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통치성’의 개념은 『안전, 영토, 인구』의 4강에서 처음 정식화됐다. 원래 이것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명확한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점차 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4강에서 이 개념은 18세기에 정비된 권력의 체제, 즉 인구를 핵심 표적으로 삼고, 정치경제학을 앎의 주요 형식으로 삼고, 안전장치를 기본적인 기술적 도구로 삼는 권력의 체제, 그리고 ‘통치’라고 부를 수 있는 권력 유형을 주권이나 규율 등 다른 모든 권력 유형보다 끊임없이 우월한 상태로 이끌어간 과정을 명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요컨대 이 개념은 서구의 역사에 특수한 생성, 분절화를 갖는 요소들로 이뤄진 총체를 지시하고 있다.
‘통치성’은 역사적이며 특이한 차원으로 인해 사건이라는 특징을 갖는데, 더 나아가 적용영역의 한계가 부가된다. 통치성도 모든 권력관계를 정의할 수는 없다. 통치성이 정의하는 것은, 근대 국가의 형성을 하부에서 지탱하는 통치기술이다. 사실 국가에서 통치성이란 이런 것이다.
“정신의학에서의 격리기술, 형벌체계에서의 규율기술, 의학제도에서의 생명관리정치[와 같은 것이다].”
요컨대 ‘통치성’은 이 단계의 푸코의 고찰에서는 국가에 관한 문제와 연관시켜 권력관계의 특수한 영역을 절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의 두 가지 특징(사건적이며 지역적인 것)은 이듬해 이후의 강의에서 점차로 사라져간다. 1979년에 이 용어는 이미 특정한 권력체제(내치국가이건 자유주의적인 최소의 통치이건)를 구성하는 통치적 실천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품행을 인도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 있다. 그에 의해 이 단어는 “ 권력관계 일반에 대한 분석 격자”로서 사용된다. 이 격자는 역시 국가에 관한 문제 안에서 작동하고 있긴 하지만 이듬해가 되면 이 격자는 그 틀을 벗어나 ‘통치’가 갖는 의미와 동일한 외연을 갖게 된다.
“이 개념은 인간들의 품행을 이끌어야 할, 정해진 기술이나 절차라고 하는 넓은 의미에서 이해된다 …… 아동의 통치, 영혼이나 양심의 통치, 집, 국가, 자기 자신의 통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통치성’과 ‘통치’가 혼동되는 듯하다. 그러나 푸코는 이 두 개념을 구별하려고 애썼다. 그것에 의하면 ‘통치성’은 “권력관계가 갖는 유동성, 변형·역전의 가능성 내에서 권력관계의 전략적 장”을 가리킨다. 여기서 확정되는 것이 품행의 유형 혹은 ‘품행의 품행’이며, 이것이 ‘통치를 특징짓는다고 여겨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왜냐하면 전략적 영역이란 여러 가지 권력관계가 서로에게 행하는 작동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이 전략적 영역은 양자가 어떻게 서로를 함의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소위 통치성은 어떤 종류의 구조, 즉 “몇 가지 변수 …… 간의 관계적 정수”가 아닌 “특이한 일반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며, 그 변수는 우연의 상호작용 내에서 여러 상황에 대응한다.
요컨대 통치성이란 고려된 분석 수준이 어떤 것이건(부모/자식, 개인/공적인 힘, 인구/의학 등의 관계) 간에 미시권력에 내재하는 합리성을 일컫는다. 통치성은 ‘일종의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일지라도 통치성은 더 이상 『안전, 영토, 인구』에서처럼 역사적으로 규정된 일련의 흐름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권력관계가 전략적 분석을 부추긴다는 그런 의미에서만 일종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한 일반성. 그 현실태는 오로지 사건적événementielle일 뿐이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전략적 논리를 활용할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푸코의 사유에서 다음과 같은 유형의 사건성을 연결시켜주는 관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서구 사회 고유의 특정한 역사적 과정에 기입되어 있는 사건성, ‘통치’라는 면에서 권력에 대한 일반적 정의의 이론적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건성.
