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philosophy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philosophy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 4. 14.

동물해방


 
‘동물해방’을 바라보는 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의 옹호』
 
 
 
1792년 오늘날 ‘여성 인권운동 이론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영국의 작가ㆍ철학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는 『여권의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라는 제명의 책을 출간했다.
 
   
 
 
 
존 오파이가 그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초상(1797)
 
                                   





   
 
- 『여성권리의 옹호』, 1792년 미국 판의 표지
 

 
 
최근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이 책의 주된 논지는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여성이 남성보다 선천적으로 열등한 것이 아니며 다만 교육의 부재가 그러한 결과를 불러왔을 따름이고, 따라서 사회는 여성에게 교육의 평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일견 평범한 주장이다. 계몽주의 및 영국의 전통적인 경험주의적 사고에 기반한 공리주의적 경향의 이 저작은 결국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이른바 ‘선천적인’ 차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후천적인’ 교육의 존재 여하에 따라 남여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각각의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하나의 ‘인간’인만큼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정치ㆍ경제ㆍ문화ㆍ교육 등등의 제반 사회적 권리 및 의무의 측면에서 차등을 둘 수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논지의 핵심은 여성과 남성이 모두 동등한 인간으로서 동등한 이성 혹은 합리성과 감수성을 자연적으로 타고나므로 남여가 동등한 교육에 의해 이러한 자연적 권리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사회가 여성들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테일러의 『수권(獸權)의 옹호』

 
 
그러나 사실상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의 주장은 당시 보수적이며 남성중심주의적인 18세기 말의 영국사회에서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모하고도’ ‘비합리적’ ‘비상식적인’ 주장으로 치부되었고, 그 결과 저작은 엄청난 비판과 비난에 직면했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권의 옹호』, 손영미 옮김, 한길사, 2008.
 
 
 
그러한 비난 혹은 비판의 일환으로, 이 책이 출간된 같은 해에 영국에서는 『수권(獸權)의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Brutes)라는 익명의 ‘풍자서’(?)가 출간되었다. 책의 저자는 오늘날 그 책의 저자는 캠브리지 대학의 저명한 철학자 토마스 테일러(Thomas Taylor)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이른바 ‘당시 영국 혹은 유럽 제도권 최고 명문 대학의 명망 있는 정통 철학자’가 저술한 것으로 볼 수 있을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논지의 전개를 통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여성의 평등에 대한 주장이 건전하다면 그와 같은 논증이 개나 고양이, 또는 말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추론은 이러한 ‘짐승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짐승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짐승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추론은 건전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짐승이 권리를 갖는다는 추론이 건전하지 못하다면 여성들이 권리를 갖는다는 추론 또한 건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경우에 동일한 논증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 토마스 로렌스 경이 그린 토마스 테일러의 초상(1812년 경)
 
 
 
 
 
 
제러미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그런데 이 모든 논쟁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동물해방의 논리가 여성인권의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토마스 테일러가 적절히(?) 지적하고 있듯이 ‘두 경우에 모두 동일한 논증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이른바 의무론이라 불리는 칸트주의와 함께, 가장 강력한 윤리학설 중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영국 공리주의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아야 한다. 근대 영국 공리주의의 역사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영국의 법학자이자 철학자인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저술하여 1780년 인쇄되었으나 1789년에 정식으로 간행된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에서 처음으로 학문적 이론의 형태로 제출되었다.
 
 
                                   

   
 
- 근대 영국 공리주의의 창시자 제러미 벤담
 
 
 
적어도 서양사상에서 최초로 종교에 호소하지 않는 세속적ㆍ인간주의적 윤리학 혹은 철학적 윤리학으로 간주되는 공리주의의의 기본원리는 벤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자연은 인류를 쾌락(pleasure)과 고통(pain)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 아래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지시하는 것도 오로지 이 두 군주에 달려있다. 한편에 있어 옳음(right)과 그름(wrong)의 기준, 다른 한편에 있어서의 원인과 결과의 고리는 그들의 옥좌에 달려있다.” 서양 윤리학사에서 벤담의 의의는 그가 그의 이전까지는 그저 단순히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라는 주관적 호오, 취미 판단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던 기존의 논리를 뒤집어, 그것을 ‘옳고ㆍ그름을 판정해주는 도덕적 기준’으로까지 격상시킨 점에 있다고 말해진다. 간단히 말하면 이전까지의 윤리 이론들에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본성을 갖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상이한 성질들로 간주되었으나, 이제 벤담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를 즐겁게 혹은 행복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덕적으로도 옳은 것’이라 보게 되었다.
 
 
고전적 공리주의의 세 가지 원리
 
 
 
벤담은 이러한 인간적 욕망과 호오에 기초한 새로운 자신의 윤리학을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라 이름붙이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도덕 판단의 기준 혹은 원리를 제시하였다.

 
 
첫째 어떤 행위가 옳은가 그른가를 판정해주는 기준, 즉 다시 말해 도덕 판단의 제일원리는 기존의 여하한 신학적ㆍ종교적ㆍ초월적 명령ㆍ원리 혹은 의무감이 아니라, 그 행위가 그 행위자 및 그 행위의 결과에 의해 영향 받는 존재들의 쾌락과 고통의 유무이다. 즉 도덕 판단의 제일원리는 종교적 혹은 신학적 교의와의 일치 여부가 아니라, 그 행위가 ‘얼마나 많은 쾌락 혹은 행복을 가져 오는가 또는 얼마나 적은 고통 혹은 불행을 가져 오는가’이다. 이제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는 가능한 여러 행위들 중 ‘더 많은 쾌락을 가져오는 행위’ 혹은 ‘더 적은 고통을 가져오는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악한 행위’란 여러 가능한 행위들 중 ‘더 적은 쾌락을 가져오는 행위’ 혹은 ‘더 많은 고통을 가져오는 행위’이다. 이러한 윤리학의 제일원리에 입각하여 벤담은 ‘윤리학’을 ‘이해관계에 있는 당사자들에게 가능한 한 최대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도록 그 사람들의 행위를 지도하는 기술(art)’이라 새로이 정의한다. 단적으로 말해, 공리주의 윤리학은 ‘쾌락 즉 행복의 추구와 고통 즉 불행의 회피’를 누구나 바라는 유일하고도 옳은 행위의 목적으로 바라본다. 공리주의의 이 첫 번째 원리를 벤담은 쾌락주의(hedonism)라 불렀다.
 
