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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29.

emmanuel levinas


엠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95
 
 
 
Emmanuel Levinas on his early relationship with Maurice Blanchot.
From Hugo Santiago's 'Maurice Blanchot' (1998).

 
 
 
 
 
Levinas: The Strong and the Weak (English Subtitles)
 
 
 
 
 
On June 29 1993 Michel Field interviewed Emmanuel Levinas on the occasion of the recent publication of "Dieu, la Mort et le Temps", a collection of Levinas's course materials. Field questions Levinas about the lateral character of his approach to philosophy at the crossroads of different civilizations. Levinas also talks about one of his favourite themes, the relation between one human and another, which consists of transcendence, "the exit from oneself".
 
 
 
 
 
Emmanuel Levinas: Being in the Principle of War (English Subtitles)
 
 
 
 
 
 
 
 

 

2012. 7. 28.

앎의 본질

 






<유고 (1885년 가을-1887년 가을)>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이진우
       
5[10]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뭔가 낯선 것을 알려진 것, 익숙한 것으로 환원하는 것. 첫 번째 기본 원칙 : 우리가 익숙해진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수수께끼,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새로운 것, 낯설게 만드는 것에 대한 감정의 둔화 :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의심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 탐색은 인식하는 사람의 제일 본능이다 : 물론 규칙의 확인으로써 ‘인식된’ 것은 전혀 없다! -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의 미신 : 그들이 고수할 수 있는 곳, 즉 현상들의 규칙성이 단축시키는 정식들의 적용을 허용하는 곳에서 그들은 무엇인가가 인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안정성’을 느낀다. 그러나 지적 안정성의 배후에는 두려움의 진정(鎭靜)이 있다 : 그들은 규칙을 원하는데, 그것은 규칙이 세계에서 두려움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학문의 배후 본능이다. / 규칙성은 묻는(즉, 두려워하는) 본능을 잠들게 한다. “설명한다”는 사건의 규칙을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칙’에 대한 믿음은 자의적인 것의 위험성에 대한 믿음이다. 법칙을 믿으려는 선한 의지는 학문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특히 민주 시대에)


7[3] <제3장. 진리에의 의지> [...] C. 새로운 것공포를 일으킨다 : 다른 한편, 새로운 것을 새롭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포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 경악은 약화된 공포다. / 낯익은 것은 신뢰를 불러 일으킨다 / ‘진실한’ 것은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 관성은 외부의 어떤 인상에도 우선 동일화를 시도한다 : 다시 말해서 인상과 기억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반복을 원한다. / 공포구분, 비교를 가르친다. / 판단 속에는 의지(그것은 그러그러해야 한다)가 일부 남아 있고 쾌락의 감정이 일부 남아있다(긍정의 즐거움 :) / 주의. 비교원래 활동이 아니라 동일하게 취급하기다! 판단은 원래 어떤 것이 이러이러하다는 믿음이 아니라, 어떤 것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의지다. / 주의. 고통은 가장 거친 형태의 판단(부정하는). / 쾌락은 긍정 / ‘원인과 결과’의 심리학적 발생에 관하여



*** 




앎의 본질은 공포와 불안의 해소라는 이 말.

내가 모르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공포를 주며 나의 정체성과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모르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미 내가 아는 것, 이해하는 것, 곧 위험하지 않은 것, 안전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이 앎과 지식, 진리와 학문의 본질적 동기라는 니체의 이 말.

앎, 인식이란 내가 아닌 것, 나와 다른 것, 내가 알지 못하고 사실은 알 수 없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이라는 도식 속에 집어넣어 너를 잡아 먹어버리는 행위, 동일자에 의한 타자의 복속이라는 이 말.

니체의 이 말은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게 만든다!

레비나스의 "윤리는 타자로부터 온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읽혀야 한다.






2012. 7. 1.

