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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4.

잠언 10




 
 
 
 
0. 고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생각하는 인간, 독립적인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가령 윗 문장을 읽고, 너무 고독해서 힘들어 죽을 지경에 처해 있는 자가 '그래도 사람은 고독해야 해'하는 식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자신을 괴롭힐 수 있다. 우리는 이를 고독도 아니고, 철학은 더더욱 아니고, 그저 '스스로 철학을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경우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누구에게서 듣거나 책에서읽은 말이 자신의 상황과 상관없이 자기에게 어떤 정답, 곧 진리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믿는 사고에서 생겨난다. 스스로 철학한다는 것은 그런 진리도, 그런 진리를 말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 자신의 상황에 맞지 않는 이른바 보편적 진리를 무시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는 일에 다름아니다.


1. 가령 부모가 되거나, 상사가 되거나, 군대에 가거나, 선생이 되거나, 혹은 사랑받는 연인이 되는 경우처럼, 무제한의 권력이 주어진 상황에서 한 인간은 그녀가 어떤 인간인가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2. 철학자는 '왕자병'(王子病)에 걸리지 않는다. 철학자가 병에 걸릴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왕병'(王病)일 수밖에 없다.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책임지는 철학자가 자기 존재의 근거를 타인에게 의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3. "안전과 안락에 대항하여 위험과 모험을 다시 창안해야 한다." -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길, 20쪽)
 
 
4. 어떤 것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것의 가치를 긍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5. 식민지인의 초상 - "이론은 서양분들에게, 우리는 도덕적 실천을!"


6. 폭력의 정의 -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그를 대신하여, 때로는 '그를 위해서' 대신 정해주는 일.


10. '이름'이라는 책이 없다!


11. 철학의 명령 - "어떤 경우에도 너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너의 세상을 살아라!"


12. 당신의 글은 늘 당신이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 의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읽히고 있다.


13. 언어에, 기호에 도달해야 하는데, 나는 아직 진실에, 현실에 머무르고 있다.


14.  '내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관점에서 나를 보는 연습 - 나의 의도가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었다면, 내가 한 일의 결과가 좀 나쁘더라도 나를 너그럽게 바라보는 것(이것이 내가 한 일에 대한 냉정한 평가, 때로는 내가 책임져야 함을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15. 이 놀라운 한 마디! - 어둠이 빛을 낳는 세상, 빛이 어둠의 결여인 세계


16. 의도와 결과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구분할 필요가 있다.


17. 나눔에 인색한 사람은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18. 니체가 바라보는 '양심의 가책'의 기원 - 정당하게 표출해야 할 대상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못한 사람은  분노의 방향을 자신에게 돌린다. 자기 처벌 기제의 '내면화'.
 
 
19.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과는 적어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
 
 
20. '타인의 말을 여하튼 자기 맥락에서 읽어버리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악습이 없다면, 이 세상에 분노와 싸움은 현격히 줄어들 것이다.
 
 
21. 자기 혐오는 '혐오'가 아니라 '자기'에 초점이 맞추어진 담론이다. 결국 그녀의 세계에는 남이 없고 나만 있다. 결국 그녀는 '자기 얘기'만을 한다. 실로, 실로 끔찍한 일이다!
 
 
22. 서양문명의 특성은 개별자들을 가로지르는 메타적인 것 곧 보편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킨켰다는 점이다.
 
 
23. 때로 '성격 좋다'는 사회성이야말로 자기 소외의 완벽한 형식, 자기 파멸에 이르는 길이다.
 
 
24. 인식론적 반성 - "대부분의 인간들이 말하는 진실이란 '자기 느낌의 진실', '자기에게 진실하게 느껴지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경우 보통 인식론적 반성의 결여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자, 이런 말을 듣고 나서 화가 나는가? 혹은 공감이 되는가? 혹은 나아가 안심이 되는가? 그런데, 당신은 위의 문장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위 문장을 어떤 뜻으로 이해했는가? 그런데, 위의 문장은 실제로 당신이 이해한 의미를 가질까? 혹은 위의 문장은 필연적으로 당신이 이해한 바로 그 의미로만 해석되어야 하는 문장이었던 것일까?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대답하는 행위를 인식론적 반성, 혹은 보다 적절하게는, 인식론적 검토라고 부른다.




24. 남들은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심지어 때로는 나 자신도.

 

 2013.06.-2013.08.


 

 

2014. 6. 17.

잠언 09

 



0.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자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누군가가 '민주주의자'인가 아닌가를 알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녀가 타인의 말을 들을 능력이 있는가, 보다 정확히는 그녀가 남의 말을 듣고자 하는 의지와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민주주의자'란 차라리 하나의 무서운 농담이다.



1.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의 인식 버전을 앎의 의지(will to know)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앎의 의지의 철학 버전은 보편에의 의지(will to the universal)이다.



2. 철학자의 참다운 윤리는 자신의 이론을 자신의 '이론'에도 적용시키는가의 여부에 놓여 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중요시하는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가의 여부는 이에 비하면 차라리 부차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3. 야구와 바둑이 '있는 줄' 알다 - 흔히 가령 야구 혹은 바둑이 인생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말은 맞을 수밖에 없다. 야구나 바둑을 삶으로부터 실체적으로 분리하여 바깥에 두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야구와 바둑은 삶의 내부에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야구와 바둑은 삶의 일부이고, 따라서 삶의 모든 속성이 야구와 바둑에서도 발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 "한 학문의 청년기는 그것의 성숙기이다. 이 시기 이전에, 학문은 - 어린아이가 편견으로 살아가듯 - 편견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며, 결국 부모들의 세대를 살아가는 것이므로 낡은 것이다." -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와 라캉>, <<아미엥에서의 주장>>(솔, 1991, 25쪽).



5.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한 것은 정치였다. 정치 일반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정치였다. [...] 일단 마르크스-레닌 주의 정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자, 나는 또한 철학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마침내 마르크스와 레닌, 그람시의 위대한 테제, 즉 철학이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는 테제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같은 책, 45쪽)



6.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마땅히 그래야 되므로'라는 식으로 도덕화하는 경우가 있다.



7. 내가 아는 것과 내 몸이 느끼는 것은 다르다. 가령, 당신이  - 그것이 심지어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 당신이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다고 '믿는다면' 당신의 이러한 믿음에 따라 반응한다. 따라서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 무엇이 사실인가임과 동시에 - 어떤 면에서는 더욱 더 내가, 나의 몸이 무엇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가이다.



8. 친구, 애인, 부모, 직장을 막론하고, 인간관계를 '우격다짐으로' 해서는 곤란하다. 그녀가 실패해도 문제이지만, 기실 더 큰 문제는 그녀가 - 적어도 외견상 - '성공'했을 경우이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이룬 반면, '사람'을 영원히 잃는다. 결국, 부작용이 성과를 능가하는 것이다.



9. 라캉의 manque(lack)는 결핍이 아니라 결여이다. 결핍은 무엇인가 '채워넣어야' 할 부정적인 것이고, 결여는 '존재의 본질적 양태', 곧 존재의 존재 조건이다.



10.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는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 이호영, <<여자의 속사정, 남자의 겉치레>>(23쪽)



11. "<대학 大學>이라는 책은 남자에게 '나라를 다스리고 治國',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라 平天下'고 주문한다. 그런데 <대학>에서 주문하는 정치를 하려면 먼저 왕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평천하'를 직접 실현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모두가 왕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대학>이라는 남자의 규격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태도 '왕 노릇 연기'이다. 한 마디로 <대학>은 왕만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 남자를 왕으로 느끼게끔 해주는 가상적인 '남자 판타지'라는 얘기다. 남자는 근본적으로 판타지에 목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같은 책, 22-23쪽.



12. 존경과 사랑을 동시에 얻기는 참으로 힘들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상극이다. 그러나 지금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진심의 존경을 받고 있다면, 이는 그 인격의 탁월함을 증거하는 것이다.




13. 가령 철학선생님에게 배워야 할 것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철학하는 것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철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철학함이란 하나의 능력이며, 가령 누군가가 하고 싶다고 해서 바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철학을 배우는 이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 적어도 처음에는 선생님이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 철학하는 행위를 직접 보고 이를 모델로 삼아 따라해 봄으로써 - 어떻게 스스로 철학하는가를 배우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칸트가 자신의 수업 시간에 자주 반복했다는 '여러분은 내게 철학을 배울 수 없고 오직 철학하는 방법만을 배울 수 있을 뿐이다'라는 말은 천하의 명언이다).




14. 당신이 가장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15.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몹시 괴롭힌다. 이런 면에서, 내 삶의 목표는 '자기를 괴롭히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16. 시칠리아의 암소, 혹은 키요틴 - 평생 '단장취의'와 '거두절미'로 타인을 심판하던 자가 이번에는 스스로 그러한 심판의 대상이 되다.




17. 하나의 관점 - 철학자를 '섹시한' 철학자와 '그렇지 않은' 철학자로 나누어 본다.




18. '초심자의 마음이 부처이다'라는 말은 때로 참으로 옳다. 아무 것도 모르나,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며, 나아가 참으로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초심자들은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던지는 대부분의 질문은 가히 근본적인, 곧 철학적인 질문들이다.




19. 프랑스철학의 두드러지는 두 가지 특징은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과학철학적 전통, 그리고 소쉬르 이래의 구조주의적 사유이다.




20. "종교란 죽음의 해결을 위해 발명된 것이다." - 김용옥




21. 현상학이 말하는 이른바 '본질직관'이란 '서양본질직관'이다.




22. 철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종종 어떤 철학자 개인에 대한 호감을 철학 행위 자체의 탁월함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철학은 개인에 대한 호감 혹은 악감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철학자가 '유명'해진다면, 이는 곧 그 철학자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따르는 일군의 사람들, 팬들(?)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철학자가 참된 철학자라면,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 자기 자신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호감이 아닌 - 참다운 사유 행위 자체, 철학 행위 자체를 향하도록 이끌고 격려할 것이다.




23.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가령 엄마에 대한 자식의 묘사는 대개의 경우 '엄마'보다는 오히려 그 말을 한 '자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24. 푸코 효과 -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할까?'로부터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로.




25. 올바른 교육의 유일한 형태는 학생들의 말을 경청하고,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교육이다(학생들의 의견이 잘 경청되었고 잘 반영되었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학생들 자신이어야만 하며, 이에는 어떤 예외, 혹은 어떤 형식의 대표자(대리인)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이외의 모든 '교육' 형태란 기득권자의 가치관을 피교육자들에게 주입시키는 폭력 혹은 세뇌에 다름 아니다.








 
 
Danzonete Hebreo




2014.05.-2014.06.





 
 

2014. 5. 22.

잠언 08

 
 
 
 
 
 
 

0. 하나의 언명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놀이임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언명 혹은 이러한 언명들의 집합을 담론(談論, discours)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세상에 언표된 말 중에 담론이 아닌 것은 없다.



