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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7.

le visible et l'invisible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4, 동문선), 중 「작업 노트」
 
 
 
- 초월적 장이란 여러 초월성의 장이다. 초월론적인 것은 정신 즉 영혼과 심리학적인 확고히 넘어서는 것이므로 반(反)-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의미에서 주관성의 넘어섬이다(252).
 
 
 
- 중요한 일은 현재 작용하는 잠재적 역사성으로서의 생활세계에 의해 부름을 받아 생성된 창조이다. 역사성을 계승 연장하고 역사성을 증언하는 창조이다(255).
 
 
 
- 현재와 과거 이상의 것을, 즉 생활세계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 한 문화의 현존재(présence)를 복원하는 것이 문제이다(257).
 
 
 
- 결국 아생적 존재들의 층이 존재할 것이다. [.] 수차례 자기 이입, 코기토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 예를 들어 나는 신체의 수준에서 앎 이전의 앎(pré-savoir); 의미 이전의 의미(pré-sens), 침묵의 앎을 기술할 것이다.
 
 
 
- 철학자가 찾는 내면성은 또한 상호주관성이고, ‘체험된 것’의 저 너머에 있는 원공동성(原共同性)의 창설(創設, Urgemein Stiftung)이다 - 체험된 것들(Erlebnisse)에 대항하는 자성(自省, Besinnung). [...] 세계에 관한 ‘야생적’ 조망의 탐구는 결코 전(前)이해나 선(先)과학에의 회귀로 그치지 않는다. ‘원시주의’는 과학주의의 상대항에 불과하고 또한 그 역시 과학주의이다. 현상학자들(셸러, 하이데거)이 이 귀납성에 선행하는 이 전(前)이해를 지적한 것은 옳다. 대-상(Gegen-stand)의 존재론적 가치를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전이해이다. 그러나 선과학으로의 회귀는 목표가 아니다. 생활세계를 되찾는다 함은 하나의 차원을 되찾는 것이다. 요컨대 과학의 객관화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를 지니며, 진실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하나의 차원을 되찾는 것이다(하이데거 자신이 그 점을 말하고 있다. 모든 존재의 숙명(Seinsgeschick)은 진실한 것이며, 존재역사(Seinsgeschichte)의 일부다). 선과학적인 것은 메타과학적인 것을 이해하라는 초대일 뿐이다. 그리고 메타과학적인 것은 비과학이 아니다. 메타과학적인 것은 과학을 구성하는 과정들에 의해 밝혀지기도 하는데, 다만 과정들을 재활성화하여 이 과정들이 자신들에게 남겨놓은 상태로 은폐(verdecken)하고 있음을 꿰뚫어보는 조건에서이다. 예를 들어, 구조주의적 태도=발언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매번 우리 눈앞에서 완전히 재창조되는 것으로서의 언어사슬, 언어활동. 요컨대 말하는 행위를 이 행위가 일어나는 현장에서 포착하려는 방침, 그것은 원초적인 원천(Ursprung)으로 회귀하자는 방침이요 - 사실적ㆍ공시적 규정성 속에서 머무르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 공시적ㆍ통시적 전체의 맥락을 말 속에서 포착하려는 방침이다. 과학을 구성하는 작용의 양의성: 언어사슬에 서로 얽혀있는 음운적인 것과 의미론적인 것에만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임. 그것은 1) 원천을 파악하고자 하는 요구, 원천을 발견(Entdeckung)하고자 하는 요구이며, 2) 대상(Gegenstand)에의 환원, 즉 원천의 은폐이다(266-267).
 
 
 
- 후설 그리고 우리가 향해 열리는 생활 세계의 길을 따라 야생의 혹은 본연의 존재를 밝히기. 철학이란 무엇인가? 은폐되어 있는 것(Verborgen)의 영역(ρ[철학]과 신비학) [...] 우리 ‘문화’에서 우리 ‘과학’의 여러 힌트(Winke)에서 출발해서 퓌시스(physis)를, 그리고 다음으로 로고스와 수직적 역사를 재발견한다. 나의 제1부는 후설의 『위기』처럼 매우 직접적이고 현재적인 방식으로 구상되어야 함; 우리 시대의 비철학을 보여줄 것, 그 다음 그 기원을 역사적인 어떤 자각(Selbstbesinnung) 안에서, 그리고 과학인,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 가운데서 찾을 것. 그 속에서 여러 힌트를 탐구하게 될 것(268).
 
 
 
- 칸트나 데카르트의 분석: 세계는 유한하지도 무한하지도 않다. 세계는 무한정이다. - 다시 말해 세계는 인간의 경험처럼, - 무한한 존재에 직면하고 있는 유한한 오성의(또는 카늩에 의하면: 인간적 사유의 심연의) 경험처럼 생각되어야 한다. / 후설의 개방성이나 하이데거의 피은폐성(verborgenheit)이 의미하는 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요컨대 존재론의 환경(milieu)은 즉자의 질서와 대조를 이루는 ‘인간적 표상’의 질서처럼 생각되고 있지 않다. - 진리 자체는 초월의 관계 밖에서는, 지평을 향한 등반 밖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 ‘주관성’과 ‘객관성’은 불가분한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 주관적 ‘체험들’은 세계의 계산에 들어오며 ‘정신’의 세계성의 일부를 이루고 존재라는 ‘장부’에 기재된다는 것, 대상은 이 윤곽(Abschattungen)의 뭉치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자 한다 ... 지각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사물이 저기서 자신을 지각하는 것이다. - 말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진리가 말의 저변에서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 자신이 인간화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인 인간이 자연화하는 것 - 세계는 들판이다. 세계는 이러한 명목에서 언제나 열려 있다(271).
 