 
두 번째는 이른바 ‘결과주의’(consequentalism)라 불리는 것으로서, 하나의 행위는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로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어떤 행위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닌 것처럼 어떤 동기 혹은 의도는 그 자체로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동기가 좋으면 더 좋겠지만 그것은 그 행위의 윤리적 판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부차적 사항이며, 오직 중요한 것은 그 행위가 가져온 결과일 따름이다. 요약하면, 공리주의는 오직 더 많은 쾌락 혹은 더 적은 고통을 결과적으로 산출하는 행위를 ‘선’으로, 더 많은 고통 혹은 더 적은 선을 결과적으로 산출하는 행위를 ‘악’으로 바라본다.
 
세 번째는 ‘보편주의’(universalism)라 불리는 입장으로, 간단히 말해 민주주의의 원리이다. 이는 벤담의 “모든 사람은 한 사람으로 계산되어야 하며, 아무도 한 사람 이상으로 계산되지 않는다.”(Everybody to count for one, nobody for more than one)는 말에 잘 나타나 있는데, 오늘날 보면 평범한 주장으로 보이지만, 이는 18세기 말 당시 왕정 하의 영국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이 보편주의는 이후 오늘날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적 선거의 4대 원리’인 평등ㆍ비밀ㆍ직접ㆍ보통 선거의 철학적 기초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놀라운 주장인가 하는 점은 벤담의 동시대인 우리나라 영ㆍ정조 시기의 어느 학자가 당시의 국시인 유학을 부정하며 “노비와 상놈,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1인 1표의 평등한 투표권을 부여하여 왕을 선출하자.”는 이론을 제안했다고 가정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정신은 이후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무수한 사회적 개혁가들을 낳게 되는데, 공리주의의 이러한 발전을 가능케 한 벤담의 유명한 명제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옳고 그름의 기준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라는 말이다.
 
 
유정적 존재,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결국 이러한 벤담의 공리주의 이론은 윤리와 도덕의 근거를 그 윤리적 행위의 수행자 혹은 수혜자가 ‘이성적 존재인가 아닌가’에 따라 판단하는 기존의 윤리학을 부정하고, 이를 그 수행자 및 수혜자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전환시킨 것이다. 벤담은 말한다. “문제는 그들이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또한 그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가, 아닌가도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벤담은 이렇게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를 ‘유정적(有情的) 존재’(sentient being)라 불렀다. 어떤 존재가 윤리적 고려의 대상인가 아닌가는 이제 그가 이성적인 존재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 존재가 유정적 존재, 즉 쾌락과 고통을 느낄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우리가 충분한 이성적 능력을 가진 존재만을 윤리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당시의 어린아이와 교육받지 못한 여성은 물론 서구인이 아닌 모든 인종, 노예, 혹은 정신적ㆍ신체적 장애로 인하여 이른바 ‘정상적인’ 이성적 활동을 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모두 배제하는 논리적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이러한 벤담의 ‘유정적 존재의 이론’은 이후 우리가 역사에서 실제로 목도한 바와 같이 여성ㆍ흑인ㆍ노예ㆍ동성애를 위시한 여타 피압박 집단ㆍ계급ㆍ인종ㆍ민족의 해방 이론으로 기능하며 헤아릴 수 없는 인류의 도덕적 발전에 기여하였다.
 
 
공리주의 이론의 필연적 귀결, 동물해방
 
 
그리고 오늘 드디어 공리주의의 세 가지 원리는, 토마스 테일러에 반하여, 우리에게 묻는다. 생명의 존엄성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한정되어야 하는가? 동물이 ‘유정적’ 존재라면, 즉 동물이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들을 윤리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만 하지 않겠는가? 동물해방의 이론은 바로 이러한 공리주의 이론의 필연적 귀결이라 볼 수 있다. 측정 기준과 방법의 문제는 있을 수 있겠지만, 동물 해방론자들은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볼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없다고 본다. 사실상 만약 우리가 지금 여기 고양이 혹은 개를 한 마리 잡아 가위로 한쪽 다리를 마취 없이 자른다면, 그 고양이 혹은 개가 몸부림을 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동물 해방론자들은 동물들이 유정적 존재이며, 고통이나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이렇게 사실상 오늘날의 입장에서 사후적으로 조감해 본다면, 오늘날 동물해방의 이론은 이러한 18세기 말 벤담 공리주의의 세 가지 원리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는 것이었으며, 실제로도 벤담은 오늘날 노예 해방 및 동물 해방이라 부를 수 있는 여러 사항들에 관해 진보적 입장을 취하였다.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 『동물해방』의 저자 피터 싱어, 미 프린스턴대학교 교수
 
 
                                   
 
   
 
- 피터 싱어, 『동물해방』, 김성한 옮김, 인간사랑, 1999.
 
 
 
 
 

 
 
 
 
 
그리고 1975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의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을 발간한다. 그리고 그의 저작은 바로 앞서 인용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제러미 벤담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한다(벤담과 싱어의 논의를 잘 정리한 입문서로는 최훈의 『벤담ㆍ싱어』(김영사, 2007)가 참조할 만하다). “이 책은 인간의 ‘인간이 아닌 동물들’(non human animals)에 대한 폭정에 관한 책이다. 벤담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학정을 고발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동물은 이제 더 이상 도덕적 고려의 외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도덕적 고려 가장자리의 어떤 특별한 구역이다. 그들의 이익은 인간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 한 약간의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 충돌이 발생한다면, -심지어 그것이 동물의 일생 동안의 고통 및 사망과 인간의 식도락적 취미 사이의 대립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아닌 존재의 이익은 간단히 무시된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이러한 논증의 궁극적 정당화가, 어떤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합리적인 기본적 도덕원리에 대한 호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의 공리주의자인 싱어에게 있어 동물해방의 논리는, 어떤 정서적 요구 혹은 권고가 아닌, 이성과 당위의 요구이다. “나는 이 책이 논거로 삼고 있는 원리에 근거하여 육식과 관련된 당신의 이익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한 분명히 그렇게 요구한다.” 싱어는 “일상적으로 우리는 ‘동물’이라는 단어를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을 의미하는데 사용하며, 이러한 용례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지우며 우리 스스로가 동물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하나, 생물학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그러한 진술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동물 해방’을 ‘동물 사랑’ 혹은 ‘동물 애호 혹은 사랑’과 혼동한다. 그것은 동물을 ‘사랑하고 애호하는’ 문제가 아니라, 동물이 자신의 본성대로 자연적 수명을 누리며 살 권리가 있음을, 인간이 동물을 죽일 권리가 없음을 말하는 주장이다. 즉 우리가 흑인이나 여성들의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그들을 ‘사랑하고 안아 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동물을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개를 ‘중성화’시키고, ‘성대제거 수술’을 행하는 것이 결코 동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폭력주의 동물해방 운동
 
 
한편 싱어는 동물해방을 위해 실험실에 폭탄을 설치하여 실험자들을 죽이기도 하는 폭력적 유형의 동물해방 운동에 명시적으로 반대한다. “동물 해방 운동 진영 내의 모든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물해방을 지탱하는 힘은 실천에서 나온다. 동물 해방을 지지하는 우리들은 좀 더 높은 도덕적 토대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억압자의 손에 놀아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간디와 마르틴 루터 킹이 승리를 거둔 이유는 그들 주장의 정의로움이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며, 그들의 행위가 반대자들의 양심마저도 울렸기 때문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다른 종들에게 가하는 우리의 잘못도 부정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우리의 운동이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의 여부는 폭발물로 두려움을 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장하는 바가 올바른가에 달려있다.”
 
