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27.

le visible et l'invisible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4, 동문선), 중 「작업 노트」
 
 
 
- 초월적 장이란 여러 초월성의 장이다. 초월론적인 것은 정신 즉 영혼과 심리학적인 확고히 넘어서는 것이므로 반(反)-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의미에서 주관성의 넘어섬이다(252).
 
 
 
- 중요한 일은 현재 작용하는 잠재적 역사성으로서의 생활세계에 의해 부름을 받아 생성된 창조이다. 역사성을 계승 연장하고 역사성을 증언하는 창조이다(255).
 
 
 
- 현재와 과거 이상의 것을, 즉 생활세계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 한 문화의 현존재(présence)를 복원하는 것이 문제이다(257).
 
 
 
- 결국 아생적 존재들의 층이 존재할 것이다. [.] 수차례 자기 이입, 코기토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 예를 들어 나는 신체의 수준에서 앎 이전의 앎(pré-savoir); 의미 이전의 의미(pré-sens), 침묵의 앎을 기술할 것이다.
 
 
 
- 철학자가 찾는 내면성은 또한 상호주관성이고, ‘체험된 것’의 저 너머에 있는 원공동성(原共同性)의 창설(創設, Urgemein Stiftung)이다 - 체험된 것들(Erlebnisse)에 대항하는 자성(自省, Besinnung). [...] 세계에 관한 ‘야생적’ 조망의 탐구는 결코 전(前)이해나 선(先)과학에의 회귀로 그치지 않는다. ‘원시주의’는 과학주의의 상대항에 불과하고 또한 그 역시 과학주의이다. 현상학자들(셸러, 하이데거)이 이 귀납성에 선행하는 이 전(前)이해를 지적한 것은 옳다. 대-상(Gegen-stand)의 존재론적 가치를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전이해이다. 그러나 선과학으로의 회귀는 목표가 아니다. 생활세계를 되찾는다 함은 하나의 차원을 되찾는 것이다. 요컨대 과학의 객관화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를 지니며, 진실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하나의 차원을 되찾는 것이다(하이데거 자신이 그 점을 말하고 있다. 모든 존재의 숙명(Seinsgeschick)은 진실한 것이며, 존재역사(Seinsgeschichte)의 일부다). 선과학적인 것은 메타과학적인 것을 이해하라는 초대일 뿐이다. 그리고 메타과학적인 것은 비과학이 아니다. 메타과학적인 것은 과학을 구성하는 과정들에 의해 밝혀지기도 하는데, 다만 과정들을 재활성화하여 이 과정들이 자신들에게 남겨놓은 상태로 은폐(verdecken)하고 있음을 꿰뚫어보는 조건에서이다. 예를 들어, 구조주의적 태도=발언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매번 우리 눈앞에서 완전히 재창조되는 것으로서의 언어사슬, 언어활동. 요컨대 말하는 행위를 이 행위가 일어나는 현장에서 포착하려는 방침, 그것은 원초적인 원천(Ursprung)으로 회귀하자는 방침이요 - 사실적ㆍ공시적 규정성 속에서 머무르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 공시적ㆍ통시적 전체의 맥락을 말 속에서 포착하려는 방침이다. 과학을 구성하는 작용의 양의성: 언어사슬에 서로 얽혀있는 음운적인 것과 의미론적인 것에만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임. 그것은 1) 원천을 파악하고자 하는 요구, 원천을 발견(Entdeckung)하고자 하는 요구이며, 2) 대상(Gegenstand)에의 환원, 즉 원천의 은폐이다(266-267).
 
 
 
- 후설 그리고 우리가 향해 열리는 생활 세계의 길을 따라 야생의 혹은 본연의 존재를 밝히기. 철학이란 무엇인가? 은폐되어 있는 것(Verborgen)의 영역(ρ[철학]과 신비학) [...] 우리 ‘문화’에서 우리 ‘과학’의 여러 힌트(Winke)에서 출발해서 퓌시스(physis)를, 그리고 다음으로 로고스와 수직적 역사를 재발견한다. 나의 제1부는 후설의 『위기』처럼 매우 직접적이고 현재적인 방식으로 구상되어야 함; 우리 시대의 비철학을 보여줄 것, 그 다음 그 기원을 역사적인 어떤 자각(Selbstbesinnung) 안에서, 그리고 과학인,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 가운데서 찾을 것. 그 속에서 여러 힌트를 탐구하게 될 것(268).
 
 
 
- 칸트나 데카르트의 분석: 세계는 유한하지도 무한하지도 않다. 세계는 무한정이다. - 다시 말해 세계는 인간의 경험처럼, - 무한한 존재에 직면하고 있는 유한한 오성의(또는 카늩에 의하면: 인간적 사유의 심연의) 경험처럼 생각되어야 한다. / 후설의 개방성이나 하이데거의 피은폐성(verborgenheit)이 의미하는 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요컨대 존재론의 환경(milieu)은 즉자의 질서와 대조를 이루는 ‘인간적 표상’의 질서처럼 생각되고 있지 않다. - 진리 자체는 초월의 관계 밖에서는, 지평을 향한 등반 밖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 ‘주관성’과 ‘객관성’은 불가분한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 주관적 ‘체험들’은 세계의 계산에 들어오며 ‘정신’의 세계성의 일부를 이루고 존재라는 ‘장부’에 기재된다는 것, 대상은 이 윤곽(Abschattungen)의 뭉치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자 한다 ... 지각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사물이 저기서 자신을 지각하는 것이다. - 말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진리가 말의 저변에서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 자신이 인간화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인 인간이 자연화하는 것 - 세계는 들판이다. 세계는 이러한 명목에서 언제나 열려 있다(271).
 
 
- 철학을 하나의 지각으로 만들고, 철학의 역사를 역사의 지각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면 이상의 것은 분명해질 것이다 - 결국 모든 것은 지각과 이해에 관한 이론 수립의 필요성에 귀착한다(275).
 
 
- 말하는 것이 내가 아니듯 지각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 언어활동이 나를 소유하듯이 지각이 나를 소유하는 것이다(277).
 
 
- 후설이 시간을 구성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시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성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옳은 말이다(27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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