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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24.

잠언 00

 
1. 모든 것이 사라졌다. 따라서 이제 사라진 것은 영원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기억이란 파괴될 수 없는 완전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될 수 없으나 변형 가능한 영역이고, 실제로 늘 변형된다).
 

2. 부재는 존재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3. "망각은 기억의 또 다른 방식이다." - 롤랑 바르트
 

4. 인간은 누군가가 안아주어야만 하는 동물이다. 타인 혹은 자신이라도. - 그런 면에서 일정 연령에 도달한 이후에는 이른바 '이성의 애인'이 아니라면 누구도 타인의 신체를 접촉할 수 없게 되어있는 지금 우리나라의 접촉관은 더 관대해져야 한다.
 

5. "생체 커뮤니케이션" - 김지하
 

6. 사람들이 호감을 갖는 혹은 의지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그것은 다정한 말과 배려, 선물공세와 눈동자만이 아니라, 때로는 무관심, 혹은 심지어는 공격성, 냉소, 비판, 극단적으로는 폭력이라는 - 받는 당사자가 '알아볼 눈'을 미처 갖지 못했다면, 오해하기에 꼭 알맞은 - 그러한 방식으로도 표출된다. 받는 이의 입장에서는, 때로는 재미있고, 때로는 짜증이 난다.
 

7. 모든 인간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적어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조금씩 보여주지 않는 한, 사람들이 먼저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 길을 따라 그녀에게 다가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것을 바라면서도 그 길을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많은 이유가 있지만, 때로 그것은 스스로가 그 길을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8. 모든 사상가들이 말하는 이른바 '인간의 본질'이란 실상 그녀가 속한 문화에서 바라본 인간성의 특정 양태에 불과하다(반복과 차이).
 

9.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늘 생각하는 그 사람이다. - 도올 김용옥
 

10. “고통만이 인간을 성숙시킨다” - 프리드리히 니체
 

11. 당신 삶의 모든 중요한 일은 당신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12. 어색할 때는 어색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삶을, 상황을 조작하지 마라.
 

13. 철학과 과학은 사물의 체계가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 관념의 체계이다.
 

14.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15. 한 사람의 참다운 깊이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 달려 있다.
 

16.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음악이다!
 

17. 당신이 외로울 때, 무엇이 외로워하는가? 그것은 당신의 피부(皮膚)이다. 주체 혹은 자아란 '피부-효과'이다. * 참조. 디디에 앙쥐외의 『피부자아』.
 

18.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는 그 사람이 슬퍼하거나, 마음 아파할 일, 괴로워 하며 고통스러워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19. 친구들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면, 자기 인생이란 없다. 예수가 자신과 하느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이는 나의 적이요 지옥에 갈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정말 명언이다. 때로 친구야말로 따뜻한 이데올로기의 얼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속이고 얽어매는 합리화 장치로서의 친구.
  
20. 사람들이 신을 발명해낸 이유는 이 세상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있는 그대로의 이 세상이 아무런 위안이나 약속도 없이 그저 인간에게 끔찍하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21. 모든 성숙한 성인들은 어느 날 카뮈가 수첩에 옮겨놓은 친구의 말이 참으로 옳은 말이라는 것을 안다. "모욕이 준비되었을 때, 인생이 시작된다."
 

22.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기에 너무 늦었을 때란 결코 없다.” - m. 에릭슨
 

23. “진실로 자신을 이해하는 남성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신을 갖는 것이다.” - ?
 

24. “당신의 단점이 당신의 예술적 장점이 될 때까지 끝까지 밀어 부쳐라!” - 프리드리히 니체
 

25. 한계가 조건이다.
 

26. 오늘날의 윤리란 듣는 것, 상대의 말을 상대의 말과 상대의 의도대로 듣는 것, 곧 경청이다.
 

27. 상대의 느낌과 의견, 판단,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사랑' 혹은 '이해'란 무지, 오해, 착각, 기만 그리고 궁극적으로 폭력이다. 폭력이란 결국- 때로는 '상대를 위해서' 또 때로는 상대의 의사에 '반해서' - 상대를 대신해서 결정해주는 것이다.
 

28. 오, 나의 영혼이여, 불가능의 영역을 탐하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탕진하라! - 핀다로스, 아폴로 축제 경기 축가 3
 

29. 모든 고통받는 존재들의 무한한 연대
 

30. “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일찍 죽는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일찍 죽은 자들이 신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한 사실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2, 154
 

31.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외로움은 원치 않지만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은 종종 서로를 넘나든다.
 

32. '왜 내게(만) 이런 일이...'가 아니라, '왜 내게라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걸까?'라는 건강한 생각.
 

33. 인식의 수동적 본성 - 인간은 자신이 한번 알게 된 것을 모를 수가 없고, 자신에게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할 도리가 없다.
 

34. 철학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더 나아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철학을 '잘'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이 질문 하나만 '모든 것'에 대해 '계속' 던지면 된다(단 반드시 '모든 것'에 대해 죽을 때까지 '계속'!). "그거 누가 정했어?" 혹은, 보다 세련된 형식으로서, "그거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해서 정해진 거야?"
 

35. “인간의 고통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알베르 카뮈
 

36. 지금 당신이 가장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37. 질문 - “그 사람을 아직도 사랑하나요?”
 

38. 있는 줄 알면, 보인다!
 

39. 모든 개념, 모든 언어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지식, 하나의 관점이다.
 

40. 내가 너에게 '화가 나는' 곧 '윤리적인 비난'을 하게 되는 근본 원인은 '나라면 안 그랬을 텐데'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네가 나와 다르게 느끼고 생각한다는 바로 이 사실로부터 모든 민주주의의 윤리는 출발해야 한다.
 

41. 철학은, 학문은 "과연 네 생각대로 그럴까?"를 묻기보다는, "과연 내 생각대로 그럴까?"를 묻는 것이다.
 

42. 자신이 속한 학파, 종교, 집단이 신봉하는 주의와 교의 이외의 책을 찾아 읽지 않는 것 이상으로 지성이 행할 수 있는 게으름과 부도덕은 없다.
 