2) 푸코에게 통치성의 유형을 분석하는 것은 그 유형에 맞서는 저항(혹은 ‘대항품행’)의 형태를 분석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안전, 영토, 인구』의 8강(1978년 3월 1일)에서 푸코는 사목에 대해서 중세에 발달한 대항품행의 주요 형식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수덕주의, 공동체, 신비주의, 성서, 종말론적 신앙). 또한 푸코는 그 해의 강의 마지막에 국가이성의 원칙을 향해서 정리되고 있는 근대적 통치성의 분석으로부터 시민사회·인구·국민의 이름 아래에서 이뤄지는 특수한 대항품행의 중심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 대행품행들은 각각의 시대에서 ‘통치성의 위기’의 징후로 여겨지고 있다. 거기서 투쟁이나 저항의 새로운 양상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위기에서 대항품행이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는지를 자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푸코에 의해서 제안되고 있는 자유주의의 독해는 이 문제를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푸코가 통치성을 ‘특이한 일반성’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강의원고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실 거기에는 푸코에게 정치가 얼마나 권력에 대한 저항의 형식이라는 관점에 입각해 구상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참고로 푸코가 칼 슈미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이 텍스트뿐이다.
“특이한 일반성으로서의 통치성을 분석한다는 것은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tout est politique라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 표현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 정치적인 것은 국가개입의 권력 전체에 의해 정의된다. …… 모든 것이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국가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느 곳에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정치적인 것은 서로 대적하는 두 사람 사이의 투쟁이 편재하고 있다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 …… 이쪽은 [칼] 슈미트의 정의이다.
동지[동료/아군]의 이론. […]
요컨대 두 가지 정식화가 있다. 사물의 분석 때문에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 대적자의 존재 때문에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인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정치화가 가능하다. 모든 것은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정치란, 통치성에 대한 저항, 즉 최초의 봉기 혹은 최초의 대립과 함께 탄생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523-531]
1978-1979년.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다른 한 측면에 대해 논의한 다음 올해의 강의를 끝내고자 합니다. 물론 그 다른 측면이란 시민사회라는 이 관념을 통해, 제가 이미 작년에 말씀드리려 했던 통치이성의 재분배 혹은 통치이성의 일종의 재중심화와 탈중심화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다시 한 번 일반적 문제를 다뤄보죠. 16세기 이래로, 게다가 중세에 이미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 것 같습니다. 통치하는 자의 권력 행사를 어떻게 규칙화하고 측정할 수 있을까? 인간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혹은 이따금씩 밖에는 벗어날 수 없는 매우 특이한 실천으로서의 권력 행사, 법학자와 역사학자에게 일련의 물음을 제기하는 특이한 절차이자 개별적 내지 집단적 행위인 권력 행사, 이런 것으로서의 통치자의 권력 행사를 어떻게 규칙화하고 측정해야 좋을까? 매우 일반적이며 포괄적으로 말해보겠습니다. 오랫동안 권력의 무제한적 행사를 규칙화하고 측정함으로써 제한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통치하는 자의 현명함 쪽에서 찾아왔습니다. 현명함, 이것은 고릿적부터의 답이었습니다. 현명하다는 것은 사물의 질서에 따라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신의 법을 인식해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이 명한 것에 따라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과 인간에 관련된 사물의 일반적 질서가 우리에게 명령하는 바에 따라 통치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주권자는 어떤 점에서 현명해야 하는지, 주권자의 현명함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알고자 해서 시도된 것은, 결국 통치를 진리에 기초해 규칙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적 텍스트의 진리, 계시의 진리, 세계질서의 진리. 이것이 권력의 행사를 규제하기 위한 원리, 아니 오히려 규칙화하기 위한 원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작년에 제가 보여드리려 했듯이, 이에 비해 16~17세기 이래로는 권력의 행사가 현명함이 아니라 계산에 따라 규칙화된다고 여겨졌습니다. 