 
- 철학을 하나의 지각으로 만들고, 철학의 역사를 역사의 지각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면 이상의 것은 분명해질 것이다 - 결국 모든 것은 지각과 이해에 관한 이론 수립의 필요성에 귀착한다(275).
 
 
- 말하는 것이 내가 아니듯 지각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 언어활동이 나를 소유하듯이 지각이 나를 소유하는 것이다(277).
 
 
- 후설이 시간을 구성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시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성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옳은 말이다(277-278).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철학에 대하여 - 류의근, 『지각의 현상학』(문학과지성사, 2002) 중 ‘역자해설’
 
 
① 현상학적 시기 - 『지각의 현상학』(1945)은 후설의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적 현상학』의 현상학, 생활세계의 현상학을 이어받아 발전시킨다. ② 사회 및 정치철학적 시기 ③ 탈현상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시기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을 실존화한다. 현상학은 사유 방식 또는 양식이므로 실천하는 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상학이 갖는 다양성의 참된 의미는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된다. 현상학은 ‘우리에 대한 현상학’이다. 후설의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 auf die Sachen selbst, 『이념들 Ⅰ』, 35): “사태에 대해 이성적이거나 학문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 언설이나 의견을 버리고 사태 자체로 되돌아가,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캐묻고, 사태와 무관계한 선입견을 모두 배제하는 것이다.”(『현상학사전』, 도서출판 b, 2011) 메를로퐁티는 사태 그 자체에로 되돌아감은 “의식에로의 관념론적 복귀와 전적으로 다르다. 세계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석 이전에 있는 것이다. 실재는 기술해야 하는 것이지, 구성하거나 구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태 그 자체로 돌아간다는 것은 인식 이전의 세계, 즉 의식의 구성적 작용 이전에 주어져 있는 현상 세계로 복귀한다는 뜻이다. 초월적 주관성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이런 ‘현상학적 장’이 탐구의 대상이 된다. 후설의 ‘너 자신 속으로 들어가라.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거주한다’에 반대하여, ‘인간의 내면 같은 것은 없으며, 인간은 세계-에로-존재(être-au-monde)이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세계 내에서이다.’고 말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 복귀할 때 내적 진리의 근원, 인식의 궁극 토대, 즉 초월적 주관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운명지어진 주관성’을 발견한다(698-699).
 
 
 
현상학적 환원. 후설은 세계의 실재성에 가담하지 말고 세계를 바라만 보며 괄호칠 것을 반복한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친밀성을 끊고, 환원하고 또 환원해야 한다. 환원이란 초월적 인식으로 복귀하는 것이며, 세계는 그 앞에서 절대적 투명성으로 나타난다. 이와 달리,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적 환원은 관념론의 공식이 아니라 오히려 실존철학의 공식이며,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역시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환원의 위대한 가르침은 완전한 환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순수한 자기 의식, 절대적 의식으로 규정할 수 없다. 후설의 지향성은 의식의 근본구조로서 작용적 지향성, 구성적 현상학의 지향성이나, 메를로퐁티의 지향성은 발생적 현상학의 지향성이다. 곧 절대적 주체성의 작용적 지향성의 근저에는 우리의 삶과 세계의 선(先)술어적 통일성을 구성하는,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미리 구성하는 익명적인 침묵’이 있다. (실재에 대한 모든 판단을 정립하고 명시화하는 의식의 지향성보다) ‘더 심층적인 지향성’이 있고, (구성적 사유 주체의 의미 부여에 의존하기 것이라기보다) 신체-주체에 의존하는 선(先)이론적 구성이 있다. 이러한 지향성에는 시간과 역사의 차원이 있고 어떤 사실성, 세계성이 있다(699-701).
 
 
 
후설은 주체를 능동적 종합, 지적 종합의 주체로만, 또는 그 자체로 조직되어 있는 세계의 수용체로만 볼 수 없는 어떤 지각적 경험이 있다고 본다. 후설이 말하는 ‘수동적 종합’. 수동적 종합이란 말은 (칸트적 의미에서) 종합이 이미 늘 구성적인 것, 곧 능동적인 것이므로 하나의 형용모순이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 후설의 선험적 의식으로부터 신체에로 이행하는 것이 『지각의 현상학』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메를로퐁티는 초월적 자아에서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서 초월적 의식을 역구성하는 데서 성립한다. 초월적 자아의 삶이 육화된 삶이다. 지각과 인식의 주체는 신체이고, 개개의 감각기관은 모종의 종합의 대행자이다. 신체가 하는 종합은 고유한 신체의 지향적 구조에 의해 해명된다(701-702).
 
