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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6.

황상익, 근대 의료의 풍경

















나는 딱 한 마디만 하겠다.

참다운 우리나라 학문(國學), 참다운 보편사는
바로 이런 책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나도 바로 이런 작업을 지난 이십여년 간 해오고 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고독한 작업에 매달리신
황상익 교수님의 혜안에 존경의 념을 품는다.







2012. 7. 28.

계림수필 - '구원'의 죄악







<계림수필 - 봉혜처럼 살리라>, 김용옥

       
2009년


8월 13일(木)


인생이란 허망한 것이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8월 16일(日)


* 사랑도 압제가 될 때에는 해방의 대상일 뿐이다.


* 대오大悟는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다가온다. 무여대오無餘大悟를 말하는 돈오자頓悟者는 궁극적으로 사기꾼이다.



9월 11일(金)


* 사람의 과거는 결코 아름다운 것일 수 없다. 그것을 아름답게 이상화하는 자는 모두 오늘을 잘못 살고 있는 자들이다. 과거가 미화되는 것은 오늘까지의 삶이 퇴행적退行的이기 때문이다.


9월 16일(水)


철학이란 궁극적으로 체계가 아니다. 체계가 되면 그것은 한정되고, 도그마가 되어버린다.



10월 11일(日)


* 나의 몸에 관한 정보는 반드시 나 스스로 증득證得해야 한다. 그리하면 체질론의 금기도 신경쓸 필요가 없어진다. 건강에 관한 시중의 정보는 아무리 과학적 검증을 빙자해도 모두 알고보면 의료식품 산업로비와 조작의 결과이다. 건강에 관한 정보는 근원적으로 보편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다양한 구조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몸의 상황성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정보'는 몸의 리듬을 무시한 무시간적 관념의 나열이기 때문이다. 건강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텔레비젼을 꺼라!


10월 14일(水)


* 인간은 심오한 타인의 내면에 직접 관여하면 안 된다.


10월 21일(水)


* 합리적 사고란 전체를 보는 것이다.


10월 22일(목)


* 이 세상엔 참 가슴아픈 일이 많다. 인간이 너무도 억울한 일로 터무니없는 좌절을 당했을 때 우선 자신의 정결함으로써 마음의 건강을 다스려야 건강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과거의 쓰라림을 되돌아보지 말고 다가오는 앞날의 가치를 찾는 것이 더 소중한 일이다. 억울한 일은 반드시 풀린다. 그 억울함 때문에 오늘의 '나'가 다쳐서는 아니 된다.


10월 26일(月)


* 남의 인생에 관심을 갖는 사람, 그러면서 친절과 호의를 베풀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사람은 대부분 정신병자들이다. 타인의 인생은 그 본인의 도움의 요청이 있을 때에 한하여 진지한 관심이 요구되는 것이다. 평소에 멀쩡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없는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죄악이다.


* 특히 '인간은 구원되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모두 잘못된 사람들이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성직자야말로 구원이 대상이다.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오직 스스로의 규율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인간은 구원의 대상(the object of Salvation)이 아니라 삶의 주체(the subject of Life)이다.





* 구원의 열정에 빠진 사람들은 암암리에 타인의 불행을 희구한다. 행복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아량이 없으며 무엇인가 불행의 씨앗을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본다. 그래서 한 꼬투리라도 발견하면 구원의 친절을 베풀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행복하고 유복한 자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자기존재의 우위를 확인하고 스스로 즐거워한다. 이것이 대개 모든 종교의 본질이다. 구원의 기쁨이란 저주의 기쁨이요 마녀의 희열이다.


10월 27일


* 편식은 건강의 첩경이며, 편식을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최악이다. [...] 음식은 적절하게 몸 컨디션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는 것과 똑 같다. 그 선택은 편식이다. 편식을 잘하는사람, 그러니까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편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 한국의 지성이라고 한다면 어느 전공을 하는 사람이고를 막론하고 주희와 여조겸이 함께 편찬한 <<근사록>>과 양명의 <<전습록>> 이 두 권은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근사록(집해)>>은 이광호 역주로 아카넷에서, <<전습록>>은 정인재, 한정길 역주로 청계에서 출판되었다. 둘 다 공들인 번역이다. 읽을 만하다.