 
실험동물들의 고통?
 
 
싱어는 이 책에서 어느 저명한 과학자의 강연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과학자의 강연이 끝난 후 누군가가 과학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의 실험에 사용된 동물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학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왜 동물들한테까지 신경을 써야하는가?” 싱어는 이에 대해 “위대한 과학자가 반드시 좋은 철학자인 것은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사실상 그들의 동물에 대한 발언은 그들이 철학적으로 아주 무지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오늘날의 전문적인 철학자가 쓴 글로서 우리의 윤리 체계에 동물을 포함시키는 것이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데에 동의하는 글을 본 적이 없다. 또한 동물 실험이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하는 글도 본 적이 없다. 철학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지구는 평평하다고 우기는 것에 비할 만한 무지한 주장이다.” 피터 싱어는 유대인이다. 그는 역시 유대인인 작가 아이작 싱어의 말을 빌려 인간의 ‘인간이 아닌 동물들’에 대한 학정을 이렇게 고발한다. “동물의 처우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나치이다.”
 
 
종차별주의의 간략한 역사
 
 
이어 싱어는 고대 그리스ㆍ로마 시대 이래 서양 동물학대의 역사를 간략히 다룬다. 싱어는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해 비판적인데 이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일반이 동물해방의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했으며, 실상은 동물학대 논리의 주요한 한 원천을 이룬다는 점에서 쉽게 수긍할만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의 교리를 확립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를 신에 대한 죄, 자신에 대한 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죄라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으며, 이른바 ‘동물에 대한 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학적,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싱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이 동물에게 동정어린 관심을 나타냈을 때, 그는 그만큼 더 동료 인간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정의로운 자는 야수의 생명을 중시한다.’(「금언」 10절)라고 쓰여 있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그 어떤 논의도 종차별주의의 본질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마치 지금이 일본제국주의의 강점 시기이고, 어느 일본인 학자가 “조선인들에게 동정어린 관심을 나타냈을 때, 그는 그만큼 더 동료 일본인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정의로운 일본인은 조선인의 생명을 중시한다.’라고 고전에 쓰여 있다.”는 말을 했을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이 말이 종차별주의의 본질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싱어의 지적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동물실험의 딜레마?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즉시 모든 육식을 중지하고, 동물실험을 중단해야 할 것인가? 물론 피터 싱어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이는 현대 윤리학의 딜레마이다. 동물해방의 논리는 실상 현대 윤리학의 주된 이론 중 하나인 고전적 공리주의의 가능한 필연적 귀결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공리주의를 받아들인다면 동물해방의 논리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무지는 논증이 아니다. 내가 몰랐고, 모른다는 사실이 도덕적 면책 사유는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오늘 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동물 해방 이론의 논거 혹은 논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동물해방 이론은 그저 브리짓 바르도 류의 몰상식한 서구 우월주의, 가끔 해외토픽에 나오는 운동가들의 나체 시위, 재미 혹은 취미 혹은 배부른 서구인들의 괴상한 짓거리 정도로 바라보는 피상적 시각이 엄존한다. 이는 물론 언론의 영향이 가장 크다 하겠으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문학 자체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가 그 근본원인이라 생각된다.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교양계급의 경우에서조차 철학ㆍ윤리학 혹은 인문학이란 배부른 고상한 유한계급의 말장난 혹은 고리타분한 훈장님들의 고전에 대한 도덕적 고담준론 혹은 윤리적 설파 정도로 생각하는 일제시대의 이미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엄마, 소가 불쌍해! 왜 이렇게 맛있지?”
 
나 자신은 학부 시절 불문과를 다녔지만 철학을 부전공하면서 “인간은 타인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뭘까?”를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있다. 물론 그러한 행위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한 번도 사실상 어느 누구에게서도 인간이 인간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은 존엄하며, 따라서 결코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되며 오직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을 뿐이었다. 물론 인간은 존엄하다지만, 그리고 모두들 타인은 존엄하겠지만, 내게는 결코 아무도 ‘나’를 존엄하다고 느끼지 않는 상태인 것으로 느껴졌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존엄하지만, 살아있는 오늘 여기의 ‘나’는 감히 존엄하지 않으며, 오히려 차라리 온갖 이기심과 욕망에 의해 일그러진 존재로서만 느껴지는 것, 내게는 바로 그것이 ‘주어진 전제에 대한 이해와 비판 작업’으로서의 참다운 철학이 아닌, ‘암기로서의 철학’만을 해온 나 그리고 우리 사회의 현실로만 보였다. 한 마디로 우리의 교육은 “왜?”를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회의 주어진 전재들을 아직 다 ‘습득’하지 못한 어린아이는 모두 철학자이다. 싱어가 지적한대로, 종차별주의가 만연한 현대 서구 사회에서, 그리고 오늘날 그만큼 서구화된 우리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동물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느끼며 동시에 육식을 한다. 쇠고기를 맛있게 먹으며 “엄마, 소가 불쌍해. 왜 이렇게 맛있지?”하고 미소를 머금고 말하는 천진한 영혼에게 우리 세대의 부모가 들려준 이야기는 “얘, 밥맛 떨어지게 왜 그런 얘기를 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밥이나 먹어.” 정도가 다였다.
 
