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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24.

잠언 05


 
Satyricon, 1998
 




0. 가장 비극적인 삶이란 '나만의 질문'을 아직 발명하지 못한 자의 삶이다.


1. 철학이란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게 당연하게 인식되는) '틀'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적 검토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 학문이란, 공부란 내가 배우는 이 공부와 나의 일상 생활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다. 달리 말해, 공부란 '내가 배우는 공부의 내용, 공부를 하며 내게 드는 생각, 그리고 지금 내 상황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이란 교육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다.


3.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철학에 있어 유일한 타당한 시제는 오직 '현재'이며, 그 주어가 어떤 경우에도 '나'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4. 학문이란, 가령 칸트의 책이란, 설령 독일인이 독일어로 그 책을 읽는 경우에조차, 하나의 외국어이다. 학문이란 하나의 엄밀한 약속 체계, 규칙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을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외국어 학습과 똑같이, 적어도 그 최초의 단계에 있어서는 상당한 양의 학습과 암기가 요구된다. 오랜 시간 그 언어의 단어, 문법, 용례를 지루하지만 꾸준히 외우고 습득한 후에야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고,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거나 기대하는 바와 달리, 적어도 그 최초의 시기에는 꾸준한 암기와 이해, 습득이 요구될 뿐,  토론할 바가 전혀 없다.


교육은 기계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가령 내가 라틴어를, 물리학을 배우고자 한다면, 상당한 시간을 성실히 라틴어와 물리학의 단어와 개념, 문법과 규칙, 용례와 공리 들을 외우고 습득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두 공부는 공히 토론할 일이 전혀 없다. 다만 라틴어와 물리학의 학습은 그 단계가 깊어지면서 점차로 그 성격이 달라갈라지는데, 전자는 여전히 이해할 일이 거의 없고 다만 그 용례들을 찬찬히 매 경우마다 살펴야 하는 반면, 후자는 자신이 습득한 개념들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된다. 철학은 물론 후자에 더 가깝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잘 보여준 것처럼, 전자의 특성도 가지고 있다.


물론 이상의 대비는 방편적인 것일 뿐 실제로 두 가지는 겹친다(물론 교육의 지향점은 민주주의적 인간의 확보이다). 이상의 요지를 종합하면 교육이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작동되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일이다.


5. 푸코의 최종적 관심 중 하나는 '아예 처음부터 자격이 박탈된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에 자격을 부여하는 '정당화legitimation'의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삶의 혹은 논의의 어느 과정, 어떤 시점으로부터 자격을 박탈당한 존재가 아니라, 아예 게임의 시작, 논의의 맨처음부터 자격 자체가 없는 존재로 가정되어 있다는 점이다(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다).


푸코가 찾아낸 해결책은 자격의 부여와 박탈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규칙들의 집합으로서의 인식론적 조건, 곧 장 자체가 힘 관계의 놀이에 의해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그 절대성, 보편성, 필연성, 곧 변경불가능성을 근본적으로 파괴하여 게임의 규칙 자체를 변형시키는 것, 곧 다른 게임을 하는 것이다.


정치적이든 심리적이든, 자격(과 그 박탈), 자격 있음과 없음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기준의 문제, 곧 정당성의 근거라는 문제를 낳게 되고, 이는 곧 정당화 논리의 문제가 된다. 정당화가 정당성을 생산하는 하나의 장치, 메커니즘인 것과 똑 같이, 합리화는 합리성을 생산하는 하나의 장치, 메커니즘이며, 통치화는 통치성을 생산하는 하나의 장치, 메커니즘이다. 이렇게 생산된 정당성, 합리성, 통치성이 곧 (이른바 주어진 시점의 한 사회에 의해 보편적 정상적 도덕적인 것으로 가정되는) 품행good conduct이다. 이 이른바 '품행'은 자신이 규정하는 '올바른' 품행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통제하는 기준, 곧 박탈-기계이다. 따라서 이른바 품행은 개인의 내외면 모두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전면적으로 정당화하고, 이는 개인에게 죄책감, 열등감, 양심의 가책 등의 양상 아래 내면화된다. 따라서 푸코의 통치성 논의가 목표로 하는 타겟은 이러한 기존의 정당화, 합리화, 통치화의 품행에 대적하는 새로운 대항품행(counter-conduct)의 제공이다.


6. 마르크스에게는 헤겔적 합리성 이외의 합리성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탈신화화화 곧 합리화 과정을 설정한 베버는 이러한 합리화 과정의 방식이 시대와 지역, 상황에 따라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합리화의 결과로 탄생하는 합리성의 개수도 복수(復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베버는 이러한 통찰을 서구의 특수성을 해명하는 문제(왜 다른 문명들도 분명히 서구가 오늘날 발전시킨 여러가지 근대적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초기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오직 서구만이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었는가?)로 전화시킴으로써 자신의 탁월한 통찰을 서구 내로 한정시키면서, 서구적 보편주의의 폭력을 용인, 심지어 조장하는 이론의 탄생에 기여하고 말았다(오늘날 헌팅턴도 거의 완벽히 동일한 길을 걷고 있으나, 차이점은 베버가 이를 아마도 반쯤은 무의식적 상태에서 행한 반면, 헌팅턴은 이를 완벽히 의식적인 상태에서 선택했다는 점이다).


7. (사랑의) 나눔에 인색한 사람은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8. 많은 경우 사람들은 스타일, 취향, 관점의 차이를 '도덕성'의 차이로 보곤 한다.


9. 사람들은 푸코를 - 그들이 마르크스를 이미 그렇게 보았듯이 - '도덕주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오류이자, 누군가가 푸코와 마르크스의 해석에서 범할 수 있는 최대의 오류이다.


10. 어떤 말이든 어떤 맥락, 어떤 상황에 대입시켜 설명하고자 시도해 보라.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적절한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이 합리성이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11.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알 수는 없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옳다. 더 작은 존재가 더 큰 존재를 이해할 수 없듯이.


12. 삶을 살고 철학을 하는데 그날 그날 몸과 마음의 컨디션 조절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마음이 피폐한 자, 자기 몸의 소리를 못 듣는 자는 아직 철학을 행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13. 지금 옳은가, 잘하고 있는가, 잘 살고 있는가가 관건이 아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그녀가 지금 올바른 방향을 향해가고 있는가, 올바른 길 위에 서있는가의 여부이다.


한 사람이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녀가 참으로 올바른 유일한 길, 곧 스스로에게 다가가는 길 위에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만이 중요할 뿐이라는 융의 말은 참으로 탁월한 통찰이다. 지금의 고통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 위에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이다.


14. 존 로크의 <관용에 관한 편지>(Epistola de Tolerantia, 1689)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게으름을 '스스로가 자신의 타락과 파멸을 재촉하는 것이지만 남에게 특별한 피해를 따로 끼치지는 않으므로' 관용의 대상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이전 전통적 그리스도교에서는 게으름을 7대 죄악 중 하나로 간주하여 놔두지 않았다. 이제 게으름이 관용의 대상, 무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15. 어떤 개인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그 개인일 수밖에 없다, 라는 로크의 생각은 밀에 도달하여 이른바 '자유주의'(liberalism)라는 형식으로 확고히 정착되는데, 그 핵심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정하겠다, 곧 남이 정하도록 놔두지 않겠다, 라는 '간섭 배제 원칙'으로 나아간다.


16. 오늘 푸코는 자유주의를 '내가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통치당하고 있지 않은가를 끊임없이 묻는 체제'로 정의한다. 푸코는 이로써 자유주의의 규칙, 나아가 정치학의 규칙을 완전히 바꾼 것인데, 물음을 묻는 주체가 더 이상 통치자도, 심지어는 보편적 인간도 아닌, 피통치자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푸코의 피통치자는 '네가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결단을 내린 주체이다.


나아가 푸코는, 이런 측면에서, 결정적 한 걸음을 더 내딛는데, 그것은 '인간이란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이른바 '보편적' 형식을 특정 시대, 특정 지역의, 특정인들이 특정 사건을 거쳐 구성해낸 역사적 산물임을 밝혀낸 일이다. 곧, 누구나 해야 하는 보편적 인간상, 곧 내가 따라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이란 없다,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란 없다. 인간 일반에게 무엇이 좋은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설령 누군가가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해도 내가 그거을 따라야 할 하등의 의무가 없으며, 그가 나에게 그것의 실행을 강제할 수도 없다. 결국 이는 곧 '내가 무엇을 마땅히 해야 하는지 내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만약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일 수밖에 없다'는 원칙의 천명이다.


17. 에픽테토스가 이 세상에는 당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생각과 당신을 노예로 만드는 생각 둘두 가지밖에는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의미에서 보면 정확히 푸코가 말하는 '사유의 담론 효과'에 대한 언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부와 관련하여 이렇게도 말해 볼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당신을 공부하게 만드는 생각과 당신이 공부하지 않게 만드는 생각 두 가지밖에는 없다.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전자의 생각을 하는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실하고 차분하게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고, 특히나 후자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진지하고 성실한 공부로부터 멀어진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당신을 공부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달리 말하면, 당신이 공부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드는, 혹은 공부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들인가?


18. 니체는 역사적 감각의 결여가 이류 학자들의 공통적 특징이라고 말했다(이들은 자신이 배우고 알게 된 특정시대, 특정 학파의 최종 버전 혹은 가장 최근 버전이 그것의 영구불변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 자체'의 본질적 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 지리적 감각의 결여가 이류학자들의 공통적 특징이다.


19. 인간은 대개의 경우 자신이 파괴하고 싶어하는 사고방식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사고한다.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동일한 사고의 구조를 유지한 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치를 바꾸는 것, 곧 같은 구조 내에서 자신이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만큼 자신의 적으로부터 영향받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나와 나의 적은 같은 구조가 낳은 두 명의 쌍둥이 자매들이다. 누가 나의 적이 되는가? 나와 같은 생각의 '틀'을 공유한 자들만이. 따라서 차라리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 보아야만 할 것이다. 왜 저 사람은 나의 적이 되었을까? 나의 적은 나의 분신이다. 나의 적이, 나다.


20. 당신 삶을 두 개로 가를 결정적 질문 하나(경솔하게 대답하지 말고, 차분하게 잘 생각해보라) - 당신은 혼자 있을 때, 혼자 있는가?


21. '현실'과 '진실'을 기준으로 사는 삶이란, 자신에게 어리석은 것인 만큼, 타인들에게는 끔찍한 것이다. 그녀는 현실과 진실을 - 이른바 현실과 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해석이 아닌 - 현실 자체, 진실 자체, 곧 사실 자체로 생각한다. 그녀는 '해석권력'(power of interpretation)이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2. 니체의 매우 흥미로운 생각 - "무지하고 비겁한 다수로부터 지혜롭고 용기 있는 소수를 보호해야 한다."


23. 함부로 말을 내뱉으며, 그것이 재치있고 소신있는 행동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24. 철학을 비판한다 - 자신이 철학을 비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철학을 자신의 '외부'에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2013.04.-2013.12.



2015. 10. 17.

잠언 18



0.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못하면 자신의 인격적 성숙이 불가능하듯, 자신이 사람하는 사람에 대한 근본적 실망을 느끼지 못하면 자신의 삶이 시작되지 않는다.



1. 복음 1 - 내가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없듯이, 당신도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



2. 그렇게 적당히 타협적으로 징징대지 마라. 징징대려면 확실히 철저하고 전적으로 징징대거나, 아니면, 남탓 상황탓 하지 말고, 고개를 똑 바로 들고 네 인생을 살아라!



3. 기대에의 부응 - 자기 중심주의와 담론 효과가 만나면 모든 것을 관계망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관계망상은 자신과는 관계 없는 어떤 하나의 사실을 자신과의 관계 하에서만 해석하는 질병이다. 이건 분명히 나 들으라고 한 말이야, 이건 나 보라고 쓴 거야 운운 ... 이는 인식론적 자기 중심주의의 극단적 버전이다. 하지만 이는 실상 정도의 차이일 뿐 망상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일반적인 인간의 일반적 경향인데, 가령 내가 이곳에 올리는 글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 느끼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들에게는 내가 어떤 경우에도 특정 개인을 겨냥하여 글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나와 가까운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내게 '버림 받으려면' 남의 뒷얘기를 내 앞에서 하면 된다는 사실을 얘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여하튼 이 글은 그런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쓰는 글이다. 이 글이 '나'를 겨냥하여 쓴 것이라 생각되는가? 그렇다, 이 글은 바로 당신을 겨냥하여, 그리고 오직 당신만을 겨냥하여 쓴 글, 당신에게만 해당되는 글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관계망상이 실로 얼마나 황당한 자기 중심주의의 병적 형식인가를 알 수 있다.


4.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분석이 다만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인식은 실로 타자에 대한 모든 대상화, 주체화 과정에 대해서도 말해질 수 있다. 청년 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권고와 질타는 실로 '청년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독백'이다.


그리고 이는 이후의 푸코가 깨달은 바로 그대로 기성세대의 담론 권력, 곧 자기 정당화 장치의 핵심적 일부를 이룬다.


나는 청년 세대가 아니며, 학벌부터 계급적 기반까지 그들과 모든 것이 다르고, 실상 그들을 잘 알지도 못한다. 기성세대의 급선무는 그들을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들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것, 자기 생각으로, 제멋대로 청년들의 삶을 규정짓지 않는 것이다.