 
 
『지각의 현상학』의 논의틀은 주지주의와 경험주의, 실재론과 관념론,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사이의 대립구도 안에서 수행된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주지주의는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관념론, 비판철학적 성향, 그리고 브룬슈빅의의 신칸트주의를 가리킨다. 때로는 후설의 초월적 관념론, 사르트르도 포함된다. 주지주의는 물질에 대한 의식의 우위를 주장하고 인간을 세계와 자신의 신체로부터 격리시킨다. 데카르트의 관념론 이래 주지주의적 전통은 인간을 순수 의식의 세계, 순수 지적 작용의 세계 안에 가두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의식의 대상으로 축소시켜 놓았으며 주객의 이분법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험주의는 로크에서 흄으로 이어지는 고전적 경험론의 정신을 계승하는 원자주의적 실증주의적 과학주의적 행동주의적 사고 성향, 그리고 각종의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을 일컫는다. 이는 인간을 외적 원인과 자극의 결과로 환원시키고 의식의 발심적 창조적 역할과 인간 행동의 통합적 특성을 외면하며, 인간의 경험을 조각으로 나누어 인위적으로 분해한다. 모든 사건은 객관세계에서 일어나고 그 때문에 지각하는 주체가 망각된다(702-703).
 
 
 
후설이 자연주의의 위협에 대한 응전으로 현상학을 창시한 것처럼, 메를로퐁티는 경험주의 철학과 주지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신체(corps)의 현상학을 내놓았다. 주지주의는 감각적 한계를 무시하고, 경험주의는 지적 추상 작용을 무시한다. 양자는 마음과 세계를 서로에 대해 외적인 것으로 보는 무비판적 자연주의적 태도를 구현하며, 이런 의미에서 양자 모두 자연주의적 태도를 전제하는 객관주의 철학이다. 자연주의적 태도는 체험되지 않은 세계, 즉 객관적 세계만을 설명할 뿐이고 우리가 비(非)반성적으로 참여하는 많은 일상적 활동, 가령 산보를 하고 버스를 타고 식사를 하며 담배를 피우고 텔레비전을 보는 등의 선(先)반성적 수준을 설명할 수가 없다. 객관주의 철학은 발생하고 태동하는 초기화 단계의 지각적 경험의 본성을 규명할 수가 없고, 우리와 세계를 통합시키기보다는 분리ㆍ고립시키며, 실재론과 관념론의 공통지반을 망각한다(703-704).
 
 
 
고유한 신체 혹은 체험된 신체의 현상학은 ‘지각적 경험에서 신체가 수행하는 역할과 의미’를 탐구한다. [* 體驗, le vécu, the lived, Erlebnis * 經驗, Erfahrung] 그것은 신체를 우리와 세계와의 살아있는 ‘유대’로서, 우리를 세계에 소속시키는 ‘탯줄’로서 이해한다. 그것은 인간 경험의 ‘뿌리’가 신체에 있음을 캐낸다. 그것은 세계가 아직 객관적 세계로 되기 이전의 현상적 장을 기술한다. 이러한 ‘선(先)객관적ㆍ선(先)의식적 세계’에서 보면, 신체를 구성된 대상세계에 배치시키는 것은 오류이다. 마음도 신체도 아닌 어떤 존재가 있는데, 바꾸어 말하면 신체의 마음이 있고 마음의 신체가 있다. 따라서 의식은 육화된 의식이고, 신체는 의식하는 신체이다. 인간은 육화된 정신이다. 육화된 의식은 메를로퐁티 신체현상학의 기본적 진리이고 정신과 신체 이원론의 극복이며 관념론과 실재론의 공통 근원이다(705).
 
 
 
이러한 존재 영역을 근본적으로 특징짓는 것이 신체가 세계를 지향할 수 있게 되는 운동적 지향성이다. 이것은 물론 지적ㆍ반성적 의식의 지향성이 아니라 기능적 지향성, 육화된 지향성이다. 이러한 지향성은 우리가 시선을 보낼 때, 손을 내뻗칠 때, 걸을 때, 대상을 지각하면서 감각들이 상호 협동할 때, 신체가 방향을 잡을 때 우리가 느끼고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체의 자연적 지향성이 존재가 세계에 현상하는 근원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신체의 현상학은 존재가 의식에 도래하는 과정, 또는 세계가 형(形)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존재의 계보학’이다. 그것은 의식이 의존하는 토대를 벗겨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주체의 고고학’이며, 마음이 신체에 두고 있는 그 뿌리를 파헤치고 캐내는 ‘마음의 고고학’일 뿐만 아니라, 신체를 자연적 주체성으로 발견하는 ‘신체의 고고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고에서 사고되지 않은 것을 사고하는 ‘사고의 고고학’이다(705).
 