 
‘사람의 아픔’, 혹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아픔’
 
 
결국 나는 인간을 죽이면 안 되는 ‘왜’(why), 그러니까 이유(reason)를 찾다가 그가 죽기를 원하기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즉 “그가 고통을 원하지 않으며, 죽음은 그에게 고통이므로, 나는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더욱이 나 역시 그런 일을 타인으로부터 당하고 싶지 않으므로 나 역시 타인에게 그런 일을 할 권리가 없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바로 공리주의의 쾌락원칙에 해당되는 논리였다. 그리고 언젠가 『사람의 아픔』이란 책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알베르 카뮈의 말대로, “인간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에 너무도 공감했기 때문이다. 나는 윤리와 도덕의 기준이란 인간의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하는 즉시, 나는 그러한 논리가 인간에게만 한정되지 않으며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포괄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할 것임을 이해했다. 나는 먼 훗날 내가 쓰려는 책의 제목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아픔』으로 바꾸었다. 지금 생각하면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학부 시절이던 1980년대 중반 경에 정말 타인의 영향 없이 혼자서 ‘고안’해낸 생각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후 육식은 물론 심지어 채식마저도 그만두어야 할 것 같은 ‘죄책감’(?)에 마치 이 세상의 비밀을 나 혼자 알고 있는 것처럼 두려워했다. 그런데 학부를 마칠 무렵 윤리학 관련 수업에서 나의 이러한 생각이 이미 200년도 더 전에 영국의 어떤 사상가, 즉 제러미 벤담이라는 사람에 의해 ‘공리주의’라는 이름으로 체계화 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즉시 ‘공리주의자’가 되었다.
 
 
대학원 시절 읽었던 『동물해방』의 충격, 그리고 번역
 
 
그리고 이후 또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과정 학점을 이수하던 중, 나는 윤리학 관련 수업에서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을 원서로 읽게 되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고, 이 책을 내가 반드시 우리말로 번역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박사과정에 올라가서 당시 전공 관련 번역서를 몇 권 냈었던 나는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한 출판사의 사장님께 이 책의 번역 저작권을 문의하여 우리말 번역 판권을 따냈다. 그러나 나 자신은 이미 계약되어 있던 다른 전공서적의 번역과 논문으로 시간을 도저히 낼 수가 없어 책의 번역은 한 없이 늦어질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이런 상태로 책을 붙잡고 있다가는 내가 결국 몇 년은 더 있어야 이 책을 번역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평소에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내가 전적인 신뢰를 보내던 나의 대학원 윤리학 석ㆍ박사 과정 동기인 김성한 박사에게 번역을 문의하여 보았다. 고맙게도 김성한 박사는 번역에 흔쾌히 응하여 주었고, 마침내 1999년 너무나도 유려하고 훌륭한 번역으로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번역을 흔쾌히 허락해준 김성한 박사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한다.
 
 
해월 최시형의 이천식천
 
 
이후 나는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모든 육식을 금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식물은 먹어도 되는 것일까? 그럼 나는 굶어죽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초등학교ㆍ중학교 시절 했던 저 동물 실험은? 쾌락과 고통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싱어는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결정적 보고가 없으므로 식물은 먹어도 되고, 동물로서는 굴을 그 기준으로 삼던데, 나도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도덕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그 고통의 존재를 측정할 기술적 기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식물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절대적으로 단언할 수 있을까? 또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모든 식물ㆍ동물 실험을 중단하고 온갖 고통으로 죽어가는 저 환자들이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일까? 또 온갖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할 궁극적으로는 환자들을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오늘도 밤을 새우며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는 저 연구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콩으로 만든 고기가 있다던데, 언젠가 육류를 대신할 수 있고 자연 육류에 버금가는 영양소를 가지고 있으며 또 경제적으로 타산성이 맞는 대체 육류가 개발된다면, 살생을 하지 않고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도, 육식을 하고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있을 텐데...
 
 
                                   
 
 
   
 
- 이천식천! 하늘로써 하늘을 먹인다! 해월 최시형 선생(1827-1898). 동학의 창세 교조 최수운 선생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37년간 지하포교를 하다 잡혀 현재 단성사 자리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61세. 사진은 순교당하기 직전 관원에 의해 찍힌 모습.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나는 책을 읽다가 이후 마음 속 깊이 존경하게 된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선생을 만났다(부언하면, 물론 나는 종교가 없으며, 동학에 대해서도 오직 학문적 관심만을 가지고 있다). 기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간단하고 단순한 논리이지만, 진리는 때로 가장 쉽고 간단한 것, 심플한 것이다. 우리에게 동학의 제2세 교조로 잘 알려져 있는 해월 선생은 기초적 한문 독해 수준 만을 가진 이른바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언어는 지식인의 말장난이 배제된 성실하고 소박한, 한 평생을 자신의 진리를 믿고 그렇게 살아간 인간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소박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 “모든 이가 자신 안에 한울님을 품고 있다.”라는 동학의 명제를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로 확장하여, 여성, 어린아이를 포함한 모든 인간, 그리고 식물ㆍ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위에 적은 나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인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귀하다. 그러나 하늘의 이치는 서로 먹고 먹힌다. 인간도 살기 위하여서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살기 위하여서만’. 결코 취미나 오락이나 재미나 사치로서가 아니다. 자기 합리화이거나 부당한 착취이거나 영악한 장삿속이거나 거대기업의 논리로서가 아니다. 오직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먹이기 위해서만. 그리고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만.
 
 
 
동물 실험을 할 자격이 있는 자란 바로 자신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식물 혹은 동물들에 대하여 감사와 존중의 마음을 품은 자, 그러한 과정에서 결코 그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자,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고통과 죽음이 오직 생명을 살리겠다는 보다 더 큰 목적에 봉사할 때만 그러한 일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나가면서
 
 
 
오늘 내가 적은 이 모든 말들은 어떤 이에게는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글로써, 혹은 어떤 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나가는 글로써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동물해방의 논리가 ‘견딜 수 없는 진리’, 이 말이 너무 강하다면 일종의 ‘견딜 수 없는 진실’로서 느껴졌었다. 그런데, 니체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한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얼마나 많은 양의 ‘견딜 수 없는 진리’를 견뎌내는가에 달려있다.” 진리란 자신이 ‘그랬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지금 그런 것’에 더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2009년 12월,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 피터 싱어, 『동물해방』, 김성한 옮김, 연암서가, 2012(개정완역판).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 반복의 두 가지 형식
특수자의 일반성
독특한 것의 보편성
똑 같은 개념 아래 재현된
대상들 사이의 차이
이념에 상응하는 역동적 시공을 창조하는 어떤 순수한 운동으로 펼쳐지는 차이
일반적 개념과 특수한 것
사이의 추상적 관계(44)
le rapport abstrait du particulier
avec le concept en général(26)
이념 안에서 독특한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진정한 관계
le vrai rapport du singulier et de l'universal dans l'Idée
질적 유사성(=어긋나 있는 반복)
양적 등가성
교환불가능
대체불가능
동일성(재현=추상적인 거짓 운동)
반복(=실제적 운동)
이데아(원형)/모상
시뮬라크르
시간성/무시간성
역사성/영원성
특수/보편
시대에 반하는
도래할 시대를 위한
지금-여기(Erehwon)
추상적 보편자/경험적 특수자
분열된 자아를 위한 코기토
개체화들이 비인격적이고 독특성들이 전(前)-개체적인 세계,
눈부신 익명인 ‘아무개’(on)의 세계
이념의 외부로 추락하는 차이
개념 안의 같음의 형식 아래로 전락하는 차이
개념 없는 차이 = 반복
개념의 외부에
이념의 내부에
같음의 반복
자신 안에 차이를 포괄
개념이나 재현의 동일성에 의해 설명
이념의 타자성,
어떤 ‘간접적 현시’의 다질성 안에 포괄
개념의 결핍에서 성립하는 부정적 반복
이념의 과잉에서 성립하는 긍정적 반복
가언적
정언적
재현의 연극
반복의 연극
개념과 재현
힘과 운동
매개
매개 없는 직접성
추상적인 총체적 결과
작업의 결과
작용 중인 원인
몸짓의 ‘진화’
박자-반복
리듬-반복
산술적 리듬
강세적 리듬
평범한 단어들의 수평적 반복
단어들의 내면으로 다시 상승이 일어나는 수직적 반복, 특이점들의 반복
관념적 운동성
감각적 운동성
정태적
역동적
결과 안에서
원인 안에서
외연 안에서
강도적
평범
독특ㆍ특이
수평적
수직적
개봉되고 설명됨
봉인되어 있으며 해석되어야 함