나이와도 상관없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로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상상과 실천은 상대에 대한 경청과 정직한 내 생각의 토로, 그리고 서로의 생각에 대한 토론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실천 방안의 하나로 나는 모든 정치적 제도적 개혁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자기 정직의 실천을 들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래, 어차피 남들은 속여도 된다, 그러나 나를 속이지는 말자! 우리나라에는 실로 데카르트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없다는 것, 이것이 근본문제이다. 자생적 데카르트의 탄생이 개인주의와 정당정치와 민주주의의 선결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묻자. 과연 우리에게는 내가 없는가? 과연 그런가? 이 부족한 나, 못난 나, 지지고 볶는 내가 이미 완전한 충만한 나의 또 다른 형식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더 나아가 관념적으로 완전한 이상보다 현실 안에서 불완전한 오늘의 내가 이미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서구가 17세기에 도달한 데카르트적 근대성이 한반도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어떤 모델도 비교대상도 없으며, 따라서 나 자신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의 삶은 내가 만들어나갈 바로 그 삶이라고, 서구적 근대성은 서구의 근대성일 뿐이고, 근본적으로는 근대성 자체가 서구의 지배를 위해 작동하는 완벽한 지배의 장치-기계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데카르트에게서 나는 좋은 부분을 배울 것이되, 나는 데카르트가 아니고 따라서, 그의 삶을 존경하고 존경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으로 나의 삶을 살 뿐, 데카르트는 내가 따르고 모방해야 할 내 삶의 모델이 아니라는 이 생각이야말로 참으로 데카르트적인 생각이 아니겠는가? 나는 데카르트가 나의 이런 생각을 지지하고 응원해주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설령 데카르트가 나의 이런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데카르트를 존중하고 배우되 동시에 무시하고 경멸하며 데카르트를 가르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믿는 바대로, 그리고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배우고 타인을 경청하며, 어떤 경우에도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대상화/주체화의 동시적, 상관적 과정'이라 일컫는 것이다.



5. 내가 어떤 누구에게도 조종당하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어떤 누구도 조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6. 즐거운 자기 긍정 -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7. 복음 2 - 네가 나의 구원을 위해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나도 너의 구원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8. "모든 사람들이 고대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 또는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특히 자기 자신을." -  프리드리히 슐레겔



9. 한국사회의 인식가능조건 곧 에피스테메는 겉다르고 속다른 이중성이다. 다만 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이 이중적이라면 그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아가 이중성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라고 본다. 다 이중적일만 하니까 이중적이 된 것이 아닐까? 실로 생각과 말과 삶의 분리라는 이 이중성의 태도는 우리시대  인식과 실천, 생각과 삶의 가능 조건이다.


10. 내적 현실의 외적 대상을 향한 투사










11. "현상이 실체를 가리듯, 실체가 현상을 가린다." - 선림고경총서



12. 도덕주의적 인격주의는 지적 현학주의를 훨씬 능가하는 악을 생산한다.



13. 대화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일이지만, 버림 받는다.



14. 현실이라는 이미지 - 어떤 인간도 현실 자체, 현실 전체를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실이란 내가 보는 현실, 내가 느끼는 현실, 내게 당연하게 보이는 현실이다. 따라서 모든 '현실'은 현실에 대한 누군가의 표상, 파편적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관념이 현실을 가리듯이, 이 '현실'이 현실을 가린다.



15. '질서'란 늘 이미 그 뒤에 존재론적 위계를 전제하는 사물의 배치행위, 곧 권력 정당화의 장치이다.



16. "토마소 캄파넬라에 의하면 세상은 사악하거나, 죄악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것도 적재적소에 위치하지 않고, 모든 게 비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에는 개인적 자유, 우연 그리고 개별 사항들이 너무 많은 반면 질서가 너무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관리되어야 하고, 모든 사항들은 제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캄파넬라의 사고 속에는 스페인의 복고주의 외에도 분명히 중세의 특징이 엿보입니다. 가령 여러분, 조토의 벽화에 묘사된 위대한 질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대상들은 각자의 처지에 상응하는 대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등급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질서를 생각해 보세요. 고립된 모든 존재들은 단테의 작품에서는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이라는 정해진 공간에 소속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스콜라 철학의 질서 체계를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제반 사고는 마치 건축물의 부속품처럼 본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역시 상기한 내용과 유사합니다. 작품 내에서 모든 것을 질서 잡고 연결시켜 주는 것은 지상에 머물고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질서는 개별적으로 파고 들어 가서, 모든 개개인들의 삶을 규정합니다."(326쪽)

- 에른스트 블로흐, <서양 중세르네상스 철학 강의(1950-1956, 1962-1963)>(1977), 열린 책들, 2008.



17.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인식의 내용은 인식대상보다는 차라리 인식주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내가 보는 세계는 실상 세계보다는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세계에 대한 연구는 나라는 인식주체에 대한 연구가 된다. 신학과 형이상학은 물론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이 인간학이고, 인간의 인식이며, 인간과학이라는 칸트, 포이에르바흐, 니체, 푸코의 말은 이런 뜻이다.



18. 사람들이 너의 열등함이라 부르는 것을 열등함이 아닌 너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건, 나아가 자긍심으로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19. 들뢰즈는 '오리엔탈리스트'가 아닐까?



20. 한문과 일본어를 모르면 21세기 대한민국의 '국학'은 태어나지 않는다.



21. 효도와 마마보이는 실로 차이가 미묘하여 거의 대부분의 경우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22.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와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북한의 구호는 주체사상이 성리학의 마르크스주의적 변용, 곧 '충효 마르크스주의'임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들이다.



23.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은 한 마디로 전망의 부재, 곧 철학의 부재이다!



24. 산티아고 순례길은 아랍과 유대인과 스페인인이 공존하던 70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정치적 경제적 주도권을 쥐기 위한 왕권과 가톨릭의 배제 기능, 곧 이른바 가톨릭 '스페인'의 정체성 형성을 위한 주체화, 자기의 테크놀로지 장치이다.



25. 철학은 볼성상 불온한 것이다. 혹은 불온하지 않은 철학은 체제순응을 위한 자기 정당화의 논리이다.


26. "말은 거짓말을 해도, 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2015.11.4.-2015.11.17.

2015. 9. 16.

잠언 14







01. "반항마저도 기존 형식을 따라한다" - 그렇다면 반항이란 기존 형식을 무시하며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실로 반항마저도 무형식으로 할 수 없다는 곧 기존 형식의 내부에서 이루어진다는 자각에 도달해야 하는 것일까?


02. 이미지와 언어 - 모든 인간은 자기 이미지의 노예이다. 이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그리고 세계에 대해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늘 자신이 품고 있는 이미지의 틀 안에서 왜 나는 이 정도밖에 되지 못 하느냐고, 왜 너는 내가 설정한 이 틀 안에서 행복하지 못하느냐고, 왜 세계는 나의 이미지대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고 화를 내고 채근한다. 이 이미지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이미지를 정확히 아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는 인간 지각의 조건 자체이므로 문제는 이미지와 함께 혹은 없이 지각하고 사유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통해 어떻게 지각하고 사유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에 두 가지 유익한 조언이 있다. 이미지는 일종의 자동 기계이므로 적절한 외적 간섭이 작용하기 전까지는 무한히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그러나 안심이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미지의 인식 자체가 이미지를 변형시킨다는 점이다. 가령 지금 이 글은 당신에게 이전과는 다른 어떤 이미지를 발생시켰는가. 결국 이미지는, 마치 언어처럼, 감옥도 지옥도 아닌 인간 지각 및 인식의 조건이다. 따라서, 이 모든 논의의 방법론적 핵심은 이미지의 언어화로 정리될 수 있다.


03. 내 삶은 무엇인가를 실현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은 어떤 무엇인가에 대한 재현이거나 모방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는 원본, 이데아 그 자체라고 말해야 한다. 존재들 사이에는 어떤 존재론적 우열도 없으며, 모든 존재는 지금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이미 자족한 존재이다. 이제 인간을 파괴하는 두 가지 근본적 태도, 비교와 희생은 삶으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 내가 나인 것이 부끄러운 일일 수는 없다. 가령 내가 남을 속이거나 게으른 것은 부끄러운 일일 수 있으나 어떤 경우에도 내가 흑인이거나 여성인 것이 부끄러운 일일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한계는 실상 내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존재와도 다른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조건이다.


04. 사람들은 묻는다. 왜 세상이 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왜 너는 내가 짜준 이 틀 안에서 행복해 하지 않느냐고,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되느냐고. 그러나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나외 상호작용하는 우리 관계가, 내가 만들어가는 나는 모두 자신만의 길을 스스로 만들며 변해가는 법이다(푸코는 이를 '우리 자신의 역사적 비판적 존재론'이 갖는 세 영역 곧 지식, 권력, 윤리라 불렀다). 이 길을 모르면 이 길을 따르고 존중하고 만들어갈 수 없을 뿐이다. 노자가 이르는대로, 나와 남과 세계를 존중하는 길이란 어떤 조작도 어떤 억지스러운 작위도 없이 세상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는 길뿐이다. 내가 말이 없을 때 세상은 어떻게 굴러가는지, 남의 모습을 내가 정하지 않고 남의 말과 그 말 너머의 느낌을 들을 때 남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세상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나는 나 자신과 남과 맺는 관계와 세상의 주인이로되, 나 자신과 남과 맺는 관계와 세상의 주인이 아니다.


05. 이미지와 감정을 '다 살다' - 어떤 이미지는 때로 강렬한 고통의 감정을 수반한다. 그때 해야 할 일은 이 이미지를 그저 말없이 바라보는 일, 이 감정을 그것을 피하지 않고 있는 대로 느껴보는 일이다. 그것이 스러질 때까지 혹은 적어도 조절 가능한 것이 될 때까지. 그것은 5분이 될 수도 5일이 될 수도 5개월 혹은 5년이 될 수도 있으나, 인생에서 이러한 작업을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06. 글은 생각이다. 생각의 결여를 자료나 양이나 노가다 혹은 기교, 혹은 진정성으로 때우려 해서는 안 된다. 꾸준히 차분히 생각하되 과감하고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야 한다.


07. 글이 생각이다.


08. 글이 그 사람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글에는 내가 온전히 드러난다. 내 삶을 내가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없듯이 내 글을 내가 하루  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실상 그러한 욕망은 소아적 욕심이며, 오히려 글쓰기란 그러한 소아적 집착을 버리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글쓰기란 글짓기가 아니다. 글쓰기에는 나의 말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믿는 나의 진심구조가 드러난다. 글과 생각과 삶은 서로를 만든다. 나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 전체가 다 바뀌어야 내 글이 바뀐다. 글쓰기의 왕도란 없으며, 오직 이 순간 내가 믿는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야 할 뿐이다(이 말은 이해도 받지 못할 타인들에게 나의 결점을 무조건 '까발리라는' 말이 아니다). 이 진실을 짜는 나의 말이 그대로 내 삶의 피륙인 것이다. 글쓰기는 나를 만들어가는 주체화의 금욕적 실천이다. 글쓰기란 이처럼 내 삶을 가꾸는 실천, 지금 나의 진실을 적어내려감으로써 지금까지의 나와 달라지려는 실천이다.


09. 나는 나의 글을 고치고 또 고친다. 내 몸이 '됐다'고 말할 때까지.


10. 나의 만족감이 나의 인식론적 장, 곧 나를 지배하는 무의식적 에피스테메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나의 자연이 인위이다.


11. 좋은 글은 자기 삶의 진실을 드러내려는 용기, 참으로 존재하려는 용기에서만 나온다.


12. 철학의 시제 - 철학이란 남이 짜준 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따라서 그 바깥으로 나가는 행위이다. 나의 과거도 지금의 내게는 남이다. 철학의 주체는 늘 지금의 나이며, 철학의 시제 또한 늘 현재일 수밖에 없다. 철학은 이처럼 오직 정치적이다.


13. "나는 한 평생 나의 삶을 의탁할 생각과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어떤 책, 어느 누구에게서도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느 누구의 그림자도 따라 걷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 더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


14. 나는 고등학교 이래 뼈속까지 '자유주의자'였던 것 같다. 부모님과 학교의 비합리적인 강제적인 규율이 너무나도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절제와 규율이라는 말에 엄청난 거부감을 가졌다. 아마도 이것이 훗날 대학원 시절 푸코를 읽으며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을 공부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도 공감하게 되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는 그 전의 일이지만 대학시절 에리히 프롬의 <종교와 정신분석>을 읽으며 모든 권위가 아니라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를 구분하고 후자는 거부하되 전자는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나의 생각을 조금은 고쳐먹게 되었다. 물론 더 훗날 과연 이 '합리성'이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이며 그러한 기준은 또 누가 정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지만. 여하튼 잃을 것이 없었던 '영혼의 프롤레타리아'였던 나는 모든 권위를 의심하는 가히 철학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흔을 훌쩍 넘긴 어느날 나는 드디어 중용과 절제의 참다운 의미를 내 삶속에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이에는 대학 시절 이래 나의 심령을 온전히 지배하게 되었던 <노자>의 '휴머니즘적' 해석의 영향이 컸다. 이에는 역시 대학시절 이래 내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중용>의 '때에 맞음' 곧 시중의 영향도 동시적이었다. 여기에는 불교의 '불이론' 역시 내재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제 나는절제와 중용을 노자적으로 내 몸에 닦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나의 이러한 절제와 시중, 중용의 사상을 타인에게 보편적으로 부과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삶과 상황과 또 그로부터 나온 삶의 깨달음과 각자만의 틀이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사상의 기틀이 잡힌 이십대 후반 이래 <중용>의 시중과 노자의 사상을 통하여 서양의 모든 사상을 바로 이러한 의미의 '아나키즘적 민주주의'의 정치철학, 윤리로 해석하려는 꿈을 품고 있다. 실로 나의 공부와 삶은 둘이 아니다. 오늘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절제와 중용을 나와 세계에 닦는다. 그리고 때로는 나의 이러한 깨달음과 즐거움을 당신에게도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15. 한 번도 학문에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는 이들은 모든 것을 자신이 생각하는 '학문과 삶의 이분법' 안에서 바라보고 생각한다. 그들이 학문을 자신의 삶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숭상하든 혹은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여 폄하하든 그들은 삶과 생각, 공부, 학문을 자신의 삶과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하는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어떤 인간도 자기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세계를 알 수 없다. '한 인간의 참다운 깊이는 그녀가 자신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는 나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16. 진실을 말하기, 잘못 행동하기(truth-telling, wrong-doing)


푸코가 말하는 '진실 말하기' 곧 파르헤시아는 도덕적인 것이자 글자 그대로 자신의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인식론적 장을 드러내는 과정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있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무의식적 진실을 명료히 언어화함으로써 그것을 구성하는 동시에 변형시키기 위한 것이다. '나는 진실을 공격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만 그것에 대해 말합니다'라는 푸코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의 진실이란 실제의 진실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믿는 바의' 진실이다.