43. 겁 많은 자의 용기, 우유부단한 자의 결단.
 

44. “진지함과 우울함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어.” - 에릭
 

45. “종교란 개인이 자신의 고독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Religion is what the individual does with his solitariness.”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46. '나를 위해서 대신 결정해준다'고 말하는 인간들이 있다!
 

47. 공부, 학문이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그래서 무엇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48.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그럴만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하여,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녀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변들이다.
 

49.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마이클 샌델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목적론'에 대한 완벽한 반론 - 넌 정말 광어가 '인간에게 맛있기 위해' 그렇게 생겨먹은 거라고 생각하니?
 

50. 쌍둥이 - 나의 적은 나와 닮았다. 서구 근대 사유의 특징으로서의 이중ㆍ분신(double).
 
 
 
 
 
 

2012.03.18.

니체적 잠언 3



 



1. 모든 세대는 자신과 같은 음악을 듣는 사상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

 
2. 그리스어 dike의 완벽한 우리말 번역 - 道
 

3. 사랑하는 남자를 얻고 싶은가? 그의 '유치한' 꿈을 끝까지 들어 주어라.
 

4. 상대가 자신을 잊기로 결정했을 때 여전히 그를 사랑하기로 마음 먹는다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다.
 

5. 하이데거의 '불안'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인간적인 반응이다.
 

6. 그는 왜 그렇게 밖에 될 수 없었을까 !
 

7. 無爲는 사실 판단이며, 爲無爲는 가치 판단이다.
 

8. 힌두교에서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앎이다(아름다움을 댓가로 치른 앎).
 

9. 그런데 道와 正義는 차라리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닐까 ?
 

10. 德不孤 必有隣 ! -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오직 德만이 그러하다.
 

11. 꿈의 정신분석에 결여된 것은 그것의 미학적 차원이다.
 

12. 프로이트를 플라톤 혹은 데카르트 이후 서구 최대의 사상가로 본다면 ...
  
13. 자신의 시대가 '타락했다'는 단언은 마치 자신의 시대가 '역사의 정점'이라는 견해와 마찬가지로 유치하고 피상적인 자기 중심주의의 한 예에 불과하다.
  
14. 잠언을 쓰는 자들을 위한 한 마디의 말 -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15. 무지는 논증이 아니다(마르크스)
 

16. 청년 프로이트의 글을 읽다보면 당시 빈의 한 의대생이 받았던 인문학 수업의 깊이에 경탄하게 된다.
  
17. 소위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헤겔)
 

18. 종교의 본질은 고대적 세계관의 '제도화'다. 그리하여 그것은 '왜?'를 인정치 않는다(왜를 묻는 행위 자체가 신성에 대한 모독, 불경, '죄'가 된다).
 

19. 무뚝뚝한 경고 - "잠언을 함부로 쓰지 마라! 그것은 네 정신의 깊이를 온전히 드러낸다."
 

20. 매우 흥미로운 말 - "사람 사는 것은 어디나 똑 같다."
 

21. 나는 인간의 종교성은 인정하나, 제도화된 종교는 신뢰하지 않는다.

 
22. 확실히 가벼운 것, 움직이는 것은 보다 무거운 것, 움직이지 않는 것의 지배를 받는다(노자).
 

23. 자신을 좀 알아 달라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다 ...
 

24. 잠언의 이상은 철학자와 시인의 만남이다.
 

25. "남성을 전쟁을 위해, 여성은 그의 휴식을 위해 길러져야 한다"는 니체의 단언은 '전쟁에 미친 한 여성혐오주의자',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예언자', '자신이 남들보다 글자 그대로 '우월하다'는 엘리트주의자'의 말로 이해할 때 거짓없이 가장 쉽게 이해된다.
 

26. 담배가 있는 여행과 담배가 없는 여행이 있다. 그런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27. 지옥이, 하늘의 감옥(天獄)이 아닌, 땅의 감옥(地獄)이라는 점에 하늘과 땅의 모든 비밀이 숨어 있다.
 

28. 이런 말이 있다. "정치적 혁명으로 인간 삶의 본질적 개선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철학은 농담이자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정치적 관심이 부재한 모든 자기 혁명, 내적 혁명은 농담이자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29. 서양 철학에서 아직 우리는 필경 제국주의에 이르고야 마는 보편주의라는 '왕의 목'을 자르지 못 했다 - '유럽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
 

30. '이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 - 모든 병 중에 가장 심각한 병? 이 문제를 바라보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
 

31. 너의 절망에 충분한 시간을 주어라.
 

32. 네 병의 본성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33. 반성되지 않은 통속적 견해 - '모든 인간의 진리, 종교는 하나로 통한다'.
  
34. 사랑받고 싶다면 상대에게 작은 약점을 보여라(니체).
 

35. 인간 관계에서 침묵은 잘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때로 전혀 새로운 관계(종종 보다 건강하고 깊이있는)를 향한 통로가 되곤한다.
 

36.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은 신앙이 합리의 영역이 아니라는 논리계형적 구분의 선언으로 읽혀지는 것이 낫다.
 

37.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서구의 인식은 약 2,500년 전 오늘의 그리스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품었던 세계 인식의 연속, 확장에 지나지 않는다(지명의 예만을 들어본다면, 유럽, 아시아, 소아시아, 근동, 중동, 극동 등등).
 

38. 누군가를 사랑하려 노력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39.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상상을 적어오라(마광수)
 

40. 변태는 없다(마광수) - 마광수는 보기 드문 충실한 프로이트주의자이지만 이 점에서 그는 프로이트를 넘어섰다.
 

41. "구름을 생각하지 마시오" - 당신은 이미 구름을 생각했다.
 

42. 망각은 또 다른 기억의 방식이다(롤랑 바르트)
 

43. "고통이 없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it is impossible to achieve an aim without suffering. - j.g. bennett) - 매우 타당한, 그러나 매우 위험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
 

44. 당신이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robert fripp).
 

45.심리학은 자신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인간 심리현상을 신경증, 정신 질환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하나의 '과대망상' 혹은 '편집증'으로 간주될 수 있다.
 

