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8.

파르헤시아, 아시아류

 


<희랍문학사> - 마틴 호제 / 김남우
       
고대의 후반에 구희극은 본질적으로 정치극이었다. 희극 작가들은 고위층 인사, 그러니까 페리클레스 정도 되는 지도자급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실명을 언급해가며 그 사람됨이나 잘못, 악덕을 낱낱이 고발하는 등, 전대미문의 일을 벌였다. 고대의 문학은 이런 유의 공격을 정쟁에 비방 선전문을 도입했던 정치적 출판물로부터 배워왔다.

구희극의 이러한 특성은 분명 구희극 안에 녹아든 사회적 관습에 기인한다. 조롱극이나 가면극 등의 전통에 5세기 아테네의 공공생활이 가진 또 하나의 원리가 추가되었던 것이다: 시민들이 가진 언론의 자유, 즉 '직설(파르헤시아, parrhesia)'(Scarpat 1964년)이 그것이다. 정치적 희극이라 단정할 만한 흔적이 5세기 중반 이전에는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신랄한 정치적 풍자가 아티카 지방에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시기에 비로소 유행하였고, 이것이 희극에 가능성을 제공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155)


기원전 1세기에는 언어적 준거를 다시 규정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이때에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의 아티카 방언이 문장연습의 모범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런 아티카풍은 우선 로마에서 활동한 희랍 출신 수사학 선생들이 로마의 학생들에게 적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Gelzer 1978년). 아티카풍을 내세운 수사학 선생들은 소아시아의 수사학 학교에서 배우는 언어와 문장을 '아시아류'라고 깎아내렸다. 옥타비아누스가 패배한 안토니우스를 '아시아놈'이라고 낙인찍어 버린 것에 고무되어 희랍문학에서 아티카풍이라는 개념이 급작스럽게 유행하였다.

기원전 30년 이래로 로마에서 모여 호라동하던 희랍 출신 변론술 선생들은 이런 흐름에 이끌려 아티카풍의 수업을 마련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이름만으로나마 전해지는 바, 시킬리아 섬의 칼레악테 Kaleakte 출신 카이킬로스 Kaikolios 는 <아티카풍과 아이사류의 차이에 관하여 Tini diapherei ho Attikos zelos tu Asianu >와 아티카풍에 관한 저작을 지었다고 한다 [...] 이 모든 저작들은 하나같이 따라해봄직한 아티카풍의 문장연습본을 중심으로 씌어져 있다

기원후 1세기를 거치며 아티카풍은 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문자로 기록되는 모든 영역에서 복고풍이 일었으며 이로써 일상언어와 갈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리는 문학사적으로 커다란 결과를 가져온다. 옛것을 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강제 때문에 작가들이 아티카풍을 참고할 수 있도록 돕는 뜻에서 사전류들이 만들어졌다.

[...]

과거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보면 아티카풍은 기껏해야 교육제도의 전반적 보수주의적 경향의 한 부분이며 경직된 사고를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더 이상 문화적 내지 정치적 중심이 존재하지 않던 희랍 언어권에서 아티카풍과 그 교육기관은 남부 프랑스에서 유프라테스강 지역에 걸쳐 여기저기 살고 있는 희랍어를 아는 지배 계층의 문화적 공통분모로서 500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공통 분모로 인해서 문화적, 인종적 차이는 쉽게 무시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생활 구어와, 문학어 즉 '배운 사람들의 언어'는 점점 더 확연히 달라졌다. 하지만 아티카풍의 엄격한 규준과 교육제도의 엄격한 규율이 문학어를 통한 상호교통을 보증하였으며 또한 문학어를 쓰는 사람들의 규합을 가능케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아티카풍은 로마제국의 안정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272-274).


* 맺는말


희랍문학은 언제 끝맺는가?


529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를 폐교시킨다. 530년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는 몬테가시노에 수도원을 설립한다. 제국의 동방에서도 서방에서처럼 단절이 존재하는가? 이제 '비잔틴 문학'은 희랍의 양식과 전통을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희랍세계의 정신적 중심은 이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된다. 파울루스 실렌타리우스는 논노스의 맥을 잇는 시인이라 하겠다. 563년 1월 6일 '소피아 성당'이 대대적인 수리 공사 후에 새롭게 봉헌되었을 때 그는여섯 소리걸음으로 축제의 시를 지었다. <소피아 성당 소묘>라는 시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