'나는 너희들보다 우월하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 나보다 힘든 사람은 없다, 니네들이 가난을 알아?, 공부도 못 하는 게, 나는 존중해줄 필요 없는데, 책밖에 모르는 새끼가, 못 생겨가지고, 난 느낌이 마비되었다, 난 곧 죽을 것이다'처럼 반사회적이고 특히 비사회적인 진실을 (남들에게보다는 자신에게) 정확히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사회적인 것에 대한 인식은 반사회적인 것에 대한 인식보다 더 중요한데, 실로 인간은 사회속에서 합리화되며 언어와 욕망을 습득하여 자기가 되므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욕망과 언어가 '말이 되도록' 곧 합리적 설득력을 갖도록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실로 반사회적 욕망은 사회적 욕망의 일부이다. 따라서 반사회적인 것보다 비사회적인 것 곧 일반적으로 자신과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보다 정확히는 합리적이지도 설득력을 갖지도 못하는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 정상적 사고의 한도 내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인간은 그저 '정상인'이 될 수밖에 없다.


가령 나치를 피해 도망가다가 에스에스가 내일 아침에 자신을 잡으러 도착할 것을 알면서도 '피곤해서' 길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잠자기를 선택한 어느 유대인 지식인처럼 정상적 사회성의 관점에서는 '말하기도 뭣한' 비사회적 욕망의 인식구조가 그런 것이다. 사회성이 좋다는 말은 때로 '(실은 자신 안에 내면화된) 타인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라는 말과 동의어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 '인간은 결국 이기주의자들이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같은 도식을 믿고 사는 '순수한' 혹은 '천박한' 인식에 머무르는 사람은 죽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자존감이 전혀 없고 따라서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여 이래도저래도 상관없는 사람, 혹은 악한 부모를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진실 말하기란 사람들이 그 말에서 느끼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사회적 혹은 반사회적 곧 사회적 진실을 기본적으로 자신 앞에 그리고 때로는 남들 앞에 드러내는 행위를 말한다. 진실 말하기란 자신의 기존 생각과 관념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말하기, 용기 모두에 대해 철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작업이다. 기본적으로 진실하기란 자기 앞에서 하는 것이지 남들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진실을 알고 말하는 인간은 옳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옳은 일을 추구하지만 실상은 잘못된 일 곧 실수를 할 뿐이다. 실수가 없다면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대가, 괴물이 된다. 실수는 인간 인식과 행동의 조건이다.


그러나 파르헤시아에 관련된 이 모든 논의는 실로 철두철미 서양적인 것으로, 가령 서양화된 사회이나 여전히 비서양사회이기도 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과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가령 파르헤시아 곧 진실 말하는 이는 한국에서 그저 분위기 파악 못하는 '돈 키호테', '평지풍파'를 불러일으키는 생각이 짧은 이로 이해되어 그녀의 권력과 신망이 상실되는 결과만을 낳기가 십상이다).

17. "한 사람의 정신적인 폭과 깊이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양의 '견딜 수 없는' 진실을 '견뎌내는가'에 달려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18. "이기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패하는 길이다."


19. "진인사 대천명"()


20. 나의 유학시절 말미를 버티게 해준 <<중용>>(中庸)의 한 마디


     "군자는 그 자리에 처하여 그 자리에 합당한 행동에 최선을 다할 뿐,
       그 자리를 벗어난 환상적 그 무엇에 욕심내지 않는다.

       부귀에 처해서는 부귀에 합당한 대로 도를 행하며,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에 합당한 대로 도를 행하며,
       이적(夷狄)에 처해서는 이적에 합당한 대로 도를 행하며,
       환난에 처해서는 환난에 합당한 대로 도를 행한다.

       군자는 들어가는 곳마다 스스로 얻지 못함이 없다.

       윗자리에 있을 때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아니 하며,
       아랫자리에 있을 때는 윗사람을 끌어내리지 아니 한다.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내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 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 하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평이한 현실에 거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짓을 감행하면서 요행을 바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유사함이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14장, 김용옥 옮김)


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 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
在上位, 不陵下; 在下位, 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 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故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徼幸.
子曰: “射有似乎君子, 正鵠, 反求其身.”


21. 
신영복이 감옥에서 20년 20일을 보내고 출소한 것은 80년대 후반, 노태우 정권 때였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신영복은 그 당시 '시국강연'을 하러 이곳저곳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내가 학생이던 대학교에도 강연을 왔다. 나는 출소 전부터 그의 채을 감명 깊게 읽고 존경의 념을 품고 있었기에 그 강연을 들으러 갔다. 강연이 끝나고 어떤 여학생이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견뎠는가,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신영복은 그 때 이렇게 대답했는데, 이 대답은 이제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내가 힘들 때마다 되새기는 말이 되었다.


"나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늘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늘 이런 일을 무엇인가를 찾으며 '오늘'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를 버티게 해준 힘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매일매일의 노력이었을 것 같다."


23.  '나'도 내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諸法無我). Le moi est sans moi.
 
 
My mind has been wandering
I hardly noticed
It's running on its own steam
I let it go


내 마음은 언제나 방황했어
마음이란 자기 스스로의 흐름을 따라
달려가는 거라는 걸 난 몰랐어
이제 난 내 마음이 흘러가게 내버려둬

 
 
 
david sylvian
fire in the forest [remix]






2015.09.16-2015.09.28.


 
 







 

 

2015. 12. 7.

잠언 20



0. 철학의 축복과 저주 -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자신이 인식론적 자기 반성이 부재한 '선남선녀'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떠나왔으며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선남선녀의 세계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변화하는 '내'가 없으며 상식과 관습이 지배하는 '우리'의 세계일 뿐이다.


1. "아마도 글자 그대로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만이 있을 뿐."(there is properly no History: only Biography) - 에머슨, <Essays>, 1841.


2. "우리 민족의 살길은 남북이 하나되는 길 외로는 어떠한 다른 우회로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직시해야만 할 현실이요, 우리 실존의 본래 모습이요, 우리 역사, 우리 민족의 원주소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파워풀하고, 가장 보수적이라면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전경련'과 같은 단체서도 남북의 대결이나 불화를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로운 방법에 의하여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합리적인 소통이  확보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경제를 갈망하면서, 남한경제만을 고립적으로 획책한다는 것은 너무도 아둔한 짓이다. 우리가 세계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남북의 소통으로  마켓의 규모를 키우는 길이다.

'남북통일'이라는 말은 당분간 쓰지 말자! '통일'(unification)이라는 말은 두 개의 정치체제(politeia)가 공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자의 타자에로의 복속을 의미하며, 필연적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 문제를 수반하며, 또 도식적인 단계론을 제시하는 담론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불필요한 소음만을 지어낸다.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은 통일이 아니다. 두 집을 한 집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두 집이서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남북화해'(south-north reconciliation)라고 부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남북통일이 아니라 남북화해다. 남북화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매우 간단한 하나의 명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자유왕래'(free comings and goings). 여행이든, 학술교류든, 편지든, 테레비든, 인터넷이든, 비지니스든 자유롭게 왕래하자는 것이다.

우선 자유왕래를 해야만 모든 것이 풀려나가고 녹아나가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자유왕래를 못하는가? 옆집 사람과 자유왕래하려면 가장 선행하는 조건이 무엇일까? 옆집 사람이 사는 삶의 방식이나 그의 가치관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존재방식을 부정하면 만나는 매순간마다 쌈박질을 하게 되고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유왕래란 '상호인정'(mutual recognition)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통을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인정'이라는 한 마디에 걸려있다. 북한의 정치체제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를 기준으로 해서 바꾸려고 하면 왕래나 화해는 물건너간다."

- <도올의 중국일기 3>, 2015, 294-297쪽.





3. 내게 일어난 일만큼이나, 내가 그 일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펴야 한다.


4. 내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들은 내가 평상시에 말하지 못하는 나의 진심을, 적어도 위장된 형태로, 말할 수 있는 상황을 제공해준다. 이 사건들은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지만 이런저런 사회적 상황에 따라 말할 수 없었던 나의 느낌을 정당홰해준다. 나의 내적 느낌이 이러저러한 사건이라는 외적 계기를 만나 다른 어떤 방식이 아니라 바로 이 방식으로 현실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담론 분석은 이때의 내외가 실체가 아닌 상호적•동시적으로 형성되는 관계론적인 것임을 명심한 채 양자를 모두 분석해야 한다.


5.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실로 구조주의적인 말이다. 인간은 본질이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배치가 이른바 '본질'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것을 만든다. 당신의 속한 자리가 이른바 '당신'을 만든다.


6. 하급자로서 날카로운 비판자가 상급자로서 불통의 아이콘이 되는 수가 있다. 그릇이 원래 그것밖에 안 되는 옹졸한 인물이었던 것일까?


7. 이른바 같은 상황, 같은 처지라 해도 실상 모든 것은 천차만별이고, 다 상황나름이다. 일반화할 수 없는 것, 일반화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서양인들은 지금 바로 이 위의 명제가 이미 일반화한 명제는 아닌지를 문제 삼았다. 실제로 이 문제가 일정한 진전을 보는 것은 20세기 러셀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른바 유가와 도가 그리고 불교는 이러한 언어철학적 명제를 넘어선 곳에서(우열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 자신의 사유를 시작했다. 이러한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서양의 메타적 언어철학이 '말장난'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은 외부자들이 보듯 윤리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말장난'을 행한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유의미한 '말놀이'의 조건을 탐구한 것이다.

철학을 배우기 이전의 존재 곧 선남선녀는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 자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8. 계몽이란 무엇인가? - 계몽이란 '나' 곧 '큰 나'를 위해 사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해줄 인식과 실천의 여러 조건을 발견•발명해내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 진심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또는 적어도 자신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어떤 참다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이 부분이 핵심이다. 자신이 진심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 기준,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도 다를 수 있다. 자기와 남을 속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정말 자기 생각과 느낌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의 진실된 느낌은 반사회적일 수도, 또는 더 빈번하게는 비사회적일 수도 있다. 내가 고통스러운 희한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남들 앞에서 그런 것을 보여주고 또 해야하는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자신에의 정직, 울기, 글쓰기, 나의 느낌을 왜곡하거나 심판하지 않을 누군가에게 말하기, 때로는 전문가로서의 의사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말과 생각은 조작이 가능한 것이지만 느낌은 속일 수도 속여지지도 않는 것이라는 노자와 중용, 한의학, 더하여 니체의 통찰을 길잡이 삼아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어떤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닌 바로 '나', 말하자면 '큰 나'를 위한 일이다.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 이것이 내가 제출하는 새로운 계몽의 조건이다.


9. "네 진심을 얘기해 봐. 농담 아니다. 숨겨봐야 실은 다 드러난다. 너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네가 진짜로 생각하는 거, 정말 네 진심을 있는 그대로만 얘기해 봐."


10. 천재도 저주도 없다. 인간이란 오직 스스로가 어떤 가치를 설정하고 그것을 지향하여 노력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 바깥으로부터 오는 구원이란 요행에의 잘못된 기대이며, 오직 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내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중용>의 위대한 깨달음이다. 비코를 빌어 말하자면, 나는 내가 만든 것이며 따라서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나의 삶이란 어떤 섭리나 운명이 아니라 내 삶에서 내가 행했던 무수한 실존적 선택의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11. 당신이 불행한 인간이 된 것은 당신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당신이 불행해지는 방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니체를 따라 말하자면, 본래적으로 불행한 사건이란 없고 일어난 사건에 대한 불행한 해석이 있을 뿐이다. 프로이트를 따라,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 불행한 존재로 몰고간다면, 비록 어리석은 이유일지라도, 그 당사자가 그러한 몰고감 속에서 일정한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교와 스피노자, 라이히 그리고 들뢰즈가 말하는 문제를 설명해준다. 인민은 왜 자신의 예속을 마치 그것이 자신의 해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열렬히 스스로 욕망하는가?


12. 세상의 어두운 면만 보려고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세상의 밝은 면만 보려고 하는 것 역시 건강한 태도라 하기 어렵다. 가령 밝은 면만 보려 하고, 또 보아야 한다고 강변하는 당신의 태도는 당신의 자녀와 심각한 트러블을 일으킬 것이다.

13. 인간의 삶이란 자신이 행하지 않은 선택에 대가를 치루며 사는 것이다. 오늘 내 삶의 모습은 나 스스로가 선택한 바 없는 나의 부모, 조상, 사회, 국가, 세계 체제, 그리고 나의 유년기가 선택한 것들이 빚어놓은 결과이다. 이제 내 삶이 내 선택의 결과임을 아는 나는 이제까지의 무능력 무기력하고 무의식적인 수동적 선택(실은 조건화된 선택당함)을 나 자신의 의식적의 숙고와 의지, '선택'의 결과로 전환시켜야 한다(아마도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인연설법,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실상일 것이다). 이제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인 것이다. 이처럼, 가히 선천개벽을 잇는 후천개벽이라고나 해야 할 이러한 근본적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전환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은 무엇인가?






14. "어떤 이의 행복을 파괴하는 기이하고 알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 사람은 미지의 적들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게 자기 탓이며 자신이 원인 제공자였음을 깨닫게 된다."(1838년)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정신적으로 그에게 종속된 다른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고, 명령을 받은 자는 그에 따라 행위를 취한다. 명령한 사람이 죽어도 명령을 받은 사람은 죽는 날까지 그 행위를 지속한다."(1843년)

-  '너대니얼 호손', 보르헤스의 <만리장성과 책들>(1949년)


15. "사람의 모든 행동, 모든 생각은 물론, 병에 걸리는 것마저 그 사람의 의지의 발현일 뿐이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16. "위대한 작가들은 선구자들을 창조한다." - 루이스 보르헤스, <만리장성과 책들>(1949), 열린책들, 120쪽.


17. 대부분의 부모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식들의 진정한 성장을 방해한다.


18. 프로이트의 폐기(Verwerfung), 또는 라캉의 폐기(배제, forclusion)는 실로 놀라운 통찰이다!