1. 메타적 층위의 문제 - 주어진 하나의 진리 놀이들 안에서는 참과 거짓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진리놀이들 사이의 선택에는 결단만이 존재할 뿐 참과 거짓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놀이들 사이에 그것들을 갈지르는 또 다른 메타적 층위의 보편이 존재한다고 보는 순간, 그는 다시 근대(modernity)의 진리관에 빠져든다.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은 이러한 메타적 층위의 보편을 인정하지 않는 다원주의를 의미한다.



2. 구성주의(constructionism)는 재현주의(representationalism)를 파괴하려는 운동이다. 구성주의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 '나의 선택과 관심에 상응해서' 구성되었다는 적극적 개입의 입장, 재현주의는 '있는 그대로' 곧 '나는 아무 것도 안 하고 100% 수동적으로 기술한다'는 순수주의의 입장이다.



3. 사람들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무섭다고 말한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이유가 도덕적으로 게으르거나 노력 혹은 결단력의 부족으로 보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모든 걸 자기 기준으로만 바로본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적절한 제한만 주어진다면, 때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우리 모두가 - 어떤 의미에서는, 혹은 자신이 성공한 영역들에서는 -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4. 무엇이든 너무 집착하면 오히려 안 된다. 가령, 행복하려고 환장해서 발악을 하면  오히려 될 일도 안 된다. 푸코는 블랑쇼에 관한 자신의 글 <바깥의 사유>에서 블랑쇼의 글이 보여주는 '이끌림'(attirance)의 비결을 '게으름 혹은 무심함'(negligence)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생각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조금은 무심하고 조금은 게을러져야, 그럴 수 있는 여유와 거리를 가져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5. 한 어리석은 정치인 때문에 '실용주의'라는 말이 폄하되곤 하고, 때로는 실용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있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실용주의를 지지한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방식이 실용적이지도 못하다는 것, 사실은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1960년대 당시에도 인권을 유린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위해 주창되던 그러한 비민주적인 '조국근대화'의 방식이 이른바 '선진국'을 지향한다는 오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통용될 것 같은가? 같은 이야기이지만, 가령 우리나라 기업이 유럽이나 미국에 진출해서, 그곳의 현지인 직원들에게 과거의 대한민국이나 오늘의 중국과 같은 방식을 강요하고 그것이 어떤 '실용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어리석인 사람이 있을까?



나는 실용적이고 싶다. 관건은, 실용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실용주의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여 그러한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실용주의란 어떤 것이며, 나와 우리의 어떤 행동이 실제로 실용적인 결과를 낳는가에 관심이 있다.



6. 노력이란 실로 때로는 자기합리화의 일종이다. 노력하는 것은부족하기 짝이 없다. 노력을 하는 것에 그치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으로 얻어려는 바가 실제로 얻어져야 한다. 사랑을 해도 상대를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나의 사랑이 전달되어야 하고, 효도를 해도 나 혼자 힘들어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들이 실제로 기쁨을 느껴야 하고, 직장에 취직을 하려해도 노력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합격을 해야 한다.



7. 애니어그램들을 왜 그렇게 열심히들 하는가? - 자기 얘기니까! 연애가 재미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둘이서 자기 얘기, 자기 사랑, 결국 자기가 관심있는 얘기만 하기때문이다. 사주든 궁합이든 타로든, 점을 열심히 보는 이유도 자기 얘기라서. 이런 관심은 적절하면 애교로 보아줄 수도 있지만, 지나치면 좀 끔찍한 부분이 있다.



8.  점과 관련하여 꼭 나오는 얘기가 점이 통계학이라는 것이다. 그시대에 통계가 있지도 않았고 이 때의 통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인간 유형을 유형별로 나눌 수 있다고 보는 것도 한계가 확실하고, 질문과 점괘의 내용 자체도 중의적이라 읽는 사람이 해석하기 나름이다(물론 이 점이 점의 묘미이고, 가치이다).



9. "미국의 스티븐스 판사는 논쟁적인 도덕적 주제가 걸려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임신중절의 여부는] 입법부가 아니라 여성 개인이 스스로 겨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법원이 주장하는 것은 - '법원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가치관을 개인에게 강요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어떤 개인도 단순히 그가 '선호하는 가치'가 다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자유를 포기하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스티븐스가 생각한 근본적인 질문은 - 생명에 관한 어떤 견해가 옳으냐가 아니라 - "임신중절의 결정을 개인이 내려야 하느냐 아니면 다수가 내려야 하느냐"이다." - 마이클 샌델, <<왜 도덕인가?>>(한국경제신문, 109쪽)



10. 남을 "걱정해주면서" "상대를 위해서" 상대의 삶에 간섭하며,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관전평을 때로는 도덕적 훈계를 일삼는 행동이 실로 달콤한 간섭(intervention), 곧 권력행위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드물다.


11. "내 몸의 느낌을 내가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야!"



12. 푸코의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해석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황당한' 언명이다(그런데 푸코는 물론 이런 점을 당연히 알고 있다).



13. 지식인과 인민은 둘이 아니다(不二).



14. 일본에는 사소설(私小說)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 사소설이란 없다. 그것은 철저한 '보편소설'의 한국적 양상이다.



15. 미시사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기원 5세기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아테네에 사는 한 평범한 성인남성의 사랑이 갖는 다양한 측면들을 문화인류학적으로 재구성해보라.




16. 모든 정치적인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는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며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이다. 실로 이보다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란 없다!



17. 요즘 기자들과 쓰레기를 결합하여 '기레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물론 기자들 개개인에게 그러한 사태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이러한 사태의 궁극적 원인은 19세기적 과학관, 진리관의 무비판적 반영, 곧 중립보도, 사실보도, 공정보도라는 관념 안에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문제는 이러저런한 편집권의 문제가 아니라, 편집권 자체이다. 편집권은 편집권력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한국말'이라는 말처럼 기자들이 이런저런 말을 편집하는 그 행위 자체가 중립이 불가능한 선택의 행위이다. 취재 대상과 아닌 대상을 나누는 일, 중요한 기사와 그렇지 않은 기사를 나누는 일 자체가 이미 도저히 중립적일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의 행위이다.



모든 기자들은 사실 어린 시절 이러한 편집권력의 무시무시한 힘을 깨닫고 적어도 두 번은 전율에 떨게 된다. 한 번은 이 힘의 강력함에, 두 번째는 아무도 이 부당한 '중립적이지 않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는 사실에.



18. 인생에서 종종 찾아오는 연극무대는 그녀의 오늘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결혼식장과 상가집, 혹은 강의실, 혹은 팀발표 등에서 그녀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녀의 행동을 보라.



19. 사람들은 보통 너무나 자기중심적이어서 (가령 자신이 개인적으로 아는) 어떤 이의 글을 읽을 때 이것이 자신에 대해 말한 글이 아닌가 생각하고 또 의심하곤 한다.



20. 푸코는 지식인, 부르디외는 상식인이다.



21. 루소와 알튀세르가 이른바 정말 '미친 사람'임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들이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어떤 단 한 가지 사건 혹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으로 말한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다른 사람들의 오해와 시기와 모함에 의해, 후자는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그'라고 붙였다는 그 사실에 의해.




22.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문제가 자신의 '정상성'임을 알지 못한다.



23. 안티기독교인은, 물론, 기독교신자다. 그녀의 사고는 여전히 모든 것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4. 스스로 오랜 기간 동안 기자였던 카뮈가 <이방인>에서 그리고 있는 법정과 언론의 모습은 실로 탁월하다. 그들 모두는 재판이나 보도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행하고 있다. '용의자' 혹은 '피의자'인 뫼르소가 하는 모든 행동이 자신들이 뫼르소를 바라보는 관점에 입각해 재단되고 판정된다. 가령 평상시 이웃들의 증언이 그를 순수한 사람으로 보았다면 '저렇게 치밀한 두 얼굴의 완벽한 이중인격자', 조금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역시 이 사람은 원래 저런 인간, 파렴치한 범죄자'라는 식이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근대의 사법제도는 '범죄행위'에 대한 재판 이외의 어떤 것, 그 이상의 어떤 다른 것, 곧 한 인간의 '품행'을 심판한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탁월한 통찰이다. 가령 오늘 푸코가 살아 있어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고, 어느 기자가 푸코의 수첩에서 <<감시와 처벌>>의 논지와 비슷한 글을 발견한다면, 그녀는 아마 '이렇게 치밀하고 간교하게도 푸코는 이런 경우에 대비해 자신에게 유리한 이런 책을 미리 써놓았던 것이다!'라며 비분강개하는 어조로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경우의 참다운 문제는 무엇인가? 자신이 원래 믿고 있는 해석에 준하는 증거는 자신의 생각이 '옳은' 증거로, 반하는 증거는 범죄자 혹은 용의자의 '교활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하는 것다. 결국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틀릴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해석권력'이라 부르기에 가히 부족함이 없는 행동이다.




25.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런 해석권력을 행사하는 기자이다. 그렇지 않은가?









 
 
 
 
 
 
 

2014. 5. 5.

잠언 07





Patterns in a Chromatic Field/Untitled Composition For Cello And Piano
for cello and piano (1981)






1. 당신은 무엇을 '모르기로' 결정했는가?



2. 주체화 - 우리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알렉산더의 물음에 '햇빛을 가리니 비켜달라'고 요구한 디오게네스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디오게네스는 우리가 아는 유일한 디오게네스이다. 디오게네스가 '가난한 이들의 세금을 면제해 달라거나, 학교를 세워달라'고 했다면 이 또한 커다란 칭송을 받았겠지만, 이 경우 우리는 오늘 우리가 아는 그 디오게네스를 모를 것이다. 이처럼 '나'란 바로 지금 내가 하는 행동과 말의 축적에 의해 이 자리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3.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 안셀무스와 홉스 데카르트의 이른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절대적 진리'는 우연히도 그들이 읽은 <성서>와 꼭 일치한다. 나의 생각은 우연히도 대한민국의 헌법, 상식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연일까? 이는 '내가 그 안에서 태어나 내가 그것을 '당연한 것', '진리'로 밖에는 인식할 수 없게 나를 조건화시킨 것'과 나의 인식이 사실은 '쌍둥이'임을 말해준다.


이처럼, 한 인간이 말하는 '인간 본연의, 불변의 진리'란 바로 이렇게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와 동시적 상관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쌍둥이에 다름 아닌 이 인식은 그녀에게 '당연하고도 영원한 불변의 진리'로서 인식된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은 '이미 자신이 세계에 집어넣은 것'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4. 가장 강력한 컴플렉스 중의 하나는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면 혹은 그런 인간이 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에서 기인하는 컴플렉스, 곧 '폐인 컴플렉스'이다.



