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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7.

죄책감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니체전집 14)>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정현




최근, 강의 준비를 위해 니체의 책을 다시 읽었다. 니체의 입장은 타인에 대한 동정과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가 그가 그런 말을 하게 된 동기 자체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타인에 대한 동정 혹은 보다 광범위하게는 이타심이 결국 사회 자체, 다수 대중의 유지를 위한 이익의 도구이고, 바로 그런 체계 아래서 '정신적으로 뛰어난 이들'이 희생당하며, 니체의 입장에서 보면 '가치가 없는 무리들'만이 이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책감 역시 인간 통제의 도구이고, 저 고대 유대-그리스도교의 후예들인 권력자들이 인민을 보다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낸 통제의 도구,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와 남들에게 내가 실제로 고통을 주었을 경우, 그저 죄책감만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무의미할 수도 있고, 때로는 그렇게 죄책감만을 느끼는 행위 자체가 더욱 더 교묘한 자기 합리화의 도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니체의 도덕에 관한 가장 커다란 공헌은 우리가 그것을 죄책감이라 부르던 혹은 양심이라 부르던 여하튼 그 어떤 것을 느끼게 된 것이 그저 내가 받은 무비판적이고 비철학적인 전통적 관습의 추종임을 밝히고, 오늘 내가 내게 주어진 도덕적 감정들, 이론들, 주장들을 새롭게 검토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혹은 그렇게 느껴야 한다고 내가 어릴 적부터 주입된, 그 도덕 혹은 이른바 '도덕적 감정'이 참으로 도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가, 곧 참으로 인간적인 것인가를 오늘 내가 남에게 기댐이 없이 스스로 묻고 또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반대하는 것은 전통에 대한 혹은 도덕 감정에 대한 무비판적인 맹종 혹은 성실성이지, 성실성 자체가 아니다.

달리 말해, 니체가 비판하는 것은 성실성이지만, 그거은 모든 성실성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주어진 무비판적인 성실성에 대한 비판이지, 자기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충실한 정직한 성실성이 아니다.

니체의 도덕은 차라리 성실이라기보다는 자기를 속이지 않고 이 세계를 모두 받아들이는 그러한 지적 정직성, 자기 정직성이다.

니체는 그렇다면 우리에게 타인을 동정하지 말 것이며, 따라서 죄를 짓고도 곧 타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도 부끄러운 줄도 미안한 줄도 모르고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당당한 범죄자, 악인이 되라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니체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렇다면 니체의 말대로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니체와 생각이 다르다. 그의 관점주의와 도덕 비판은 십분 공감하지만, 내게는 우리가 느끼는 이 죄책감을 바라보는 니체의 태도란 주의깊게 검토된 후 받아들여져야만 할 어떤 것으로 보인다.

니체가 뭐라고 얘기했던간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왕을 죽이고 모두가 자신의 왕이 된 오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한다.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그 죄책감은 누구를 위해 어떻게 생긴 것이고, 어떻게 기능하는 것일까?

혹시 나는 그렇다면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남에게 부당한 상처와 고통을 주고도 그냥 나 몰라라 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타인에게 알게 모르게 혹은 어떠한 이유로든 결국 커다란 혹은 작은 고통과 상처를 주었다면, 나는 - 기존과 같이 그저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학대하는 그러한 방식으로가 아닌 - 새로운 건강한 방식으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으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라는 말은 여하한 이유로든 내가 타인에게 고통을 주었으며 그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라는 말이다.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하기 역시 그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니체의 물음대로,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오늘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어야 할까?

우선 나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내가 고통을 준 상대는 내가 오늘 그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랄까? 나의 어떤 행동이 그를 덜 아프게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 최종적 결정은 물로 온전히 나의 것이어야만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해답은 나 혼자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 말을 귀기울여 듣고, 경청하는 것이야말로 무익한 자학적인 죄책감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죄책감을 바라보는 일이다.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니체의 말은 - 물론, 니체를 공부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글자 그대로, 죄책감도 없이 뻔뻔하게 살고 남을 착취하라는 말일 수도 있지만 - 또 다른 한편으로 의타적이고 유아기적인 자학적 죄책감이 아닌 네가 스스로 듣고 말하고 판단하는 성숙한 해결책을 찾으라는 명령이다.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말은 죄책감 없이 남에게 고통을 주라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와는 달리 내가 한 일이 - 본의던 아니던, 알고 했던 모르고 했던 - 결코 잘한 일이 아님을, 아니 명백히 잘못된 일임을 분명히 깨닫고 알고, 반성하고 참회하고, 그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를 행하고 그에 대해 겸허히 용서를 구하며, 이제 그런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 잘못된 행동의 인정, 그에 따른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당신 행동의 진실성 여부는 - 당신 자신이 아니라 - 당신에게 고통받은 자가 느끼고 알 것이며, 그러한 진심이 당신이 고통을 준 사람에게 마음으로 전달되기 전까지 당신은 당신의 진심을 몸과 마음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