프로이트 -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효과적인 일종의 방어가 있다. 거기서 자아는 참을 수 없는 표상과, 동시에 그 정동을 폐기한다(verwirft). 그것은 마치 그 표상이 자아에 결코 도달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처신한다."(<방어정신신경증>, 1894)

라캉 - 상징화되었어야 할 것(거세)을 상징화하지 못한 것, 따라서 폐기는 '상징적 폐기'이다. 환각의 공식, "상징계에서 폐기된 것은 실재계에서 다시 나타난다."


19. 라캉의 이론은 권위에 대한 긍정이자, 권위의 작용에 대한 세심한 분석이다. 이미 정치적인 주제에 대한 비정치적 분석으로서의 라캉 이론이 갖는 정치성.


20. 헤겔의 인정 투쟁은 인정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정 받는 기술이다. 이는 프롬이 잘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사랑하는 기술(the art of loving)이 아닌 사랑받는 기술(the art of being loved)로 생각하는 것, 혹은 응용해보자면, 이해를 이해하는 기술(the art of understanding)이 아닌 이해 받는 기술(the art of being understood)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헤겔의 인정 투쟁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인정이 필요 없다."


21. 부드럽고 넉넉한 관대함.






2015.12.03-2015.12.10.

2014. 2. 10.

잠언 06

 
 
 
 
 
 
 
 
 
 
0.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 백지 상태의 누군가가 자신이 전혀 모르는 어떤 것을 새롭게 배우는 일이라기보다는 - 그녀가 철학에 대해 이미 갖고 있는 '황당한' 편견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가깝다. 모든 '가르치는 사람'은 이 점을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1. 사르트르가 1945년의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한 말은옳다. 이른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이 정말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책임으로부터 완벽히 면제받을 것이다. 그녀는 원래 위대하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고, 그는 원래 악인이고 나는 원래 용기가 없고, 하는 식으로. 운명이란 당신의 '알리바이'이다.


그러나 당신이 어제 들은 하느님의 목소리가 환청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느님인가, 당신인가? 우리들의 사랑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운명인가, 당신들인가? 한 노래 가사가 잘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바람'이 아니었던가? 니체의 말대로, 나의 소망이 나의 인식이 된다.


2. 때로는 어떤 것이 내게 정말 옳은것으로, 가히 '운명'처럼 정말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 그것은 운명인가? 물론 아니다. 이는 다만 당신이 사회문화적으로 그렇게 느끼도록 조건화된 경우에 불과하다. 나의 느낌과 생각이 내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져서 - 감히 그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믿기 어렵고 - 다만 내가 그렇게 진실로 '느낀다'고 믿도록 조건화된 경우.


더하여, 때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옳다는 혹은 당연하다는 느낌이 너무도 강렬하여 도저히 스스로 자신의 느낌을 의심할 수 없는 경우마저 존재한다(물론 자기 기만이나 합리화의 경우는 제외해야 한다). 진심으로 그것이 옳다는 혹은 그것이 운명이라는 느낌이 너무도 강렬하여 나 스스로가 이러한 생각을 부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내게 이토록 '옳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생각, 이 느낌은 옳은가?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것이 옳다는 나의 강력한 감정은 그것이 실제로 옳은가와는 전혀 무관하며, 다만 내가 그것을 얼마나 옳다고 강력히 믿고 있는가만을 알려준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그것이 옳다고 혹은 그르다고 느끼는 감정의 강렬함, 혹은 그렇게 생각에 대한 믿음의 강렬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또 하나의 문제이다.


결국 문제는  '운명'의 정의(definition)이다. 사람들이 보통 '운명'이라 말하는 것들은 그들의 생각처럼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실상은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운명의 정의에 따라서는, 때로 정말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든 혹은 다른 무엇이라 부르든, 우리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계가 조건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3. 푸코에 따르면, 합리성(rationality)은 시공을 초월한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특정 문제상황을 해결하려는 합리화(rationalization) 과정의 결과로서 얻어진 생산물(product)이다. 인간의 모든 사유가 합리화의 결과이다. 이것이 니체의, 사실은, 베버의 중요성이다.


4. 어떤 문제가 존재할 때, 유용한 해결책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와 세계를 냉정하게('냉혹하게'가 아니다), 곧 '정확하게' 본다. 인간은 자기 기만을 행하는 존재이니, 무엇보다 먼저 (남보다는) 자기 자신의 자동적 '자기 기만 메커니즘'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여기서 누군가가 '인식만 하면 뭐해요'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이는 그녀가 한 번도 냉정한 자기 인식을 스스로 수행해본 적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5. 이른바 프랑스현대철학자들은 '계몽'이 덜 된 존재들이다(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담론은 자신들만의 초엘리트 지식인 사회 안에서 생산, 유통, 폐기된다. 그들은 지식인과 인민의 관계, 학문과 일상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 관습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들에게는 계몽이, 성찰적 반성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다.


6. 악의(惡意)가 없는 자란 죽은 사람이며, 자신의 악의를 모르고 있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7. 사람들은 보통 내가 그녀에게 이런 인상을 받았으므로, 그녀의 의도가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만 확실히 구분할 수 있어도 인생의 불필요한 많은 분쟁을 피할 수 있다.


8. "철학은 전도를 하지 않는다" - 이는 설령 내 말이 옳다 해도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우선, 당신이 내 말을 듣기 싫어한다면, 혹은 듣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당신은 여하튼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당신이 내 말을 들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원래 없다. 더하여, 내 말이 '옳다'는 말은 보통 내가 설정한 전제의 한도 내에서 '옳은'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옳다'(진리)는 말의 의미는 천차만별, 무한대로 확장 가능하다. 옳다, 그르다는 '관점'의 문제일 수가 있다. 더구나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실제로는 전혀 옳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나의 말이 옳은 경우라 할지라도,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고통을 겪게 될 사람은 당신이다. 결국, 어떤 경우이든, 당신 자신의 인생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도 융도 늘 같은 말을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알아서 하세요!"


9. 아이러니 - 인간은 자신이 자기 합리화를 행하고 있지 않은지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부분, 곧 그녀가 스스로 의식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기 합리화를 거의 행하지 않는다. 그녀의 의식이 글자 그대로 깨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합리화를 행하는 부분은 그녀가 전혀 생각짇 못하는 부분, - 곧 의식적으로 늘 자기를 감시하고 처벌하느라 너무도 지친 나머지 -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다. 이 곳은 - 그녀의 의식적 고려와 검토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 무성의와 무신경, 자기 합리화로 점철되어 있는 영역이다.


10. 대한민국의 학생들, 아니 모든 배우는 이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너무 예의바르고 너무 얌전하며 너무 순하고 너무 (수동적으로만) 길이 잘 들어 있다. 이는 물론 구조적 문제인데, 궁극적으로 전통적 지배 이데올로기인 불교와 유교에 더하여, 근래에 수입된 기독교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적 감시와 처벌 메커니즘의 거의 완벽한 내면화가 가져온 결과이다. 이러한 태도는 한 마디로 '남들과 다른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것,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식의 눈치보기, 분위기 파악, (자기) 기만, 비겁, 자기 처벌의 메커니즘이 완벽한 자동화의 수준으로까지 내재화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케이팝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품행담론은 아직 '자기 의식'을 갖지 못한 것이다.


11. 대한민국 대학의 학문적 풍토를 비판하는 태도는 거의 대부분 (일제 시대 이래 더욱 강화된) 한(韓)민족의 자기 비하, 자기 멸시의 일종, 곧 사회적 버전이다. 한국에서 누군가가 우리나라 대학을 비판하면 이를 듣는 사람(물론 한국인)은 즐거운 웃음, 냉소를 터뜨린다. 사회학적, 문화인류학적으로 연구해볼 만한 현상.


12. 보편성 관념의 부재 - 오늘날 보편성은 비판받아야 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하지만, 때로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절감하기도 한다. 가령,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우선, 여러 사람이 있는데 자신과 친근한 관계에 있는 어떤 사람과만 (즐거운) 대화를 지속하는 경우. 이는 때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실상은 이러한 행위가 - 본의건 아니건 - 그 이외의 주변 사람을 소외시키는 행위가 된다(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당사자가 알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아예 의식을 못하건 모르는 경우는 보편성의 '전적인' 부재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공적인 자리나 상항에서도 자신과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농담(이야기)을 하는 경우. 실제로 주의 깊게 이런 경우를 심사숙고해 보면, 이를 정작 당사자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편성의 개념이 필요한 시간!


13. 자기 비하, 자기 경멸은 또 다른 자기중심주의이다. 문제가 여전히 그리고 늘 '자기'이다.


14.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것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성숙한 자가 된다.


15. 철학이란 방법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야 한다", ""~되어야 한다"라는 식으로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이나 바람, 당위 자체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도덕주의적 함정에 빠진다.


도덕주의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지에 대한 현실적 구체적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타인혐오, 자기혐오, 인간혐오에 빠진다. 어리석은 선택.


잘 되어야 한다고?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해야만 한다고? 안 돼서 못하는데, 노력하라고? 웃기는 이야기들이다! 가령 자신감이 부족한 인간에게 자신을 가지라고, 너 자신을 믿으라고 하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무의미한 말, 더 나아가 해로운 말이다(물론 때로는 이런 말이 좋은 효과를 낳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가져라'라는 말은 잘못된 대전제, 곧 그저 모든 것을 '의지'의 문제로 보라는 무식한 대전제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인간이 자신감이 없다면, 그것은 그가 의지가 약하고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합리적인 존재이며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감을 가질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것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아 실제로 자신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억지로 믿는다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자신감이 없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합리적이 존재이며 자신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현실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강함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적'이다. 인간은 스스로 설득이 되지 않으면 결코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16. '좋은' 방법론을 고르는 여러 기준들 중 하나는 그런 말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 곧 그런 담론이 어떤 인간을 낳는가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다. 가령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혹은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잘 살고 있나라는 담론은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낳는가, 어떤 인간을 결과적으로 탄생시키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담론은 성실한 인간을 낳는가? 효도해야지라는 담론은 효도하는 인간을 낳는가? 학생은 공부해야 한다는 담론은 공부하는 학생을 만드는가?


17.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잡는다" - 가령 어머니에게 고통받은 인간(어머니의 의도가 선한 것이었는가 아니었는가의 문제는 이 경우 중요하지 않다)은 때로 상당한 세월이 흘러 현실의 어머니가 이러저런 이유로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한 경우에도 여전히 어머니로부터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그녀는 가령 어머니가 죽어도 여전히 어머니로부터 고통받을 것이다. 이 경우 어머니는 머릿속 외부의 현실저 존재가 아니라, 머릿속의 현실적인 존재, 오늘 그녀의 정신적 구조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는 존재로서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녀는 그렇게 구조화, 조건화되어 있다.


관건은 이러한 지옥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실제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어떻게'의 문제, 방법론의 문제다.


18. 모든 인간관계는 적당한 거리, 적당한 불편함, 적당한 두려움이 존재해야 썩지 않는다, 오래 간다.


19. "일은 일" - 함께 일을 할 때, '상대가 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은 일이므로, 담백하고 간명하게 예의를 갖추어 본심을 정확히 전달하면 된다.


20.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 사정이 있다. 따라서 자기 사정이 없는 사람은 없으므로, 자기 사정만을 특별히 양해해 달라고 말하는 자는 사회에서 아웃된다. 그는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이다


21. 냉정한 인식과 냉혹한 인간성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22. "너도 물론 위에서 시켜서 한 거라는 거 다 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쓰레기 같은 인간 말종이 될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 월터 미티


23. 한 분야(보통은 자기 분야)에서의 무능력을 그 인간 자체에 대한 경멸의 이유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24. '초심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은, 그 이 말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와 달리, 이러한 말을 생각하는 경우 그렇지 않았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효과가 발생되는 하나의 유용한 조작 개념(operational notion)이다.


25. "신이란 그것에 따라 우리가 자신의 고통을 측정하는 개념이다." - 존 레논, <신>(god)


26. 해석권력(power on interpretation) - 실상은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 가능한 어떤 현상에 대해 자신의 해석이 사실 혹은 현실 자체라고 말하고 그것을 관철, 강요하는 능력.이는 당사자가  자신이 현상에 대한 해석 권력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경우와 모르고 있는 경우로 크게 대별된다. 전자와는 궁극적으로 대화와 투쟁이, 후자와는 교육과 설명이 가능할 따름이다.


27. "언어가 살해한다." - 헤겔


28.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이 실상은 정말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존재하는 바깥'이라는 점, 그리하여 이른바 '바깥'이 실상은 안쪽을 유지하는 하나의 장치임을 깨달은 푸코는 구조주의적 중립성의 개념 전체를 포기하고 니체주의적 힘 관계의 논리를 전적으로 수용한다. 그리하여, "권력에는 바깥이 존재하지 않는다."


29. 블랑쇼의 '익명의 그녀'(une anonyme)가 바타유의 '공공의 여성' 곧 '창녀'(la femme publique)이다.


30. '저주의 몫'(la part mudite) - 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그중에서도 자기 삶, 생존 자체의 정당성을 빼앗긴 자들, 박탈당한 자들, '파렴치한 자들'(les infameux)이, 그들에 대해, 그들을 위해 쓰는 것이야말로 '문학'이다(푸코의 문학관).


31. 논증의 '필연성' - 모든 '고전적'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갖는 '필연성'을 논증하고자 한다. 그러나 가령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아니라 아리우스파가 승리했다면,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정되고 따라서 삼위일체론이 부정되었다면, 보다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역사적 사건에 의해 그리스도교 <성경>의 정경과 외경이 지금과 달라졌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물론 그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그 '필연성'을 논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도 - 바로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 하나님이 역사(役事)하신 결과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 믿지 않는 자들에겐 반증불가능한 맹목적 믿음으로 보이는 영역이다. 그들 논증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는다.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필연적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32.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라는 니체의 말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니체의 말은 사람을 죽여놓고서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사실은 없고 어차피 해석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살인자의 말을 편들어주지 않는다.


니체의 사실이 없다는 말은 이른바 사람들이 말하는 사실이 무수히 선택 가능한 사실들 중에 관심을 받아 선택된 사실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이 아니라 보는 자의 관심에 의해 조명된 사실, 또 그렇게 선택된 사실이다.