46. "나는 논쟁을 매우 좋아한다"(존 레논)
 

47. 누군가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때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당신은 당신의 삶을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48. 하나의 즐거운 우연 - 노자(도덕경)와 스피노자(윤리학).
 

49. 우리는 한 인간이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을 대하는 이해와 존중의 정도에 의해서만 그 사람의 (소위) '우월함'을 인정할 수 있다(어느 영국의 철학자).
 

50. 정상과 비정상, 광기의 경계선 위를 걷지 않는 철학, '위험 없이 안전하기만 한 철학'이란 그저 속물들의 교양에 불과하다.
 

51. 노력이란 때로 자신의 죄책감을 무마하기 위한 도덕적 자위행위에 다름 아니다.
 

52. 죄책감을 권력의 유용한 지배 도구로 보았던 니체의 탁월성!('도덕의 계보', '선악을 넘어서')
 

53. 노력하는 자는 결코 자기 자신의 이해라는 참다운 '내면적인' 궁극적 목표에 이르지 못 한다. 기껏해야 그는 사람들이 알아주는 자신의 '외면적' 목표만을 달성할 수 있을 뿐이다.
  
54. 지나치게 노력하는 사람은 다만 그가 자신도 세계도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강한 의지'란 그저 스스로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 자기 이해의 부족을 드러내는 하나의 '고백'에 불과하다.
 

55. 인간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속일 수 있으나 자신만은 속일 수가 없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56. 이기주의자는 보통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불린다. 그러나 그녀는 타인은 물론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에리히 프롬. 사랑은 '능력'의 문제다)
 

57. 그런데, 이해도 '능력'의 문제다.
 

58. 참다운 강함은 부드러움이다(노자).
 

59. 심리학의 기본 법칙 - 부정은 긍정의 뒤집힌 형식이다.
 

60.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같은 언어를 말하는 사상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
 

61. 한 철학자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많은 양의 '견딜 수 없는' 진리를 '견뎌내는가'에 달려있다(니체)
 

62. 네가 하고 있는 일이 옳은 길 위에 있는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거기에 네 마음이 깃들어 있는지 살펴 보아라(우파니샤드).

 


 
 

2006. 07. 31. 스트라스부르.

니체적 잠언 2



 
 























1. 행복의 어떤 느낌은 불행의 그것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2. ‘고귀한 천품’이란 것이 있을까 ?
  
3.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만이 행복하다(어린아이들의 행복의 비결).
  
4. 사랑의 고백은 때를 잘 선택해야 한다. 오직 한 번만 가능하므로.

 
5. 왜 그다지도 많은 사상가들은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않고, 아름다움에 대해 분석하고 말하는 것에 그쳤을까 ?

 
6. 종종 우리는 삶에서 ‘환상적인’ 것과 마주치곤 한다(음악, 작품, 사람 …). 그런데 그것은 실제로 ‘환상’이다(인식 혹은 예술의 본질로서의 환상).
 

7.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외로움은 강요당한 것이라고 해보자.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종종 서로를 넘나든다.

 
8. 당신은 당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
  
9. 때로는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10. 악기를 연주할 때 ‘악기소리’가 들리면 안 된다. 오직 ‘음악소리’만이 들려야 한다.
 

11. 음악이란 정신이다. 그것은 정신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있다.
 

12. 20세기 최고의 '동양철학자'는 존 케이지이다.
 

13.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끔직한 일이다.
 

14. 모든 인간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15. 속물이란 누구인가? 바로 ‘나’이다.

 
16. 설명하는 사람은 항상 너무 적게 하거나 너무 많이 한다.
 

17. 해설이 없었더라면 작품이 훨씬 더 명료하고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었을텐데 … (니체가 옮겨 적어놓은 글)
 

18. 중용은 중간이 아니다.
 

19. ‘근대성’이란 개념 자체가 근대적이다(근대성은 ‘성공한 쿠데타’이다).
 

20.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이 ‘정상적’이다.
 

21. 아름다운 음악은 좋은 음악이다. 그러나 모든 좋은 음악이 아름다운 음악인 것은 전혀 아니다.
 

22. 음악이란 육체이다. 그것은 육체의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다.
 

23. 살아있는 동안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보통, 철학자에게는 ‘끔찍한’ 일이다.
 

24. 모든 책은 자신에게 적절한 숫자의 독자를 갖는다. 이 숫자에 미치지 못했을 때 저자는 절망하며, 이를 넘어섰을 때 - 그녀가 ‘진정한 저자’라면 - 그녀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25. 음악은 듣다보면 점점 커진다.
 

26. 음악은 처음에는 작게 그리고 점점 볼륨을 높여가면서 방의 크기와 자신의 상태에 맞는 적당한 음량에 도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반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7. 니체는 오디오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
 

28. 독자들은 한 권의 책에서 자신에게 이해가능한 것만이 그 책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29. 말을 하는 순간, 모든 신비가 깨진다.
  
30. 언어는 합리주의로, 묵언은 신비주의로 이끈다.
 

31. 인간의 '보편적' 에피스테메 ?
 

32. 보편성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다.
 

33. '사교성' 혹은 '사회성'이란 여전히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다.
 

34.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 허영심이 아니라면 - 재미가 없다.
 

35. 알지 못하는 도시의 여관방은 슬프다.
 

36. 예술은 ‘틀림’에서만 나온다.
 

37. 틀림이 없는 세계에 틀림을 주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38. 지나친 호의, 선의는 인간에 대한 신뢰의 부족이다.
 

39.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달려 있다.
  
40. 크라프트베르크의 세계는 틀림이 없는 세계다.
 

41. 모든 보통 명사는 고유 명사다.
 

42. 매우 흥미로운 질문 -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43. 몹시 쓸쓸한 밤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44. ‘구원’이란 ‘구도’의 동의어이다.
 

45. 당신의 상상과 소망이 당신의 무의식적 배경과 잘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 기능하지 않는다.
 

