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

니체, 계보학, 역사





"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1971), DEQ I, pp. 1004-1024.
<니이체, 계보학, 역사>, 이광래 옮김, <<미셸 푸코>>, 민음사, 1989.



 
“이로부터 계보학의 필요불가결한 신중함이 생겨난다. 계보학은, 모든 단조로운 목적론의 외부에서, 사건들의 특이성을 지적해내야 한다. 계보학은 감정ㆍ사랑ㆍ양심ㆍ본능처럼 아무도 역사를 기대하지 않는 영역들에서 사건들을 기다려야 한다. 계보학은 사건들의 회귀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는 결코 어떤 진화의 완만한 곡선을 추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건들이 다른 역할을 수행했던 다른 장면들을 다시금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계보학은 심지어 사건들이 누락된 지점,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지점들을 정의해야만 한다(시라큐즈의 플라톤은 마호메트가 되지 않았다...).”(1004; 330)



 
“계보학은 철학자의 도도하고도 심오한 견해가 현자의 두더지 같은 시선에 대립되듯이 역사에 대립되지 않는다. 반대로 계보학은 관념적 의미작용들 그리고 무한한 목적론들의 메타 역사적 전개에 대립된다. 계보학은 ‘기원’(l'origine)의 추구에 대립된다.”(1004-1005; 330)




 
“그런데, 만일 그 계보학자가 형이상학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지속시키기보다는 역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면, 그는 무엇을 배우는가? 그는 모든 사물의 배후에는 ‘전혀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 사물의 초시간적이며 본질적인 비밀이 아니라, 사물은 본질이 없다는 비밀, 사물들의 본질은 그에게는 낯선 형상들로부터 한 조각 한 조각 구성된 것이라는 비밀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은 어떠한가? 하지만 이성 역시 전적으로 ‘이성적인’(raisonnable) 방식, 즉 우연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 하지만 자유는, 인간의 근원에서, 존재와 진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유는, 사실상, ‘지배계급의 발명품’이다. 우리가 사물의 역사적 시작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 기원으로부터 보존되어온 동질성이 아니라, 다른 사물들의 불화(不和), 부조화이다.”(1006; 333)
 



“계보학자는 역사로 하여금 기원이라는 환상을 반박할 것을 요청한다.”(1008; 336)




 
“결국 내력(provenance)은 신체에 속한다.”(1010; 339)




 
“규칙들의 세계는 폭력을 순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 규칙이란 증오의 계산된 쾌락이며 약속된 유혈극이다. 규칙은 끊임없이 지배의 놀이를 다시금 시작하며, 섬세히 반복된 폭력을 무대 위로 불러온다. [...] 인류는 전투에 전투를 거듭하며 규칙이 전쟁을 영원히 대치하는 보편적 상호성에 도달할 때까지 천천히 진보하는 것이 아니며, 인류는 각기 자신의 폭력들을 규칙들의 체계 안으로 정착시키면서 지배에서 지배에로 나아가는 것이다.”(1013; 343)



 
“니체는 계보학을 ‘진정한 역사’(wirkliche Historie)로서 묘사된다. 니체는 반복해서 계보학을 ‘역사적 감각’(sens historique) 혹은 ‘정신’(esprit)으로서 규정짓는다. [...] 니체가 ‘진정한 역사’, 역사적 감각을 실천할 때, 그는 우리가 인간에게 있어 불멸이라 믿었던 것을 생성(devenir) 안으로 다시금 집어넣는다. [...] 실제적(effective) 역사는 어떤 상수(常數, constance)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사가들의 역사와 구분된다. [...] 이는 지식이 이해가 아닌 절단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1014-1016; 344-347)
 




“우리는 사건을 어떤 결단, 계약, 통치 혹은 전투가 아니라, 서로 역전되는 힘들의 관계, 탈취된 권력, 그 사용자들에 반해 다시금 포착되고 되돌려진 단어들, 스스로 약화되고 완화되며 손상되는 지배, 가면을 쓴 채로 들어오는 타자로서 이해해야만 한다. [...] 실제적 역사는 어떤 섭리도 최후의 원인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우연의 주사위를 흔드는 철의 손’만이 존재하는 하나의 왕국을 알뿐이다.”(10106; 347)




 
“이러한 실제적 역사의 마지막 특성은 그것이 관점적(perspective) 지식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들의 지식에서 자신들의 열정이 갖는 필요불가결함을 해칠 수도 있는 것, 즉 그곳으로부터 자신들이 사물을 응시하는 장소, 그들이 존재하는 순간, 그들이 취하는 입장을 가능한 한 삭제해 버리고자 노력한다. 니체가 이해하는 역사적 감각은 자신이 관점적임을 알고 있으며, 자기 자신의 부당한 체계를 거부하지 않는다.”(1018; 349-350)




 
“역사가가 취하는 담론은 선동가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 역사가의 친족도는 소크라테스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그러나 이러한 선동은 위선적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선동은 보편이라는 가면 밑에 자신의 고유한 앙심(rancune)을 숨긴다. 선동가가 진리, 본질의 법칙 및 영원한 필연성에 대해 말하는 것과 꼭 같이, 역사가는 객관성, 사실의 엄밀성, 변경 불가능한 과거에 대해 말한다. [...] 역사가는 자신의 관점을 뒤흔들기 위해 그것을 허구적인 보편 기하학으로 대치한다.”(1018; 352)




 
“실제적 역사는 역사철학 위에 기초 지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역사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부터 계보학적 사용, 즉 철저히 반(反) 플라톤적인 사용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실제적 역사는 초역사적인 역사(histoire supra-historique)를 넘어설 수 있다.”(1020; 353-354)




 
“인류를 가로지르는 이 거대한 앎에의 의지[원한으로서의 지식](vouloir-savoir)에 대한 분석은 따라서 부정의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은 없다(따라서 인식 자체 안에는 진리에의 권리 혹은 참된 것의 기초는 없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인식 본능은 악하다(그 안에는 살인적인 무엇인가가 존재하며, 또 그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행할 수도, 행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야만 한다.”(1023; 357)




 
“이제 19세기 이래 철학적 사유를 양분했던 두 문제(진리와 자유의 상호적 기초, 절대적 지식의 가능성), 즉 피히테와 헤겔에 의해 반복되어왔던 이 거대한 두 개의 주제를 ‘절대적 인식의 포기가 존재 기초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라는 주제로 대치할 시간이 되었다.”(1024; 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