정말 객관적 사실이란 것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관심과 무관하게 중립적으로 드러난다면, 세상에 신문은 단 하나만 존재하거나 혹은 모든 신문이 다 완벽히 똑 같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앉아 있는 방 혹은 버스의 크기나 평수, 당신의 나이는 다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엄밀한 '중립적 사실보도'를 해야 할  언론은 내일 아침 신문에 그러한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사실이란 특정한 관심에 따라 선택된 사실이며, 이는 사실상 무한 개수의 사실에서 유한한 개수의 사실을, 그것도 지극히 협소한 유한 개수의 사실만을 추출해낸 것이다. 그러니 사실이란 늘 선택된 사실이며, 인간은 이러한 선택의 기준 곧 '관심'(interest) 혹은 '관점'(perspective) 없이 사실을 볼 능력이 없다. 바로 이런 면에서 관심과 관점이란 한계가 아니라 인간 인식의 '조건'(condition)이며, 모든 인간은 자신의 관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사실이 없다라는 말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사실이란 없으므로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라는 말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무수한 사실들 중에 당신이 왜 다른 모든 사실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하필이면 이 사실을 인식했고 또 말하는가에 관련된 언명이다. 한 마디로, 사실과 관점의 문제는 주어진 관점 내에서의 사실 여부보다는, 무수한 사실들 중 이런 혹은 저런 사실에 대해 말하는 당신의 선택과 관점의 층위에 속하는 말이다.


33.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 토머스 홉스, <시민론>(1642년, '디본셔 백작에게 드리는 헌사')


34. 자신의 몸이 싫어하는 걸 싫어하지 않으려고, 심지어 좋아하려고 하는 사람들, 더하여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35. 강박관념의 특징은 그것이 매우 논리적인 관념의 질서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러 면에서, 강박관념의 해결은 비논리적인 방식으로는 어렵고, 오히려 더 논리적인 방식으로 그 논리를 밀고 나아가 그 논리의 '부분적' 특성, 비현실성, 비논리성을 밝히는 방식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도 역시 모든 인간은 '합리적'이다. 이 말을 듣고 어떻게 강박증환자의 논리와 '우리'의 논리가 같은 합리성일 수 있는가를 묻는 사람은 적어도 다음의세 가지 사항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첫째, 합리성에 대한 나의 정의와 타인(이 경우 위의 정의)의 정의가 다를 때, 누구의 정의를 정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둘째, 강박증 환자와 나는 다만 정도의 차이에서만 다른 두 사람인가, 아니면 질적으로 다른 실체적으로 구분되는 두 사람인가? 셋째, 합리성의 정의는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36. 모든 인간은 자기 기만을 한다. 자기 기만은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 조건이다. 다만 자신의 자기 기만을 명확히 인식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있을 뿐이다. 전자는 앞으로 나아가겠지만, 후자는, 그가 여전히 그러한 상태에 머무르는 한, 당연히,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다.


37. 성격이 나쁜 인간이란 - 원래 그녀가 선천적으로 악(惡)해서라기보다는 - 어린 시절의 고통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성격의 인간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격 안 좋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해서 '같이 지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38. 도덕과 무관한 이유로도, 그리고 때로는 비도덕적인 이유로도, 얼마든지 '도덕적' 행동, 보다 정확히는 '도덕적으로 보이는' 행동, 혹은 때로는 '도덕적 결과를 낳는' 행동을 할 수 있다.


39. 논리적 오류 - 보통 우리는 '모든 인간은 외롭다'라는 말을 들으면, 모든 인간이 외로움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로부터 치유되고 싶어하고 따라서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고들 생각한다.


40. 오르한 파묵은 좋은 소설가이다. 그러나 파묵의 가장 큰 장점은 소설가로서의 그가 가진 재능, 곧 '놀라운 입담'이 아니라, 그가 '오늘을 사는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 곧 '서양과 비서양의 대면'이라는 고통스러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사실 안에 놓여 있다.


41. 당신이 사랑하는 죽은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당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 사람은 죽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다.


42. "존 레논은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생각'이란 것을 하게 만들어준 사람들 중 하나이다" - 다니엘 클로드


43. 리트머스 시험지 - "이 세상의 모든 사상가, 소설가, 시인들은 자신들의 책이 아니라면 정신병자들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이 말이 당신에게 '안심'을 주었는가?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44. 데카르트와 니체 - 이른바 한 사회의 '상식'이란 한 번도 검증된 적이 없는 관습의 집합이다. 참으로 스스로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은 데카르트를 따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다시 스스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의 재검토 과정에서 데카르트가 검토한 것은 인식의 측면만이었다. 그의 '방법적 회의'는 관습적 삶의 도덕적 기초를 인정하고, 또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시작된다. 이러한 관습적 도덕 자체에 대한 재검토는 니체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45. 법과 주먹, 혹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 "사회는 멀고, 가정은 가깝다."


46. 철학의 유일한 문제는 '자연'과 '당연'의 문제, 곧 기준의 문제이다.


47. 인정 투쟁은 '정의(defintion) 투쟁'이다. 기존의 '진리'와 '정의' 자체가 타도의 대상이다. 다시금 세워져야 하는 것은 진리와 정의의 새로운 정의에 다름 아니다.


48. "요컨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자연법 그 자체는 어떤 힘에 대한 공포 없이는 지켜지지 않는다." -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1>(227쪽)


49. 11세기 안셀무스의 이른바 '존재론적 증명'을 밀고 나가면, 17세기의 이신론자들(deists), 그리고 이후의 과학자들(scientists), 그리하여 무신론자들(atheists)이 나온다. 이는 정의상 '신앙의 내부에만 설정된 이성'으로부터 '신앙 바깥에 존재하는 이성'으로의 이행이다. 이성과 자연, 신과 인간의 정의가 모두 바뀐다.


50. 이른바 '무신론자들'은 여전히 유신론자들이다. 그리스도교를 '저주하는' 이들이 여전히 또 다른, 뒤집힌, 그리스도교도들인 것처럼. 그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 한다.




 




1984.12.-2014.02.

2015. 5. 2.

잠언 11



 
 
 
john cage, in a landscape, 1948.
 
 
 



 0. 당신은 누구를 왜 경멸하는가?


1. 권력의 최대 형식은 자연에 대한 해석이다. 이는 자신의 관점이 관점이나 해석이 아닌, 있는 그대로, 곧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나의 자연이 자연 자체"라고 선언하는것이다. 이때 '나의 자연과 다른 모든 자연'은 자연적이지 않은 것, 이상한 것,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계몽과 교정의 대상으로 치부된다.


2. 마르크스의 <독일이데올로기>에 등장하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집단에 대해서는 불변의 진리이다. 때로 개인은 자신의 존재 조건을 넘어 의식, 곧 도덕적인 이유로 어떤 일을 행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수십,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하나의 집단에 대하여 이러한 도덕성을 바란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따라서 도덕적 개선을 넘어선 제도의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3. 고진을 읽으니 내 안의 고진이 드러난다.


4. 글이란, 사유란 모름지기 내가 세상의 유일한 주인인 것처럼 쓰는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5. 무겁지 않은 글쓰기란 무겁지 않으니 가벼운 글을 쓴다는 식의 이분법이 아니라 기존에 자신이 생각하던 가벼움과 무거움 모두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벼움, 새로운 무거움의 글쓰기이다. 이처럼, 글쓰기란 - 마치 삶과 사랑과 마찬가지로 - 이미 존재하는 어떤 모델을 따르는 것이 아닌, 이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글쓰기의 새로운 모습을 오늘 내가 여기서 발명해내는 일이다.


6. 신중히 생각하고 가벼이, 그러나 경박하지 않게.


7. 모든 현실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첫걸음 - 나의 마음과 외적 상황 모두를 어떤 조작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8. 내가 오늘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하다면, 네가 오늘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도 중요하지 않을까?


9. 폭력이 보여주는 최악의 형태는 실상 자기 '스타일'의 강요이다. 더구나 그것이 강요하는 자가 진심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합리성'의 형식을 갖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10. 자기 비하의 핵심이 이기적인 자기 중심주의인 것처럼, 지속되는 죄책감이야말로 자기 합리화의 궁극 형식이다.


11. 위안과 위로, 가능성과 희망이 남아있는 한 새로운 길은 열리지 않는다. 새로운 길은 완벽한 절망, 희망의 완전한 결여, 비유가 아닌 실제로 몸이 덜덜 떨리는 육체적 두려움, 겁이나 숨도 못쉬는 심리적 지옥의 상태를 어떤 조작도 도피도 위안도 없이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수하겠다고 마음 먹은 자, 곧 내 몸을 던지겠다고 마음 먹은 용기있는 자에게만 열린다.

지금 이 삶이 살만 하고 견딜만한 것인 한, 위로와 위안이 있는 한, 희망과 가능성이 있는 한,
새로운 삶은 네게 자신의 문을 열어보여주지 않는다. 죽어야만할 때 죽을 용기가 없는 자는 제대로 살 수조차 없다. 모든 길이 끊어지고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내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지 않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그리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어떤 조작도 없이 온전히 다 받아들일 때에만, 이해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실로 신비스러운 일이지만, 내 몸 안에서 내가 모르던 힘이 저절로 솟아나온다.

이 말을 믿지 못하는 이는 이러한 경험이 없는 이인데, 이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몸을 던져 이를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다.


12. 설득권력으로서의 철학 - 내가 생각하는 철학에 따르면, 설득력이 없는, 자신과 타인을 설득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담론은 철학이 아니다. 설득력이 없는 담론이란 타인들로부터의 공감도 지지도 얻어내지 못하는 담론이다. 그런데 철학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오직 합리적 논증에 기대어 자신의 권위와 힘 곧 설득력을 얻으려한다. 이 설득력이야말로 설득하고 설득시키는 힘, 곧 철학의 현실적 권력이다. 당신의 말이 타인들의 공감과 지지, 적어도 찬성 혹은 반대에 관한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바로 그만큼 당신의 담론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것이며 바로 그만큼 무력하다.

이제 당신은 물을 것이다. 설득력이란 무엇이며, 설득력은 꼭 얻어야 하는 것인가를(혹은 때로는 이 글이 자신을 겨냥해 쓰인것이 아닌가라고 자문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데 나는 - 무라카미 하루키와 마찬가지로 -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당신의 모든 질문은 타당하며 유의미하다.

그렇다. 이해했는가? 바로 당신이 정당하게 묻고 질문한대로, 설득력이 권력이며, 설득력이 힘의 논리이다. 설득권력!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철학이, 생각이, 공부가, 글이란 이미 권력추구 행위이다. 물론 이때의 권력은 필히 니체적 힘에의 의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따라서 철학을 하고 공부를 하고 생각을 하고 글을 쓴다면서도 타인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으려는 생각도 의지도 능력도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헤겔의 말대로 인간 의식의 모든 행위 곧 노동이 나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면, 나의 노동은 설득력을 지향해야 한다.

그렇다면 설득력은 어떻게 얻을수 있는가? 당신의 삶, 가치관, 진심, 한마디로 당신의 인생 전체가 당신의 동시대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것이 될 때이다.  당신은 당신의 진심 일상생활은 변화하지 않은 채로 당신이 보여주는 당신의 논리가 사람들에게 공감과 설득력을 얻기를 바라는가? 좋다. 그러나 당신이 바라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의식과 외적 언어와 행동는 당신의 진심 평상시 태도의 필연적 반영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당신의 말과 행동이 사랑이 오늘 당신이 사랑하는 자의 되돌아오는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로 비극이다. 이는 당신의 생각과 사랑이 당신의 머릿속에 갇혀있을 뿐 상대의 공감과 되돌아오는 사랑과 존중을 불러일으킬 현실적 힘과 능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용>의 말대로, 공감과 설득력의 획득은 평생을 두고 오늘 담담히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나만의 나인 동시에 우리인 나를 위해 스스로 행하는 작은 실천, 특별한 것 하나 없는 평범함, 곧 중용의 실천에서만 조금씩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없이 힘과 억지로 자신의 사정을 타인들에게 강요하는 자, 스스로를 설득하고 스스로가 설득되는 기나긴 지난하고도 지루한 자기성찰의 과정을 걷지 못하여 어떤 합리적 논리도 없이
궤변과 교언과 폭력과 심정적 호소로만 타인의 마음을 얻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자에게
세상은 비극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사소한 이 작은 일에 있어서의 타인에 대한 경청, 이 시시한 이 비소한 일에 있어서의 자기 배려만이 공감과 설득력을 낳고, 그리하여 천하를 바꿀 힘을 만든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자는 많아도 이에 성공하는 이는 드물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세상을 실제로 바꾸는 힘은 오직 자신의 진심과 세상의 이치를 맞닿게 하는데 성공한 자에게서만 나온다.


13.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그리고 그 실천)은 어떤 사람을 만들까?


14. 이른바 '고집'을 너무 부리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러나 이른바 사람들이 고집이라 부르는 것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옳다고 느껴지는 그의 가치관, 인식의 근본구조, 쉽게 말해 '진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해주어야 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가치관, 진심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집과 진심의 문제는 가치관들 사이의 수적 충돌, 곧 인정투쟁, 권력투쟁으로도 기술될 수 있다. 사람들과 교섭하지 않고 혼자 살거나(혹은 혼자 죽거나) 혹은 현실의 이러한 속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에 반응하며 같이 살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고집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멋대로 재단되고 유린되는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교섭이라는 사회적 속성을 갖는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파기해야만 할 장애물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어떤 부분이 존중받아야 할 인권이며, 어떤 부분이 당신의 성숙을 위해 버려야 할 장애물인지를 누가 알고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철학이 내 머리속, 몸 속 생각, 느낌과 나 바깥의 현실과의 무한한 대화라고 할 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란 영원히 지금-여기-나의 삶이다.