46. 당신 인생의 모든 중요한 일은 당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47. 절망은 본질적으로 시적이며 연극적인 제스처이다(삶을 예술화하는 하나의 형식으로서의 절망).
  
48. ‘깊이에의 강요’ -  재미있는 말이다.
 

49. 지옥이 예술이다.
  
50. 사람들은 지옥을 필요로 한다.
 

51. 니체의 사상을 요약하는 한 마디의 말 - "관념이 속이는 것이며, 감각이 진실한 것이다."
 

52. 시시때때로 변하는 당신의 기분에 어울리는 음악과 그 음량(침묵과 그 길이)이 항상 존재한다. 이것이 사상의학의 본질이다.
  
53. 하이데거는 니체를 ‘기묘한 방식으로’ 존재에로 되돌려 놓는다.
 

54. 카페에서 우연한 기회에 맞은 편으로 자리를 바꿔 앉아보면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55. 이상(理想)은 사람을 사로잡는 하나의 강박 관념이다.
 

56. 예술의 본질은 인간 삶의 '덧없음'(vanitas)에서 나온다.
 

57.        '모태신앙'인 사람은은 결국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간다(그런데 사실은 우리 모두가 '모태신앙'이다).
 

58. 이제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어떤 사람도 자신의 임종시에 ‘다른 모든 이들을 함께 데려가려는’ 시도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59. 우리는 모두 자신의 어떤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60. 침묵은 존재하지 않는다(존 케이지).
 

61. 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을 ‘인간’ 혹은 ‘남성’으로 바꾸어서 읽어보라 !
 

62. 사려깊음과 우울함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63. 중국이 공산주의에서 해방될 때 …
 

64. 현대미술은 그 자체로 철학 행위이다(철학의 적용 혹은 응용이 아니다) - 이것이 ‘현대의’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저주이자 축복이다.

 
65. 깊이는 고통에서만 나온다. 이 점에서 니체는 옳았다.
 

66.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당장’ 얻으려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얻지 못한다.
 

67. '제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68.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음악이다 !
 

69.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늘 생각하는 그 사람이다.
 

70. 한 인간의 참다운 깊이는 그녀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2006. 05. 01. 스트라스부르.


 

니체적 잠언 1






 




니체적 잠언
 

요즘 논문 때문에 니체를 다시 읽고 있다. 이번이 삼독째인데 다시 읽어도 그 깊이와 우아함이 씹힌다(니체는 독거미다!). 나는 도서관에서 혼자 일하기 때문에 커피 타임같은 쉬는 시간에 심심했었는데 문득 나도 자투리 시간에 이런 (니체적) 잠언들을 몇개 만들어 보자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래가 지난 3-4일 동안 만든 몇개의 결과물들이다.
  
1. 있다고 생각하면, 보인다.
 
2. 여성은 호감이 가는 남성 앞에서, 혹은 옆에서, 웃는다. 여성에게 호감을 가진 남성은 그녀를 바라본다.
 
3. 사랑의 상실이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안에 깃들어 있던 신뢰의 상실이다.
 
4. 질투란 지옥이다.
 
5. 지옥이란 육체적 고통이다.
 
6. 한 사람이 드는 예는 보통 그 사람의 무의식적 소망이다.
 
7.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있지만, 신뢰 없이는 살 수 없다.
 
8. 아름다운 음악은 우리의 기분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슬플 때는 슬프게, 즐거울 때는 즐겁게. 그러나 항상 우아하게.
 
9. 세련된 것은 보통 아름답지 않다. 차라리 세련됨은 아름다움의 적이다.
 
10. 테크닉에 함몰되어 예술에 도달하지 못하는 작가들이 있다.
 
11. 산울림과 마찬가지로 슈퍼스트링은 '하늘에서 떨어진' 음악이다. 이 음악들은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에서 나왔다. 그러나 실상 이 음악들은 차라리 '그들'에게서 나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12. 한 인간의 '미덕'은 때로 그의 저주다.
 
13. 어떤 한 인간이 평생을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천재?).
 
14. 천재의 징표는 자신의 재능에 깔려죽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재란 '경쾌한 발걸음'이다(모차르트).
 
15. 행복이란 육체의 느낌이다. 그러나 보통 그것은 정신의 상태라 불리곤 한다.
 
16.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발명된 것이다. 저 세상까지도(더하여, 이 세상까지도).
 
17. 많은 경우 거장에 대한 비평가의 적의는 그 비평가 자신이 '실패한 예술가'로 스스로를 생각한다는 점으로 설명 가능하다.
 
18. 기다리는 사람은 초조하다(그녀는 지루하지 않다).
 
19. 비평(비판)에 대한 비평(비판)을 해보지 않은 비평가는 해악적 존재다.
 
20. 고통받는 사람은 지루함을 모른다.
 
21. 때때로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다.
 
22. 한 사회가 '쓸모 없다', '보잘것 없다', '별 볼 일 없다'고 이르는 것에 그 사회의 비밀이 숨어있다.

 
23. 말이 없는 사람은 관심을 끈다. 그러나 전혀 말이 없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24. 친구를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자기를 열어줄 또 다른 자기, 자기 밖의 자기를(친구에 대한 최대의 찬사).
 
25. '천재적'이란 말보다 '비천재적'인 말은 없다.
 
26.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지하고 있는 여성은 깊이 있는 아름다움에 이르지 못한다.
 
27. 외로운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지만, 서로를 지나친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외롭다.
 
28. 어떤 모임에서 피곤한 사람은 자리를 일어서야 하지만, 피곤함이 그것을 방해한다.
 
29. 나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성격,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여진다(매력의 '객관성'?).
 
30. 좋은 음악에 대한 모든 정의는 주관적이다(심지어 문화적도 아니다).
 
31. '할 일이 없을 때,' 그 시간을 '창조적으로'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32. 매력없는 사람이 매력있는 사람을 향한 징검다리가 되는 수가 있다.
 
33. 베이시스트는 왜 그 악기를 선택한 것일까?
 
34.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은 블루스와 클래식도 좋아한다.
 
35. '우아한 여성'과 '우아하게 보이는 여성'이 있다.
 

