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27.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철학에 대하여 - 류의근, 『지각의 현상학』(문학과지성사, 2002) 중 ‘역자해설’
 
 
① 현상학적 시기 - 『지각의 현상학』(1945)은 후설의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적 현상학』의 현상학, 생활세계의 현상학을 이어받아 발전시킨다. ② 사회 및 정치철학적 시기 ③ 탈현상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시기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을 실존화한다. 현상학은 사유 방식 또는 양식이므로 실천하는 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상학이 갖는 다양성의 참된 의미는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된다. 현상학은 ‘우리에 대한 현상학’이다. 후설의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 auf die Sachen selbst, 『이념들 Ⅰ』, 35): “사태에 대해 이성적이거나 학문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 언설이나 의견을 버리고 사태 자체로 되돌아가,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캐묻고, 사태와 무관계한 선입견을 모두 배제하는 것이다.”(『현상학사전』, 도서출판 b, 2011) 메를로퐁티는 사태 그 자체에로 되돌아감은 “의식에로의 관념론적 복귀와 전적으로 다르다. 세계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석 이전에 있는 것이다. 실재는 기술해야 하는 것이지, 구성하거나 구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태 그 자체로 돌아간다는 것은 인식 이전의 세계, 즉 의식의 구성적 작용 이전에 주어져 있는 현상 세계로 복귀한다는 뜻이다. 초월적 주관성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이런 ‘현상학적 장’이 탐구의 대상이 된다. 후설의 ‘너 자신 속으로 들어가라.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거주한다’에 반대하여, ‘인간의 내면 같은 것은 없으며, 인간은 세계-에로-존재(être-au-monde)이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세계 내에서이다.’고 말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 복귀할 때 내적 진리의 근원, 인식의 궁극 토대, 즉 초월적 주관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운명지어진 주관성’을 발견한다(698-699).
 
 
 
현상학적 환원. 후설은 세계의 실재성에 가담하지 말고 세계를 바라만 보며 괄호칠 것을 반복한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친밀성을 끊고, 환원하고 또 환원해야 한다. 환원이란 초월적 인식으로 복귀하는 것이며, 세계는 그 앞에서 절대적 투명성으로 나타난다. 이와 달리,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적 환원은 관념론의 공식이 아니라 오히려 실존철학의 공식이며,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역시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환원의 위대한 가르침은 완전한 환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순수한 자기 의식, 절대적 의식으로 규정할 수 없다. 후설의 지향성은 의식의 근본구조로서 작용적 지향성, 구성적 현상학의 지향성이나, 메를로퐁티의 지향성은 발생적 현상학의 지향성이다. 곧 절대적 주체성의 작용적 지향성의 근저에는 우리의 삶과 세계의 선(先)술어적 통일성을 구성하는,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미리 구성하는 익명적인 침묵’이 있다. (실재에 대한 모든 판단을 정립하고 명시화하는 의식의 지향성보다) ‘더 심층적인 지향성’이 있고, (구성적 사유 주체의 의미 부여에 의존하기 것이라기보다) 신체-주체에 의존하는 선(先)이론적 구성이 있다. 이러한 지향성에는 시간과 역사의 차원이 있고 어떤 사실성, 세계성이 있다(699-701).
 
 
 
후설은 주체를 능동적 종합, 지적 종합의 주체로만, 또는 그 자체로 조직되어 있는 세계의 수용체로만 볼 수 없는 어떤 지각적 경험이 있다고 본다. 후설이 말하는 ‘수동적 종합’. 수동적 종합이란 말은 (칸트적 의미에서) 종합이 이미 늘 구성적인 것, 곧 능동적인 것이므로 하나의 형용모순이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 후설의 선험적 의식으로부터 신체에로 이행하는 것이 『지각의 현상학』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메를로퐁티는 초월적 자아에서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서 초월적 의식을 역구성하는 데서 성립한다. 초월적 자아의 삶이 육화된 삶이다. 지각과 인식의 주체는 신체이고, 개개의 감각기관은 모종의 종합의 대행자이다. 신체가 하는 종합은 고유한 신체의 지향적 구조에 의해 해명된다(701-702).
 