15. 요령이 아니라 실력, 요행이 아니라 정도


16. 공과 사를 불문하고 자신이 듣고 보는 모든 일을 개인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상에 입각해서 모든 일을 지각하고 판단하며 모든 일을 자신과의 관계에 입각해서만 바라본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모든 것을 자신과의 관계에 의해(어떤 행동이나 말이 자신에게 행해진 것이라고, 자신에게 이렇게 들린다고) 판단한다. 이들은 결국 하나의 사태를 오직 자신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해석하면서 그것이 해석이 아닌사실 자체라고 믿는다. 그 결과가 앞서 말한 개인화, 사적 사건화, 심리학화. 나아가 도덕화이며, 이들은 자신이 말이나 행위의 당사자보다 그들의 의도와 본의를 더 정확히 잘 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니체와푸코가 정확히 지직한대로 이러한 인간의 속성은 너무나 보편적으로 퍼져 있어서, 가령 현재의이 글을 개인화, 심리학화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즉이 글을 읽으며 이 글이 자신이 보라고 쓴 것은 아닌가라는 자신만의 생각에 함몰되지 않을 능력을 갖춘 건강한 사람은 오히려 소수이다. 이처럼 내가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나의 문제는 실상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이며, 이런 부정적인 자기중심주의적 자동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만이 아니라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역능을 니체적인 긍정의 의지로 끝까지 밀어부치는 들뢰즈의 작업이다.


17. 철학이란  무엇인가? 논점의 이해이다. 논점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로 어떤 논지를 찬성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논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떤 논지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다. 철학이란 이런 면에서 논점의 분명한 이해를 통한 합리적 논의라 할 수 있다.


18. 어느 날의 편지  - "심지어 저로서는 이것이 인생이 숨겨놓은 비밀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드러내야 할 때 무엇인가를 용기있게 드러내면 나와 세계가 변화하고 무엇인가를 얻지만(가장 좋지 않은 경우에조차 나는 '나의' 실패를 얻습니다), 드러내지 않고 있으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현재의 상태가 유지된다는 것 말입니다."


19. 민주주의 정치윤리의 간략한 규준 - "나의 일은 내가, 너의 일은 네가, 너와 나의 일은 너와 네가 같이 판단하도록 한다."


20. 공부란 섬세한 차이를 읽어내고 존중하는 것이다. 디테일이 학문의 최소요건이다.


2014.11.-2015.02.


 

2015. 9. 16.

잠언 13

 
 



1. 기억의 물질성 - 스페인에서 쓰다 가져온 치약이 다해가 듯 스페인의 기억도 점차로 희미해져 간다.


2.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적 소망을 방해하는 외적 저항에 붙이는 이름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41쪽.


3. "삶은 언제나 사후적인 판단을 통해서만 미래의 가치를 여실히 깨달아 간다." - 조용섭


4. 평생에 걸친 푸코 작업의 지향점들 중 하나는 세계관, 가치관의 독점과 그에 따르는 일방적 재단, 세뇌, 교정, 처벌의 정당 근거 자체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독점의 주요한 개념 장치가 절대, 객관, 중립이며, 그리고 이런 모든 개념들의 궁극 근거로서의 보편성의 관념이다. 따라서 푸코가 수행하는 모든 작업은 보편성의 관념에 대한 공격, 곧 계보학적 제도적 분석으로 수렴된다.


5. 프랑스철학을 왜 공부하는가? 내가 타인들과, 우리가 그들과 잘 살기 위해서.


6. 우리나라 축구 피파랭킹은 이번 달에 57위다. 사람들이 말하듯 나의 꿈은 대한민국이 피파랭킹 1위 하는 날까지! 이렇게 말하자면 스무살 중반 이래 나의 꿈도 이렇게 적어볼 수 있을 거다. 우리 국악 가요가 빌보드 1위 하는 날까지!

백인 배우들을 쓰는 광고들 촌스럽지 않은가? 우리 국악을 듣는 젊은이 멋지지 않은가!


7. 누군가가 말하는 이른바 '현실'이란 다만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믿는 자기 '당연함'의 일반 구조를 일컫는 말이다. 이때 이 누군가는 '자신에게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의 구조, 곧 자신이 어쩔 수 없다고 믿는 '현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8. "진리의 적은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9. 큰 착각 - 어떤 사람이 나와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 자체를 판단하는 오류.


10. "위험은 똑바로 노려보면 사라지는 법이다." - 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


11. 낭만주의와 정신분석의 위대한 통찰 - 주인공이 바라보는 '외적 현실'은 그의 내면 세계가 바깥으로 투사된 것이다.

이리하여 나와 나의 적이 서로에 대한 거울, 쌍둥이로 태어나고 자라난다.


12. 동아시아 학문의 메이지 효과, 유럽 학문의 고대 그리스 효과.


13.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다른 사람, 곧 다른 사람들, 나의 과거 혹은 미래와 비교하지 않는 것,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내가 되었어야만 하거나 또는 되어야 할 그런 상태의 나와 비교하지 않는 것. 지금의 이 현실을 어떤 가능성, 잠재성, 또 혹은 당위성과도 비교하지 않는 것.

나는 학생이거나 배워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족적이며 지금 이대로 그 자체로 충만한 존재이다.

불완전이 완전보다 상위의 가치이며, 카오스가 코스모스를 포용한다.


14. 네가 고민하는 문제는 네 어머니의 문제다.


15. 네가 감히 스스로 행할 수는 없으나 일어나주기를 바라는 '그 일'은 무엇인가?


16. 번역이 철학이다.


17. 네가 너 자신 그리고 모두를 위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궁금한가?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네 주변의 사람들이 '꽃 피고 있는지, 아니면 시들어 가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라. 특히 네 자신이.


18. 이른바 사람들이 믿는 보편적  진리, 객관적 합리성이란 무한히 다양한 세계의 특정 부분이 배타적으로 강조된 것이다. 니체적 힘관계의 논리.


19. 신 - 신은 deus 혹은 god이란 서구어를 번역하기 위해 메이지 일본인들이 채용한 번역어이다. 신, 메이드 인 저팬.

20.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 존재를 향한 용기 - 사람은 누구나 때로 이유없는 막연한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실로 '이유 없는 불안'이란 없다. 모든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적이기 때문에 모든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다 그럴만해서' 느끼는 불안을 무작정 어거지로 누르려고 해봐야 오히려 불안만 가중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방법은 오히려 불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안을 느낄 때, 특히 신체 반응이 수반되는 극심한 불안을 느낄 때, 잠시 동안이라도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고 그것을 차분히 바라보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결코 둘이 아니므로, 모든 불안은 어떤 느낌, 생각, 신체적 반응을 동반한다. 다시 한번 나의 경험을 돌이켜본다면, 바로 이때가 내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기회이다.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생각들을 피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 생각에는 적어도 나만의 합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 생각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며 찬찬히 바라보는 것이다. 인정이 반드시 긍정은 아니다.

이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 생각들 중 어떤 것은 내 머리 바깥의 현실과 일치할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싸매고 생각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다. 내 머리 바깥의 현실과는 일치하지 않는 '불합리한' 생각이라 해도 그것은 '나 자신이 믿는' 나의 현실과는 일치하는 것이므로 완전히 비현실적인 '불합리한' 생각은 아니다. 실상 그것은 내가 믿는 현실, 내가 걱정하는 현실과 일치하는 아주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생각이다.

모든 인간들 곧 '나'는 다른 어떤 누구와도 다른 고유한 존재이므로  이른바 사람들이 말하는 객관적 현실의 차원 이외에도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현실이라는 차원을 갖는다. 불안은 때로 전자와 후자의 차이에서도 나오지만, 대부분의 경우 후자의 차원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내'가 불안한 이유는 '나'만이 알 수 있다. 내가 불안한 이유를 네가 설명할 수도 네가 풀어줄 수도 없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따라서 주어진 한도 내에서의 보편성을 갖지만, 동시에 그만큼 홀로 서 있는 자 곧 단독자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 인간과 홀로 있는 단독자가 모두 언어라는 그물망이 빚어낸 효과라는 것이 라캉의 복음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고, 언어의 동일성은 타자성과 동시적 상관적으로 구성된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동물과 달리, 인간인 내가 불안한 이유, 내 몸이 불안에 떠는 이유는 내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며 내게는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생각이 내게는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믿는 합리성의 구조를 내가 모르거나 부정할 경우, 나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파르헤시아 곧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것을 말하는 용기'란 이렇게 스스로에게 '스스로가 믿는, 스스로의 지금 있는 그대로'를 알리는 행위이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정직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그 결과를 두려워 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말하는 자기에 대한 정직은 감당도 못할 진실을 스스로에게 폭로하고 붕괴되라는 말이 아니다.

공자가 말하는 학이시습지란 배우고 '때로' 익힌다가 아니라 배우고 '때에 맞게' 곧 내가 들은 바를 내 몸과 상황에 맞게 잘 응용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깨우치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나를 아끼고 섬겨라. 인간은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라는 두 날개로 난다. 모든 공부는 내 몸에 이 자기 배려를 실천하는 나만의 방법을 스스로 깨우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나의 불안을 치유하는 방법이란 내가 듣고 읽고 배운 말을 내가 내 몸에 적용하는 법을 조금씩 배우는 방법에 다름 아니다.

객관적 합리성, 우리의 합리성만큼이나 나의 합리성, 내가 믿는 합리성도 중요하다.

나의 불안, 내 몸을 떨게 만드는 이 불안은 나의 합리성, 내가 믿는 합리성의 구조를 드러내주는 고마운 메신저이다. 남들이, 아니 내가 '비합리적'이라 말하는 내 믿음의 합리성 구조는 바로 내가 느끼고 믿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사는 세계, '진심'의 세계이다. 나의 진심을 모르는 내가 내게 잘해주기란 불가능하다. 이처럼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는 함께 간다.

그리고 그 결과를 두려워 하는 이에게 나는 오직 나 자신이 경험한 나의 진심구조를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 말은 노자에 나온다.

"하늘의 그물은 성기어 빈틈투성이처럼 보이지만 빠져나가는 것이 없다."

노자에 좋은 길과 나쁜 길은 서로 기대어 있고 내 몸이 망한 것도 이 길이지만 이  길에서 나가는 길도 이 길이므로, 내가 어찌 어리석고 악한 사람을 남이라 비웃고 탓하기만 할 수 있으랴. 흥해도 이 길로 흥하고 망해도 이 길로 망하니, 불행의 조건이 행복의 조건이며, 죽음의 조건이 삶의 조건이니, 두 길은 다른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길이 귀히 여겨지는 것이란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남과 나를 모두 너그럽게 바라보되, 남과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조작도 없이 내가 믿고 보고 그 안에서 사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자만이 삶을 살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계의 지옥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단 말인가?


21. 때로 사랑과 외로움은 같이 걷는다. 쓸쓸함 역시.


22. 나의 참다운 행복과 너의 참다운 행복은 모순되지 않으며 실로 일치한다. 이것은 인식이나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믿음과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


23. 어떤 위로도 위안도, 변명도 상황의 조작도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렇게 나는 '오늘'을 견딘다.







vaughan williams, lark ascending, hilary hahn



2015.05-2015.09.

2014. 5. 22.

잠언 08

 
 
 
 
 
 
 

0. 하나의 언명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놀이임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언명 혹은 이러한 언명들의 집합을 담론(談論, discours)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세상에 언표된 말 중에 담론이 아닌 것은 없다.



1. 메타적 층위의 문제 - 주어진 하나의 진리 놀이들 안에서는 참과 거짓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진리놀이들 사이의 선택에는 결단만이 존재할 뿐 참과 거짓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놀이들 사이에 그것들을 갈지르는 또 다른 메타적 층위의 보편이 존재한다고 보는 순간, 그는 다시 근대(modernity)의 진리관에 빠져든다.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은 이러한 메타적 층위의 보편을 인정하지 않는 다원주의를 의미한다.



2. 구성주의(constructionism)는 재현주의(representationalism)를 파괴하려는 운동이다. 구성주의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 '나의 선택과 관심에 상응해서' 구성되었다는 적극적 개입의 입장, 재현주의는 '있는 그대로' 곧 '나는 아무 것도 안 하고 100% 수동적으로 기술한다'는 순수주의의 입장이다.



3. 사람들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무섭다고 말한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이유가 도덕적으로 게으르거나 노력 혹은 결단력의 부족으로 보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모든 걸 자기 기준으로만 바로본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적절한 제한만 주어진다면, 때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우리 모두가 - 어떤 의미에서는, 혹은 자신이 성공한 영역들에서는 -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4. 무엇이든 너무 집착하면 오히려 안 된다. 가령, 행복하려고 환장해서 발악을 하면  오히려 될 일도 안 된다. 푸코는 블랑쇼에 관한 자신의 글 <바깥의 사유>에서 블랑쇼의 글이 보여주는 '이끌림'(attirance)의 비결을 '게으름 혹은 무심함'(negligence)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생각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조금은 무심하고 조금은 게을러져야, 그럴 수 있는 여유와 거리를 가져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5. 한 어리석은 정치인 때문에 '실용주의'라는 말이 폄하되곤 하고, 때로는 실용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있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실용주의를 지지한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방식이 실용적이지도 못하다는 것, 사실은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1960년대 당시에도 인권을 유린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위해 주창되던 그러한 비민주적인 '조국근대화'의 방식이 이른바 '선진국'을 지향한다는 오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통용될 것 같은가? 같은 이야기이지만, 가령 우리나라 기업이 유럽이나 미국에 진출해서, 그곳의 현지인 직원들에게 과거의 대한민국이나 오늘의 중국과 같은 방식을 강요하고 그것이 어떤 '실용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어리석인 사람이 있을까?



나는 실용적이고 싶다. 관건은, 실용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실용주의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여 그러한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실용주의란 어떤 것이며, 나와 우리의 어떤 행동이 실제로 실용적인 결과를 낳는가에 관심이 있다.



6. 노력이란 실로 때로는 자기합리화의 일종이다. 노력하는 것은부족하기 짝이 없다. 노력을 하는 것에 그치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으로 얻어려는 바가 실제로 얻어져야 한다. 사랑을 해도 상대를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나의 사랑이 전달되어야 하고, 효도를 해도 나 혼자 힘들어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들이 실제로 기쁨을 느껴야 하고, 직장에 취직을 하려해도 노력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합격을 해야 한다.