5. 망쳐버리면 더 이상 망쳐버릴까봐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6. 당신이 그렇게 불안해 하는 이유는 당신의 어머니(아버지)가 늘 그렇게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7. 패닉이 선생이다 - 패닉이 오는 것을 차라리 기뻐해야 한다. "기분이 더러워질 때" 학습된 감정의 자동적 메커니즘에 대책없이 빠지지 말고 내 마음과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도망가지 말고 - 가령 친구를 부르거나 하지 말고, 차라리 혼자 길을 하염없이 걸으며 - 냉정하고도 냉철한 눈으로 자기 마음 속에 몸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해 보아야 한다.



8.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 어떤 면에서는, 인생 자체가 이런 일의 연속이 아닐까? 바로 여기에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업보의 굴레를 끊고 해탈한다'는 말의 의미가 있다. 인생이란 내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의 죄과를 갚으며 사는 것이다. 내 성격의 결함은 내 부모 성격의 결함이 빚은 것이다, 내 부모 성격의 결함은 그 부모 성격의 결함이 ... 이런 식으로 무한 소급된다. 해탈이란, 내가 받은 업보와 악연을 나의 대(代)에서 끊겠다는 서원이자, 그러한 능력이다.



9. 가령 푸코의 철학을 공부하고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각자가 판단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요? 각자의 판단 밖에 없다면 상대주의에 빠지는 게 아닐까요?" 내게는 그들이 이렇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제가 지금 하는 것처럼, 각자 스스로 판단해서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요? 뭔가 누가 제 밖에서 타율적으로 정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이런 질문과도 같다. "시가 너무 많고 다양하면 안 되는 것 아닐까요? 시의 본질은 이런 건데, 이런 시의 정의와는 다른 저런 시를 쓰면  안 되는 게 아닐까요?"



궁극적으로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의 근본적 문제는 그녀가 '논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들이 '각자 스스로 판단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이 '그 각자'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그녀가 '스스로 철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철학하는 것을 그저 밖에서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는 철학함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 곧 이 경우 논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10. '고맙다'고 말해야 할 경우에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가가 상대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어 상대를 위해 유쾌한 작은 선행을 행한 경우가 있다. 그런데, 호의를 받은 사람이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사람들은 '상대'의 호의보다 '내'가 상대의 호의를 받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사람들, 상대의 선행보다 나의 미안함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다. 달리 말해, 이들은 결국 '자기 생각'밖에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11. 인간에 대한 예의, 상대에 대한 존중, 인격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 중 하나는 그녀가 '함부로 묻는 인간'인가 아닌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12. 나라면 니체의 사유를 이렇게 정리해보겠다. "네가 스스로 생각해라! 그리하여, 천박함에서 벗어나라!"



13. 가령, 공부를 못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공부를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게을러서 혹은 결단력이 부족해서 공부를 못하는 줄 안다. 뚱뚱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뚱뚱한 모든 사람들이 게을러서 자기 관리를 못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인 줄 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한도의 바깥을 상상하기 어렵다.



14. 서양의 책을 읽다가 그리스도교에 입각한 이야기가 나오면 '짜증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타자화해서 내 바깥에 놓고 '어리석은 이들'이라는 식으로 치부하는 자세로는 배우지 못한다(물론 사람은 배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며, 바로 그런 한도 내에서 안 배워도 된다). 나는 공부와 독서의 그리고 경청의 전략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바로 내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리스도교는 당시의 그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동시대의 당연을 구성하는 틀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보편을 사유하는 당대의 틀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라는 틀을 통해 자신들의 보편, 당연, 자연을 사유했던 것이다. 나 역시 인간인 한 그러한 틀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한에 있어, 내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이다.



15. 바울에 반대하여 - 유럽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데 1500년이 걸렸다. 적어도 데카르트부터 세어봐도, 유럽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는데 거의 400년이 걸렸다. 예수와 그의 사망이 아무리 위대하고 중요하고 큰 일이라 해도 그것으로 인간 삶의 '모든 것'을 뒤덮으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죽은 자들, 특히 억울하게 젊어서 죄없이 죽은 자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예수가 된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화 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 예수의 죽음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의 죽음이 그렇듯 그저 하나의 죽음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의 삶을 그리스도라는 이름 아래 절대화하는 것은 다른 모든 인간의 삶을, 보다 정확히는 삶에 대한 다른 모든 방식의 해석을 '그른 것', '어리석은 것', '헛된 것', 더 나아가 '악한 것'으로 설정하는  일에 대름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간에 대한 이해의 유일한 지평으로 설정하는 권력과 지배의 보편화 양상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한계가 없는 보편, 자신의 바깥을 인정하지 않는 인식이란, 그대로 폭력이다.



16. '센스가 없다'는 것은 죄가 아니나, 때로는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고통을 준다.



17. 자기 인식의 바깥, 한도, 제한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은 - 자신의 의도와도 무관하게 - 무서운 인간, 함부로 말하는 자, 천박하고도 끔찍한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이 된다. 이처럼 도덕적으로 악한 인간이란 실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능력이 없는 자, 곧 인식하지 못하는 자이다.



18. 권력이란 무엇인가? - 하나의 상황 혹은 사태에 대하여 두 가지 이상의 해석과 해결방안이 존재할 때, 여하한 정당화의 논리를 동원하여 자신의 관점, 가치관에 입각한 가치 판단과 결정, 선택의 옳음을 강변하고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현실적 (수행) 능력.



19. 모든 (자기) 검열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일 수는 없다. 모든 (자기) 검열이 아니라, 비합리적 (자기) 검열을 제거해야 한다.



20. 부르디외의 말대로,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본질주의자들이다. 독일인은, 한국인은, 일본인은, 중국인은, 미국인은, 혹은, 너는, 나는, 당신은, 그는, 그녀는 ... 그들은 늘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본질주의자들은 이른바 한 '개인' 혹은 '집단'이 - 원래부터, 그냥 그렇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내외부적 상황이 낳은 복합적 구성물(social construct)임을 알지 못한다.



21. 최근 몇 권의 책을 읽으며 - 2014년 대한민국의 문학비평이 아직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내가 김현의 문학비평을 읽던 1980년대 후반에 비해 전반적으로 오히려 퇴보했다는 것은, 사실, 충격적인 일이다.



22. "우리는 성장해서도 항상 슬픔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른 부모를 만나더라면 충분히 칭찬받고도 남을 일을 했는데도 자신의 부모는 매정하게 그것을 폄하하곤 했다면 말이다." - 강신주, <감정수업>(36쪽)



23. 데리다의 두 가지 근본적 문제 - 오늘 마르크스주의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는 사유(<마르크스의 유령들>), 결국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유(<다른 곶>).



24. 막스 베버가 말하는 중립적 혹은 긍적적 측면의 합리화 과정와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정적 의미로서의 합리화 과정은 니체에 의해 이미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이해되어 있다. 단, 이때 우리는 층위(논리계형)를 구분해볼 수 있다. 정리하면, 주어진 보편성 곧 합리성(게임)의 한도 내에서는, 옳고 그름이 분명히 구분된다. 그러나 이 합리성(보편성)과 저 합리성(보편성)이 충돌하는 경우 이를 해결해줄 보다 상위의 보편적 합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합리성이 합리성 자체이며, 자신의 보편성이 보편성 자체라고 진심으로 믿고 또 그렇게 말하는 이의 경우, 이는 무지의 양상을 띠는(반드시 권력욕 혹은 악의 때문에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으므로) 권력 행위가 된다.



25. 21세기 문화의 영웅, 존 존(john zorn)과 그의 의로운 사람들(義人, tzadik)








 
 
 



2014.02.-2014.05.






2014. 2. 10.

잠언 06

 
 
 
 
 
 
 
 
 
 
0.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 백지 상태의 누군가가 자신이 전혀 모르는 어떤 것을 새롭게 배우는 일이라기보다는 - 그녀가 철학에 대해 이미 갖고 있는 '황당한' 편견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가깝다. 모든 '가르치는 사람'은 이 점을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1. 사르트르가 1945년의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한 말은옳다. 이른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이 정말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책임으로부터 완벽히 면제받을 것이다. 그녀는 원래 위대하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고, 그는 원래 악인이고 나는 원래 용기가 없고, 하는 식으로. 운명이란 당신의 '알리바이'이다.


그러나 당신이 어제 들은 하느님의 목소리가 환청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느님인가, 당신인가? 우리들의 사랑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운명인가, 당신들인가? 한 노래 가사가 잘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바람'이 아니었던가? 니체의 말대로, 나의 소망이 나의 인식이 된다.


2. 때로는 어떤 것이 내게 정말 옳은것으로, 가히 '운명'처럼 정말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 그것은 운명인가? 물론 아니다. 이는 다만 당신이 사회문화적으로 그렇게 느끼도록 조건화된 경우에 불과하다. 나의 느낌과 생각이 내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져서 - 감히 그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믿기 어렵고 - 다만 내가 그렇게 진실로 '느낀다'고 믿도록 조건화된 경우.


더하여, 때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옳다는 혹은 당연하다는 느낌이 너무도 강렬하여 도저히 스스로 자신의 느낌을 의심할 수 없는 경우마저 존재한다(물론 자기 기만이나 합리화의 경우는 제외해야 한다). 진심으로 그것이 옳다는 혹은 그것이 운명이라는 느낌이 너무도 강렬하여 나 스스로가 이러한 생각을 부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내게 이토록 '옳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생각, 이 느낌은 옳은가?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것이 옳다는 나의 강력한 감정은 그것이 실제로 옳은가와는 전혀 무관하며, 다만 내가 그것을 얼마나 옳다고 강력히 믿고 있는가만을 알려준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그것이 옳다고 혹은 그르다고 느끼는 감정의 강렬함, 혹은 그렇게 생각에 대한 믿음의 강렬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또 하나의 문제이다.


결국 문제는  '운명'의 정의(definition)이다. 사람들이 보통 '운명'이라 말하는 것들은 그들의 생각처럼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실상은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운명의 정의에 따라서는, 때로 정말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든 혹은 다른 무엇이라 부르든, 우리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계가 조건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3. 푸코에 따르면, 합리성(rationality)은 시공을 초월한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특정 문제상황을 해결하려는 합리화(rationalization) 과정의 결과로서 얻어진 생산물(product)이다. 인간의 모든 사유가 합리화의 결과이다. 이것이 니체의, 사실은, 베버의 중요성이다.


4. 어떤 문제가 존재할 때, 유용한 해결책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와 세계를 냉정하게('냉혹하게'가 아니다), 곧 '정확하게' 본다. 인간은 자기 기만을 행하는 존재이니, 무엇보다 먼저 (남보다는) 자기 자신의 자동적 '자기 기만 메커니즘'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여기서 누군가가 '인식만 하면 뭐해요'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이는 그녀가 한 번도 냉정한 자기 인식을 스스로 수행해본 적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5. 이른바 프랑스현대철학자들은 '계몽'이 덜 된 존재들이다(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담론은 자신들만의 초엘리트 지식인 사회 안에서 생산, 유통, 폐기된다. 그들은 지식인과 인민의 관계, 학문과 일상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 관습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들에게는 계몽이, 성찰적 반성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다.


