을 읽는 것이다.) - 525~528
 

25. 예술, - 나는 언젠가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길게 언급하려 하기 때문에, 미리 말하자면, - 바로 거짓이 신성시되고, 기만하려는 의지가 한쪽에서 선한 의지를 갖는 이 예술이란 과학보다도 훨씬 근본적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립되어 있다: 유럽이 지금까지 낳은 이러한 예술의 최대 적인 플라톤의 본능은 이것을 감지했다: 플라톤 호메로스 : 이것이야말로 완전하고 진정한 적대관계이다-전자는 최선의 의지를 지닌 ‘저편 세계의 인간’이자 삶의 위대한 비방자이고, 후자는 아무 의도가 없는 삶의 숭배자이자 황금의 자연이다. [...] 학자가 중요시되는 어떤 민족의 시대를 관찰해보자: 이는 피로의 시대이며, 황혼의 시대, 쇠망의 시대이다. - {이 시대에는} 넘쳐흐르는 힘, 삶의 확실성, 미래의 확실성이 사라져버린다. 중국식 고관이 권세를 떨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도래, 전쟁 대신 평화 중재 재판의 등장, 여성 동등권의 출현, 동정 종교의 등장, 그 밖에 하강하는 삶의 징조라 할 수 있는 모든 것 역시 좋은 일이 아니다. - 529~530
 

26. 나는 또한 이상주의를 믿는 이러한 가장 최근의 투기꾼들, 반(反)유대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적으로 아리아적으로 속물적으로 자신들의 눈을 까뒤집고, 가장 진부한 선동 수단인 도덕적 태도를 견딜 수 없을 만큼 남용함으로써 민중 속에 있는 멍청이의 요소들을 모두 불러일으키려고 한다. - 53
 