7. 애니어그램들을 왜 그렇게 열심히들 하는가? - 자기 얘기니까! 연애가 재미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둘이서 자기 얘기, 자기 사랑, 결국 자기가 관심있는 얘기만 하기때문이다. 사주든 궁합이든 타로든, 점을 열심히 보는 이유도 자기 얘기라서. 이런 관심은 적절하면 애교로 보아줄 수도 있지만, 지나치면 좀 끔찍한 부분이 있다.



8.  점과 관련하여 꼭 나오는 얘기가 점이 통계학이라는 것이다. 그시대에 통계가 있지도 않았고 이 때의 통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인간 유형을 유형별로 나눌 수 있다고 보는 것도 한계가 확실하고, 질문과 점괘의 내용 자체도 중의적이라 읽는 사람이 해석하기 나름이다(물론 이 점이 점의 묘미이고, 가치이다).



9. "미국의 스티븐스 판사는 논쟁적인 도덕적 주제가 걸려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임신중절의 여부는] 입법부가 아니라 여성 개인이 스스로 겨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법원이 주장하는 것은 - '법원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가치관을 개인에게 강요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어떤 개인도 단순히 그가 '선호하는 가치'가 다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자유를 포기하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스티븐스가 생각한 근본적인 질문은 - 생명에 관한 어떤 견해가 옳으냐가 아니라 - "임신중절의 결정을 개인이 내려야 하느냐 아니면 다수가 내려야 하느냐"이다." - 마이클 샌델, <<왜 도덕인가?>>(한국경제신문, 109쪽)



10. 남을 "걱정해주면서" "상대를 위해서" 상대의 삶에 간섭하며,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관전평을 때로는 도덕적 훈계를 일삼는 행동이 실로 달콤한 간섭(intervention), 곧 권력행위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드물다.


11. "내 몸의 느낌을 내가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야!"



12. 푸코의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해석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황당한' 언명이다(그런데 푸코는 물론 이런 점을 당연히 알고 있다).



13. 지식인과 인민은 둘이 아니다(不二).



14. 일본에는 사소설(私小說)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 사소설이란 없다. 그것은 철저한 '보편소설'의 한국적 양상이다.



15. 미시사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기원 5세기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아테네에 사는 한 평범한 성인남성의 사랑이 갖는 다양한 측면들을 문화인류학적으로 재구성해보라.




16. 모든 정치적인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는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며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이다. 실로 이보다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란 없다!



17. 요즘 기자들과 쓰레기를 결합하여 '기레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물론 기자들 개개인에게 그러한 사태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이러한 사태의 궁극적 원인은 19세기적 과학관, 진리관의 무비판적 반영, 곧 중립보도, 사실보도, 공정보도라는 관념 안에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문제는 이러저런한 편집권의 문제가 아니라, 편집권 자체이다. 편집권은 편집권력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한국말'이라는 말처럼 기자들이 이런저런 말을 편집하는 그 행위 자체가 중립이 불가능한 선택의 행위이다. 취재 대상과 아닌 대상을 나누는 일, 중요한 기사와 그렇지 않은 기사를 나누는 일 자체가 이미 도저히 중립적일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의 행위이다.



모든 기자들은 사실 어린 시절 이러한 편집권력의 무시무시한 힘을 깨닫고 적어도 두 번은 전율에 떨게 된다. 한 번은 이 힘의 강력함에, 두 번째는 아무도 이 부당한 '중립적이지 않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는 사실에.



18. 인생에서 종종 찾아오는 연극무대는 그녀의 오늘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결혼식장과 상가집, 혹은 강의실, 혹은 팀발표 등에서 그녀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녀의 행동을 보라.



19. 사람들은 보통 너무나 자기중심적이어서 (가령 자신이 개인적으로 아는) 어떤 이의 글을 읽을 때 이것이 자신에 대해 말한 글이 아닌가 생각하고 또 의심하곤 한다.



20. 푸코는 지식인, 부르디외는 상식인이다.



21. 루소와 알튀세르가 이른바 정말 '미친 사람'임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들이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어떤 단 한 가지 사건 혹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으로 말한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다른 사람들의 오해와 시기와 모함에 의해, 후자는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그'라고 붙였다는 그 사실에 의해.




22.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문제가 자신의 '정상성'임을 알지 못한다.



23. 안티기독교인은, 물론, 기독교신자다. 그녀의 사고는 여전히 모든 것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4. 스스로 오랜 기간 동안 기자였던 카뮈가 <이방인>에서 그리고 있는 법정과 언론의 모습은 실로 탁월하다. 그들 모두는 재판이나 보도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행하고 있다. '용의자' 혹은 '피의자'인 뫼르소가 하는 모든 행동이 자신들이 뫼르소를 바라보는 관점에 입각해 재단되고 판정된다. 가령 평상시 이웃들의 증언이 그를 순수한 사람으로 보았다면 '저렇게 치밀한 두 얼굴의 완벽한 이중인격자', 조금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역시 이 사람은 원래 저런 인간, 파렴치한 범죄자'라는 식이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근대의 사법제도는 '범죄행위'에 대한 재판 이외의 어떤 것, 그 이상의 어떤 다른 것, 곧 한 인간의 '품행'을 심판한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탁월한 통찰이다. 가령 오늘 푸코가 살아 있어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고, 어느 기자가 푸코의 수첩에서 <<감시와 처벌>>의 논지와 비슷한 글을 발견한다면, 그녀는 아마 '이렇게 치밀하고 간교하게도 푸코는 이런 경우에 대비해 자신에게 유리한 이런 책을 미리 써놓았던 것이다!'라며 비분강개하는 어조로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경우의 참다운 문제는 무엇인가? 자신이 원래 믿고 있는 해석에 준하는 증거는 자신의 생각이 '옳은' 증거로, 반하는 증거는 범죄자 혹은 용의자의 '교활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하는 것다. 결국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틀릴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해석권력'이라 부르기에 가히 부족함이 없는 행동이다.




25.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런 해석권력을 행사하는 기자이다. 그렇지 않은가?









 
 
 
 
 
 
 

2012. 7. 21.

07.08.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 II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 전집 7.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1878),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6. [...] 너는 모든 가치 평가에서 관점주의적인 것을 터득해야만 했다 - 지평의 이동, 왜곡 그리고 표면상의 목적론과 관점주의적인 것에 속하는 모든 것 그리고 대립된 가치들과 관계하는 약간의 우둔함, 찬성과 반대와 함께 항상 지불되는 지적 희생도 터득해야만 했다. 모든 찬성과 반대 속에 포함된 필연적인 불공정[불공평]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그 불공정은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삶 자체를 관점주의적인 것과 그 불공정에 의해 제약되는 것으로 터득해야 했던 것이다.
- 17쪽.
 

11. 소위 학문이란 것으로서의 언어 - 31-32쪽
 

25. 개인 도덕과 세계 도덕 - [...] 아무튼 인류가 이와 같은 의식적인 전제적 통치에 의해 파멸되어서는 안 된다면, 지금까지의 정도를 모두 넘어서는 문화의 조건들에 대한 지식이 보편적 목표를 위한 학문의 척도로서 사전에 이미 발견되어야 한다. 이것이 다음 세기의 위대한 정신들이 해야 할 엄청난 과제이다.
- 49쪽.
 

31.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에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 들어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순수하게 논리적인 본성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주 소박한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이 목표에 접근하는 단계라는 것이 있다면,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은 상실될 것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가장 이성적인 인간도 때로는 다시 본성을, 즉 만물에 대한 자신의 비논리적 기본 입장을 필요로 한다.
- 54-55쪽
 

32.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삶의 가치에 관한 모든 판단은 비논리적으로 발전해온 것이므로 공정하지 못하다. 판단의 순수하지 못함은, 첫째 재료가 나타나는 양식에, 즉 극히 불완전한 점에 있으며, 둘째 재료에서 총계가 구성되는 양식에 있으며, 셋째는 재료의 모든 개별 부분이 순수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이며, 더욱이 이런 순수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가 다시 필연적이라는 점에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의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 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왜냐하면 모든 혐오는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유익한 것을 얻고자 원하고 유해한 것을 회피하는 감정 없이 그 무엇을 하고자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충동 그리고 목표의 가치에 대한 인식적인 평가가 없는 충동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 55-56쪽
 

* "Le sens historique, tel que Nietzsche l'entend, se sait perspective, et ne refuse pas le systeme de sa propre injustice."
"니체가 이해한 바의 역사적 감각은 자신이 관점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불공정한 체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 "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 Dits et ecrits I, p.1018; 미셸 푸코, 「니체, 계보학, 역사」, 이광래 옮김, 이광래 지음, 『미셸 푸코: ‘狂氣의 역사’에서 ‘性의 역사’까지』, 민음사, 1989, 350쪽.
 
 

-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이른바 '포스트주의'의 도덕성은 이 세계의 다양한 관점들을 가로지르는 '절대 관점, 보편 관점 혹은 신이 죽은' 이 세계에 대해 어떤 관점의 우위성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그 정신에 입각하여 자기 이론마저도 하나의 관점이고, 따라서 부당하고 불공정한 체계임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제까지 스스로를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유일한 필연적 진리라고 주장해왔던 모든 이론들은 사실상 그렇게 스스로를 믿고 주장할 뿐인 무수한 가능한 관점들 중 단 하나인데, 그들은 이렇게 보통 말한다.

"다른 모든 관점들은 관점이다. 진리인 나의 이론만 빼고!"

이른바 '포스트주의들'은 바로 이점에 대해 스스로를 배제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단연 탁월한 도덕성을 보여준다.
나는 이렇게 '하나의 논리가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적용 대상에서 빼놓지 않는 것'을 '논리의 윤리성'이라 부른다.
 

33. 삶에 대한 오류는 삶을 위해 불가피하다 - 삶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모든 믿음은 순수하지 못한 사고에 기초해 있다; 그것은 오로지 인류의 보편적인 삶과 고뇌에 대한 동감이 개인에게는 아주 미약하게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하게 불평하지 않고 삶을 견뎌내고 있고, 이로써 삶의 가치를 믿고 있다. [...] 반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운명과 고뇌에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의 가치에 절망할 것이다; 만약 그가 인류의 총체적인 의식을 자신 속에서 파악하고 감지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현존을 저주하면서 쓰러질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전체적으로 아무런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은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아 그 속에서 위로와 의지가 아니라 회의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무목적성을 보게 될 때, 그의 눈에는 자기 자신의 활동도 낭비라는 특징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개개의 꽃이 자연에 의해서 낭비되고 있는 것을 보듯이 바로 우리가 인류로서(그리고 단순히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낭비되고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은 모든 감정을 넘어서는 감정이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느낄 수 있는가? 분명 시인뿐이다; 시인들은 언제나 자신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다.
- 56-57쪽
 

50.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 라 로슈푸코가 자신의 자화상(초판 1658)의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에서 이성을 가진 모든 사람은 동정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그런 일은 서민들에게 맡겨버리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서민들은 고통받는 자를 돕거나 불행에 처했을 때 힘차게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정열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성을 통해 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런데도 로슈푸코의 (그리고 플라톤의) 판단에 의하면 동정이란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동정을 입증해야 하지만, 동정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 왜냐하면 불행한 사람들은 어쨌든 동정을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 불행한 사람의 그러한 욕구를 정녕 어리석음과 지적 결함, 불행이 수반하는 일종의 정신장애로 간주하지 않고 (라 로슈푸코는 아마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듯하지만), 전혀 다르며 의심스러운 것으로 해석할 때, 사람들은 이런 동정을 갖지 않도록 더욱 강력하게 경계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아이들을 관찰해보라. 그들은 울거나 소리침으로써 동정받고 자신들의 상태가 눈에 띌 순간을 기다린다 ; 병자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과 교제하며 살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능란하게 호소하고 흐느끼며 불행을 과시하는 것이 결국 함께 있는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닌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 그들이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떤 힘, 즉 강자를 괴롭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는 한, 함께 있는 사람이 표현하는 동정은 약자와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위안이 된다. 불행한 자는 동정 베풂이 자신에게 입증해주는 우월감으로 인해 일종의 쾌감을 얻는다 ; 자신은 아직도 세상에 고통을 줄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라는 그의 자만심도 커진다. 그래서 동정에 대한 열망은 자기 만족을 향한 열망이며, 더욱이 이웃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 동정심은 지극히 자기애에 빠져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 그러나 라 로슈푸코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음” 때문은 아니다. 사교적인 대화에서는 모든 질문과 대답의 4분의 3이 상대편을 조금이라도 괴롭히기 위한 것이다 :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대단히 사교를 갈망한다. 사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악의가 힘을 떨치고 있는 이같이 많은, 그러나 극히 적은 양의 약에서도 사교는 삶의 가장 강력한 자극제이다. 그것은 마치 같은 형식으로 이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호의가,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는 치료제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 그러나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고백할 정직한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생각 속에서는 다른 사람을 모멸하고, 악의라는 작은 탄환을 그들에게 퍼붓는 것을 가장 즐기고 - 기꺼이 즐기고 있다고 고백할 정직한 사람이 있을까? 이런 치부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기에는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 부정직하고 몇몇 사람들은 너무 선하다. 따라서 차라리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 할지라도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érimée가 한 다음의 말은 옳다. “악한 일을 한다는 쾌감 때문에 악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없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 77-79쪽.
 

57. 자기 분할로서의 인간의 도덕 - 진정으로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작가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일을 더 명확하게 표현해주고ㅡ 여기에 포함된 문제에 대해 남김없이 대답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해주기를 원한다.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는 연인이 저지른 부정에서 자신의 사랑이 헌신적이며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군인은 조국의 승리를 위해 전쟁터에서 쓰러지기를 원한다 : 왜냐하면 자신의 최고 소원도 조국의 승리를 통해 승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 즉 수면과 가장 좋은 음식을, 사정에 따라서는 자신의 건강과 재산을 자식에게 주게 된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이기적인 상황들일까?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라 이런 도덕적 행위들은 “불가능하면서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기적일까? 이들의 경우에는 인간은 자신의 그 무엇을, 하나의 사상, 하나의 욕망, 하나의 작품 등을 자신의 다른 것보다 한층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가? 어느 고집 센 사람이 “내가 이 인간에게 한 걸음이라도 길을 양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총을 맞는 편이 낫다”고 할 때,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일까? 어떤 것에 대한 애착(소원, 충동, 욕망)은 앞서 말한 모든 경우에 존재하고 있다 ;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비이기적”이지 않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개체individuum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dividuum으로서 다룬다.
- 85쪽.
 