36. 어떤 좋은 음악도 없는 것보다 못 하다.
 
38. 이른바 '인간의 본질'이란 항상 그 말을 한 사상가가 속한 문화의 본질일 뿐이다.
 
39. 자유로운 여성이 매력적이다. 단, 그 사회 관습의 한계 내에서만 그러하다. 이 한계를 벗어나면 그녀는 부담스러운, 두려운, 결국 추한 존재로 인지된다(Unheimlich, nico)
 
40.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미 죽는다. 실제의 죽음이란 자신과 타인을 위한 단순한 확인 절차(현장검증)에 불과하다.
 
41. 이른바 '천벌'이란 우연한 개인적 불행이다.
 
42. 모든 대화는 독백이다.
 
43. 모든 죽음은 자살이다. 심지어 교통사고도 그렇다.
 
44. 이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그사람을 쳐다보는 사람과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 그러나 이 두사람은 모두 그 사람을 '쳐다본다'(관심으로서의 무관심, 혹은 전략으로서의).
 
45. '이해할 수 없는 여성(남성)'이란 '이해할 수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보통 동성의 친구들에게는 쉽게 '이해가능한' 것이다.
 
46. 인생이란 어떤 경우에도 참으로 달콤하고 아름답다(dolce vita).
 
47. 한 인간이 얼마나 천재인가는 그녀가 어렸을 적에 얼마나 외로웠는가에 다름 아니다.
 
48. 동양 철학에는 절대가 절대로 없다!
 
49. 모든 불행한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내일이 오늘과 똑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내일이 오늘보다 더 불행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만이 자살을 생각한다.
 
50. 암전.



 
 
2005. 06. 17. 스트라스부르에서.

 

  

2012. 4. 25.

나를 사랑한다는 것

어제 스승의 날이라 선생님들과의 모임에 잠시 참석하고 저녁엔 고맙게도 학생들이 마련해준 모임에 갔다왔다. 이런 다이어리에나 고백하는 것이지만, 부족하기만 한 날 믿고 따라주는 학생들에게 때론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울 때가 있다. 학생들과 차를 마시고, 포켓볼을 치러 갔는데, 중간에 학생 하나에게 문자가 와서 잠시 보러 다녀왔다. 학생은 요즘 자기 혐오와 죄책감에 빠져 요즘 몹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돌아와 당구를 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다른 학생에게 또 문자가 왔다. 그 학생은 내가 아끼는 학생들 중 하나인데 몹시 힘든 일이 있는 듯했다. 어렸을 적부터 지병이 있어 아파서, 그리고 역시 어린 시절 힘든 일을 겪어서, 그 삶이 아직 다 낫지 못한 그런 학생이다. 학생은 내게 스승의 날인데 선물은 못 드릴 망정 이렇게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하다고 말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다 듣고나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많이 힘들었지? 네가 지금 후회하고 힘든 일을 했던 건 네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거야, 그걸 꼭 기억해라. 그리고 나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을 내가 나 자신의 자기 혐오와 자존심과 싸운 끝에 얻어낸 건, 결국 나를 좀 더 이해하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깨달음, 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나처럼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내가 여전히 그러한 것처럼, 너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면, 너는 그런 바보같은 선택을 하지도, 그런 후회할 일을 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마치 내가 그때 그토록 힘들지 않았다면, 그런 바보 같은 일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처럼. 그리고 또 나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다 괜찮아, 괜찮아, 이젠 다 지나갔어, 이젠 나아질 거야, 지금 네가 힘든 건 지금 네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넌 네가 한 그 바보같은 일을 일부러 했던 게, 누구가에게 고통을 주려고 했던 게 아니었잖아? 악의가 있어서 했던 게 아니었잖아? 넌 일부러 아픈 게 아니었잖아? 네가 그런 힘든 일을 겪은 건 네 책임이 아니었잖아? 넌 다만 그때 너무 어렸고 그 일은 네가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일이었잖아? 너도 이젠 알고 있잖아. 하지만, 넌 아직 그때의, 무의식의 현실에서, 무의식이라는 감옥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거잖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렴. 저 푸르른 하늘을, 너를 보고 웃어주고 있는 저 사람들을,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사랑하는 저 사람들을, 나를, 말이야. 그래, 그때 아무도 너에게, 네가 얼마나 힘든지, 네 기분은 어떤지, 네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고, 네가 정말 힘들 때 아무도 널 안아주지 않았잖아? 아무도 네 어깨에 손을 얹고, 다 괜찮다고, 그것도 다 과정이라고, 네가 한 일이 잘 한 건 아니지만, 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잖아,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아무도 네가 힘들 때, '네'가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널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위로와 위안의 말과 보살핌을 보여준 사람이 없었잖아. 나도 너와 꼭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때의 너, 그리고 지금의 나와 똑 같이 했을 거고, 똑 같이 되어 있을 거야. 널 잘 이해하고, 널 더 사랑하고, 널 더 잘 이해하고, 널 좀 더 배려해줘. 이 모든 건 이기주의도, 자기 합리화도 아닌, 그저 너를 사랑하는 행위, 남들을 사랑하기 위해 네가 꼭 겪어야만 하는 자기를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그런 일일 뿐이야. 넌 네가 행복한 만큼만 너를 그리고 남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어. 이제 그만 너를 용서해주렴."

이 모든 말은 물론 그와 나와 이 세상의 모든 '그녀'들과 이 세상의 모든 '그'들에게 하는 말이다.


마치 젊은 시절의 나처럼 지독한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그 학생에게 나는 말해주었다.

"그건 병이야, 넌 환자라고. 넌 너 자신을 환자로 잘 대해주어야 해, 잘 대접해주어야 해. 아픈 사람에게 남들과 똑 같이 일어나 100미터를 뛰라고 할 수는 없는 거야. 사람들은 우울증이 그저 우울한 건 줄 알아. 그래서 의지로 극복하거나, 병원이 아니라, 그저 사랑으로 치유하려해. 근데 그건 말도 안되는 의학적 무지야."