그러나 니체 이후의 진정한 문제는 이 '진실' 혹은 '진심'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다만 오직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특정한 해석 곧 관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이른바 '진심'이라는 개념은 다만 시시각각 변하는 나와 당신과 이 '생성'의 변화하는 세계를 '존재'의 이름 아래 묶어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변화하는 나의 마음과 너와 세계를 다양한 관점을 통해- 늘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성을 성실히 유지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결코 '전체'를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 '전체적으로' 곧 '균형잡힌 방식으로' 바라보는 일이다(그리고 <<중용>>의 '신독'이 바로 이러한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죄책감을 왜 느끼고 있는가? 도대체 나는 왜 어떻게 해서 오늘 나를 짓누르는 이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는가? 그리하여, 결정적으로, 나는 이 죄책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내가 죄책감을 느낀다는 사실, 내가 타인에게 준 고통으로 인하여 오늘의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밀양>>에서처럼, 나에게 고통받은 이에 대한 사죄도 없이, 내가 나를 구원해야 하니 내가 나 스스로를 먼저 용서해야만 하는가?

나는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나 자신을 물론 용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내가 내가 일으킨 고통에 대한 분명한 인정과 적절한 사과의 행위 이후에 구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다. 나를 구원하고 용서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이 세상에 나 자신이되, 그렇다고 나의 잘못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내가 스스로 나에게 내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며, 그가 결정해야 할 것을 내가 대신 결정해서도 안 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의 말을 듣는 것이며,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나를 나의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용서를 구하거나 혹은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죄책감 혹은 자기 학대는 당신이 타인에게 준 고통을 경감시키는 적절한 방법도, 건강한 방법도 아니다.

당신은 빛을 향해서도 어둠을 향해서도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2012. 7. 26.

교양속물








"나는 이런 권력, 이런 종의 인간들을 다음과 같이 명명하려 한다
- 그들은 교양의 속물들이다." 

- 「반시대적 고찰 I」,『니체전집 2.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190쪽.



***






"교양 속물(Bildungsphilister) [...] 맥줏집 복음. [...] 나는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이다."


- 「이 사람을 보라」,『니체전집 15.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 (1888~1889)』(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2, 398/401쪽)









2012. 7. 21.

알베르 카뮈 - 페스트

* 『페스트』


 
1947년 6월 10일 출간. 34세.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의하여 대신 표현해보는 것은, 어느 것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의해 표현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당한 일이다.” - 다니엘 디포

  
제1부

  
이 연대기가 주로 다루고 있는 기이한 사건들은 194*년 오랑에서 발생했다. [...] 언뜻 보기에 오랑은 사실 하나의 ‘평범한 도시’로서 알제리 해안에 면한 프랑스의 한 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155).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 [...]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지쳐버렸으면서도 동류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갖고 있으며, 또 자기 딴에는 불의와 타협을 거부하기로 결심한 터인 한 인간의 발언이라고 말했다(164-165)

  
파리에 있는 어떤 큰 신문사에 근무하는 기자로서 아랍인들의 생활조건에 대하여 취재하는 중인 레몽 랑베르, 호인이고 항상 웃는 낯이며 모든 정상적인 쾌락이면 무엇이고 다 좋아하는 듯했지만 그런 것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으며 우리 도시에 있는 수많은 스페인 무용가와 악사들의 집에서 종종 만나곤 했던 서른다섯 살 가량 되어보이는 장 타루, 박식하고 열렬한 제수이트 파 신부인 파늘루 신부, 오랑시 의사회 회장 리샤르, 방문에 ‘들어오시오. 나는 목매달았소’라고 적은 후 자살을 시도한 코타르는 거리에서나 거래처에서나 남의 동정을 얻으려고 줄곧 애를 쓰는 인물, 시청의 서기이자 글을 쓰는 조제프 그랑 ...
 


아들[리외]도 동감이었다. 사실 어머니만 있으면 무슨 일이건 다 수월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167).
 