 
 
특수자의 일반성
독특한 것의 보편성
공전(公轉)의 성격
진화의 성격
동등성ㆍ통약(通約)가능성ㆍ대칭성
비동등성ㆍ통약불가능성ㆍ비대칭성
물질적
(자연과 대지 안에서조차) 정신적
생기 없음
우리의 죽음과 삶들,
우리의 속박과 해방들,
악마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음

 
 
* 차이와 반복
차이
반복
개념적 차이
개념 없는 차이
무한정 이어지는 개념적 차이에서 벗어나는 차이
내생적 차이들의 개념적 질서
외생적 차이들의 공간적 질서
발산과 탈중심화
전치와 위장
순수한 차이
복합적 반복
 
 


 
 

2013. 4. 2.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Marguerite Yourcenar, 1903–1987
 
 
 
 
 
 
 
 









 


 
 
Publius Aelius Traianus Hadrianus Augustus, 76–138













 
 
 
 
 
 
 
 
 
 
 
 
"누구나 각각 자기 자신의 신에게 자신을 바치는 법이다."(2권, 79)
 
 
 
 
 
나는 쉴 새 없이 책을 읽는다. 아니, 책을 읽는 것이 내게는 쉬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는것은, 책에 대하여 말하기보다는, 책을 듣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물론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일이며, 결국 읽는 동안의 살아있다는 유쾌한 체험을, 읽은 후의 즐거운 피로를 낳는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독서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들을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저자는 아주 없지는 않더라도, 역시 매우 드물다. 아침 저녁으로, 그것도 평생을 두고 읽을 수 있는 저자,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는 저자를 만난다는 것은 인생이 주는 쉽지 않은 행운에 속한다.

 

그런데 최근에 이러한 저자들 중의 한 사람, 아마도 나의 기질 중 하나에 꼭 들어맞는 작가를 발견했다. 마르게리트 유르스나르, 그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책을 읽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가히 우주에 대한 유쾌한 명상을, 삶에 대한 사려로 가득 찬 천착을, 나 자신과 대면하는 나만의 시간을 내게 돌려준다.


 

화자는 2세기 로마의 14대 황제이자 오현제 중 세번째로 일컬어지는 하드리아누스이다. 책의 모든 문장은 너무도 아름답고, 나로서는 가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울림을 남긴다. 가령, 아래에 내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옮겨 적어놓은 문장은 나의 어린 시절 이래 내가 언제나 억눌러 왔던 나 자신의 한 부분을 상기(想起)시킨다. 삶에 대한, 관념의 진지한 정적(靜寂)주의(quietism).
 
 
 
 
그렇다. “키케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는 시기는, 이교의 신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아, 인간 홀로 존재했던 유일한 시대였다.”라는 플로베르의 한 문장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쓰인 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책은 신 없이 사는 나의 감성에 더 없이 꼭 맞는다. 결국, 신 없이 산다는 것 역시 신 안에서 사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 자신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 자신의 신 앞에 온전히 자신을 바친다.
 
 
 
더하여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은 최상급이다. 공들인, 제대로 된, 원저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탁월한 번역이다. 그리고 마르게리트 유르스나르의 1951년 이 저작은 단순히 걸작이다. 더하여, 사실 이 책은 모든 이들이 리더가 되고 자기 자신의 통치자가 되는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 - 이 시대에 두루 읽혀 마땅한 책이다. 그러나 물론 나는 이 책이 정신의 어린 아이들을 위한 책은 아니라는 점만은 미리 말해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내게 유르스나르의 글을 통해 울려퍼지는 하드리아누스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젊은 시절의 바로 내 목소리처럼 들린다. 의고주의, 격식과 형식을 차리는 언어에의 조탁. 병도 삶의 일부이며, 더욱이 죽음이야말로 삶의 일부이다. '조숙한 애어른'이라는 규정은 타자적이다. 나의 나의 고통을 다스려줄 문학적 기교들, 기법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그런 모습이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내게 고통스럽지 않다면, 나는 그것을 내 삶의 한 스타일로서 추구할 권리를, 아니 의무를 갖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수사학 없이 말할 수는 없다. 말하고 글쓰는 일 자체가 초보적인 것일 망정 하나의 수사학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수사학 없이 말하고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학과 철학에 막 입문한 이들 거의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인식론적 오류이다. 수사학을 사용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수사학을 사용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도 수사학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선택지를 보여준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의 수사학, 삶의 비참과 고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런 수사학이었다. 나는 그것을 느낀지 삼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는다.






***



 
"이 이야기는 단 한 사람-그는 나 자신인데-의 경험에서 이끌어 낸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나를 어떤 결론으로 이끌고 갈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을 규명하고 또 아마도 판단하기 위해, 혹은 적어도 죽기 전에 나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 이 사실 검증에 기대를 걸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는 인간의 생존을 평가하는 수단으로서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세 가지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첫째, 자신에 대한 연구 : 이것은 방법들 가운데 가장 어렵고 가장 위험하지만 또한 가장 풍요로운 것이고 하다. 둘째, 사람들에 대한 관찰 :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에게 자신들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서이거나, 그들이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조처한다. 셋째, 독서 : 책들은 글의 행간에서 태어나는 관점상의 특수한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역사가들, 시인들, 심지어 이야기 작가들-이 후자들의 경박하다고 평판이 나있음에도 불구하고-이 쓴 것들을 나는 거의 모두 읽었고, 아마도 그들에게서, 나 자신의 삶의 무척 다양한 상황들을 통해 모은 정보들보다 더 많은 정보들을 얻었을 것이다. 서한문은 나에게 인간의 말소리를 듣기를 가르쳐 주었으며, 그것은 조상(彫像)들의 움직임 없는 자태가 몸짓들을 분별하기를 가르쳐 준 것과 똑 같다. 반면, 삶은 그 후에 나에게 책들의 내용을 밝혀 주었다.