존재에의 용기

 
한 2주 전이던가 제자 하나와 차를 마시는데, 그 학생이 내게 말했다. "저는 제 존재가 무의미한 것 같아요. 제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아요." 나는 그 학생에게 그렇지 않다고, 네가 죽으면 내가 슬플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지난 학기 내 수업을 들은 또 다른 한 제자는 내게 낸 리포트에서 자신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으며, 그리하여 자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을 생각한다고 적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의심으로 이루어진 그 대화의 말미에서,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논리적으로는 나도 몰라, 너를 설득할 수도 없을테고, 아마 가장 정직한 사실은 인간이 존엄하지 않으면 너도 나도 다 죽어버릴테고 그러면 세상이 무너질테니, 그런 걸 발명해 낸 걸꺼야. 난 그런 건 다 모르겠고, 다만 내 제자여,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만, 네가 죽지 말기를, 그러면 내 마음이 아플테니 말이야."
  
리포트를 읽다가 마음이 먹먹해진 나는 그 제자에게 문자로 소크레테스의 마지막 문장을 그대로 옮겨 보내주었다. 잠시 후 제자는 나에게 몇 통의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내왔고, 마지막 문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도 남만 챙기지 마시고, 자기도 챙겨주세요. 자기는 소중하잖아요." 나는 이 문자를 '보호'로 지정하여 지금도 간직하고 종종 클릭하여 보곤 한다. 내 삶은 이제 적어도 학생들과 함께 하는 동안은 무가치하지 않은 걸까? 시간만이 말해 줄 것이다.
  
젊은 시절의 나는 자기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느끼는 것, 자기혐오, 삶의 무의미, 외로움, 고독에 대해 생각했다. 이해받지 못함, 이해받고 싶음. 나, 나도 그랬다. 이십 대 젊은 시절 이후 나는 내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 더 나아가, 이기적이고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기 밖에 모르는 끔찍한 인간, 한 마디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고통 받았다. 나는 끔찍한 자기혐오에 빠져 내 이십 대의 거의 전부를 보냈다.

  
칼 융의 자서전을 보면 자신을 찾아오면 마흔이 넘은 환자들을 어떤 경우에도 예외 없이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 몸과 더불어 마음의 병을 가진 자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정말 탁월한 통찰이다. 다만, 나로서는 그 나이가 마흔 살이 아니라, 한 스무 살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물론 이 존재의 의미, 삶의 의미, 나의 의미는 문제는 철학적인 문제이다. 사람이란 자신이 왜 사는지 그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일상에서 그 의미가 매일매일 실현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내가 수업 시간에 "'보편적 가치에 대한 헌신'(도올의 말이다)이 없는 삶은 가히 무의미하며,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은 진심으로 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가령 한 인간이 생각하기를, 내가 잘 되고, 내가 잘 살고, 내가 좋은 책을 써서 사람들이 나를 칭송하고, 내가 잘 생겼고 아름다우며, 내가 좋은 직장을 갖고, 내가 쿨하고, 내가 돈을 잘 벌고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이 나 이외의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이런 생각이 의미 없는 무의미한 악한 생각이라는 것이 아니라(이러한 자신에 대한 건강한 긍정은 매우 생산적인 것일 수 있다), 단지 그것만에 그친다면,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무의미하게(혹은 오히려 고통의 원천으로서) 느껴진다는 그런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나만의 세계가 지옥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것에 흥미가 없다(이는 물론 자기도 건사 못하고, 경제적 능력도 없는 무능력 상태를 찬양하는 것이 물론 아니다, 그리고 나는 부자도 아니지만, 가난하지도 않다. 지난 20년간 한 눈 팔지 않고 노력한 댓가로 지금 나 쓸 것은 있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과의 대화, 나와의 대화, 소통을 바란다.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가 말하는 저 존재에의 용기, 자기가 되려는 용기. courage to be (yourself).
 
 
 



폴 틸리히에 대한 쉽고 무난한 소개는 다음의 책이다.
 

  
 


틸리히의 책 <<존재의 용기>>에는 '현대의 가장 절박한 위기인 무의미와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이라 부제가 붙어있다. 맞다. 근대성과 현대성을 연구하는 학자인 나는 이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안다.
 