사실 재앙이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로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왔다. [...] 그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194-199)
 


그랑, 드문 경우이지만, 항상 자기의 착한 마음씨에서 오는 용기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 선의와 애착의 증인, “마음먹은 것을 시원하게 표현할 수 있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카스텔, “중요한 것은 그게 온당한 논리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가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어요.”(205-208)
 


담배가게 여주인이 알제에서 한창 떠들썩하던 당시의 어떤 체포사건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어떤 상사의 젊은 사무원이 바닷가에서 아랍인 한 사람을 죽인 사건이었다. “그런 상놈들을 모조리 감옥에 처넣는다면 정직한 사람들이 좀 숨쉬고 살 수 있을 거예요.”(215)
 



하루 종일, 의사는 페스트 생각을 할 때마다 매번 일어나는 가벼운 현기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218).
 


방 안에는 어둠이 짙어져왔다. 이 변두리 거리가 활기를 띠고, 밖에서 둔탁하면서도 안도감이 섞인 탄성이 들리면서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리외는 발코니로 나섰다. 코타르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 주변의 모든 동네들로부터, 우리 시에 저녁이 올 때마다 볼 수 있듯이, 가벼운 미풍이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와 불고기 냄새와 떠들썩한 젊은이들에게 점령된 거리에 점점 더 부풀어가는 자유의 유쾌하고도 향기로운 소음을 실어 오고 있었다. 어둠, 보이지 않는 선박들의 요란한 아우성, 바다와 흐르는 군중들로부터 올라오고 있는 웅성거리는 소리, 리외가 익히 잘 알고 있으며 전에는 퍽 좋아했던 이 무렵의 시간이 오늘은 그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일들 때문에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219).
 


총독부, 식민지 수도에 보낼 보고서, 총독부에서 보낸 전보공문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224-225).
 


제2부

  
그때부터 페스트는 우리들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229). “그러나 어쨌든.” 랑베르는 말했다. “나는 이 도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249) 랑베르: “페스트에 안 걸린 사람들도 나가지 못한다는 겁니까?” 리외: “그것은 충분한 이유가 못 됩니다. 참 어리석은 이야기지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감수해야 합니다.” 랑베르: “하지만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닌데요!” 리외: “지금부터는 유감입니다만, 선생은 이 고장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 랑베르: “선생님은 이해하지 못하세요. 선생님 말씀은 이성에서 나오는 말씀이지요. 선생님은 추상적이십니다.” 의사는 공화국의 여신상 위로 눈을 치켜떴다. 그러고는 자기의 말이 이성에서 나오는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기는 자명한 이치에서 나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양자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251-252).
 


그러나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추상으로 보이는 것이 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진리로 보이는 것이었다(257). 파늘루 신부의 강론, “여러 형제들, 여러분은 불행을 겪고 계십니다. 여러 형제분들, 여러분은 그 불행을 겪어 마땅합니다.”(259-260) 파늘루 신부로서는 만인에게 베풀어진 신의 구원과 기독교적 희망을 오늘만큼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265).
 


그랑, “작품이 완전무결해야 합니다.”(269)
 


리외, “당신도 알다시피, 기독교 신자들은 현실적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가끔 그런 식으로 말을 하더군요. 보기보다는 좋은 사람들이죠. [...] 그러나 그 병으로 해서 겪는 비참과 고통을 볼 때,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타루: “선생님은 신을 믿으시나요?” 리외: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는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뚜렷이 보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295)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주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넋은 맹목적인 것이며, 가능한 한의 초명이 없고서는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302-303).

  
그랑,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한다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했으면 좋으련만!”(305)

  
그랑, “5월의 어느 아름다운 아침나절, 한 날씬한 여인이 굉장한 밤색 털의 암말을 타고 꽃으로 가득 찬 불로뉴 숲의 오솔길을 누비고 있었다.”(307)
 


랑베르: “이것 보십시오, 타루. 당신은 사랑을 위해서 죽을 수 있으세요?” 타루: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마 그럴 수 없을 것 같군요. 지금은 ...” 랑베르: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당신은 하나의 관념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눈에 빤히 보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선 신물이 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살인적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337-338)
 


제3부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역사적 사건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 밖에는 없었다(343).
 


검둥이들이 끌고 가는 시체 운반수레(351).
 