그러나 책들은 거짓말을 한다. 심지어 가장 진지한 책들까지도. 가장 능숙하지 못한 책들은, 삶을 함축할 수 있을 단어들, 문장들을 저자가 구사하지 못해, 삶에 대해 평범하고 빈약한 이미지밖에 남기지 못한다. 어떤 작가들, 루카누스 같은 작가들은 삶을, 그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장중함으로써 무겁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 반대로 다른 작가들, 페트로니우스 같은 작가들은 삶을 가볍게 하다 못해 속이 텅 빈 튀는 공으로 만들어, 그것을 무게 없는 세계 속에서 쉽사리 던지고 받는다. 시인들을 우리들을,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이 세계보다 더 광활하거나 더 아름답고 더 열렬하거나 더 감미로운 세계로 옮겨 가지만,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런 만큼 다른, 실제에 있어서는 거의 살 수 없는 세계이다. 철학자들은 현실은 순수한 상태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불이나 절굿공이가 물체에 과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변화를 현실에 과한다. 그러나 그런 연후에,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바의 한 존재나 한 사상(事象)에서 아무 것도, 그 재나 그 결정체 가운데 존속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과거에 대해 우리들에게 너무나 완전한 체계, 너무나 정확하고 명료한 원인들과 결과들의 연계를 제시하기 때문에, 그 체계와 인과관계가 결코 전적으로 진리인 적은 없었다. 그들은 그 다루기 쉬운 죽은 재료들을 재조정하는 것이며, 나는, 심지어 플루타르코스에 의해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언제나 제대로 파악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야기 작가들이나 밀레토스 풍의 우화 작가들은 푸주한들처럼, 파리들이나 좋아해 덤벼들 조그만 고기 조작들을 진열대에 걸어 놓는 일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는 책 없는 세상에 아주 못 만족할 터이지만, 그러나 현실은 책 속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현실은 책 속에 전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은 더더욱 불완전한 방법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악의가 만족을 얻는 아주 저열한 검증만으로 끝난다. 신분, 입장, 그리고 우리들의 온갖 우연적인 상황들이 인간 감정가의 시야를 제한한다. 나의 노예는 나를 관찰함에 있어서, 내가 그 자신을 관찰함에 가지고 있는 용이함과는 전적으로 다른 용이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의 용이함이나 나의 용이함은 똑같이 제한적인 것이다. 나의 늙은 노예 에우포리온은 20년 전 이래 나에게 기름병과 수건을 가지고 와 시중을 들지만, 그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시중으로 끝나고, 그가 나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나의 목욕으로 끝나며, 그 이상 알려고 하는 시도는 모두, 황제에게나 노예에게나 곧 무례함의 인상을 준다. 우리들이 타인에 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간접적인 것이다. 혹시 누가 고백을 하는 경우, 그는 자기 입장을 변호할 따름이고, 그의 변호는 완전히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그를 관찰하는 경우에도, 그는 혼자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를, 로마 치안 당국의 보고서들을 읽기 좋아한다고 비난한 바 있다. 나는 그 보고서들에서 언제나 놀라운 화젯거리들을 발견한다. 내 편이든 그렇지 않아 보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잘 아는 사람이든, 거기에 문제되어 있는 사람들은 나를 놀라게 한다. 그들의 미친 짓들은 나의 그와 같은 행동들에 대한 변명이 된다. 나는 옷을 입은 인간을 벌거벗은 인간과 비교하기에 지칠 줄을 모른다. 그러나 그 너무나 충실하게 상세한 보고서들은 최종 판결을 내리는 데에 나를 조금도 도와주지 못하는 채로 나의 서류 더미에 쌓아 올려질 따름이다. 엄격한 외양을 가진, 문제되고 있는 그 행정관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결코 그를 더 잘 알게 하지는 못한다. 이제부터 나는 한 현상이 아니라 두 현상-그 행정관의 외양과 그의 범죄-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에 관한 관찰을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의무로 여기는데, 내가 끝까지 그 옆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이 개체와 타협하기 위해서라도 그리해야 한다. 하지만 60여년 간의 친밀성은 이 경우 역시 오류의 가능성을 크게 함축하고 있다. 가장 깊은 내면적 차원에 있어서 나 자신에 관한 나의 지식은 애매하고, 내심적이며, 표현되지 않은 것이고, 공모처럼 은밀한 것이다. 가장 비개인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그것은 내가 수(數)에 관해 세울 수 있는 이론들만큼 냉엄한 것이기도 하다 : 이 경우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능을, 나의 삶을 멀리서 또 더 높은 데서 바라보는 데에서 사용하며, 이렇게 하여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의 삶이 된다. 그러나 이 두 방식의 앎은 어렵고, 전자는 자신 내부로의 침잠을, 후자는 자신 외부로의 탈출을 요구한다. 나는 타성적으로,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그 두 방식에 순수히 관례적인 방식들을, -즉 대중들이 품고 있는 이미지에 의해 부분적으로 변형된 나의 삶에 대한 생각, 서툰 재단사가 우리 소유의 천을 힘들여 거기에 맞추어 자르는 완전히 준비된 본과 같이 이미 이루어진, 달리 말해 잘못 이루어진 판단을, 대치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모든 방식들은 한결같지 않은 가치를 가진 장비들이요, 다소간 무디어진 도구들이지만, 그러나 다른 것들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그 도구와 장비들을 가지고 그럭저럭, 인간으로서의 나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는 것이다.



나의 삶을 관찰해 볼 때, 나는 그것이 무정형하다고 생각됨에 놀란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이야기해 들려주는 영웅들의 생존은 단순하다. [...] 나는, 위인들이란 바로 그들의 극단적 위치로써 특징지어지며, 그 극단적인 위치를 평생 견지하는 데에 그들의 영웅성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그들은 우리들의 극지이거나 대척지인 것이다. 나는 모든 극단적인 위치들을 번갈아 가며 점했으나, 그것들을 견자하지 않았다. 사람은 언제나 나로 하여금 그 위치들에서 미끄러져 나오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덕 있는, 농부나 짐꾼처럼 중심에 위치한 생존을 자랑할 수도 없다.