27. 바로 우리의 문제, 즉 금욕주의적 이상의 의미에 관한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이러한 문제들을 포기할 수 있다. - 이러한 문제가 어제나 오늘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저 문제에 대해서 나는 다른 연관성에서 좀 더 근본적이고 더 엄격하게 다룰 것이다(‘유럽 허무주의의 역사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내가 준비 중인 『힘에의 의지, 모든 가치의 가치전도의 시도 Der Will zur Macht, Versuch einer Umwertung aller Werthe 』라는 저서를 볼 것을 권한다). [...] 오늘날 정신이 엄격하게, 힘 있게, 화폐의 위조 없이 활동하는 다른 모든 곳에서, 이제 정신은 그 진리를 향한 의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이러한 절제를 나타내는 통속적인 표현이 ‘무신론’이다 - : 그러나 이러한 의지, 이러한 [금욕주의적] 이상(理想)의 잔여물은, 나를 믿어주기를 바라건대, 가장 엄격하게, 가장 정신적으로 정식화된. 저 이상 자체이며, 모든 외벽을 제거한 아주 신비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이상의 잔여물이라기보다는 핵심이다. 절대적으로 성실한 무신론(- 공기만을 우리, 이 시대의 좀 더 정신적인 인간인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은 따라서 겉보기처럼 저 이상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무신론은 그 마지막 발전 과정의 하나일 따름이며, 그 추리 형식이나 내적 논리적 결론의 하나일 따름이다. - 이것은 2천 년에 걸친 진리를 향한 훈련의 장중한 파국이며, 이것은 마침내 신에 대한 신앙의 허위를 스스로 금지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개 과정은 인도에서도 있었지만, 완전히 독립적으로 전개된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그 무엇인가를 입증한다. 똑 같은 이상이 어쩔 수 없이 동일한 결말에 이르게 된다. 결정적인 지점에 이른 것은 유럽의 기원보다 5세기 전에 부처와 더불어서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미 이것은 샹카철학 Sankyam-Philosophie 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부처에 의해 통속화되고 종교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주 엄격하게 물어본다면, 도대체 그리스도교적인 신을 이겨낸 것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나의 『즐거운 학문』 357절에 있다: “그리스도교적 도덕성 자체, 더욱 엄격하게 해석된 성실성의 개념,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과학적 양심이나 지적 결백성으로 번역되고 승화된 그리스도교적 양심이라는 고해신부의 명민함이 그것이다. 자연을 신의 선의와 보호의 증거인양 보는 것, 역사를 신적 이성에 경의를 표하기 위한 윤리적 세계 질서나 윤리적 종국 목적의 영원한 증인으로 해석하는 것, 경건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해석해왔듯이, 자기의 경험을 마치 모든 것이 섭리이며, 모든 것이 암시이며, 모든 것이 영혼의 구원을 위해 생각되고 보내온 것처럼 해석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이제는 지나갔다. 이러한 것들은 양심에 반(反)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좀 더 섬세한 모든 양심에게는 점잖치 못한 것, 정직하지 못한 것, 기만적인 것, 여성적인 것, 나약함, 비겁함으로 생각된다. - 만일 어떤 무엇으로, 우리가 선량한 유럽인이며 유럽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용기 있는 자기 극복의 계승자라고 한다면, 이 엄격성 때문이다.” ...... 모든 위대한 것은 그 스스로에 의해, 자기 지양의 작용에 의해 몰락해간다 : 생명의 법칙이, 생명의 본질 속에 있는 필연적인 ‘자기 극복’의 법칙이 이러한 것을 원하는 것이다. - “그대 스스로 제정한 법에 복종하라”라는 외침은 언제나 마지막으로는 입법자 자신을 향하게 된다. 그와 같은 교의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자기 자신의 도덕에 의해 몰락했다. 그와 같이 이제 도덕으로서의 그리스도교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 우리는 이러한 사건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리스도교적인 성실성은 하나하나 결론을 이끌어낸 다음, 결국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결론을, 자기 자신에 반하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이 성실성이 “모든 진리를 향한 의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때인 것이다 ...... 여기에서 나는 다시 내가 제기한 문제를, 우리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여(-나는 아직 한 사람의 친구도 모르니까 말이다): 우리 안에서 저 진리에의 의지 자체가 문제로 의식되는 것이 의미가 없다면, 우리의 존재 전체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 진리를 향한 의지가 이와 같이 스스로를 의식하게 될 때, 이제부터 -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도덕은 몰락하게 된다: 이것은 유럽의 다음 2세기를 위해 아껴 남겨둔 100막(幕)의 저 위대한 연극이며, 모든 연극 가운데 가장 무서운, 가장 의심스러운, 아마 가장 희망에 차 있기도 한 연극일 것이다 ...... - 536~539
 

28.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해보자: 그러면 인간은,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금까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인간의 생존은 아무 목표도 없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 이것은 해답 없는 물음이었다. 인간과 대지를 위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거대한 인간의 운명의 배후에는 더욱 거대한 “헛되도다!”라는 말이 후렴으로 울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어마어마한 균열이 인간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 실로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을 뜻한다. - 인간은 스스로를 변명하고, 설명하고, 긍정할 줄을 몰랐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그 밖의 문제에도 괴로워했다. 인간이란 대체적으로 보아 병든 동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하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해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진다고 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류 위로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류에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는 낫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이상 속에서 고통은 해석되었다. 어마어마한 빈 공간은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모든 자살적 허무주의에 대해 문이 닫혔다. 해석은-의심의 여지없이-새로운 고통을 가져왔고, 좀 더 깊고, 좀 더 내면적인, 좀 더 독이 있는, 삶을 갈아먹는 고통을 가져왔다 : 이 해석은 모든 고통을 라는 관점 아래로 가져갔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 후로 더 이상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불합리나 ‘무의미’의 놀이공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 - 우선 어디를 향해,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인간이 의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 전체가 본래 표현하고자 한 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더욱이 동물적인 것, 더욱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관능에 대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이러한 공포, 모든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소망,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이러한 욕망 - 이 모든 것은, 감히 이것을 이해하고자 시도해볼 때,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있다! ......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 ...... - 539~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