6. 악의(惡意)가 없는 자란 죽은 사람이며, 자신의 악의를 모르고 있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7. 사람들은 보통 내가 그녀에게 이런 인상을 받았으므로, 그녀의 의도가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만 확실히 구분할 수 있어도 인생의 불필요한 많은 분쟁을 피할 수 있다.


8. "철학은 전도를 하지 않는다" - 이는 설령 내 말이 옳다 해도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우선, 당신이 내 말을 듣기 싫어한다면, 혹은 듣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당신은 여하튼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당신이 내 말을 들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원래 없다. 더하여, 내 말이 '옳다'는 말은 보통 내가 설정한 전제의 한도 내에서 '옳은'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옳다'(진리)는 말의 의미는 천차만별, 무한대로 확장 가능하다. 옳다, 그르다는 '관점'의 문제일 수가 있다. 더구나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실제로는 전혀 옳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나의 말이 옳은 경우라 할지라도,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고통을 겪게 될 사람은 당신이다. 결국, 어떤 경우이든, 당신 자신의 인생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도 융도 늘 같은 말을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알아서 하세요!"


9. 아이러니 - 인간은 자신이 자기 합리화를 행하고 있지 않은지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부분, 곧 그녀가 스스로 의식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기 합리화를 거의 행하지 않는다. 그녀의 의식이 글자 그대로 깨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합리화를 행하는 부분은 그녀가 전혀 생각짇 못하는 부분, - 곧 의식적으로 늘 자기를 감시하고 처벌하느라 너무도 지친 나머지 -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다. 이 곳은 - 그녀의 의식적 고려와 검토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 무성의와 무신경, 자기 합리화로 점철되어 있는 영역이다.


10. 대한민국의 학생들, 아니 모든 배우는 이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너무 예의바르고 너무 얌전하며 너무 순하고 너무 (수동적으로만) 길이 잘 들어 있다. 이는 물론 구조적 문제인데, 궁극적으로 전통적 지배 이데올로기인 불교와 유교에 더하여, 근래에 수입된 기독교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적 감시와 처벌 메커니즘의 거의 완벽한 내면화가 가져온 결과이다. 이러한 태도는 한 마디로 '남들과 다른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것,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식의 눈치보기, 분위기 파악, (자기) 기만, 비겁, 자기 처벌의 메커니즘이 완벽한 자동화의 수준으로까지 내재화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케이팝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품행담론은 아직 '자기 의식'을 갖지 못한 것이다.


11. 대한민국 대학의 학문적 풍토를 비판하는 태도는 거의 대부분 (일제 시대 이래 더욱 강화된) 한(韓)민족의 자기 비하, 자기 멸시의 일종, 곧 사회적 버전이다. 한국에서 누군가가 우리나라 대학을 비판하면 이를 듣는 사람(물론 한국인)은 즐거운 웃음, 냉소를 터뜨린다. 사회학적, 문화인류학적으로 연구해볼 만한 현상.


12. 보편성 관념의 부재 - 오늘날 보편성은 비판받아야 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하지만, 때로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절감하기도 한다. 가령,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우선, 여러 사람이 있는데 자신과 친근한 관계에 있는 어떤 사람과만 (즐거운) 대화를 지속하는 경우. 이는 때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실상은 이러한 행위가 - 본의건 아니건 - 그 이외의 주변 사람을 소외시키는 행위가 된다(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당사자가 알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아예 의식을 못하건 모르는 경우는 보편성의 '전적인' 부재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공적인 자리나 상항에서도 자신과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농담(이야기)을 하는 경우. 실제로 주의 깊게 이런 경우를 심사숙고해 보면, 이를 정작 당사자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편성의 개념이 필요한 시간!


13. 자기 비하, 자기 경멸은 또 다른 자기중심주의이다. 문제가 여전히 그리고 늘 '자기'이다.


14.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것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성숙한 자가 된다.


15. 철학이란 방법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야 한다", ""~되어야 한다"라는 식으로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이나 바람, 당위 자체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도덕주의적 함정에 빠진다.


도덕주의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지에 대한 현실적 구체적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타인혐오, 자기혐오, 인간혐오에 빠진다. 어리석은 선택.


잘 되어야 한다고?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해야만 한다고? 안 돼서 못하는데, 노력하라고? 웃기는 이야기들이다! 가령 자신감이 부족한 인간에게 자신을 가지라고, 너 자신을 믿으라고 하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무의미한 말, 더 나아가 해로운 말이다(물론 때로는 이런 말이 좋은 효과를 낳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가져라'라는 말은 잘못된 대전제, 곧 그저 모든 것을 '의지'의 문제로 보라는 무식한 대전제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인간이 자신감이 없다면, 그것은 그가 의지가 약하고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합리적인 존재이며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감을 가질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것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아 실제로 자신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억지로 믿는다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자신감이 없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합리적이 존재이며 자신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현실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강함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적'이다. 인간은 스스로 설득이 되지 않으면 결코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16. '좋은' 방법론을 고르는 여러 기준들 중 하나는 그런 말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 곧 그런 담론이 어떤 인간을 낳는가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다. 가령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혹은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잘 살고 있나라는 담론은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낳는가, 어떤 인간을 결과적으로 탄생시키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담론은 성실한 인간을 낳는가? 효도해야지라는 담론은 효도하는 인간을 낳는가? 학생은 공부해야 한다는 담론은 공부하는 학생을 만드는가?


17.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잡는다" - 가령 어머니에게 고통받은 인간(어머니의 의도가 선한 것이었는가 아니었는가의 문제는 이 경우 중요하지 않다)은 때로 상당한 세월이 흘러 현실의 어머니가 이러저런 이유로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한 경우에도 여전히 어머니로부터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그녀는 가령 어머니가 죽어도 여전히 어머니로부터 고통받을 것이다. 이 경우 어머니는 머릿속 외부의 현실저 존재가 아니라, 머릿속의 현실적인 존재, 오늘 그녀의 정신적 구조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는 존재로서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녀는 그렇게 구조화, 조건화되어 있다.


관건은 이러한 지옥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실제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어떻게'의 문제, 방법론의 문제다.


18. 모든 인간관계는 적당한 거리, 적당한 불편함, 적당한 두려움이 존재해야 썩지 않는다, 오래 간다.


19. "일은 일" - 함께 일을 할 때, '상대가 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은 일이므로, 담백하고 간명하게 예의를 갖추어 본심을 정확히 전달하면 된다.


20.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 사정이 있다. 따라서 자기 사정이 없는 사람은 없으므로, 자기 사정만을 특별히 양해해 달라고 말하는 자는 사회에서 아웃된다. 그는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이다


21. 냉정한 인식과 냉혹한 인간성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22. "너도 물론 위에서 시켜서 한 거라는 거 다 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쓰레기 같은 인간 말종이 될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 월터 미티


23. 한 분야(보통은 자기 분야)에서의 무능력을 그 인간 자체에 대한 경멸의 이유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24. '초심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은, 그 이 말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와 달리, 이러한 말을 생각하는 경우 그렇지 않았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효과가 발생되는 하나의 유용한 조작 개념(operational notion)이다.


25. "신이란 그것에 따라 우리가 자신의 고통을 측정하는 개념이다." - 존 레논, <신>(god)


26. 해석권력(power on interpretation) - 실상은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 가능한 어떤 현상에 대해 자신의 해석이 사실 혹은 현실 자체라고 말하고 그것을 관철, 강요하는 능력.이는 당사자가  자신이 현상에 대한 해석 권력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경우와 모르고 있는 경우로 크게 대별된다. 전자와는 궁극적으로 대화와 투쟁이, 후자와는 교육과 설명이 가능할 따름이다.


27. "언어가 살해한다." - 헤겔


28.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이 실상은 정말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존재하는 바깥'이라는 점, 그리하여 이른바 '바깥'이 실상은 안쪽을 유지하는 하나의 장치임을 깨달은 푸코는 구조주의적 중립성의 개념 전체를 포기하고 니체주의적 힘 관계의 논리를 전적으로 수용한다. 그리하여, "권력에는 바깥이 존재하지 않는다."


29. 블랑쇼의 '익명의 그녀'(une anonyme)가 바타유의 '공공의 여성' 곧 '창녀'(la femme publique)이다.


30. '저주의 몫'(la part mudite) - 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그중에서도 자기 삶, 생존 자체의 정당성을 빼앗긴 자들, 박탈당한 자들, '파렴치한 자들'(les infameux)이, 그들에 대해, 그들을 위해 쓰는 것이야말로 '문학'이다(푸코의 문학관).


31. 논증의 '필연성' - 모든 '고전적'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갖는 '필연성'을 논증하고자 한다. 그러나 가령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아니라 아리우스파가 승리했다면,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정되고 따라서 삼위일체론이 부정되었다면, 보다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역사적 사건에 의해 그리스도교 <성경>의 정경과 외경이 지금과 달라졌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물론 그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그 '필연성'을 논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도 - 바로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 하나님이 역사(役事)하신 결과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 믿지 않는 자들에겐 반증불가능한 맹목적 믿음으로 보이는 영역이다. 그들 논증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는다.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필연적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32.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라는 니체의 말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니체의 말은 사람을 죽여놓고서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사실은 없고 어차피 해석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살인자의 말을 편들어주지 않는다.


니체의 사실이 없다는 말은 이른바 사람들이 말하는 사실이 무수히 선택 가능한 사실들 중에 관심을 받아 선택된 사실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이 아니라 보는 자의 관심에 의해 조명된 사실, 또 그렇게 선택된 사실이다.


정말 객관적 사실이란 것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관심과 무관하게 중립적으로 드러난다면, 세상에 신문은 단 하나만 존재하거나 혹은 모든 신문이 다 완벽히 똑 같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앉아 있는 방 혹은 버스의 크기나 평수, 당신의 나이는 다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엄밀한 '중립적 사실보도'를 해야 할  언론은 내일 아침 신문에 그러한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사실이란 특정한 관심에 따라 선택된 사실이며, 이는 사실상 무한 개수의 사실에서 유한한 개수의 사실을, 그것도 지극히 협소한 유한 개수의 사실만을 추출해낸 것이다. 그러니 사실이란 늘 선택된 사실이며, 인간은 이러한 선택의 기준 곧 '관심'(interest) 혹은 '관점'(perspective) 없이 사실을 볼 능력이 없다. 바로 이런 면에서 관심과 관점이란 한계가 아니라 인간 인식의 '조건'(condition)이며, 모든 인간은 자신의 관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사실이 없다라는 말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사실이란 없으므로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라는 말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무수한 사실들 중에 당신이 왜 다른 모든 사실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하필이면 이 사실을 인식했고 또 말하는가에 관련된 언명이다. 한 마디로, 사실과 관점의 문제는 주어진 관점 내에서의 사실 여부보다는, 무수한 사실들 중 이런 혹은 저런 사실에 대해 말하는 당신의 선택과 관점의 층위에 속하는 말이다.