나의 나날들을 이루는 풍경은 마치 산악 지대처럼, 마구 뒤섞여 쌓여 있는 갖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나는 거기에서 이미 혼성적인, 균등한 비중의 본능과 교양으로 형성되어 잇는 나의 본성을 만난다. 여기저기 필연의 화강암들이 지표 위로 노출되고, 우연의 낙반은 사방에서 일어난다. 나는 나의 사람을 다시 훑어보고 거기에서 하나의 지도를 발견하여고, 거기에서 납이나 금의 광맥을, 혹은 지하수의 흐름을 따라가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그 전혀 인위적인 지도란 기억의 눈속임일 뿐이다. 때때로 어떤 조우, 어떤 전조, 어떤 확정된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서 나는 하나의 숙명을 인지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너무 많은 수 많은 길들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고, 너무 수많은 금액들은 합산되지 못한다. 그 다양성 속에서, 그 무질서 속에서 나는 정녕 한 인격의 존재를 지각하지만, 그 형태는 거의 언제나 상황의 압력이 그려 놓은 것인 듯하다. 그 용모는 물 위에 반사된 그림자처럼 흐릿하다. 나는 자기의 행동이 자기 자신을 닮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의 하나가 아니다. 나의 행동은 정녕 나를 닮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행동은 나를 재는 유일한 척도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혹은 심지어 나 자신의 기억 속에도 나를 묘사해 넣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며, 죽음의 상태와 삶의 상태 사이의 차이를 이루는 것이 아마도 바로, 행동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변화시키기를 계속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나를 이루고 있는 그 행위들 사이에는 규정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 증거는, 그 행위들을 평가하고 설명하여 나 자신에게 알리고자 하는 욕구를 내가 끊임없이 느낀다는 사실이다. 오래 계속되지 않는 어떤 일들은 물론 무시될 만하지만, 그렇다고 전 생애에 걸쳐 있는 활동들 역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내가 황제였다는 사실이 나에게 중요한 것으로는 거의 여겨지지 않는다.



[...]




나에게 나의 삶이 너무도 범속하여 기록으로 남겨질 만한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소라도 오랫동안 관조될 만한 가치조차 없고, 심지어 나 자신의 눈에도 어느 누구의 삶보다 결코 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보일 때가 있는가 하면, 그것이 유일한 것으로 보이고, 바로 그 사실로써, 대다수 인간들의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기에 무가치하고 무용한 것으로 보일 때도 있다. 아무것도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 나의 미덕들과 악덕들이 그러기에는 충분치 않다. 나의 행복이 나의 삶을 더 잘 설명하지만, 그러나 지속적이지 않고 간헐적으로 그럴 뿐이며, 특히 수락할 만한 이유 없이 그러하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자신이 우연의 손에 받아들여짐을, 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신도 주재하지 않는 운의 덧없는 산물에 자나지 않음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삶의 일부분은, 심지어 그 삶이 주목할 가치가 아주 없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출발점을, 근원을 찾는데 흘려보낸다."(1권, 41-49)


2013. 3. 20.

2013. 3. 17.

프랑스 대입 바칼로레아 철학 문제



1. 인간



1.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2. 꿈은 필요한가?
3.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4.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5. 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6. 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7. 행복은 단지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8. 타인을 존경한다는 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9. 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10.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11. 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2. 인문학



1. 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2.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3. 철학자는 과학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4. 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5. 역사학자가 기억력에만 의존해도 좋은가?
6. 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인가?
7. 감각을 믿을 수 있는가?
8. 재화만이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9. 인문학은 인간을 예견 가능한 존재로 파악하는가?
10. 인류가 한 가지 언어만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3. 예술



1.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2. 예술 없이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3. 예술 작품의 복제는 그 작품에 해를 끼치는 일인가?
4. 예술 작품은 모두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5. 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4. 과학



1. 생물학적 지식은 일체의 유기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2.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3. 계산, 그것은 사유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4. 무의식에 대한 과학은 가능한가?
5. 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6. 이론의 가치는 실제거 효용 가치에 따라 가늠되는가?
7. 과학의 용도는 어디에 있는가?
8. 현실이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고 할 수 있는가?
9. 기술이 인간 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
10. 지식은 종교적인 것이든 비종교적인 것이든 일체의 믿음을 배제하는가?
11. 자연을 모델로 삼는 것이 어느 분야에 가장 적합한가?



5. 정치와 권리



1. 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2. 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3. 법에 봅종하지 않는 행동도 이성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4. 여론이 정권을 이끌 수 있는가?
5. 의무를 다하지 않고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6. 노동은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과한가?
7.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가?
8. 노동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가?
9. 자유를 두려워 해야하나?
10. 유토피아는 한낱 꿈에 불과한가?
11. 국가는 개인의 적인가?
12. 어디에서 정신의 자유를 알아차릴 수 있나?
13. 권력 남용은 불가피한 것인가?
14. 다름은 곧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15. 노동은 종속적일 따름인가?
16. 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나?


6. 윤리



1. 도적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는가?
2. 우리의 좋다고 하는 것만을 바라는가?
3. 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4. 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하는가?
5.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6. 무엇이 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말해주는가?
7. 우리는 정념을 찬양할 수 있는가?
8. 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이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 바칼로레아[Baccalaureate]




1808년 나폴레옹시대부터 시작된 대입자격시험으로 프랑스의 대학진학을 위한 관문이며, 대학선발기능 외에 합격자에 대해 국가가 고등교육을 보장해 주는 시험이다. 중ㆍ고교 과정을 거치면서 50% 정도가 응시자격을 상실하게 되고, 20점 만점에 10점을 넘어야 합격이며, 합격률은 50%선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적으로 매년 6월 치르는 이 시험은 크게 인문(Lliterature)ㆍ사회(ESeconomics and social sciences)ㆍ자연과학(Ssciences)을 세분해 수학ㆍ물리+화학ㆍ생물학, 경제학ㆍ사회과학, 프랑스어ㆍ철학ㆍ역사+지리ㆍ외국어 등 8개 분야로 치러진다. 프랑스어ㆍ역사+지리ㆍ수학ㆍ철학ㆍ외국어는 공통 과목이고, 해당 전공 분야에 따라 추가로 과목을 선택해 시험을 치른다. 문제형태는 대부분 논술형이고, 외국어시험은 실생활에서의 구사력을 평가하기 위해 구두시험으로 치러진다.