힘의 계산, 관계의 계산, 부의 계산, 지배력이라는 요소들의 계산에 따라 권력의 행사가 규칙화된다는 것, 즉 이제 진리가 아니라 합리성에 기초해 통치를 규칙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통치를 합리성에 기초해 규칙화하는 것, 이것이 통치테크놀로지의 근대적 형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합리성에 기초하는 규칙화는, 여기서도 저는 크게 도식화하고 있지만, 순서대로 두 형태를 취했습니다. 우선 권력을 규칙화하기 위한 그런 합리성에서 주권적 개인성으로서의 국가의 합리성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컨대 이때 통치합리성은 국가이성의 시대에 주권자 자신의 합리성,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의 합리성입니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일련의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우선 이 ‘나’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통치합리성을 자신의 지배력을 최대화하려 하는 자신의 주권자적 합리성에 준거시키는 것으로서의 이 ‘나’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계약에 관한 법적문제가 있습니다. 또 다음과 같은 사실상의 문제도 있습니다. 요컨대 시장에서, 혹은 더 일반적으로 경제절차에서 합리성은 통일적 형식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통일적 형식과 굽어보는 시선을 모두 절대적으로 배제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문제시될 경우 ‘나’라고 칭하는 주권자의 합리성은 어떻게 행사될 수 있을까요? 여기서부터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고 통치를 규칙화하기 위한 새로운 합리성의 형태로의 이행이 이뤄집니다. 이제 문제는 통치를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주권자적 개인의 합리성에 기초해 규칙화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받는 자들의 합리성에 기초해 규칙화하는 것입니다. 경제 주체로서 통치되고 있는 자들, 더 일반적으로는 이해관계라는 말이 갖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해관계의 주체로서 통치되고 있는 자들의 합리성에 기초해 통치를 규칙화하는 것, 이해관계라는 말이 갖는 가장 일반적 의미에서 이해관계를 만족시키기 위해 몇몇 수단을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사용하는 자인 그런 개인들의 합리성[에 기초해] 통치를 규칙화하는 것, 즉 피통치자들의 합리성이 곧 통치합리성에서 규칙화의 원리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합리성의 특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통치받고 있는 사람들의 합리적 행동양식에 기초해 통치 내지는 통치술을 규칙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통치술의 합리화 원리를 그 위에 [기초짓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의 문제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제가 자리매김하려던 분기 지점, 중요한 변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개인-국가 내지 주권자-개인의 합리성이 사장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요컨대 모든 국민주의적 정치, 모든 국가주의적 정치는 그 합리성의 원리가 주권적 개인의 합리성과 연동되어 있고, 또 주권적 개인성을 구성하고 있는 한에서의 국가의 합리성과 연동되어 있는 정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그것들은 주권적 개인이나 주권적 국가의 이해관계 및 그 이해관계의 전략과 연동된 정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실에 기초해 규칙화된 통치도 역시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맑스주의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합리성에 기초한 일정 유형의 통치성에 관한 탐구, 하지만 개인적 이해관계의 합리성으로서보다는 오히려 진리로서 조금씩 표명되는 역사의 합리성으로서 스스로를 제시하게 되는 합리성에 기초한 일정 유형의 통치성에 관한 탐구가 아니라면 맑스주의가 달리 무엇이겠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근대 세계, 우리가 19세기 이래로 알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일련의 통치합리성들이 서로 중첩되기도 하고, 서로를 지지하기도 하며, 서로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고, 서로 각축을 벌이기도 해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실에 기초한 통치술, 주권국가의 합리성에 기초한 통치술, 경제 주체의 합리성에 기초한 통치술, 더 일반적으로는 피통치자 자신의 합리성에 기초한 통치술 등. 이처럼 상이한 모든 통치술들, 통치술을 계산하고 합리화하며 규칙화하는 상이한 유형의 모든 방식들이 서로 겹쳐지면서 19세기 이래로 정치적 논의의 대상이 구성되어온 것입니다. 결국 정치란 무엇일까요? 상이한 통치술들의 상이한 연동을 수반하는 작용인 동시에 그런 상이한 통치술들이 불러일으키는 논쟁이 아니라면 정치가 달리 무엇이겠느냐는 말입니다. 정치는 바로 여기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31-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