내 병을 고치려고 젊은 시절 이래 정신의학, 심리학, 정신분석 개론서, 원전들을 무수히 읽은 나는 그것이 그저 단순한 의학적 무지 혹은 두려움의 산물임을 안다. 간염이나 폐렴을 의지나 사랑으로 고칠 수 없다면, 우울증과 불안강박증, 그리고 정신분열증을 의지와 사랑으로 고칠 수 없다는 것은 명약간화하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의 생각이라고 믿고 있는 '망상'들은 그저 그 병의 증세이다. 이는 단순히 정신의학 개론서 몇 권만 들춰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기 혐오, 불안, 질투,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 피해망상, 자포자기, 자기 파괴 혹은 자살충동이 우리 자신의 사고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수많은 임상실험 그리고 실제의 치료들이 증명하듯이, 우리가 일정한 항우울제 혹은 적절한 치료제를 투여받게 되면 그러한 사고는 사라진다. 이는 그것이 우리가 믿듯 우리 사고의 작용이 아니라, 단순한 하나의 의학적 증상, 즉 뇌하수체 호르몬 분비 상의 이상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나 자신 정신분석 치료를 통해 그러한 사고가 일정한 기간 동안의 상담 이후 사라지는 것을 직접 수 차례나 체험하였기에 나는 이러한 의학적 지식을 몸으로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물론 나도 처음엔 의사의 이런 설명을 믿지 않았다. 그저 환자인 내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혹은 내게는 위험한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이것이 이른바 정신에 관련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고통받는 점이다. 그것은 육체의 가시적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은 물론 그 스스로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사고인 줄로만 안다. 그리하여 증상은 더욱 더 악화된다. 타인들은 그것이 꾀병 혹은 그의 자발적 사유라고 생각하고, 당사자들 역시 이를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여 결국 그의 죄책감과 고통만 더 하여지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에 관련된 질병들이 갖는 일반적인 악순환의 전형이다.

나는 내 병을 고치려고 프로이트와 그와 관련된 정신의학, 심리학의 거의 모든 책들을 다 읽었다. 내가 아픈 것은 1984년 겨울부터인데, 그후에도 열심히 챙겨 읽었지만, 적어도 1990년 정도까지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와있는 거의 모든 관련서들을 사서 혹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노트를 만들어가며 하나하나 꼼꼼히 읽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놈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독일 출신의 미국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을 읽다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당시의 나로서는 가히 '황당한' 개념을 알게 되었다. 자기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자기를,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 자기를 '사랑'하다니 ... 후에 내가 알게 되고 전공까지 하게 된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의 말을 따르자면, 자기를 '배려'하다니 ... 나는 그말이 마음에 들어, 최근까지도 수업 시간에, 예전의 나와 같이 혹은 아마도 지금의 내가 여전히 아직 조금은 그러하듯이, 자기를 혐오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그 말을 해주곤 했다.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라."

물론 이때의 이해란 이해의 일반적인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사용된 말이다. 수학공식을 이해해듯이 나의 생각을 정확히 알고 이해해라. 그리고 네가 너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감하고 그를 이해하듯이 너 자신을 이해해라.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self-love)은 프롬에 따르면 이기주의(selfishness)가 아니다.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이기주의자들이 자신만을 사랑하며, 남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물론 그들이 남들을 사랑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자들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자기를 찾는 인간>>, 종로서적). 사랑은 능력이다, 사랑은 그러한 능력을 배우고 갈고 닦고 연습하고 실패를 통하여 배우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하나의 능력이다(<<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이는 원제 <the art of loving>에서 잘 드러나듯이, 수동적인 <사랑받기의 기술 the art of being loved> 아니라, 적극적 행동으로서의 <사랑하기라는 기술>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이때의 기술은 모든 것의 제작, 만듦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테크네 techne>에서 온 것이다. 테크네가 이후 라틴어 <아르스 ars>가 되고 이것이 다시 영어 <아트 art>가 된다. 그리하여 19세기의 일본인들이 이를 예술과 기술이라는 이 단어의 두 가지 의미로, 때에 따라, 적절히 번역했다).

프롬에 따르면,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we don't fall in love)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함께 크는 것,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we grow up in love). 다시 말하면, 보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아직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주는' '적절한' 상대를 만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자신과 타인을 '사랑할 줄을 모르기 때문', 우리가 '아직 사랑하기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는 사랑의 크가와 깊이는 당신이 삶에 대하여 보고 느끼고 있는 인식의 크기와 깊이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능력이다. 나의 말로 하자면, 이는 마치 이해가 하나의 능력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남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이 들려주는 이야기, 자신의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물론 이는 철학적으로 불가능한, '순진한' 표현이나 여기서는 편의를 위하여 그냥 사용하자)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해석한다. 자신의 말, 남의 말, 자신과 남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 들을 줄 아는 능력은 말하자면 말되어진, 혹은 말로 된 것 이상의 것, 즉 그 말하고 있는 사람이 그 말을 통하여 원래 말하고자 했던 것까지 헤아려 들을 줄 아는 능력, 그의 드러난 말과 행동에 사로잡히지 않는 능력,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볼 줄 아는 능력이다.

그런데 최근에 한 학생의 블로그를 읽다가 이런 글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

나는 학생이 아마도 아무렇지도 않게 썼을 이 '평범한' 한 문장을 읽고 약간의 지적인 충격을 받았다. 이 학생은 글도 좋고 수업태도도 무척 좋은 여학생으로서, 아마도 - 이러한 말이 '성차별'이 아니라면 - 여학생들 특유의 자의식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고민으로, 즉 자신만의 문제의식으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그러한 학생이었는데, 이 짧은 글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을 터이다. 여하튼 나는 이 글을 읽고 작은 혹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철학적 전말은 이러하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우리의 사소하고도 시시한 일상에서 정확히 무엇을 어떤 행동을 하는 것, 어떤 태도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런데 도대체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은 가능하기나 한 말인가?