33.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 토머스 홉스, <시민론>(1642년, '디본셔 백작에게 드리는 헌사')


34. 자신의 몸이 싫어하는 걸 싫어하지 않으려고, 심지어 좋아하려고 하는 사람들, 더하여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35. 강박관념의 특징은 그것이 매우 논리적인 관념의 질서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러 면에서, 강박관념의 해결은 비논리적인 방식으로는 어렵고, 오히려 더 논리적인 방식으로 그 논리를 밀고 나아가 그 논리의 '부분적' 특성, 비현실성, 비논리성을 밝히는 방식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도 역시 모든 인간은 '합리적'이다. 이 말을 듣고 어떻게 강박증환자의 논리와 '우리'의 논리가 같은 합리성일 수 있는가를 묻는 사람은 적어도 다음의세 가지 사항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첫째, 합리성에 대한 나의 정의와 타인(이 경우 위의 정의)의 정의가 다를 때, 누구의 정의를 정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둘째, 강박증 환자와 나는 다만 정도의 차이에서만 다른 두 사람인가, 아니면 질적으로 다른 실체적으로 구분되는 두 사람인가? 셋째, 합리성의 정의는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36. 모든 인간은 자기 기만을 한다. 자기 기만은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 조건이다. 다만 자신의 자기 기만을 명확히 인식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있을 뿐이다. 전자는 앞으로 나아가겠지만, 후자는, 그가 여전히 그러한 상태에 머무르는 한, 당연히,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다.


37. 성격이 나쁜 인간이란 - 원래 그녀가 선천적으로 악(惡)해서라기보다는 - 어린 시절의 고통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성격의 인간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격 안 좋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해서 '같이 지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38. 도덕과 무관한 이유로도, 그리고 때로는 비도덕적인 이유로도, 얼마든지 '도덕적' 행동, 보다 정확히는 '도덕적으로 보이는' 행동, 혹은 때로는 '도덕적 결과를 낳는' 행동을 할 수 있다.


39. 논리적 오류 - 보통 우리는 '모든 인간은 외롭다'라는 말을 들으면, 모든 인간이 외로움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로부터 치유되고 싶어하고 따라서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고들 생각한다.


40. 오르한 파묵은 좋은 소설가이다. 그러나 파묵의 가장 큰 장점은 소설가로서의 그가 가진 재능, 곧 '놀라운 입담'이 아니라, 그가 '오늘을 사는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 곧 '서양과 비서양의 대면'이라는 고통스러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사실 안에 놓여 있다.


41. 당신이 사랑하는 죽은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당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 사람은 죽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다.


42. "존 레논은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생각'이란 것을 하게 만들어준 사람들 중 하나이다" - 다니엘 클로드


43. 리트머스 시험지 - "이 세상의 모든 사상가, 소설가, 시인들은 자신들의 책이 아니라면 정신병자들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이 말이 당신에게 '안심'을 주었는가?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44. 데카르트와 니체 - 이른바 한 사회의 '상식'이란 한 번도 검증된 적이 없는 관습의 집합이다. 참으로 스스로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은 데카르트를 따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다시 스스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의 재검토 과정에서 데카르트가 검토한 것은 인식의 측면만이었다. 그의 '방법적 회의'는 관습적 삶의 도덕적 기초를 인정하고, 또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시작된다. 이러한 관습적 도덕 자체에 대한 재검토는 니체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45. 법과 주먹, 혹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 "사회는 멀고, 가정은 가깝다."


46. 철학의 유일한 문제는 '자연'과 '당연'의 문제, 곧 기준의 문제이다.


47. 인정 투쟁은 '정의(defintion) 투쟁'이다. 기존의 '진리'와 '정의' 자체가 타도의 대상이다. 다시금 세워져야 하는 것은 진리와 정의의 새로운 정의에 다름 아니다.


48. "요컨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자연법 그 자체는 어떤 힘에 대한 공포 없이는 지켜지지 않는다." -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1>(227쪽)


49. 11세기 안셀무스의 이른바 '존재론적 증명'을 밀고 나가면, 17세기의 이신론자들(deists), 그리고 이후의 과학자들(scientists), 그리하여 무신론자들(atheists)이 나온다. 이는 정의상 '신앙의 내부에만 설정된 이성'으로부터 '신앙 바깥에 존재하는 이성'으로의 이행이다. 이성과 자연, 신과 인간의 정의가 모두 바뀐다.


50. 이른바 '무신론자들'은 여전히 유신론자들이다. 그리스도교를 '저주하는' 이들이 여전히 또 다른, 뒤집힌, 그리스도교도들인 것처럼. 그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 한다.




 




1984.12.-2014.02.

2014. 1. 24.

잠언 05


 
Satyricon, 1998
 




0. 가장 비극적인 삶이란 '나만의 질문'을 아직 발명하지 못한 자의 삶이다.


1. 철학이란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게 당연하게 인식되는) '틀'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적 검토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 학문이란, 공부란 내가 배우는 이 공부와 나의 일상 생활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다. 달리 말해, 공부란 '내가 배우는 공부의 내용, 공부를 하며 내게 드는 생각, 그리고 지금 내 상황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이란 교육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다.


3.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철학에 있어 유일한 타당한 시제는 오직 '현재'이며, 그 주어가 어떤 경우에도 '나'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4. 학문이란, 가령 칸트의 책이란, 설령 독일인이 독일어로 그 책을 읽는 경우에조차, 하나의 외국어이다. 학문이란 하나의 엄밀한 약속 체계, 규칙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을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외국어 학습과 똑같이, 적어도 그 최초의 단계에 있어서는 상당한 양의 학습과 암기가 요구된다. 오랜 시간 그 언어의 단어, 문법, 용례를 지루하지만 꾸준히 외우고 습득한 후에야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고,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거나 기대하는 바와 달리, 적어도 그 최초의 시기에는 꾸준한 암기와 이해, 습득이 요구될 뿐,  토론할 바가 전혀 없다.


교육은 기계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가령 내가 라틴어를, 물리학을 배우고자 한다면, 상당한 시간을 성실히 라틴어와 물리학의 단어와 개념, 문법과 규칙, 용례와 공리 들을 외우고 습득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두 공부는 공히 토론할 일이 전혀 없다. 다만 라틴어와 물리학의 학습은 그 단계가 깊어지면서 점차로 그 성격이 달라갈라지는데, 전자는 여전히 이해할 일이 거의 없고 다만 그 용례들을 찬찬히 매 경우마다 살펴야 하는 반면, 후자는 자신이 습득한 개념들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된다. 철학은 물론 후자에 더 가깝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잘 보여준 것처럼, 전자의 특성도 가지고 있다.


물론 이상의 대비는 방편적인 것일 뿐 실제로 두 가지는 겹친다(물론 교육의 지향점은 민주주의적 인간의 확보이다). 이상의 요지를 종합하면 교육이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작동되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일이다.


5. 푸코의 최종적 관심 중 하나는 '아예 처음부터 자격이 박탈된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에 자격을 부여하는 '정당화legitimation'의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삶의 혹은 논의의 어느 과정, 어떤 시점으로부터 자격을 박탈당한 존재가 아니라, 아예 게임의 시작, 논의의 맨처음부터 자격 자체가 없는 존재로 가정되어 있다는 점이다(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다).


푸코가 찾아낸 해결책은 자격의 부여와 박탈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규칙들의 집합으로서의 인식론적 조건, 곧 장 자체가 힘 관계의 놀이에 의해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그 절대성, 보편성, 필연성, 곧 변경불가능성을 근본적으로 파괴하여 게임의 규칙 자체를 변형시키는 것, 곧 다른 게임을 하는 것이다.


정치적이든 심리적이든, 자격(과 그 박탈), 자격 있음과 없음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기준의 문제, 곧 정당성의 근거라는 문제를 낳게 되고, 이는 곧 정당화 논리의 문제가 된다. 정당화가 정당성을 생산하는 하나의 장치, 메커니즘인 것과 똑 같이, 합리화는 합리성을 생산하는 하나의 장치, 메커니즘이며, 통치화는 통치성을 생산하는 하나의 장치, 메커니즘이다. 이렇게 생산된 정당성, 합리성, 통치성이 곧 (이른바 주어진 시점의 한 사회에 의해 보편적 정상적 도덕적인 것으로 가정되는) 품행good conduct이다. 이 이른바 '품행'은 자신이 규정하는 '올바른' 품행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통제하는 기준, 곧 박탈-기계이다. 따라서 이른바 품행은 개인의 내외면 모두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전면적으로 정당화하고, 이는 개인에게 죄책감, 열등감, 양심의 가책 등의 양상 아래 내면화된다. 따라서 푸코의 통치성 논의가 목표로 하는 타겟은 이러한 기존의 정당화, 합리화, 통치화의 품행에 대적하는 새로운 대항품행(counter-conduct)의 제공이다.


6. 마르크스에게는 헤겔적 합리성 이외의 합리성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탈신화화화 곧 합리화 과정을 설정한 베버는 이러한 합리화 과정의 방식이 시대와 지역, 상황에 따라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합리화의 결과로 탄생하는 합리성의 개수도 복수(復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베버는 이러한 통찰을 서구의 특수성을 해명하는 문제(왜 다른 문명들도 분명히 서구가 오늘날 발전시킨 여러가지 근대적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초기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오직 서구만이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었는가?)로 전화시킴으로써 자신의 탁월한 통찰을 서구 내로 한정시키면서, 서구적 보편주의의 폭력을 용인, 심지어 조장하는 이론의 탄생에 기여하고 말았다(오늘날 헌팅턴도 거의 완벽히 동일한 길을 걷고 있으나, 차이점은 베버가 이를 아마도 반쯤은 무의식적 상태에서 행한 반면, 헌팅턴은 이를 완벽히 의식적인 상태에서 선택했다는 점이다).


7. (사랑의) 나눔에 인색한 사람은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8. 많은 경우 사람들은 스타일, 취향, 관점의 차이를 '도덕성'의 차이로 보곤 한다.


9. 사람들은 푸코를 - 그들이 마르크스를 이미 그렇게 보았듯이 - '도덕주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오류이자, 누군가가 푸코와 마르크스의 해석에서 범할 수 있는 최대의 오류이다.


10. 어떤 말이든 어떤 맥락, 어떤 상황에 대입시켜 설명하고자 시도해 보라.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적절한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이 합리성이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11.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알 수는 없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옳다. 더 작은 존재가 더 큰 존재를 이해할 수 없듯이.


12. 삶을 살고 철학을 하는데 그날 그날 몸과 마음의 컨디션 조절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마음이 피폐한 자, 자기 몸의 소리를 못 듣는 자는 아직 철학을 행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13. 지금 옳은가, 잘하고 있는가, 잘 살고 있는가가 관건이 아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그녀가 지금 올바른 방향을 향해가고 있는가, 올바른 길 위에 서있는가의 여부이다.