 
후설에게 신체의 운동 기도는 의식적 주체의 몫이지 신체의 것이 아니다. 후설에게는 의식이 신체의 기능에 끼어드는데 반해, 메를로퐁티에게는 신체가 의식의 삶에 끼어든다. 메를로퐁티에게는 인간이 하는 사고와 반성 및 그 대상성 속에 신체가 이미 예기(豫期)되어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 현상학의 근본주제는 존재의 의미이다. 인간은 존재를 가장 탁월하게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이다. 하이데거는 이어한 존재자를 존재의 장소라는 의미에서 현존재(現存在, Dasein)라고 부른다. 현존재는 개방되어 있는 존재자요, 그 개방성은 처지 또는 기분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 곧 기초존재론은 신체적인 것이 존재에로 개방되어 있는 통로이자 장소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존재의 수준 혹은 차원은 신체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신체적인 것이 존재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신체는 존재자와의 접면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신체는 가끔 한 자리에 모여 있는 타인들과 일체임을 느낀다. 역으로, 타인의 몸짓과 동작에서 나의 경직된 몸이 풀리기도 한다. 무용수의 춤에서 우리는 존재의 현전(現前)을 본다. 나는 세계와 존재로 개방되기 위해서 그때그때마다 어떤 처지에 있거나 어떻게 느끼고 있다. 신체는 존재의 구조에 대한 자연적 이해를 소유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기분(氣分, Stimmung) 개념은 메를로퐁티가 ‘자신을 상황 속에 밀어 넣는 신체의 일반 능력’이라 부르는 것이며, 따라서 신체는 현존재 탈자성(脫自性)의 토대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신체적 내력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존재의 지각적ㆍ감각적, 곧 신체적 토대를 언급할 수 없었다. 사르트르의 신체는 경험하는 신체가 아니다. 타인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데서 나는 나 자신의 주체성을 의식하고 내가 타인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을 때 내가 그에게 대상의 하나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나의 신체는 나로부터 소외된다. 경험하는 주체를 사르트르처럼 대자존재 즉 의식에서 찾을 때, 우리의 경험에서 신체가 분명히 기능하고 있다 해도 의식은 그 점을 쉽게 놓칠 것이다. 사르트르는 신체의 기능적 지향성을 확립하지 못했으며, 대자와 즉자의 대립과 분리를 극복하는 중도론을 세우지 못했다. 사르트르에게는 의식이 신체의 기술보다 먼저이지만, 메를로퐁티에게는 신체와 세계가 동시적으로 출현한다(706-707).
 
 
 
메를로퐁티의 신체 현상학은 학(學) 이전의 것을 연구하는 학이며, ‘현상학의 현상학’을 제시하고 있다(707). 이것이 그의 현상학적 실증주의, ‘살’(chair, flesh)의 존재론이다(696-697).
 
 
‘세계-에로-존재’(l'être-au-monde). 삶의 자리, 현장, 혹은 대지로부터 찰라도 벗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우주가 인간에게 분수하는 몫, 즉 운명의 신이다. 메를로퐁티는 최종적으로 신을 모독하고 대지를 사랑하라는 니체의 운명애(運命愛, amor fati)에 공명한다.
 
 

edmund husserl


* 쿠르트 프리틀라인, 『서양철학사』, 서광사, 1985.

 
제10절 현상학: 후설


1. 머리말: 개별 과학이 없는 철학


* 현상학(現象學): 형상학(形相學, Eidologie)이라 불리는 본질 직관(Wesensschau)에 관한 철학적 이론. 의식 주관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본질에 관한 이론이 아니다. 현상학의 목표는 ‘보편인식’(mathesis universalis) 곧 ‘체계적 학문성 일반에 관한 이론’의 기획으로, 개별 과학은 이 인식 안에서 자신의 척도를 발견한다.


19세기에 철학과 사실 간의 관계에는 점증적으로 개별과학이 첨가되었다. 그리하여 철학은 다소 이들 개별 과학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철학적으로 다시금 학문적으로 편견을 가지지 않은 사실에 대한 직접적 통로를 획득하려는 노력이 이 같은 점에 대하여 점차로 스스로를 방어하게 되었다. 삶의 철학(니체 이래로)과 아울러 정신과학적 철학(딜타이 이래로)은 계속하여 이러한 동기를 갖는다. 이러한 사조에서는 학문성의 상실은 아닐지언정 일정한 엄밀성의 상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결국 1900년 경 후설은 모든 개별 과학의 감독(수학의 감독을 포함하여)이 없이 그가 현상학이라 부르는 ‘현상에 대한 본질 직관의 이론’에서 직접적으로 사실에서 그리고 동시에 엄밀하게 학문적으로 철학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시도한다.


2. 후설의 본질직관의 철학


1) 수학으로부터 본질론으로


후설은 철학과 개별 과학의 위치를 교환한다. 개별과학은 19세기 말 상호관계에서 그리고 자신의 내용으로 철학을 소유하였다. 더 이상 개별 과학은 철학이 개별과학의 결과에 집착하도록 철학의 내용을 미리 가다듬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개별 과학은 철학을 모든 사태 영역의 원칙적인 사전 검토를 위한 심급으로 명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철학은 후설이 라이프니츠를 따라 보편인식ㆍ보편수학(mathesis universalis)이라 일컬은 ‘체계적 학문 일반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후설의 생애와 저술


(메렌의) 프로스니츠 출신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1902년 이래 괴팅겐 대학, 1916-1927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였다. 저술: 『논리적 탐구』(Logische Untersuchungen, 전2권, 1900), 『순수 현상학 및 현상학적 철학에 대한 이념』(Ideen zu einer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I. Einführung in die reine Phänomenologie, 1913).