그렇다. 한 마디로 나의 충격은 '분석철학적 충격'이었다. 즉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도대체 정확히 무슨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더욱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은 또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마치 '내가 나의 애인을 사랑하듯이' 사랑한다는 말인가? 내가 나를 보고 싶어하고, 나와 없으면 내가 못 견뎌하는가? 물론 그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말은 내가 나를 참으로 위해준다는 말인가? 그런데 '참으로'란 무엇인가? 쉽게 이런 비유를 해볼 수 있겠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을 일러 내가 그를 '참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확실히 그를 '망치는' 길에 오히려 가까울 것이다.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오늘과 그의 미래에 대하여 내가 생각키에 참으로 그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참으로'를 설명해야 하는 문장 안에 '참으로'가 다시 나온다. 그리하여 이 말은 순환논증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의 일정한 의미를 밝혀준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행하되, 그의 단기적 말초적 이익 이상의 어떤 것을 보고, 멀리 보고, 행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그의 의사를 존중하는 행위, 그의 말과 느낌, 생각과 기분을 존중해 주는 행위이다. 이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느낌과 의사와 기분과 생각을 들어주는 행위, 그것들을 정확히 아는 행위, 그리하여 그것을 존중하여 주는 행위이다.

나에 대한 사랑이란 이렇게 나에 대한 인식과 분리되어질 수 없다. 나에 대한 앎 없이 나에 대한 배려란 무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기란 때로 참으로 쉬운 일인 동시에 때로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남이 아니라 나에게 정직하기,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보인다는 것, 하이데거의 말대로 무책임한 군중으로서의 '사람들'(das Man)이 아니라, 진실된(authentic) 자기 자신을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실로, 때로 귀찮으며, 때로 두려운 일이 될 수도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의 느낌과 생각, 의지와 소망에 대한 정확한 앎 없이 나 자신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행하기란 불가능하다.

나의 또 다른 학생 하나는 나에게 남긴 방명록에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라고 적고는, 이렇게 스스로 답했다.

"나는 그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아마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에 대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한 행동들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닐까."

맞다. 그리고 이때의 '자기에 대하여 책임지기'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의 하나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정확히 알고 이해하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배려를 행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자신의 윤리학 저서인 <실천이성비판>>에서 실천이성의 준칙으로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항상 자신과 타인의 인격에 대하여 그것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

어린 시절 나는 이 문장이 <타인>에 대한 것이라고만 기억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공부를 하며 다시 책을 자세히 읽어보니 <자신과 그리고 타인들에 대하여>라고 되어 있었다. 그렇다. 내가 나에게 남이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도 우리는 '그것을 하는 나'와 '그것을 하는 나를 바라보는 나'로 분리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불교 혹은 후설의 현상학이 말하는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y)이다. 의식 자체란 없으며, 오직 무엇에 '대한' 의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대상이 없는 혹은 내용이 없는 의식, 즉 '의식 자체'란 없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남이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남인 나'를 내가 정확히 알고, 그를 올바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이해하며, 그리하여 그를 배려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글을 마칠 시간이 되었다. 불현듯, 젊어 죽어 우리에게 '영원한 청년'으로서 기억되는 시인 윤동주의 <서시> 중 한 귀절이 떠오른다.
나도, 그를 따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009. 05. 16.

2012. 4. 24.

끔찍함과 죄책감

지난 수첩을 뒤적이다가 전에 정리해 올리려고 적어둔 메모를 발견했다. 그런데 문제는 책 제목이 적힌 부분이 찢어져 나가 어느 책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 혹은 유럽에서 나온 심리학 관련 번역 서적이었던 것은 확실한데,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나는 이런 우연을 사랑한다. 아래에 옮겨 적어본다.

1.

상대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그가 자기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일은 몹시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가 오랜 세월 동안의 전문적인 수련을 쌓은 의사가 아니라면, 때로 몹시 위험한 일이 되기도 한다.

2.

자기 내면에 의타적이고 고집이 세고 겁먹은 아이가 숨어있는 성인들이 많다. 아주 어린 나이에 심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을 경우 성장이 멈출 수 있는 것이다. 부모가 한 명의 여자와 남자, 즉 하나의 성적인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는 순간 진정한 성장이 시작된다. 이렇게 과감하게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어른'이 되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3.

피상적으로 보았을 때 한 사람이 분명 자신에게 손해를 주는 고통스러운 인간관계 혹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빠져 있고 더욱이 그것을 지속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심층을 들여다 보았을 경우, 그는 분명 그것으로부터 어떤 이익을 얻는다. 이것이 심층 심리학이 탐구하는 바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그러한 관계에의 집착 혹은 지속이 자신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 주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혹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현실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희망적 예측, 개인적인 소망 혹은 두려움이 아니라, 때로 인간은 끔찍한 진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 과정은 하루이틀에 끝날 것도 아니요, 때로 오랜 시간 혹은 평생이 걸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숙한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위안을 찾는다면, 오늘과 훗날의 더 큰 고통만을 받게 될 것이다.

4.

기꺼이 죽으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죽음은 우리에게 살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 묻지 않는다. 인간 고유의 한계성, 자기 고유의 소망과 가능성들의 근본적 한계를 인정할 때, 인간은 참다운 내면적 자유를 얻게 된다.

5.

당신이 스스로를 그리고 상대를 놓아준다면, 두 사람 모두는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자기 본연의 모습대로 있게 해준다면 말이다. 당신 곁에 그를 붙잡아 두려 하지 않는 것, 혹은 당신의 소망과 결정대로 그가 움직여주기를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는 것, 상대의 모습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 상대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 상대의 의견과 태도를 바꾸어 보려는 당신의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당신은 영원히 그러한 감정과 태도의 노예가 될 것이다. 상대가 아니라, 당신이 변해야 한다.

6.

상대에 대한 '지나친' 헌신은 때로 상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부족이다. 때로 그러한 행동의 이면에는 자신이 무가치하며, 근본적으로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숨어 있다. 그가 행하는 상대에의 지나친 혹은 '완벽한' 헌신은 어린시절 그가 자신의 부모로부터 받기를 원했던 그러한 사랑의 재현이다. 그는 상대를 위하면서 사실은 자기 어린시절의 무의식적 소망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7.