한 사람이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녀가 참으로 올바른 유일한 길, 곧 스스로에게 다가가는 길 위에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만이 중요할 뿐이라는 융의 말은 참으로 탁월한 통찰이다. 지금의 고통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 위에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이다.


14. 존 로크의 <관용에 관한 편지>(Epistola de Tolerantia, 1689)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게으름을 '스스로가 자신의 타락과 파멸을 재촉하는 것이지만 남에게 특별한 피해를 따로 끼치지는 않으므로' 관용의 대상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이전 전통적 그리스도교에서는 게으름을 7대 죄악 중 하나로 간주하여 놔두지 않았다. 이제 게으름이 관용의 대상, 무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15. 어떤 개인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그 개인일 수밖에 없다, 라는 로크의 생각은 밀에 도달하여 이른바 '자유주의'(liberalism)라는 형식으로 확고히 정착되는데, 그 핵심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정하겠다, 곧 남이 정하도록 놔두지 않겠다, 라는 '간섭 배제 원칙'으로 나아간다.


16. 오늘 푸코는 자유주의를 '내가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통치당하고 있지 않은가를 끊임없이 묻는 체제'로 정의한다. 푸코는 이로써 자유주의의 규칙, 나아가 정치학의 규칙을 완전히 바꾼 것인데, 물음을 묻는 주체가 더 이상 통치자도, 심지어는 보편적 인간도 아닌, 피통치자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푸코의 피통치자는 '네가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결단을 내린 주체이다.


나아가 푸코는, 이런 측면에서, 결정적 한 걸음을 더 내딛는데, 그것은 '인간이란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이른바 '보편적' 형식을 특정 시대, 특정 지역의, 특정인들이 특정 사건을 거쳐 구성해낸 역사적 산물임을 밝혀낸 일이다. 곧, 누구나 해야 하는 보편적 인간상, 곧 내가 따라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이란 없다,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란 없다. 인간 일반에게 무엇이 좋은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설령 누군가가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해도 내가 그거을 따라야 할 하등의 의무가 없으며, 그가 나에게 그것의 실행을 강제할 수도 없다. 결국 이는 곧 '내가 무엇을 마땅히 해야 하는지 내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만약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일 수밖에 없다'는 원칙의 천명이다.


17. 에픽테토스가 이 세상에는 당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생각과 당신을 노예로 만드는 생각 둘두 가지밖에는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의미에서 보면 정확히 푸코가 말하는 '사유의 담론 효과'에 대한 언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부와 관련하여 이렇게도 말해 볼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당신을 공부하게 만드는 생각과 당신이 공부하지 않게 만드는 생각 두 가지밖에는 없다.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전자의 생각을 하는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실하고 차분하게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고, 특히나 후자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진지하고 성실한 공부로부터 멀어진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당신을 공부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달리 말하면, 당신이 공부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드는, 혹은 공부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들인가?


18. 니체는 역사적 감각의 결여가 이류 학자들의 공통적 특징이라고 말했다(이들은 자신이 배우고 알게 된 특정시대, 특정 학파의 최종 버전 혹은 가장 최근 버전이 그것의 영구불변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 자체'의 본질적 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 지리적 감각의 결여가 이류학자들의 공통적 특징이다.


19. 인간은 대개의 경우 자신이 파괴하고 싶어하는 사고방식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사고한다.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동일한 사고의 구조를 유지한 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치를 바꾸는 것, 곧 같은 구조 내에서 자신이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만큼 자신의 적으로부터 영향받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나와 나의 적은 같은 구조가 낳은 두 명의 쌍둥이 자매들이다. 누가 나의 적이 되는가? 나와 같은 생각의 '틀'을 공유한 자들만이. 따라서 차라리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 보아야만 할 것이다. 왜 저 사람은 나의 적이 되었을까? 나의 적은 나의 분신이다. 나의 적이, 나다.


20. 당신 삶을 두 개로 가를 결정적 질문 하나(경솔하게 대답하지 말고, 차분하게 잘 생각해보라) - 당신은 혼자 있을 때, 혼자 있는가?


21. '현실'과 '진실'을 기준으로 사는 삶이란, 자신에게 어리석은 것인 만큼, 타인들에게는 끔찍한 것이다. 그녀는 현실과 진실을 - 이른바 현실과 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해석이 아닌 - 현실 자체, 진실 자체, 곧 사실 자체로 생각한다. 그녀는 '해석권력'(power of interpretation)이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2. 니체의 매우 흥미로운 생각 - "무지하고 비겁한 다수로부터 지혜롭고 용기 있는 소수를 보호해야 한다."


23. 함부로 말을 내뱉으며, 그것이 재치있고 소신있는 행동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24. 철학을 비판한다 - 자신이 철학을 비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철학을 자신의 '외부'에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2013.04.-2013.12.



2013. 3. 1.

잠언 04







1. 에피스테메 자체가 하나의 에피스테메이고, 패러다임 자체가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2. 펀치 드렁크(punch drunk) - 너무도 강력한 충격을 받으면 우리는 정신을 잃는다. 그 때 우리는 마비(paralysis) 곧 무감각(anesthesia), 불인(不仁)의 상태에 빠져든다. 우리는 그저 '멍한 상태'로 그것을 '겪는다'.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며 울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미 '어느 정도는' 나았다는 증거이다. 그녀는 이제 '바닥을 치고', 말하자면, 소통의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너무 강력한 충격과 고통에 가격당한 사람은 울지조차 못한다.


 


프랑스어로 '단말마'(斷末魔, death agony, marman)의 고통을 뜻하는 '영혼 속의 죽음'(la mort dans l'âme)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고전에서 말하는 어짊 곧 인(仁)은 이러한 불통과 마비의 상태가 소통과 느낌의 상태로 전환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와의, 사물과의, 타인과의, 자기와의, 자기 몸과의 '소통'이다. 김지하가 말하는 '생체 커뮤니케이션'(bio-communication)은 바로 이런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3. 숨겨놓은 생각? - "나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불행했으면 좋겠다."


 





4. 거짓말을 하기 위한 준비 운동? - "솔직히 말해서~"


 





5. 자기를 속이는 편리한 장치 - "기왕이면 ~가 좋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가 아니면 선택을 하지 않는다.


 





6. "모든 일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 김영민


 





7. 모든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8. "성공할까봐 무서워요."


 





9.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몸의 건강'이다. 이른바, 동양식으로 말하면(마음은 몸의 한 현상이므로), 몸의 건강이 최고요, 서양식 곧 로마식으로 말하면,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서양식으로 말해, 건강한 마음에만 건강한 몸이 깃든다. 마음이 건강하면 그 안에 건강한 몸의 개념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 모든 말은 건강이 도대체 무엇인지, 몸과 마음은 또 그 정의가 뭔지에 대한 대답에 달려 있다.


 








10. 자신의 악의(惡意)를 선의(善意)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11. 인생에서 도피하지 말고 직면해라, 뭐 이런 얘기가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때론 도피야말로 가장 완벽한 해결책일 때가 있다(직면해서 상처만 입고 해결되지도 않는 일을 직면해서 무엇 한단 말인가?)



 







12. 자기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고, 인생이 싫고 피곤하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냥 너그럽게 자기를 잘 이해해주면서, 특히 맛있는 거 해먹고, 충분히 푹 쉬어라!, 라는 니체의 말은 너무나도 옳은 말이다!


 








13. 어떤 현상 혹은 심리를 '이해'하고,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러한 일들을 필연적으로 '긍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14. 만나서 피곤한 사람이 있는가? 그냥 그 사람을 가급적 만나지 마라! '안 만날 수 없는' 사이인가? 그럼 최소한의 형식적 공식적 관계만 유지해라! 그렇게조차도 할 수 없는 사이인가? 그럼 그 사람을 '전혀 보지 않는 길'을 찾아라!


 








15. 민주주의의 한 원칙 - "남한테 피해주는 일만 아니라면, 그냥 당신 일은 당신 의지대로 결정해라.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결국 잘못되어도 당신 삶이 잘못되는 것 아닌가?"




 



16. "행복한 게 불편해요."




 






17. 당신의 고통과 슬픔을 말하지 않으면, 보여주지 않으면, 특히 그들이 보고 있을 때 말하고 보여주지 않으면, 당신이 그러한 고통과 슬픔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18. 칭찬, 이해로도 인간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19. 상대가 '잘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만 진정한 속마음을 보다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20. “행복한 게 불안해요.”




 


21.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아는, 혹은 자신이 상상한 대로의 그녀'가 '참다운 그녀'일 거라고 믿는다.


 






22.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끝나는 것에 대한 우려”



 




23. "한 인간이 망가진 인간이라는 것은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 망가져 있다는 의미이다." - 무라카미 류



 


24. 간접적 독서는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로, 직접적 독서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만든다.


 
 


25. “사상가가 변한다는 것은 그의 문체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론적 내용이 변해도 문체가 변하지 않는다면 사상가는 조금도 변한 것이 아니다.” - 가라타니 고진




 

26. 이 세상 전체가 거짓말을 할 수 있음을 깨달은 이후, 이른바 ‘여론’을 믿지 않고 우습게 여기게 된 한 독립적 정신의 자기 선언 - “좆까, 씨바, 누가 그래!”




 

27. 당신이 얼마나 컨트롤된 인간인지 알고 싶은가? - 당신이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언어들을 살펴보아라.




 


28. “사물을 정돈하려는 자를 믿지 말라.” - 드니 디드로





 

29.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30. 윤리란 (자기와 남의 마음과 몸의 속도에 맞추어) ‘기다려주는 일’이다.




 

31. “나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거의) 전혀 없었다.”





 

32. 총체적으로 오해받고 있을 때, 그것을 교정하기란 불가능하다 - 프리드리히 니체





 


33. "불완전이 완전보다 상위의 가치이다"(Imperfection is a higher value than perfection). - 김용옥



 

 

34. 남들에겐 명백하나, 당사자들은 확신하지 못하는 일.


 


 

35. 자전거를 타기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기차 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36.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당신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 로버트 프립




 

37. 젊은 시절 나는, 인간이란 자기 손 안에 잡힌 것, 파악한 것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에 나는 인간이란 그보다는 차라리 자기 손에 잡히지 않는 것, 움켜쥔 두 손에서 빠져나간 것들로 산다고 말해야 함을 깨달았다.



 

 

38. 38 special


 


 

39. '39



 

 

40. "작품은 예술가와 신의 합작품이다. 그런데 예술가가 적게 일할수록 작품은 더 좋아진다." - 앙드레 지드. * 그런데, 인생 자체도 그러하다.



 


41. 자기와의 차이(차이화, difference, differenc/tiation)는 모든 개념을 파괴한다. - 질 들뢰즈



 


42.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 플라톤과 유대-그리스도교
vs. "영혼은 육체의 감옥이다" - 미셸 푸코



 


43.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노예가 된다, 진리, 논리, 윤리에 의해.