3) 사실과 본질


* 의식의 지향성(志向性, Intentionalität). 만일 의식이 대상적인 내용을 암시한다면 그것은 지향적이다. 이 경우 그것은 ‘어떤 것에 관한 의식’(Bewußtsein von etwas, consciousness of something)이다. 여기에서 의식 자체는 실재적이지만, 대상이 되는 어떤 것은 지향적, 비실재적이다. 이러한 지향적 대상에서 사실적인 것은 본질과 결합된 것으로서 존재한다. 이때의 본질(Wesen)이란 ‘개별적인 대상 자체의 고유한 존재에서 자신의 무엇으로서(als sein Was) 현존하는 것’이다. 즉 사실로부터 (인식에 이르는) 길은 본질에 이를 수 있지만, 본질로부터는 어느 누구도 사실에 도달할 수 없다. 말하자면 본질 지식은 현실성에 관하여 아무 것도 언명하지 않는다.


* 더 이상 사실적인 것이 아닌 오로지 본질적인 것만을 나타내는 의식이 순수의식(das reine Bebußtsein)이다. 이 순수의식은 후설이 말하는 이른바 현상학적 판단중지(Phänomenologische Epoche, epoché), 곧 차단, 괄호 안에 넣기를 통해서 성립한다. 여기에서 의식은 일상성, 논리학, 수학, 심리학,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그리고 신학의 관점을 배제한다. 이러한 순수의식의 비지향적 완성의 총체를 질료라 부르고, 이에 대응하는 지향적 완성 곧 활동ㆍ작용을 노에시스(das Noësis)라 부르고, 지향적 대상을 노에마(das Noëma)라 부른다. 형상(Eidos)이란 다름 아닌 이러한 노에마 혹은 노에마 집합의 핵심이다.


대상의 세계는 의식에 주어져 있다. 그러한 한에 있어서 의식은 대부분 ‘어떤 것에 관한 의식’이며, 또한 ‘지향적(志向的) 의식’이라 일컬어진다. 그러한 의식은 실재하며, 그것의 개별적 실행(활동)이 이루어진다. 그러한 실재적인 실행(활동)의 지향적 대상 자체는 실재적이지 않고 실재를 통하여 의도된 지향적인 것이며, 따라서 비실재적이다.


의식의 지향적 대상에서 후설은 ‘사실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분한다. 여기서 본질은 ‘개별적 대상에 고유한 존재에서 그것의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모든 사실로부터 그것의 본질에 이르는 길이 있다면, 반대로 그러한 본질로부터 사실에 이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한 한에 있어서 현상학은 어떠한 존재론도 아닐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도 아니다.


현상학은 지향적 객관으로서 어떠한 사실에 더 이상 직면하지 않고 단지 그러한 객관의 본질(形相, das Eidos)에 직면하는 그와 같은 의식의 종류를 발견하려는 과제를 던진다. 여기에서 후설은 순수의식을 언급한다.


현상학적 판단중지에 의해 자연적 일상성, 논리학과 수학, 심리학,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신학의 관점이 차단된 이후, 그리고 동시에, 무엇보다 먼저 그것들에 의해 야기된 의식의 피안, 곧 초월적인 것에 관한 언명조차 차단된 이후, 남는 것은 오직 순수의식, 곧 잔재(Residuum)이다.


4) 질료-의식작용-의식대상-대상


오로지 ‘순수의식’의 기초 위에서만 본질에 관한 ‘근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이 가능하다. 본질직관(Wesensschau)이 실제로 성립할 경우, 본질 직관은 본질 지향(본질을 직관적으로 향함)과 함께 시작되며, 자신에게 속하는 본질 지향의 충족과 아울러 끝난다. 그러나 후설에 의하면, 언제나 예외 없이 모든 경우가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본질을 근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의 모든 가능성 자체가 결코 본질 내용의 전체적인 충만함을 다시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의식에도 역시 비지향적 상태가 존재한다. 후설은 그것을 질료(Hyle) 혹은 질료적인 것(das Hyletische)이라 불렀다. 후설은 순수의식의 지향적 실행을 노에시스(das Noësis. 의미로 충만한 의식 작용)라고 부르고, 이 노에시스의 지향적 대상 내지 내용을 노에마(das Noëma. 의미로 충만한 활동의 대상)라 부른다. 결국 해당되는 노에마의 ‘대상적 핵심’으로서 대상 자체가 (그것의 본질에 따라) 노에마의 집단에 속한다.