 
 
추체험적으로, 추사유적으로, 적어도 서양의 근대가 데카르트의 "(신이 아닌) 내가 생각함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위대한 인간 선언으로 시작되었다면, 현대는 바로 니체의 "신이 죽었다"는 선언에서 시작된다. 니체의 철학은 데카르트 철학의 필연적 귀결들 중 하나이다. 그것이 그의 <<안티크리스트>>이며,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기독교 도덕에 대한 분석이 <<선악의 저편>>과 위대한 걸작 <<도덕의 계보>>이다.

 
 
  
 






서양에서, 삶과 존재의 의미를 보증해주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던 신이 죽었을 때, 인간이 빠지는 필연적 귀결은 키에르케고어적 '공포와 전율', '죽음에 이르는 병', 즉 '불안'이다.


  
 




  
이것이 하이데거적인 인간, 삶에 단 하나의 확실성이라고는 죽음밖에 없는 존재, 즉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인간, 현존재가 겪는 '불안'이다.




 
 

 
이제 서양인에게 남겨진 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를 '발명'해내는 것이다. 그것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그리고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과제이다.
 
 





 
그리고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그의 자서전이 바로 <<말>>이다. 내가 아는 최고의 자서전이다. 이번에 행복하게도 민음사에서 새 번역이 나왔다.





 
 
 
그리고 내가 젊은 시절 좋아하던 카뮈의 '이방인'은 '여자를 안고, 압쌩트 주를 마시며,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신을 믿지 않고, 자살이 해결책이라 생각하지 않는, 그리고 아직은 친구가 없지만(동료인간으로서의 친구는 <<페스트>>에서 생긴다), '삶을 다 사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하며, 자기 확신에 찬" 인간이다.

 


 

  
‘부조리'는 인간에도 세계에도 속하지 않으며, 다만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의 그 과정 자체에서, 육체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그와 더불어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한다.




 
 
 


이것은 사실상 키에르케고르, 니체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실존주의'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운 나는 내 삶의 무가치함, 무의미함이 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 이 세계, 이 서양, 결국은 인간의 문제임을 안다. 이는 마치 미국에서 자살하는 흑인 자신이 그것을 자신만의 문제로 생각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 그가 속한 사회, 세계의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 제자에게 말한 것처럼, 내가 느끼는 내 삶의 실존적 무가치함으로부터의 구원은 나르시시즘적 자아, 즉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너'로부터 온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나와 너의 대화에서 온다(이것이 또 다른 신학자 마르틴 부버의 <<너와 너>>이다).
 


 
   
 
 
더 나아가 구원은 내가 '우리'라 생각하는 나나 네가 아니라, '그'로부터 온다. 그의 '얼굴', 그의 '눈'을 바라보는 나는 네가 나와 똑 같은 인간임을 안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이 그것이다. 내가 무심한 '그'가, 내가 죽이는 '타인'이 하느님이다.




 
 
학생들은 내가 그들의 고민과 즐거움과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듣고 대화를 나눌 때, 아마도 내가 그들을 '구원'해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물론 그들을 구원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구원은 자신만이 한다. 나는 다만 그들의 말을 '들어줄' 뿐이다. 좋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은 그들이 바로 나를 구원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존재가 나를 구원한다.
 
 
 
많은 사람이 책에서 읽어 알고 있는 것처럼, 참으로, 철학과 일상은 둘이 아니다. 그리고 존재의 무의미, 나의 무의미를 해결하기 위해 오늘도 필사적으로 삶을 사는 나는 이 정도 서양화, 서구화 되었다. 나의 가장 깊은 고민은 공자와 주자와 퇴계와 다산의 것이 아닌 데카르트와 니체와 하이데거와 부버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서양'만이 아닌,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다.
 
 
 
네가, 그가, 이 '관계성'이, 이 대화가, 이 소통이 바로 내 존재의 의미를 구성한다. 네가, 그가 없이는, 나와 나의, 나와 너의, 나의 그의 대화가, 소통이 없이는, 내가 없다.
 




2008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