 
 
『지각의 현상학』의 논의틀은 주지주의와 경험주의, 실재론과 관념론,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사이의 대립구도 안에서 수행된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주지주의는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관념론, 비판철학적 성향, 그리고 브룬슈빅의의 신칸트주의를 가리킨다. 때로는 후설의 초월적 관념론, 사르트르도 포함된다. 주지주의는 물질에 대한 의식의 우위를 주장하고 인간을 세계와 자신의 신체로부터 격리시킨다. 데카르트의 관념론 이래 주지주의적 전통은 인간을 순수 의식의 세계, 순수 지적 작용의 세계 안에 가두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의식의 대상으로 축소시켜 놓았으며 주객의 이분법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험주의는 로크에서 흄으로 이어지는 고전적 경험론의 정신을 계승하는 원자주의적 실증주의적 과학주의적 행동주의적 사고 성향, 그리고 각종의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을 일컫는다. 이는 인간을 외적 원인과 자극의 결과로 환원시키고 의식의 발심적 창조적 역할과 인간 행동의 통합적 특성을 외면하며, 인간의 경험을 조각으로 나누어 인위적으로 분해한다. 모든 사건은 객관세계에서 일어나고 그 때문에 지각하는 주체가 망각된다(702-703).
 
 
 
후설이 자연주의의 위협에 대한 응전으로 현상학을 창시한 것처럼, 메를로퐁티는 경험주의 철학과 주지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신체(corps)의 현상학을 내놓았다. 주지주의는 감각적 한계를 무시하고, 경험주의는 지적 추상 작용을 무시한다. 양자는 마음과 세계를 서로에 대해 외적인 것으로 보는 무비판적 자연주의적 태도를 구현하며, 이런 의미에서 양자 모두 자연주의적 태도를 전제하는 객관주의 철학이다. 자연주의적 태도는 체험되지 않은 세계, 즉 객관적 세계만을 설명할 뿐이고 우리가 비(非)반성적으로 참여하는 많은 일상적 활동, 가령 산보를 하고 버스를 타고 식사를 하며 담배를 피우고 텔레비전을 보는 등의 선(先)반성적 수준을 설명할 수가 없다. 객관주의 철학은 발생하고 태동하는 초기화 단계의 지각적 경험의 본성을 규명할 수가 없고, 우리와 세계를 통합시키기보다는 분리ㆍ고립시키며, 실재론과 관념론의 공통지반을 망각한다(703-704).
 
 
 
고유한 신체 혹은 체험된 신체의 현상학은 ‘지각적 경험에서 신체가 수행하는 역할과 의미’를 탐구한다. [* 體驗, le vécu, the lived, Erlebnis * 經驗, Erfahrung] 그것은 신체를 우리와 세계와의 살아있는 ‘유대’로서, 우리를 세계에 소속시키는 ‘탯줄’로서 이해한다. 그것은 인간 경험의 ‘뿌리’가 신체에 있음을 캐낸다. 그것은 세계가 아직 객관적 세계로 되기 이전의 현상적 장을 기술한다. 이러한 ‘선(先)객관적ㆍ선(先)의식적 세계’에서 보면, 신체를 구성된 대상세계에 배치시키는 것은 오류이다. 마음도 신체도 아닌 어떤 존재가 있는데, 바꾸어 말하면 신체의 마음이 있고 마음의 신체가 있다. 따라서 의식은 육화된 의식이고, 신체는 의식하는 신체이다. 인간은 육화된 정신이다. 육화된 의식은 메를로퐁티 신체현상학의 기본적 진리이고 정신과 신체 이원론의 극복이며 관념론과 실재론의 공통 근원이다(705).
 
