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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8.

계림수필 - '구원'의 죄악







<계림수필 - 봉혜처럼 살리라>, 김용옥

       
2009년


8월 13일(木)


인생이란 허망한 것이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8월 16일(日)


* 사랑도 압제가 될 때에는 해방의 대상일 뿐이다.


* 대오大悟는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다가온다. 무여대오無餘大悟를 말하는 돈오자頓悟者는 궁극적으로 사기꾼이다.



9월 11일(金)


* 사람의 과거는 결코 아름다운 것일 수 없다. 그것을 아름답게 이상화하는 자는 모두 오늘을 잘못 살고 있는 자들이다. 과거가 미화되는 것은 오늘까지의 삶이 퇴행적退行的이기 때문이다.


9월 16일(水)


철학이란 궁극적으로 체계가 아니다. 체계가 되면 그것은 한정되고, 도그마가 되어버린다.



10월 11일(日)


* 나의 몸에 관한 정보는 반드시 나 스스로 증득證得해야 한다. 그리하면 체질론의 금기도 신경쓸 필요가 없어진다. 건강에 관한 시중의 정보는 아무리 과학적 검증을 빙자해도 모두 알고보면 의료식품 산업로비와 조작의 결과이다. 건강에 관한 정보는 근원적으로 보편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다양한 구조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몸의 상황성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정보'는 몸의 리듬을 무시한 무시간적 관념의 나열이기 때문이다. 건강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텔레비젼을 꺼라!


10월 14일(水)


* 인간은 심오한 타인의 내면에 직접 관여하면 안 된다.


10월 21일(水)


* 합리적 사고란 전체를 보는 것이다.


10월 22일(목)


* 이 세상엔 참 가슴아픈 일이 많다. 인간이 너무도 억울한 일로 터무니없는 좌절을 당했을 때 우선 자신의 정결함으로써 마음의 건강을 다스려야 건강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과거의 쓰라림을 되돌아보지 말고 다가오는 앞날의 가치를 찾는 것이 더 소중한 일이다. 억울한 일은 반드시 풀린다. 그 억울함 때문에 오늘의 '나'가 다쳐서는 아니 된다.


10월 26일(月)


* 남의 인생에 관심을 갖는 사람, 그러면서 친절과 호의를 베풀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사람은 대부분 정신병자들이다. 타인의 인생은 그 본인의 도움의 요청이 있을 때에 한하여 진지한 관심이 요구되는 것이다. 평소에 멀쩡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없는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죄악이다.


* 특히 '인간은 구원되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모두 잘못된 사람들이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성직자야말로 구원이 대상이다.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오직 스스로의 규율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인간은 구원의 대상(the object of Salvation)이 아니라 삶의 주체(the subject of Life)이다.





* 구원의 열정에 빠진 사람들은 암암리에 타인의 불행을 희구한다. 행복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아량이 없으며 무엇인가 불행의 씨앗을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본다. 그래서 한 꼬투리라도 발견하면 구원의 친절을 베풀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행복하고 유복한 자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자기존재의 우위를 확인하고 스스로 즐거워한다. 이것이 대개 모든 종교의 본질이다. 구원의 기쁨이란 저주의 기쁨이요 마녀의 희열이다.


10월 27일


* 편식은 건강의 첩경이며, 편식을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최악이다. [...] 음식은 적절하게 몸 컨디션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것과 똑 같다. 그 선택은 편식이다. 편식을 잘하는사람, 그러니까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편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 한국의 지성이라고 한다면 어느 전공을 하는 사람이고를 막론하고 주희와 여조겸이 함께 편찬한 <<근사록>>과 양명의 <<전습록>> 이 두 권은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근사록(집해)>>은 이광호 역주로 아카넷에서, <<전습록>>은 정인재, 한정길 역주로 청계에서 출판되었다. 둘 다 공들인 번역이다. 읽을 만하다.


11월 2일(월)





*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학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스승을 만드는 것이다. 학생을 교육시킨다고 하는 것은 그가 자라 사회에서 스승 노릇할 수 있는 인물이 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학기學記>의 논지이다.










2012. 7. 27.

헤겔 - 역사 속의 이성

       





  * 프리드리히 헤겔, 『역사 속의 이성』, 임석진 옮김, 지식산업사, 1992.




“철학적 고찰은 우연적인 것을 떨쳐 버리는 것(das zufällige zu entfernen) 이외의 다른 어떤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 우연성이란 외적 필연성, 즉 그 자체가 한낱 외적 사정에 지나지 않는 원인에 귀착되는 필연성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의 보편적 목적, 즉 세계의 궁극목적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주관적 정신이나 심정이 지닌 어떤 특수목적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도 이때 우리는 그 궁극목적을 이성을 통하여(durch die Vernunft), 즉 그 어떤 특수한 한정된 목적이 아닌 오직 절대적 목적에만 스스로의 관심을 두고 있는 이성을 통하여 포착해야만 한다. 이 절대적 궁극목적은 자기 자신에 관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이를 자체 내에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이 자기의 관심사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속에서 스스로의 지주(支柱)를 마련하고 있는 그러한 내용이다. 이성적인 것은 즉자 대자적 존재자로서 모든 것은 이것을 통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지닌다. 이성적인 것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그러나 실로 정신 자체가 흔히 국민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형태 속에서 개진(開陳)되고 현현(顯現)되는 데서처럼 이성의 명백한 목적이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 이제 우리는 역사에 대하여 의욕의 세계(die Welt des Wollens)는 결코 우연에 내맡겨져 있지 않다는 믿음과 사상을 안겨주어야만 한다. 모든 국민이 겪어나가는 사건 속에서는 궁극목적이 지배적인 것이며, 또한 이성이 세계사 속에 있다는 것(Vernunft in der Weltgeschichte ist)-그러나 어떤 특수한 주관의 이성이 아닌 신적이며 절대적인 이성(die göttliche, absolute Vernunft)-이 우리가 전제로 하는 진리이거니와 이 진리를 증명하는 것이 곧 세계사 자체의 논구이며, 다시 이 논구야말로 이성의 상(像)이며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본래적 증명은 바로 이성 그 자체의 인식(Erkenntnis der Vernunft selber) 속에 깃들어 있거니와, 이 이성은 오직 세계사 속에서 입증될 뿐이다(in der Weltgeschichte erweist sie sich nur). 세계사란 오직 이와 같은 성질의 이성이 현상화된 것이며, 또한 그 속에서 이성이 현현되는 특수한 형상 가운데 하나일뿐더러, 더 나아가서는 모든 국민이라고 하는 특수한 요소 속에서 표현되는 원형(原型)의 모상(模像)이다.”(5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