생활세계 Lebenswelt, 삶의 형식 Lebensform

 

2013. 12. 20.

maurice merleau-ponty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년 3월 14일~1961년 5월 4일)
 
 


Original French
English Translation
국역
1942
La Structure du comportement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42)
The Structure of Behavior, trans. Alden Fisher, (Boston: Beacon Press, 1963; London: Methuen, 1965).
『행동의 구조』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8
1945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Paris: Gallimard, 1945)
Phenomenology of Perception, trans. Colin Smith (New York: Humanities Press, and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2);
trans. revised by Forrest Williams (1981; reprinted, 2002);
new trans. Donald A. Landes (New York: Routledge, 2012).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
1947
Humanisme et terreur, essai sur le problème communiste
(Paris: Gallimard, 1947)
Humanism and Terror: An Essay on the Communist Problem trans. John O'Neill, (Boston: Beacon Press, 1969)
『휴머니즘과 폭력. 공산주의 문제에 대한 에세이』
박현모ㆍ유영산ㆍ이병택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1948
Sens et non-sens (Paris: Nagel, 1948, 1966)
Sense and Non-Sense trans. Hubert and Patricia Allen Dreyfus,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4).
『의미와 무의미』
권혁면 옮김
서광사
1990
1949
-
1950
Conscience et l'acquisition du langage (Paris: Bulletin de psychologie, 236, vol. XVIII, 3–6, Nov. 1964)
Consciousness and the Acquisition of Language, trans. Hugh J. Silverman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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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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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Merleau-Ponty à la Sorbonne: résumé de cours, 1949-1952
(Grenoble: Cynara, 1988)
Child Psychology and Pedagogy: The Sorbonne Lectures 1949-1952, trans. Talia Welsh (Evanston, Ill.: Northwestern Univ. P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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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Les Relations avec autrui chez l’enfant
(Paris: Centre de Documentation Universitaire, 1951, 1975)
The Child’s Relations with Others, trans. William Cobb, in The Primacy of Perception ed. James Edie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4), 96-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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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Éloge de la Philosophie, Lecon inaugurale faite au Collége de France, Le jeudi 15 janvier 1953
(Paris: Gallimard, 1953)
In Praise of Philosophy trans. John Wild and James M. Edie,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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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Les aventures de la dialectique
(Paris: Gallimard, 1955)
Adventures of the Dialectic trans. by Joseph Bien,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73; London: Heinemann,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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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Les Sciences de l’homme et la phénoménologie
(Paris: Centre de Documentation Universitaire, 1958, 1975)
Phenomenology and the Sciences of Man, trans. by John Wild in The Primacy of Perception ed. by James Edie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4), 4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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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Éloge de la Philosophie et autres essais (Paris: Gallimard,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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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Signes
(Paris: Gallimard, 1960)
Signs trans. Richard McCleary,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4).
[부분번역]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김화자 옮김
책세상, 2005
1961
L’Œil et l’esprit
(Paris: Gallimard, 1961)
Eye and Mind trans. by Carleton Dallery in The Primacy of Perception ed. by James Edie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4), 159-190. Revised translation by Michael Smith in The Merleau-Ponty Aesthetics Reader
(1993), 121-149.
『눈과 마음. 메를로-퐁티의 회화론』
김정아 옮김
마음산책
2008

1964
Le Visible et l’invisible, suivi de notes de travail
Edited by Claude Lefort
(Paris: Gallimard, 1964)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Followed by Working Notes, trans. Alphonso Lingis,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68).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남수인ㆍ최의영 옮김
동문선
2004
1968
Résumés de cours, Collège de France 1952-1960
(Paris: Gallimard, 1968)
Themes from the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52-1960
trans. John O’Neill,
(Evanston: Northwestern Univ. Pr.,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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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La Prose du monde
(Paris: Gallimard, 1969)
The Prose of the World, trans. John O’Neill,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 1973; London: Heinemann,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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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편역본]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옮김
서광사, 1989


* 메를로-퐁티: 몸의 현상학자 - 서동욱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실체란 무엇인가? 바로 이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이다. 생각하는 실체가 육체로부터 들끓어 오르는, 우리 영혼의 판단을 흐리는 ‘정념’을 통제해야 한다. 또 이런 문제도 생각해 보라. 우리 인간은 생각하는 실체인데, 저 바깥에 걸어 다니는 개와 고양이 같은 짐승들은 무엇인가? 그들에게도 영혼불멸을 보증해줄 생각하는 실체 같은 것이 있는가? 천만에! 저것들은 모두 동물기계들이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만들어놓은 근대적 세계관이다. 여기서는 명석판명한 정신이 떠받들어 올려지고, 몸이란 이 정신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몸이 없었다면 보다 잘 인식하고 보다 자유로웠을 텐데! 플라톤에서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 대부분의 구간에서 이런 한탄이 메아리친다. 메를로-퐁티는 바로 이러한 세계관에 맞서서 ‘몸’의 불가결한 근본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철학자다.

 
프랑스 현상학의 대표자 - 사르트르와의 엇갈린 길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누구인가? 그의 주저의 명칭 [지각의 현상학](1945)이 알려주는 것처럼, 그는 ‘현상학자’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의 친구로서 같이 유명한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를 창간했고, 또 냉전 시대의 정치적 문제로 갈라서기도 했으며, 세잔(Paul Cézanne)에 대한 매력적인 그림론을 남기기도 했고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마지막 주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8)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그의 인생의 중요한 여러 굴곡들보다도 저 ‘현상학’이라는 명칭이 더 우리를 매혹시킨다. 거기 메를로-퐁티 철학의 진수가 들어있을 것만 같으니까. 사르트르는 메를로-퐁티에 대한 추도사 [길목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동등했고 친구였지만 동류(同類)는 아니었다.” 이 말은 정치적인 문제에서만 진실인 것이 아니라, 후설(Edmund Husserl)로부터 발원하여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거쳐 이 두 사람이 계승하고자 했던 현상학에 대한 입장 차이에 대해서도 진실이다. 그렇다면 얼마간 사르트르와의 비교를 통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의 정체를 드러내 볼 수 있지 않을까?
 