 
 
이러한 존재 영역을 근본적으로 특징짓는 것이 신체가 세계를 지향할 수 있게 되는 운동적 지향성이다. 이것은 물론 지적ㆍ반성적 의식의 지향성이 아니라 기능적 지향성, 육화된 지향성이다. 이러한 지향성은 우리가 시선을 보낼 때, 손을 내뻗칠 때, 걸을 때, 대상을 지각하면서 감각들이 상호 협동할 때, 신체가 방향을 잡을 때 우리가 느끼고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체의 자연적 지향성이 존재가 세계에 현상하는 근원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신체의 현상학은 존재가 의식에 도래하는 과정, 또는 세계가 형(形)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존재의 계보학’이다. 그것은 의식이 의존하는 토대를 벗겨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주체의 고고학’이며, 마음이 신체에 두고 있는 그 뿌리를 파헤치고 캐내는 ‘마음의 고고학’일 뿐만 아니라, 신체를 자연적 주체성으로 발견하는 ‘신체의 고고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고에서 사고되지 않은 것을 사고하는 ‘사고의 고고학’이다(705).
 
 
후설에게 신체의 운동 기도는 의식적 주체의 몫이지 신체의 것이 아니다. 후설에게는 의식이 신체의 기능에 끼어드는데 반해, 메를로퐁티에게는 신체가 의식의 삶에 끼어든다. 메를로퐁티에게는 인간이 하는 사고와 반성 및 그 대상성 속에 신체가 이미 예기(豫期)되어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 현상학의 근본주제는 존재의 의미이다. 인간은 존재를 가장 탁월하게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이다. 하이데거는 이어한 존재자를 존재의 장소라는 의미에서 현존재(現存在, Dasein)라고 부른다. 현존재는 개방되어 있는 존재자요, 그 개방성은 처지 또는 기분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 곧 기초존재론은 신체적인 것이 존재에로 개방되어 있는 통로이자 장소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존재의 수준 혹은 차원은 신체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신체적인 것이 존재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신체는 존재자와의 접면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신체는 가끔 한 자리에 모여 있는 타인들과 일체임을 느낀다. 역으로, 타인의 몸짓과 동작에서 나의 경직된 몸이 풀리기도 한다. 무용수의 춤에서 우리는 존재의 현전(現前)을 본다. 나는 세계와 존재로 개방되기 위해서 그때그때마다 어떤 처지에 있거나 어떻게 느끼고 있다. 신체는 존재의 구조에 대한 자연적 이해를 소유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기분(氣分, Stimmung) 개념은 메를로퐁티가 ‘자신을 상황 속에 밀어 넣는 신체의 일반 능력’이라 부르는 것이며, 따라서 신체는 현존재 탈자성(脫自性)의 토대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신체적 내력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존재의 지각적ㆍ감각적, 곧 신체적 토대를 언급할 수 없었다. 사르트르의 신체는 경험하는 신체가 아니다. 타인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데서 나는 나 자신의 주체성을 의식하고 내가 타인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을 때 내가 그에게 대상의 하나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나의 신체는 나로부터 소외된다. 경험하는 주체를 사르트르처럼 대자존재 즉 의식에서 찾을 때, 우리의 경험에서 신체가 분명히 기능하고 있다 해도 의식은 그 점을 쉽게 놓칠 것이다. 사르트르는 신체의 기능적 지향성을 확립하지 못했으며, 대자와 즉자의 대립과 분리를 극복하는 중도론을 세우지 못했다. 사르트르에게는 의식이 신체의 기술보다 먼저이지만, 메를로퐁티에게는 신체와 세계가 동시적으로 출현한다(706-707).
 
 
 
메를로퐁티의 신체 현상학은 학(學) 이전의 것을 연구하는 학이며, ‘현상학의 현상학’을 제시하고 있다(707). 이것이 그의 현상학적 실증주의, ‘살’(chair, flesh)의 존재론이다(696-697).
 
 
‘세계-에로-존재’(l'être-au-monde). 삶의 자리, 현장, 혹은 대지로부터 찰라도 벗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우주가 인간에게 분수하는 몫, 즉 운명의 신이다. 메를로퐁티는 최종적으로 신을 모독하고 대지를 사랑하라는 니체의 운명애(運命愛, amor fati)에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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