 


44. "관념이 진실된 것이고, 감각이 인간을 속인다" - 플라톤
vs. "감각이 진실된 것이고, 관념이 인간을 속인다" - 프리드리히 니체




 

45. "길(道)을 길이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길(常道)이 아니다" - 노자




 

46. 영원히 철학, 특히 정치철학을 하게 만드는 질문 하나 - "그건 누가 정했어?"



 


47. 성실, 순결, 결혼, 효도 -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 혹은 차라리 '부정적' 효과를 가져오는 몇 가지 장치들


 

48. 그리스도교는 위선(僞善)을 통해서, 불교는 위악(僞惡)을 통해서, 삶의 ‘보다 나은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49. 대한민국에 - 도덕(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인식론적 의미에서 - 참다운 그리스도인, 참다운 마르크스주의자, 참다운 민주주의자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50. 도덕주의적 담론은 대부분 비도덕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문제는 "~ 해야 한다"라는 도덕주의적 당위가 아니라, 의도한 좋은 결과를 실제로 가져오는 '방법론'을 찾아내는 일이다.

 
 
 

 

2012년 7-8월




 
 

 

* 인생이란 어떻게 해야 '유머가 가능한' 세계관을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천착이다.

http://blog.naver.com/topjoys/60176570401



* 진지한 질문 - 유머가 가능한 세계관은 진지하게 찾아야 하는 것일까, 유머스럽게 찾아야 하는 것일까?
       




2012. 9. 7.

잠언 03





1. 철학을 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인간 삶의 형식, 완전히 새로운 인간 유형의 발명이다!


2. 무서운가? 더 해봐라, 네 두려움의 정체를 알고, 두려움이 사라질 때까지!


3. 인식과 철학은 서양인들이 하고, 우리는 도덕적 실천만 하자고? 웃기지 마세요!


4. 天長地久 - 나는 괜히, 시시때때로, 정치적인 저항의 언사를 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개 그들은 인식의 '깊지 못함'(비난이 아니라, 그냥 사실 판단)으로 말미암아, 오래 못간다(오래 가면 인정해준다).


5. 칼 마르크스에 대한 감사 - 만약 마르크스가 '무지는 논증이 아니다'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을까!


6. 심리와 논리 - 어떤 논리가 자신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자신의 어떤 감정, 가령 죄책감에 들어맞기 때문에 - 때로는 전혀 아무런 비판적 관점도 없이 - 그 논리를 받아들이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이지, 논리가 아니다. 심리적인 문제를 심리의 영역에 남겨두고 그 안에서 현실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철학의 문제와 섞어버리고 심리적 안정감 혹은 만족감을 논리적 혹은 철학적 해결과 동일시하는 것은, 물론, 오류이다.


7. 당신 인생을 '망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당신 자신의 인생을 '망치지' 않는데 누가 당신의 삶을 망칠 수 있는가?  당신이 당신을 '버리지' 않는데, 누가 당신을 '버릴 수' 있는가? 버려지다니, 인간이 버려질 수 있는 물건이란 말인가?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물건이 아니라 스스로를 창조하고 발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 곧 구성물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혹은 롤랑 바르트의 말대로, 그런 말은 오직 이른바 당신이 '사람들'의 말, 곧 '상투적으로' 생각할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그러한 어리석은 말이다.


에픽테토스가 <엥케이리디온>(까치출판사)에서 말한 대로, 당신에게 일어난 일 혹은 당신에게 든 생각 혹은 감정이 당신을 파괴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당신을 자유가 아니라 노예적 상태로 이끌 수밖에 없는 방식의 사유이다. 따라서 가령 성폭행 당한 여성에게 '(여자로서의 혹은 인간으로서의?) 네 인생은 이제 끝났다, 망쳤다, 너 이제 어떻게 하니!'라는 식의 말은 무지이자 폭력이며 한 인간을 비참으로 몰고가는 사유이다. 지금 이른바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는 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8. 인간은 때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이른바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아, 이런 걸 해야 하다니, 너무 힘들다'라고 말한다. 이는 물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자신의 소망을 충족시키는 '교묘한' 방법이다.


9. 인간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종류의 방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행한다.


10.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한 가지 - 인간은 이른바 남들이 볼 때 '나쁜 것',  '불행한 것'만이 아니라, '좋은 것', '행복한 것'에 대해서도 열들감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가령, 당신은 당신이 공부를 잘 한다는 것, 얼굴이 예쁘다는 것, 집에 돈이 많다는 것에 대해 열등감과 불행을 느낄 수 있다.


11. 이른바 '행복한 고민'이란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고민은 절실하며 간절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너 정도면 행복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아프리카에서 부모는 전쟁으로 사망했고 자신은 성폭행당했으며 에이즈로 죽어가는 동시에 굶어죽어가는 10살 짜리 여자아이에 비하면, 이 세상의 모든 고민은 '배불러 터진 행복한 고민'이다. 행복한 고민이란 말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시선이며, 폭력이다.


12. 폭력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시선으로, 타인을 재단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폭력적이며 자신과 타인을 착취하고 살고 있으며(우리 삶의 조건),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은 순진한 이들 혹은 기만적인 인간이라는 니체의 말은 만고의 명언이다.


13. 정상이란 무엇인가? 한 사회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 다수의 인간들이 그러한 상태인가? 내가 손가락이 여섯 개일 때 나는 비정상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그 말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철저히 정상이며, 내가 비정상이라는 말은 오직 타인들의 시선일 뿐이다. 이렇게 정상/비정상의 개념은 다수/소수의 관념에 의해 설정된 폭력적 개념이다.


14.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불행하다면 나는 행복할 수 없다"는 유마힐 혹은 볼테르 류의 말은 그 의도는 매우 가상하나 매우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잠시라도 생각을 해본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사고 방식을 정직하게 스스로에게 유지하는 한 어떤 인간도 지상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다.






 
 
 



2012. 7. 27.

리얼리스트











박경리, <토지 10:제4부 1권>



인간의 영혼 속에 잠겨 있는 신성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리얼리스트, 나는 그것이 슬프다(143).










2012. 7. 1.

잠언 02

 
 
0. 인간이 타인에게 행할 수 있는 극한의 폭력은 무엇인가? - 그녀의 의사에 반하여, 그녀를 '대신해서' 결정해주는 것이다.
 
 
1. "무지는 논증이 아니다." - 칼 마르크스
 
 
2. 진짜 '무섭도록 효율적인' 권력 테크놀로지의 배제 장치는 자신이 속한 혹은 속하고자 하는 집단의 지배적 담론과 상이한 (혹은 그것과 충돌을 불러일으켜 자신을 곤란한 상황에 빠뜨릴 것 같은) 생각과 느낌들을 처음부터 자신의 몸과 마음 속에서 제거하고, 또 그러한 자기 검열의 연장선상에서, 주변의 모든 타인들에 대해 동일한 검열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3. 유럽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 - 오늘의 철학은 ‘서양의 시녀’이다. 철학을 서양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4. 진보란 무엇인가? 일본말이다. ‘진보’를 말하면서 헤르더, 칸트, 헤겔, 마르크스와 달리 사유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녀는 자기가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5. 진보란 무엇인가? 이 말은 - 반드시 역사철학적으로가 아니라 - 이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존재들의 말에, 기쁨에, 아픔에 귀를 열어놓는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6. ‘역사철학’이 고유명사인 줄 모르는 서구주의자들이 있다. 역사철학이야말로 통치와 지배의 도구이며, 당신의 일상을 학문적 세계에 의해 식민화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역사철학과 진보는 억압의 도구이다.
 
 
7. 우리는 서기 2012년 극동의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산다.
 
 
8. 최근 독일과 그에 동의하는 우리 지식인들이 말하는 '성찰적 반성적 근대성'이란 불가능한 프로젝트이다. 인간은 - 인식론적이든 도덕적이든 - 이른바 '반성'이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일까? 더욱이 '시대정신'은 반성할 시간이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내적 필연성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에도 바쁜 것이다!
 
 
9. 이른바 '근대' 프랑스인들이 우리를 대신해 왕의 목을 잘라준 이후, 모든 개인은 자신에 대한 주권자요 왕이다. 고대로부터 마키아벨리에 이르는 모든 '제왕학' 서적들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읽혀야 한다.
 
 
10.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11. 나는 예전에 동양과 서양이 진짜 이 세상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 실제 세계가 아니라 - 지도 위에 혹은 내 머리 속에 남들이 그어놓은 하나의 금(線)이었다.
 
 
12. 현대 혹은 오늘이 '역사상 가장 타락한 시대'라는 말은 오늘이 '역사의 최정점이자 가장 찬란한 시대'라는 말과 꼭 같은 유치한 자기(시대) 중심주의이다. 오늘은 그저 오늘이고, 다른 어제 혹은 내일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하루, 시대이다.
 
 
13. 근대로부터 벗어나고 근대를 초극하고 근대를 넘어서려는 태도 자체가 서양적 근대의 일부이다. 서양적 근대는 성공한 쿠데타이자, 스스로에 대해 끊임없이 친위 쿠데타를 수행하는 하나의 성공적 양식이다. 서양적 근대를 감싸 안는, 서양적 근대와는 다른, 보다 큰 게임을 발명하고 실천해야 한다.
 
 
14. 서양적 근대성은 하나의 문화적 에피스테메 혹은 자기의 테크놀로지, 곧 서양의 고유한 문화적 현상으로 읽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적 근대성은 철학과 사회학 혹은 정치학만이 아니라, 동시에 문화인류학 혹은 문화정치학의 탐구 대상 영역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의 정치사'만이 아닌, '진리의 지정학적 문화정치사'를 써야 한다.
 
 
15. “운동은 궁상이 아니다!”
 
 
16. 푸코의 철학적 의미는 이제까지 그저 의학의 영역에 속해 있었을 뿐인 하나의 개념 곧 '정상/비정상'의 쌍을 철학적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인 점이다. 이른바 '정상화'(normalisation)의 개념 앞에서 푸코는 묻는다. 이 '정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 '정상'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었는가? '정상적인, 너무나 정상적인' 사회를 위한 물음.
 
 
17. 모든 집단에는 그 집단이 수용하는 지배 이념(감성) 이외의 이념들(감성들)에 대한 검열 행위가 존재한다. 그 주요한 감시, 배제 및 검열의 방식으로는, 무시, 냉소적 비웃음, 직설적 비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척도로서 '자기 검열' 등이 있다. 이 태도들이 그 집단이 -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 실천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 주체화 및 대상화 방식을 구성한다.
 
 
18. “소녀들이여, 야망을 품어라! girls, be ambitious!”
 
 
19. 대문자가 없는 세계. a world without any majuscule.
 