후설의 발견 - 의식의 지향성

 
그러나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도대체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이라는 개념이다. 종래에 의식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이라는 개념에서 보듯 일종의 고립된 사물처럼 다루어져 왔다(저 표현에서 res란 라틴어로 사물(thing)을 뜻한다). 그러나 의식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늘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다. 여러분도 한번 실험해 보라.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여러분의 의식이 가 닿는 각종 대상, 상념, 수학적 개념, 물리학적 이론, 기억 등등으로부터 의식을 고립시키려고 해보라.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의식은 잠을 잠으로써 의식 없음(무의식)에 도달할 수는 있을지언정, 깨어있는 의식은 늘 무엇에 대한 의식,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의식이지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과 무관하게는 존재할 수는 없다. 이것이 의식의 지향성이다.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대상은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의식이 늘 어떤 대상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은, 대상은 항상 의식에 주어지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지, 의식 바깥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르게 얘기하면, 대상의 존재 양식이 별도로 있고, 그것이 의식에 주어지는 형태가 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은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때 의식에게 존재하는 그 자체의 모습대로 자신을 내주는 대상을 ‘현상(Phänomen)’이라고 부른다. 왜 굳이 여기에 ‘현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가? 이 말의 어원을 조사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리스적 어원을 가지는 이 현상이라는 단어, 즉 파이노메논(ϕαινμενον)은, ‘자신을 그 자체로 내보여준다’를 의미하는 동사 파이네스타이(ϕανεσϑαι)에서 나왔다. 스스로 존재하는 모습대로 나타나는 것이 그리스인들이 애초에 부여했던 ‘현상’의 의미인 것이다. 이 '현상에 대해 말하는(논하는) 일'이 바로, ‘현상(Phänomen)’과 ‘말함(logos)’이 결합된 단어인 ‘현상학(Phänomeno-logie)’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사르트르 식의 현상학 - 자유와 선택을 가능케 하는 텅 빈 의식

 
현상, 즉 의식에 주어진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그 대상의 존재 방식을 기술하는 일과 동일하다. 앞서 말했듯 대상은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현상을 제대로 기술한다면, 우리는 대상의 참다운 존재 양식을 가능케 하는 대상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대상들이 저 마다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이 다르다면, 이 다양한 방식을 기술하는 현상학의 작업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런 방법론으로서 현상학이 가지는 강력한 힘이 지난 세기 현상학을 사회학, 정치학, 미학 등등 여러 학문에 그토록 널리 파급되도록 했다.

 
현상학의 저 파급력에 감염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사르트르다. 그는 의식에 주어지는 대상을 기술하는 후설의 현상학을 '자아(ego)'의 문제 쪽으로 가져갔다. 의식에 주어지는 대상으로서 자아의 성격이 무엇이냐가 사르트르의 흥미를 끌었던 것이다.

 
흔히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 ‘나’란 뭘까? 이것은 의식의 주인인가? ‘태권브이’를 타고 있는 훈이처럼 자아는 의식 안에 거주지를 가지는가? 사실 책을 읽고 있을 때 책의 내용을 지향하는 의식은 있고, 떠나는 버스를 잡으려고 뛰어갈 때 버스를 지향하는 의식은 있지만, 이 의식 안에 ‘자아’가 들어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대상(책, 버스 등)을 지향하는 익명적 의식이 있을 뿐이다. 자아 역시 다른 실재적 대상이나 관념적 대상처럼 의식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주어지는, 의식 바깥의 대상일 뿐이다. 즉 텅 빈 내용 없는 익명적 의식이, 어떤 내용을 지닌 자아, 기질과 역사와 개인적 관계 등등의 내용을 지닌 자아를 ‘대상으로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은 그 안에 자아라는 내용물을 가지지 않는 완전히 텅 빈 의식이다. 그리고 지향적 광선을 외부로 쏘아대고 있는 의식의 이 텅 비어 있음이 바로 사르트르의 실존적 ‘자유’를 이룬다. 이 의식은 준수해야 할 어떤 내용(개인의 성격, 창조주의 작품, 어머니의 기대를 받는 아들 등등)을 가지는 인격적 자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텅 비어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우며, 이 자유에 입각한 ‘선택’만이 이 의식이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메를로-퐁티는 반대 길로 가다 - 우리는 텅 비지 않고 늘 충만해 있다