당신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의 뿌리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당신의 그 죄책감은 언제, 어느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 사랑과 분노가 겹쳐지는 곳에서 죄책감이 시작된다. 만약 아이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부모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다면 그는 성인이 되어 정당한 죄책감과 강박적인 죄책감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부모에 대하여 사랑과 분노를 동시에 품고 있는 아이, 그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당신이 행동함으로써 바뀔 수 있다. 당신의 공격성을 글로 적어보라. 그리고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방식으로 당사자에게 차분히 말로 해보라.

8.

일반적으로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남자들은 어린 시절부터는 일반적으로 공격성의 표현이 상대적으로 더 용인받기 때문일 것이다.

9.

심리치료사 밀튼 에릭손은 행복한 어린 시절을 갖기에 너무 늦는 때는 결코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때이든 언제든 자신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다시 살 수가 있다. 인간은 인생의 어느 때이건 상처받은 자신감, 잃어버린 자존감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자존감, 자신감을 구축할 수 있다.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라.

10.

당신이 어떤 상황, 어떤 곳에 있던 상관없다. 뇌는 인식기관임과 동시에 매일매일 새로이 구축되고 구성되는 사회적 기관, 학습기관이다. 당신의 새로운 행동은 새로운 기억 세포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생리학적, 생물학적 사실이다. 행동해야 할 때, 그것은 바로 지금이다. 전문가에게 당신의 문제를 털어놓을 진정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한 번밖에 없는 당신의 삶은 당신의 것이다.

11.

아무 말없이 헤어지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헤어지는 데에도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있는 것이다. 상대에게 자신의 이유를 분명히 말로 표현해주지 않는 경우, 그는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고, 회복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마지막 말로 두 사람은 더욱더 큰 고통에 잠시 빠질 수도 있겠지만, 이는 과거를 잊고 각자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 나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12.

걱정거리, 괴로움이 몰려올 경우, 하루에 10분 혹은 30분 정도라도 자신의 걱정거리를 위한 시간을 따로 내어야 한다. 가능하면 특정한 같은 장소에서 이를 행하는 것이 좋다. 당신의 이불 속, 침대 위, 소파 위, 의자 위, 조용한 산책길, 집 위의 옥상, 떡갈나무 아래에서 당신의 고통과 원한을 괴로움을 두려움을 스스로에게 토로해보라. 억지로 그러한 것들을 억누르고 있는 것보다 스스로의 에너지를 갈아먹는 것은 없다. 걱정을 스스로에게 드러내고 그것이 현실적인 것인지, 망상적인 것인지, 실제로 일어날 것인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보라.

13.

걱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글로 써보라. 불완전한 당신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법을 배우라.


* 2009

자기 분석의 테크닉 2

행복을 상상하지조차 못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이다. 이는 마치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이 세상의 모든 가정이 원래 다 불행할 거라고, 가정 자체가 다 불행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일이다.

그런데 내가 깨달은 것은 그러한 내게는 '당연'한 것으로, 심지어는 '자연'적인 것, '필연'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이 느낌이 만들어진 것, 구성된 것이며, 그리하여 적절한 치료, 치유 행위를 통해 사라질 수 있다는 위대한 심리학적 사실이었다.
모든 사람은 개인적 신화를 만들어 그 안에서 실제로 살고 있으며, 외적인 삶은 차라리 우연적이며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C. G. 융의 말은 만고의 명언이다.
나는 언제나 홀로 달 위 사는데, 핵심은 지구는 밝고 따뜻하고 사랑에 넘치며, 달에는 나밖에 없고 나는 외로움과 고통에 몸부림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신화다.
그리고 그 신화를 정확히 알수록 사람은 자신의 신화를 새로 쓸 수가 있다. 나는 내가 나의 신화 안에서 불행하기 때문에 실제로 불행하며, 나의 신화가 신화임을 몰랐고, 심지어는 내가 그 안에서 나의 삶의 대부분 혹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나는 오늘 내가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그렇지 않은 상태에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게는 그렇게 확실하고, 자연적이며, 필연적이고, 변경 불가능한 것, 바꿀 수 없는 것, 이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느껴오던 감정이나 이미지가 치료를 통해 실제로 사라져 버리는, 그리하여 다시는 돌아오지도, 생각조차도 나지 않게 되는 경험을 함으로써 그러한 사고가 '변경 가능한 것'임을 알았다.
나는 나를 더 정확히 알고, 나를 더 이해하면,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 배려,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저절로 생겨나는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나를 더 알고자 한다.


나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멋으로 폼으로 혹은 치기어린 진지함을로 읽던 어린 시절의 그 불건강한 책들을 요즘 다시 본다. 아무리 늦었다라도 인간은 자신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다시 살 수 있다는 말은 정말 천하의 명언이다. 나는 그 당시 겉멋에 혹은 나름의 진지함으로 인상주의 시들, 이상, 전혜린, 니체, 카뮈, 지드, 콜리지, 워즈워드, 같은 사람들의 책들을 지금 생각하면 '병적인 방식으로' 읽었다.
당시 내가 읽은 니체와 카뮈는 오늘날 보면 완전한 오독이며 어이 없는 독서이다.
멋 있어지고 싶다는 것. 내가 생각하기에 젊은이들 마음의 병에 걸리는 가장 큰 이유는 멋있어지고 싶다는 것, 아니 멋있게 보이고, 그것을 보아주는 자가 심지어 자기 자신일지라도, 싶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묻는다.


정말 멋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반농담 삼아하는 말이 하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다. 몸의, 그리고 특히 마음의, 건강이다.
남에게와 꼭 마찬가지로, 너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너에게 잘 해줄 도리는 없는 것이다. 너를 네가 모른다면, 너는 너도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다. 너는 네가 행복한 만큼만 남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가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우스개 말일 터인, '소크라베이컨'의 말 "너 자신을 아는 것이 힘이다"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란 사람의 내가 좋아하는 말 하나를 적으며 글을 마쳐본다.


"나는 자기에 대한 배려가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존재론적으로(=본질적으로) 우선한다고 믿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배려가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윤리적으로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