11월 2일(월)





*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학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스승을 만드는 것이다. 학생을 교육시킨다고 하는 것은 그가 자라 사회에서 스승 노릇할 수 있는 인물이 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학기學記>의 논지이다.










2012. 7. 26.

커피의 해악과 효능



 

<내 이름은 빨강 1> - 오르한 파묵 / 이난아
       
"자기 얘기에 도취된 후스렛 호자는 더욱 흥분해서 입에 거품을 문 채 계속 열변을 토했습니다.

<오, 나의 헌신적인 신도들이여! 커피를 마시는 것은 죄악입니다. 우리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께서는 커피를 들지 않으셨소. 커피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위궤양과 허리 디스크와 불임의 원인이 되는 사탄의 음료임을 아셨기 때문이지요. 또한 커피숍은 쾌락을 탐닉하는 돈 많은 한량들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 온갖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는 장소요. 그러므로 수도원보다 먼저 커피숍을 폐쇄해야만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커피 마실 돈이 어디 있겠소? 그런데 그들은 커피숍에서 커피를 잔뜩 마시고 정신이 몽롱해져서 그곳의 천한 잡종견들이 떠드는 이야기에 잔뜩 귀를 기울이고 심지어 그들이 하는 말을 진짜로 믿습니다. 나와 우리 종교를 비방하는, 바로 이런 자들이야말로 진짜 똥개들입니다!>"(32)



<내 이름은 빨강 2> - 오르한 파묵 / 이난아
       
"그들은 커피의 해악, 즉 눈과 위를 나쁘게 만들고 머리를 몽롱하게 하여 인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게 한다는 걸 강조하고, 유럽인들의 독(毒)인 커피를 아름다운 여자을 한 악마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주었다가 거절당했다는 에피소드도 얘기해 줬어요. 마치 밤의 여흥으로 교양을 배우는 것 같았죠. 집에 돌아가면 남편에게 <독을 많이 마시면 안 되요.>라고 잔소리를 할 생각도 했답니다."(240)




<광기의역사> - 미셸 푸코 / 이규현

"(2) 정화.

내장의 협착, 들끓는 잘못된 생각, 술렁이는 독기와 격한 감정, 체액과 정기의 부패 ... 광기는 동일한 정화 작업에 결부될 수 있는 일련의 치료법 전체를 불러들인다. [...]

그러나 주된 작업은 몸 속에 형성되어 광기를 결정적으로 유발한 모든 동요를 해소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한 것으로는 우선 쓴 맛의 액체가 있다. 쓴 맛은 바닷물의 매서운 힘을 모두 지니고 있고, 정화 작용을 하며, 병으로 인해 육체나 영혼에 쌓인 무익하고 해로운 모든 불순물을 부식시킨다. 쓰고 강한 맛의 커피는 <뚱뚱한 사람, 그래서 진한 체액이 가까스로 순환하는 사람>에게 유익하고, 위험한 열기 없이도 필요 이상의 습기를 없애주는 것이 이러한 종류의 물질에 고유한 속성이므로, 태우지 않으면서 건조시키고, 불꽃 없는 물과 같은 것으로서, 태우지 않고 정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불순물을 줄여준다.

<커피를 오랫동안 마셔온 사람은 커피가 위장병을 고친다는 것, 커피가 위장의 과도한 습기를 빨아들인다는 것, 커피가 장 속의 가스를 없애주고 장의 점액을 녹여 부드럽게 청소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느끼고, 특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 커피가 머리로 올라오는 술기운을 막고, 따라서 흔히 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바늘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완화시키며, 요컨대 생명의 정기에 힘과 활기를 주고, 생명의 정기를 청결히 유지시키면서도, 커피를 습관적으로 마시는 사람에게조차 상당한 열기의 느낌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1763년 퐁타무송에서 제출된 티리옹의 박사학위 논문 <커피의 사용과 남용에 대하여>, Thirion, De l'usage et l'abus du cafe, these soutenue a Pont-a-Mousson, 1763(Gazette salutaire, n. 37, 1763년 9월 15일 서평 참조))"

(498~5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