 
메를로-퐁티는 이런 철학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간다. 지각의 현상학에 나오는 구절을 보자. “우리는 결코 무(無)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충만 속에, 존재 속에 있다. 마치 얼굴이 쉬고 있을 때나 심지어 사망해 있을 때도 늘 무엇인가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어 있는 것처럼.” 사르트르에게 의식은 아무런 내용도 가지지 않는 텅 빈 ‘무’였다. 나의 자아나 신체를 비롯해 내용을 지니는 것들은 이 텅 빈 의식이 바라보는 외적 대상들일 뿐이었다. 메를로-퐁티는 반대로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사르트르가 말하는, 아무런 내용으로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텅 빈 의식 같은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충만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의식이 빠져나간 죽은 얼굴조차 늘 충만한 내용(표정)을 지니지 않는가? 외부의 세계는 바로 프리즘으로 들어오는 빛이 굴절되어 들어오듯 이 충만한 내용과 뒤섞이며 우리 의식에게 주어진다. 외부 대상이 우리에게 의식되는데 불가결하게 개입하는 조건인 이 충만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몸’이다.

 
몸은 의식 외부의 대상이 아니다 - 몸을 통해서 비로소 외부 대상은 주어진다
 
“우리를 세계에 연결하는 지향적 단서”는 무엇인가? 여느 현상학자들처럼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이런 물음과 더불어 사색을 시작한다. 혹시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세계와 관계를 가지는가? 즉 과학과 철학의 이론에 의해 구성된 세계가 우리의 근본적 지각인가? 오히려 과학의 이론적 그물망은 그 그물코가 너무 커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원초적 지각은 모두 그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비판적 질문에 답해나가는 가운데 메를로-퐁티는 몸을 우리의 원초적 지각의 ‘선험적 근거’로서 발견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라는 하나의 간격’을 통해서만 세계에 연결된다. “우리는 세계를 그리는 데 있어 우리 자신인 그러한 빈틈, 세계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존재하게 되는 그러한 빈틈을 지울 수 없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바로 세계에 대한 이러한 간격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각 그 자체가 “거대한 다이아몬드의 흠집” 같은 이 간격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간격의 정체는 바로 우리의 ‘몸’이다.

 
지금껏 철학은 고작해야 몸을 인식 주관이 대면하는 여타의 다른 대상과 다를 것이 없는 시공을 채우고 있는 연장(延長)으로 보았다. 몸을 인식 주관의 개념적 틀이 파악하는 대상으로만 보았지, 그것이 모든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선험적 조건이라는 점은 모르고 있었다. 즉 “규정된 대상의 총합으로서가 아니라 규정된 모든 사고에 앞서 스스로 우리의 경험에 끊임없이 현존하는 잠재적 지평으로서의 몸”을 발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몸은 의식이 지각하는 대상이기 이전에, 몸 때문에 바로 외부 대상들이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세상 바깥에 있는 비신체적인 “고공비행을 하며 내려다보는 주체”는 없으며, 세계 안의 몸과 뒤섞여 있는 의식이 주체가 된다. 피부의 조직끼리 갈라낼 수 없이 얽혀 있듯 의식은 “세계의 조직(tissu du monde)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알려주는 것들 - 화가의 시선은 신체와 얽혀 있다

 
세계가 비신체적인 명증한 의식(데카르트의 코기토, 사르트르의 익명적 의식)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신체 자체를 통해 굴절되는 모습이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지각 자체라는 점은 무엇보다도 ‘그림의 영역’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메를로-퐁티가 말년의 『눈과 정신』(1964)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까닭이다. 메를로-퐁티는 세계 바깥의 명증한 의식에 비견되는 르네상스 시대의 허구적인 원근법을 이렇게 비판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들은, 그때까지의 회화의 탐구와 역사를 마감하고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정확한 회화의 기초를 확립한 척 한에 있어서 거짓된 것들이었다. 반면 화가들은 어떤 원근법의 기술도 정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요컨대 원근법은 실재의 본 모습을 드러내 주기보다는 작위적으로 구성된 비전(vision)을 보여주는 허구적인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안의 존재인 몸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 세계 바깥에 위치하는 의식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세계에 대해 작위적으로 설정된 허구적인 지점이다.



File:Loreto Fresko.jpg


http://it.wikipedia.org/wiki/Melozzo_da_Forl%C3%AC

 
화가의 시선이란 신체와 떨어져 “고공비행을 하며 내려다보는 주체”가 아니라 ‘눈’이라는 신체와 얽혀 있으며 이 눈이라는 신체는 세계 안의 다른 대상들 사이에 있다. “인간이 자기 집에 살고 있듯이 화가의 눈은 존재의 조직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세계의 비전을 절대적으로 보여줄 세계 바깥의 절대적인 한 지점에서 시작되는 원근법이란 없고, 존재의 조직 안에 들어있는 눈의 관점에 따라 그때그때 나타나는 비전만이 있다. 그렇기에 세계가 가시적이 되는 방식은 무궁한 것이고 이에 따라 그림 역시 무한하게 생산된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역시 마찬가지다. 대상이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에 대한 기술 역시 세계 안에서 몸이 사는 방식이 무한한 만큼 종결 지어 질 수 없는 무한한 내용을 가질 것이다.
    
이처럼 메를로-퐁티를 통해, 의식이 바라보던 외부 대상에 불과하던 신체가, 우리 의식적 활동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근본적 권좌를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