특히 가장 비중이 높은 과목 중의 하나며 4시간 동안 3개 주제 중 1개를 선택해 논문 형태로 작성해야 하는 철학시험 논제는 프랑스 지성을 가늠하는 잣대로 인식되고 있다. 철학시험문제 자체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시험이 끝난 후 각 언론매체나 사회단체들은 유명인사와 일반 시민들을 모아놓고 각종 토론회를 열 정도로 국민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그러나 바칼로레아 자격을 취득했다고 해서 모든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특히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특수대학 격인 그랑제콜에 입학하려면 바칼로레아를 취득한 후 별도의 준비과정을 거쳐 해당 시험을 치러야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사전




* 에콜노르말쉬페리외르 [고등사범학교, Ecole normale superieure ]



줄여서 ‘ENS’라고 부른다. 우수한 학부생 및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엘리트 고등교육을 실시하는 대학원 과정의 교육기관이자 권위 있는 연구센터이다. 언론, 공공서비스, 기업 등 모든 분야에서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인문학 및 과학 분야에서 독특한 교육 방식으로 유명하다.2009년 영국의 일간지 <타임스(The Times)>가 선정 발표한세계 200대 대학에서 28위를 기록했다.



1985년 윌름 가에 있던 에콜노르말쉬페리외르(1794년 창립)와 세브르에 있던 여자 에콜노르말쉬페리외르(1881년 창립)가 합병해 탄생되었다. 설립 목적은 순수학문 및 연구 활동에 종사하려는 학생, 중등 및 고등교육 교사가 되려는 학생, 공직과 행정에 종사하려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에콜노르말쉬페리외르는 프랑스 혁명 기간 중인 1794년 프랑스 교육체계를 바꾸는 과정에서 설립된 에콜 노르말 드 랑 III(Ecole normale de l'an III )에서 출발했다. 설립 초기에는 중등 및 고등교육 기관에 종사할 교사를 양성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후 최고 연구원들의 요람으로 발전하였다. 1830에콜 노르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1845년 에콜 노르말이라는 이름의 초등 교사 양성학교가 등장하자 학교명을 현재의 에콜노르말쉬페리외르로 확정하였다. 1847년 캠퍼스 위치를 생트 제네비브 산(Montagne Sainte-Genevieve) 위 윌름 거리(rue d’Ulm)에 자리잡았다. 이 학교는 빅토르 뒤리(Victor Duruy, 1811~1894)와 장 조레스(Jean Jaures, 1859~1914)를 비롯한 관료 및 공무원들을 포함해 다수의 고위직 정부 관료를 위한 훈련의 장으로도 이용된다.



교육 과정은 수업학과와 연구학과로 나뉜다. 2011년 기준 수업학과로는 수학과, 컴퓨터공학과,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과, 지구-대기-해양과(Earth-Atmosphere-Ocean),지리학과, 철학과, 문학 및 언어학과, 예술학과, 인지연구과(Cognitive Studies), 사회과학·경제학·법학과, 고전학과, 사학과 등 14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연구학과로는 수학 및 응용학과, 컴퓨터과학과, 지구-대기-해양과, 생물학과, 물리학과, 고전연구학과, 역사학과, 지리학과, 철학과, 문학 및 언어학과, 사회과학·경제학·법학과, 예술사 및 예술 이론학과,인지연구과 등 15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35개의 연구 실험실을 중심으로 개별 지도 및 학제간연구(學際間硏究), 그리고 외국 교수들의 국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고학, 이론 수학, 암호학, 양자광학, 분석화학, 기상역학(dynamic meteorology), 신경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밖에 나노과학, 인지심리학, 전략지정학(geostrategy), 암호작성술(cryptography) 등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연구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학교의 메인 캠퍼스는 학생 및 예술가가 많이 사는 파리의 중심부 라틴 구(Latin Quarter)에 있으며, 뤽상부르 공원(Jardin du Luxembourg)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라틴 구에는 19세기 중반에 건축된 건물이 많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인문학, 사회과학, 수학, 컴퓨터 과학과가 입주해 있다. 로몽(Lhomond) 거리 근처에는 물리학, 화학, 기상학, 지리학 등 실험과학 학과가 주로 입주해 있으며 1937년에 건축된 건물이 많다. 주변에는 오르세미술관, 루브르박물관 및 대학들이 인접해 있다. 기숙사로는 메인 캠퍼스에 있는 윌름(Ulm) 기숙사, 메인 캠퍼스에서 지하철로 10분 거리에 있는 100개의 객실을 갖춘 주르당(Jourdan) 국제학생 기숙사, 200개 객실을 갖춘 몽트루즈(Montrouge) 기숙사 등 3개의 기숙사가 운영되고 있다.




12개에 달하는 대학 도서관은 윌름 캠퍼스, 주르당 캠퍼스, 몽트루즈 캠퍼스,그리고 각 학부에 나뉘어져 있다. 윌름 캠퍼스 도서관은메인 도서관또는인문학-윌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학 도서관 가운데 가장 먼저 문을 열었으며 방대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예술 및 인간과학(human science: 인류학·언어학·문학 등의 총칭) 관련 50만 권의 도서, 1,600개의 현대 정기간행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주르당 캠퍼스의 도서관은 150만 권의 도서가 보관되어 있는 인문학 도서관과 사회과학 도서관으로 나뉜다. 몽트루즈 캠퍼스 도서관은 주로 물리과학 분야의 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재학생은 전산화된 기록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졸업생도 평생대학의 모든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



이 학교는 재학생들에게 한두 학기 동안 유럽, 러시아, 중동, 일본 등의 자매학교에서 공부할 것을 권장한다. 이 대학의 국제 선발 시험에 합격한 수백 명의 외국 유학생들이 석사 또는 박사과정에서 수학하고 있다. 매년 약 60명의 세계적인 외국 국적의 교수들을 초빙하는데 2011년 현재 300명의 외국 교수들이 재직하고 있다. 석사학위 과정의 경우 런던 대학교, 베이징 대학과 함께 공동 학점인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또한 중국 상하이,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학점을 인정해주는 석사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영국, 중국, 미국 등의 고등교육기관들과는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 대학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우수 연구원들과 공동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박사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학제간연구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00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알베르 페르(Albert Fert, 1938~) 등 과학,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여러 명 배출하였다. 이외에 2006년 수상자인 벤델린 베르너(Wendelin Werner, 1968~)를 포함해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Fields Medal) 수상자를 8명 배출하였다. 이 대학 소속 전·현직 프랑스 학술원(Academie Francaise) 회원만 100여 명에 이른다. 파리 대학교를 비롯하여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퀴리 연구소(Institut Curie), 파스퇴르 연구소(Institut Pasteur), 씨앙스포(Sciences Po, 국립정치학교) 등의 고등교육기관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