 
20. 모든 콤플렉스의 궁극은 '정상 콤플렉스'다. 내가 정상이 아니며, 사람들과 다르고, 다르게 느끼며, 결국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정상 콤플렉스는 나도 '보통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불가능한, 불합리한, 결국 불필요한 콤플렉스이다. '비정상'이란 이 세상에 없으며 오직 '사태에 대한 정상적 반응들'만이 존재함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은, 그녀처럼, 정상이다.
 
 
21. 이른바 '고백'이란 '남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자기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고백'하지 않는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 말해도 되는 것을, 그저 내가 말하기로 결정했으므로, 말할 뿐이다.

 
 
22. 푸코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혹은 타인들에 의해 칭해지는 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실상은 ‘이른바 진리라는 명칭으로 칭해지는 무엇인가에 대해 특정 시기의 특정 지역에서 역사적ㆍ문화적으로 설정된 특정한 규칙들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형식’임을 밝힌다. 이른바 ‘진리’는 진리에 대한 하나의 담론, 곧 하나의 진리담론이다.
 
 
 
23. '인간들'이 아니라, 인간의 '성향들'을 나누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나는 항상 '선한 우리 편'에, 나와는 다른 이들은 '그들' 곧 '악인들' 편에 속한다. '인간들'을 나누는 것은 보통 살인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24. “젊은이들이 꿈꾸는 혁명은 보통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혁명이다.” - 버트런드 러셀
 
 

25. 때로, 희생자 담론은 가해자 담론보다 더 무섭다. 자신이 정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6. 어떤 논리가 자신의 죄책감에 들어맞기 때문에 - 때로는 아무런 비판적 관점도 없이 - 그 논리를 받아들이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이지, 논리가 아니다. 심리적인 문제를 심리의 영역에 남겨두고 그 안에서 현실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철학의 문제와 섞어버리고 심리적 안정감을 논리적 혹은 철학적 해결과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이다.
 
 

27. 나는 괜히, 시시때때로, 정치적인 저항의 언사를 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개 그들은 인식의 깊지 못함(비난이 아니라, 그냥 사실 판단)으로 말미암아, 오래 못 간다(오래 가면 인정해준다).

 
 
28.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그러나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


29. 하버마스의 철학적 중요성 - 인간은 '자신에게 옳은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옳은 것' 곧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따라서 철학의 진정한 출발은 바로 이렇게 - 자기가 '정한 것'이 아니라 - 자기에게 '옳은 것으로 느껴져서, 자기가 받아들인' 이른바 '진리'가 각자에게 늘 모두 다르다는 '사실' 위에 기초해야 한다.



30. 모든 것을 도덕적으로 바라보는 자들! - 푸코의 가장 탁월한 정치적 통찰들 중 하나는 그가 개인적 도덕주의와 그 확장 버전으로서의 집단적 음모론을 피할 수 있는 분석의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도덕으로만 세상을 보는 자들은 자기의 권력 확장을 향한 끔찍한 지배욕구를 보편적 도덕, 인류를 위한 도덕으로 포장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끔찍한 사실은 그들이 그러한 욕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과 집단의 권력 욕구 자체는 정당한 것이다).



31. 자신의 권력욕구를 선의(善意)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2012년 2-6월.






잠언 01

  


 










 












http://en.wikipedia.org/wiki/Bar_Kohkba#Book_2:_The_Book_Of_Angels





1.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2. 모든 것이 '정상적'이다, 사랑만 빼고!
 
 
3. “합리성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합리적인' 방식 곧 '우연을 통해' 구성되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
 
 
4. 에피쿠로스는 틀렸다. 고통의 부재는 쾌락이 아니라, 권태이다. 가령, 고통 받는 자는 권태를 모른다.
 
 
5. “진실은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상처를 주리라는 사실이다.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은 고통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 밥 멀리
 
 
6. “나란 타자이다. je est un autre.” - 아르튀르 랭보
 
 
* 이 문장을 나는 타자이다, 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것이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한국어 번역 문장을 들을 때 불어 원문의 주어와 동사가 모두 1인칭인 듯한 (도덕적?)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즉 je suis un autre가 아니란 말이다. 영어로는 i is another( i is the other)와 i am another(i am the other) 사이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되겠다. 요약하면, '내'가 타자인 것이 아니라, ''나'라고 불리는 그것'이 타자란 말이다. 시인의 말을, 더군다나 한국어와 일본어와 불어와 영어를 왔다갔다 하며 옮겨야 하니, 사실은 안 헷갈리면 그게 신기한 일일 듯하다. 철학 없는 문헌학(어학)도 없지만, 어학(문헌학) 없는 철학이란 귀여운 농담에 불과하다. 문법의 한도를 벗어난 '자유로운 의역'이란 그저 어학 실력의 부족에서 오는 '오역'에 불과하다.
 
 
7. “내가 네 입장이었다면...”라는 생각은 상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너는 내 입장이 결코 될 수 없다.
 
 
8. “동일한 일을 겪은 모든 사람이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다.”라는 생각은 '동일한 두 개의 상황'이란 전혀 없으며, 모든 상황이 그 자체로 ‘고유한 사건’(événement)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주체도, 대상도, 상황도, 맥락도, 그들의 디엔에이도 모두 전혀 다르다. 이것이 니체가 “관념(=개념)이 인간을 속인다.”고 말한 의미이다.
 
 
9. 책을 안 읽는 사람, 성실하지 않은 사람,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 때로 책을 성실히 읽는 사람,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을 비웃는 일이 있다. 양자 모두는 각자의 모순에 의해 붕괴된다. 다만 전자는 붕괴되는 것에 그치고, 후자는 그것을 감싸 안아 뚫고 나아간다.
 
 
10. 가해자란 누구인가? 피해자의 고통을 알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자, 그리하여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자,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이다. 이제, 그 가해자는 누구인가? 바로 나와 너이다. 이렇게 때로 가해자이며 또 때로 피해자인 우리는 듣고자 하지 않는 자, 그리하여 듣지 못하는 자이다. 오늘날의 윤리란, 듣는 것이다.
 
 
11. 학문이란, 공부란 결국 자신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깨닫는, 알게 되는 과정이다.
 
 
12. 죄책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야말로 때로 가장 교묘한 자기 합리화의 방책이다. 이때, 그는 여하튼 자신이 고통 받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며, 이러한 자신의 고통 받고 있음을 남들이 알아줌을 알고, 더구나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지금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행하지 않고 죄책감과 고통 속으로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음을 안다.
 
 
13. “올바른 일을 올바른 동기, 올바른 이유에서 해라!” - 이마누엘 칸트
 
 
14.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령 살인을 저지른 것 정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다. 사람들은 일단 자기 일로 다들 너무 바빠서, 나를 알려고 하지 않고, 내가 누구를 속이는지는 더더욱 알려고 하지 않으며, 만의 하나, 알고자 한다 해도 사람들이 그걸 꼭 알아내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15. 사랑이란 어떤 존재에 대하여, 그것 혹은 그녀를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느끼는 것이다.
 
 
16. “잘난 체하기를 좋아하는 일련의 바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한두 단어라도 말하는 것이 침묵보다는 낫다!” - o. p.
 
 
17.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만 슬픔을 느낀다.
 
 
18. 한 인간이 타인에 대하여 하는 말은 예외없이 모두 너무나 부분적 말, 따라서 그녀의 인격 혹은 그녀가 한 일을 왜곡하는 말, 부당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조건이다.
 
 
19. 나의 소원은 어린아이가 아무도 없는 한밤에 홀로 깨어나 외로움과 두려움과 목마름에 떨며 울 때, 아이의 곁에 말없이 다가가 앉아 아이의 이마를 짚어 안아주며 시원한 물을 한 잔 떠주고는, 아이의 곁에 누워 아이를, 그러니까 당신을, 나를, 안아 재워줄 수 있는 그런 글을 쓰는 것이다.
 
 
20. 그냥 부러워하고, 지면되는 것 아닐까? 사람은 모름지기 '잘 지는 법', '잘 부러워하는 법'을 배워야.
 
 
21. 약한 모습을 못 보이는 것이야말로 약한 것이다(단, 시도 때도 아무데서나, 특정 목적 하에, 혹은 그냥, 약한 모습으로 ‘징징’대는 것은 제외). 약한 모습을 드러낼 만할 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담담히 드러낼 수 있는 자야말로 강한 자이다. 달리 말해, 오직 강한 자만이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노자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 강한 자는 - 강해 보이는 자가 아니라 - 부드러운 자, 여유 있는 자, 미소를 머금은 자이다.
 
 
22. 속물이란 누구인가? 바로 '나'다!
 
 
23. 너도 합리적이며 나도 폭력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핵심은 폭력과 합리성이 너무도 당연히 '함께 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누구에게? 특히 ‘나’에게!
 
 
24. “그래, 좋다, 지옥은 내가 간다.” -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25. 무너지려는 자신을 붙잡고 관념으로 세뇌하면서 억지로 무너지지 않으려고 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무너지면 된다. 무너져서 모든 것을 잃고, 죽게 될까봐 두려운가?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무엇을 얻을 수도 살 수도 없다. 백척간두에서 한발 더 나아가란 불교의 말은 농담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한계란 내가 생각하는 한계이다.
 
 
26. 부자연스러울 때, 어색할 때,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 그럴 만해서 그렇지 않겠는가? 어색과 부자연스러움을 자신의 만남과 주변에서 추방해버려서는 안 된다. 어색함을 받아들이면 자기가 몰랐던 자연스러움의 세계가 스스로 꽃 피어난다. 아름답지 않은가?
 
 
27. 우월감의 폭발, 열폭의 뒷면. 혹은, 동전의 양면. 우폭도 열폭도 없이, 생각하고 살기.
 
 
28. '논점' 곧 '문제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 제출된 명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전제'에 대한 비판적 주장 앞에서, 논점을 이해도 못한 채,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 당연함 자체일 것'이라는 식(!)의 - 반박은 그저 무의미하다. 찬성 혹은 반대는 논점에 대한 참다운 이해가 선행된 이후에만 의미를 갖는다.
 
 
29. "나는 (너무 깊은?) 확신을 가진 사람, 자신이 틀릴 가능성 자체를 생각해보지 못하는 혹은 않기로 한 사람이 피곤하다 못해 무섭다."
 
 
30. 알고 보니 '희생자'가 - '가해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똑 같이 타인을 이용하는 - 이기적인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는 수가 있다.
 
 
31. 때로, '가해자'와 '희생자'는 실체가 아니다. 또한, 때로, 그들은 겹친다.
 
 
32. ‘모든, 항상’(전칭명제)과 ‘어떤, 때로’(특칭명제)의 구분.
 
 
33. 무엇인가에 대해, 특히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이 나아졌음을 의미한다. 너무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인간은 그것에 대해 (여하튼 적절히) 말을 할 수 없다.
 
 
34. '적절한' 고통은 인간을 성숙시킨다. 그러나 '지나친' 고통은 인간을 파괴한다.


 
 
 
 
 


 
 
2012년 3-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