92. 정의의 유래 - 101-102쪽
 

114. 그리스도교에서 비그리스적인 것 - [...] 그리스도교의 모든 심리학적 발명은 감정의 이러한 병적인 과도함과 거기에 필요한 머리와 마음속의 깊은 파괴를 향해 작용했다 : 그리스도교는 파멸시키고, 파괴하고, 마비시키고, 도취시키려고 한다. 단 한 가지 척도만은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말하면, 야만적이고 동양적이며, 천박하고 비그리스적이다.
- 138쪽.
 

303. 반대하는 이유 - 한 의견이 우리들에게는 단지 그 전달된 어조만이 호의적이지 않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흔히 그 의견을 반대한다.
- 289쪽
 

304. 신뢰와 친밀함- 다른 사람과 의도적으로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확신하는 사람은 친밀함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 289-290쪽
 

310. 기다리게 하는 것 - 사람들은 흥분하게 하고 그들 머릿속에 나쁜 생각을 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그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도덕적으로 만든다.
- 291쪽
 

311. 친밀한 사람들에 대해 - 우리에게 완전한 신뢰를 보이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신뢰를 얻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이는 잘못된 추리다. 선물로 권리를 획득할 수는 없다.
- 291쪽
 

314. 사려 깊은 -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기질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많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 292쪽
 

379. 부모의 존속 - 부모의 성격과 성향에 관련된 해결되지 않는 불협화음은 어린아이의 본질 속에서 계속 울리게 되고 그의 내면적인 고뇌의 역사를 형성한다.
- 323쪽
 

381.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 324쪽
 

390. 여성의 우정 - 여성은 남성과 아주 좋은 우정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마 약간의 생리적인 반감이 협조해야 할 것이다.
- 326쪽
 

396. 반하고 싶어 한다 - 관습에 따라 결합된 약혼자들은 흔히 그들의 차갑고 타산적인 유용성을 비난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에 빠지려고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이익 때문에 그리스도교로 전향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경건해지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종교적 무언극이 그들에게 훨씬 쉬워지기 때문이다.
- 327쪽
 

416. 여성해방에 대하여 - [...] 도대체 학문이 무엇인가를 참으로 알고 있는, 한 명의 여성보다 더 희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가장 우수한 여성들마저도 마치 자신들이 그 무엇에 의해서 학문보다 더 우월한 것처럼, 가슴속에서는 은밀하게 학문에 대한 경멸에 가까이 가고 있다. 아마 이 모든 것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당분간은 그러하다.
- 335쪽
 

422. 어린 시절의 비극 - 고상하고 높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유년기에 가장 혹독한 투쟁을 견뎌내야 했다는 것은 아마 드물지 않게 있는 일일 것이다: 그들은 비천하게 생각하고 겉치레와 거짓을 따르는 아버지를 거역하고 자신들의 의향을 관철시켜야만 하거나 바이런 경처럼, 끊임없이 어린아이 같고 화내기 잘하는 어머니와 싸우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한 것을 체험했다면 사람들은 평생 동안 한 사람에게 가장 크고 가장 위험한 적이 과연 누구였던가를 알게 된 사실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 338쪽
 

446.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 - 356-357쪽
 

475. 유럽인과 여러 국가의 파멸 - [...] 동양적인 구름층이 유럽 위에 무겁게 덮여 있었던 중세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가혹한 개인적인 압박 하에서도 계몽과 정신적 독립의 깃발을 고수하고 동양에 맞서 유럽을 방언한 것은 유대의 자유사상가, 학자 그리고 의사들이었다. 좀더 자연적이고 합리적이며 적어도 비신화적인 세계 해석이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과 지금 우리를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화에 의한 계몽과 연결하는 문화의 고리가 단절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노력에 신세진 것이 적지 않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서방을 동양화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다고 한다면, 유대민족은 근본적으로 서구를 다시 서양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서양화하는 것이란 특정한 의미에서는 유럽의 과제와 역사를 그리스적인 것을 계승하는 것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 382쪽
 

483.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 391쪽.
 

499. 친구 - 고통의 나눔 곧 동정이 아니라, 기쁨의 나눔이 친구를 만든다.
- 395쪽.
 

550. 감사의 끈 - 노예 같은 영혼들이 있는데, 그들은 감사의 끈으로 스스로 목을 매어 죽기까지 할 정도로,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아주 지나치게 한다.
- 407쪽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8.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2.
 

제1장 혼합된 의견과 잠언들
 

10. 역사의 포로가 되는 것 - 베일을 쓴 철학자들과 세계를 어둡게 만드는 사람들, 즉 섬세한 씨앗이나 씨앗을 가진 모든 형이상학자들은, 철학 전체는 지금부터 역사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명제와 더불어 그 명제가 정당한지 의심하기 시작할 때 눈과 귀와 이에 통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
- 26쪽
 

140. 입을 다무는 것 - 자신의 작품이 입을 열 경우, 작가는 입을 다물어야만 한다.
- 92쪽.

221. 예외적인 그리스인 - [...] 그렇지만 이제는 학문을 창시한 그 예외적인 그리스인들의 위대함을 존중하자! 그들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인간정신의 가장 영웅적인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 138-139쪽.
 

346. 오해받는다는 것 - 전적으로 오해받고 있다면, 개개의 오해를 근본적으로 풀어가기는 불가능하다. 자신을 변명하는 데 지나친 힘을 낭비하지 않도록 사람들은 이 사실을 통찰하고 있어야 한다.
- 195쪽.
 

386. 들을 귀가 없다는 것 - “항상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은 아직도 천민에 속한다 ; 항상 자신에게만 책임을 돌릴 경우, 그는 진리의 궤도에 들어 서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즉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책임은 없다고 생각한다.” - 누가 이렇게 말했던가? - 천 8백 년 전 에픽테토스이다. - 사람들은 그 말을 듣기는 했지만 잊어버렸다. - 아니, 듣지도 잊어버리지도 않았다 : 모든 것이 망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들을 귀를, 즉 에픽테토스의 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 그렇다면 그는 이것을 자신의 귀에 대고 말한 것일까? - 그렇다 : 지혜란 사람이 넘치는 시장에서도 고독한 사람이 자신에게만 속삭이는 귓속말이다.
- 207-208쪽.
 

395. 너무 비싸게 사지 말 것 - 너무 비싸게 산 물건은 역시 대체로 좋지 않게 사용된다. 왜냐하면 물건에 대한 애착이 없이, 씁쓸한 기억과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사람들은 이중으로 손해를 보게 된다.
- 210쪽
 

제2장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19. 비도덕주의자들 - 도덕주의자들은 오늘날 비도덕주의자로 비난받는 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도덕을 해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부하려는 사람은 먼저 죽여야만 한다 :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단지 더 잘 알고, 더 잘 판단하고,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세상 모두를 해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도덕주의자들이 그 모든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 그들은 도덕주의자를 도덕의 설교자와 혼동하고 있다. 과거의 도덕주의자들은 도덕을 충분히 해부해보지도 않고 설교하는 일이 너무나 흔했다 : 이 때문에 이러한 혼동뿐만 아니라 현재의 도덕주의자들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생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 237-238쪽.
   
  
22. 균형의 원리 - 239-241쪽
 

23. 자유의지 이론의 추종자들을 처벌해도 되는가 - 241-244쪽
 

28. 형량의 결정에 있어서 임의성 - [...] 모든 것은 범죄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사회가 받는 손상과 위험이 기준이 된다: 그리고 한 인간의 과거의 유익성은 그가 저지른 단 한 번의 유해성에 불리하게 계산되고, 과거의 유해성은 또 현재 발견된 유해성에 불리하게 계산되고, 과거의 유해성은 또 현재 발견된 유해성에 가산되어 그에 따라 형량은 최고로 산정된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과거가 함께 처벌되거나 또는 함께 보상(처벌의 경감으로 보상된 첫 번째 경우)되는 것이라면,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이러저러한 원인들을 다 처벌하고 보상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부모와 교육자와 사회 등의 원인이다. 많은 경우에 재판관도 어떤 방법으로든 죄에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과거를 처벌할 경우, 범죄자에게만 국한하는 것은 임의적이다. 모든 죄가 가진 절대적인 용서 가능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각 개별적인 경우에만 국한해야 할 것이며 더 이상 소급해서 올라가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죄를 분리시켜 그것을 과거와 관련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논리를 거역하는 죄인이 될 것이다. [...]
- 247-248쪽
 

38. 양심의 가책 -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개가 돌을 무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 257쪽.
 

40. 도덕감각에서 망각의 의미 - 원시사회에서는 공동의 이익을 위한 의도에서 우선적으로 권장되었던 행위가, 나중에 다른 세대에 의해서는 다른 동기들에서 행해졌다 : 다른 동기들이란 그러한 행위를 요구하고 권장했던 사람들에 대한 공포나 외경심에서 혹은 유년 시절부터 그러한 행동이 주위에서 행해지는 것을 보며 생긴 습관에서 혹은 그러한 행위는 어디서나 기쁨과 동의를 보내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은 호의에서, 혹은 그 행위가 칭찬받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허영심ㅂ에서 나온다. 그런데 근본 동기, 즉 유용성이라는 동기가 망각된 그러한 행위들이 도덕적 행위라고 불린다 : 그것이 도덕적 행위라 불리는 이유는, 그 행위가 다른 동기에서 행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유용성을 의식하고 행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모든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는 행위와 이익을 위한 행위가 확실히 구분되는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이익에 대한 이러한 증오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 모든 도덕의 근원이며 도덕적 행위에 대한 모든 찬사의 근원인 사회는 분명 이외의 다른 모든 동기가 도덕적으로 훨씬 더 높게 평가되도록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나 격렬하게 개인의 사리사욕과 싸워야 했다. 그리하여 도덕은 마치 이익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도덕은 근원적으로는 사회의 이익이며, 모든 개인적인 이익에 맞서 자신을 관철시켜나가고 더 높은 품위를 얻기 위해 애써왔다.
- 257-258쪽.
 

52. 양심의 내용 - 우리 양심의 내용은 유년 시절에 우리들이 존경하거나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이유 없이 규칙적으로 요구했던 모든 것들이다. 따라서 양심에서 (“나는 이것을 해야만 한다, 이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의 감정이 야기된 것이며, 이 감정은 그러나 나는 해야만 하는가? 라고 묻지 않는다. - 인간은 ‘때문에’와 ‘왜’와 함께 행하게 되는 모든 경우에 양심이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 된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직 양심을 거역하는 것은 아니다. - 양심의 원천은 권위에 대한 믿음이다 : 따라서 양심은 인간들의 가슴 속에 있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몇몇 인간들의 목소리인 것이다.
- 265쪽.
 

55. 정신의 자유에 대한 언어의 위험 - 모든 단어는 하나의 편견이다.
- 266쪽.
 

68. 용서할 수 있을까? -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용서할 있겠는가? 우리는 용서할 것이 전혀 없다. -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있을까? 이 문제가 적어도 의문스러운 것으로 남는다면, 사람들이 서로 용서해야 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가장 이성적인 사람에게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 만약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이 정말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그 죄를 묻고 벌을 줄 권리가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경우에만 그 사람을 용서할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없다.
- 273-274쪽.
 

87.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을 배우는 것 - [...]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훌륭하게 유럽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훌륭하게 그리고 점점 더 훌륭하게 글 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 설령 그가, 잘 쓰지 못하는 것이 국민적 특권처럼 취급되는 독일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더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은 동시에 더 훌륭하게 사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것은 항상 전할 가치가 더 큰 것을 창안해내고 그것을 실제로 전할 수 있다는 것 ; 이웃 나라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고 우리의 언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쉬우며 또한 재산은 모두 공유 재산이 되고 자유인에게 모든 것이 개방되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 그리고 마침내 지구의 모든 문화를 인도하고 감독한다는 저 위대한 임무가 훌륭한 유럽인의 손에 쥐어질, 아직도 여전히 먼 미래의 일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 그 반대의 것, 즉 훌륭하게 쓰고 잘 읽는 법 - 이 두 가지 덕은 함께 성장하고 함께 감퇴한다 - 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실제로 어떻게 여전히 더 민족주의적으로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는 셈이다: 즉 그는 이 세기의 질병을 증가시키는 사람이며 훌륭한 유럽인의 적이자 자유정신의 적이다.
- 286-287쪽.
 

182. 문화의 기상과 변화의 전조 -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같은 사람에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 - 자유정신에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를 의미한다 -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느낌을 살펴보면 된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교에 비판적이 아닌 어떤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다 : 그는 우리에게 나쁜 공기와 악천후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 336쪽.
 

215. 유행과 현대 - [...] ‘현대적’과 ‘유럽적’이라는 두 개념이 거의 동일시되고 있는 이곳에서는, 유럽이라는 개념 하에 지리학적 유럽, 즉 아시아의 작은 반도가 포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지역들이 고려되고 있다 : 특히 아메리카도 그것이 우리 문화의 식민지인 한에서는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결코 유럽 전체는 문화 개념으로서의 ‘유럽’에 포함되지 않는다 ; 오히려 거기에 포함되는 것은 그리스 정신, 로마 정신, 유대 정신 그리고 그리스도교 정신에 그들의 공통적인 과거를 가진 모든 민족과 일부 민족들이다.
- 360쪽.
 

237. 가장 무시무시한 복수 - 만약 상대방에게 철저하게 복수하려고 한다면, 진리와 정의를 손에 가득 쥐고 그에게 패를 내놓을 수 있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복수는 정의를 실행하는 것과 같게 된다. 이것은 가장 무시무시한 복수이다. 왜냐하면 그 위에는 더 호소할 수 있는 어떠한 상급심도 없기 때문이다.
- 371-372쪽
 

284. 참된 평화에 이르는 수단 - 395-396쪽
 

324. 사상가가 되기 위해서는 - 적어도 하루의 3분의 1을 정열, 인간, 책이 없이 지내지 않는다면, 그가 어떻게 사상가가 될 수 있을까?
- 4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