제4부
 


랑베르, “나는 떠나지 않겠어요.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있겠어요.” 타루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운전을 하고 있었다. 리외는 피로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 “그럼 부인은요?”하고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 랑베르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는데 자기 생각에 변함은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떠난다면 부끄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남겨두고 온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거북해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외는 몸을 일으켜 세워서 앉으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행복을 택하는 것이 부끄러울 게 무어냐고 말했다. / “그렇습니다.” 랑베르가 말했다. “그러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 볼대로 다 보고 나니, 나는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389-390)
 


리외, “허, 이 애는, 적어도 아무 죄도 없었습니다. 당신도 그것을 알고 계실 거예요!” 파늘루 신부, “그렇지만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 리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힘과 정열을 기울여서 파늘루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 “아닙니다, 신부님.”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파늘루의 얼굴에 당황한 그림자가 스쳤다. / “아, 선생님.” 하고 그는 서글프게 말했다. “이제 방금 나는 은총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 그러나 리외는 다시 벤치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그는 다시 엄습해오는 피로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 “나는 그런 걸 못 가졌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런 문제에 대해 당신과 토론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신성모독이나 기도를 초월해서, 우리를 한데 묶어주고 있는 그 무엇을 위해서 함께 일하고 있어요.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 파늘루가 리외 곁으로 와서 앉았다. 그는 감동한 모양이었다. / “그럼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럼요, 당신도 역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고 계시거든요.” / 리외는 웃는 낯을 하려고 노력했다. / “인간의 구원이란 나에게는 너무 거창한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원대한 포부는 갖지 않았습니다.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인간의 건강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건강이지요.”(400-401)
 


“사제가 의사의 진찰을 받을 수 있는가?”(403)

  
타루, “젊었을 때, 나는 결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말하자면, 전혀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았던 거나 마찬가지죠. 나는 고민하는 성질도 아니었고, 사회의 진출도 적당하게 이루어졌어요. 머리도 괜찮았고, 여자들도 곧잘 따랐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죠. 혹 가다 불안감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내 잊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난 반성하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 /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당신처럼 가난하지는 않았었죠. 우리 아버지는 차장검사로 계셨는데 그만하면 좋은 자리지요.”(432)
 


타루 -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형선고라는 기반 위에 서있으니, 그것과 투쟁함으로써 살인행위와 싸우겠다고 생각했어요. [...] 물론 우리도 역시 때에 따라서는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몇몇 사람의 죽음은, 더 이상 아무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 세계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진실이었으나, 어쨌든 나로서는 그런 종류의 진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주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요구했고, 사형당한] 올빼미 씨 생각을 했고, 언제나 계속할 것 같았어요. 내가 사형집행을 구경한 그날(그것은 헝가리에서의 일이었지요)이 될 때까지는 말입니다. 그날, 어린애였던 나를 휘어잡았었던 그 현기증이 어른이 된 나의 눈을 캄캄하게 만들었어요. / 혹 사람을 총살하는 것을 보신 일이 있으신가요?(437)
 


그때, 나는 그야말로 내가 나의 온 힘과 정신을 기울여 페스트와 싸우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끊임없이 페스트를 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가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인간의 죽음에 동의한다는 것, 숙명적으로 그러한 죽음을 가져오게 했던 그런 행위나 원칙들을 선(善)이라고 인정함으로써 그러한 죽음을 야기시키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그들은 나에게, 붉은 제복이 옳음을 인정하는 태도는 곧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전적으로 일임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일단 한번 양보하게 되면 끝도 없이 양보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역사는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많이 죽이는 자가 승리하는 모양이니 말이에요. 그들은 모두가 살인에 미친 듯이 열중해 있습니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어요. 그래도 최소한 나로서는 그 진저리가 나는 도살 행위에 대해 단 하나라도. 오직 하나라도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절대로 거부하겠다고요. 그렇습니다. 나는 더 뚜렷하게 사리를 깨닫게 될 때까지 고집스럽게 맹목적인 태도를 지켜나갈 것입니다(438-439).
 


그 이후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부끄러워했습니다. 아무리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더라도 나 역시 살인자 측에 끼어들었었다는 것이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들조차도, 오늘날의 모든 논리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죽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몸 한 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으며, 우리들은 모두가 페스트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오늘날도 그 평화를 되찾아서,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그 누구에게도 치명적인 원수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나는 다만 다시는 페스트에 전염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를 되찾게 해준다는 것을, 평화가 아니라면 적어도 떳떳한 죽음을 바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며, 비록 인간을 구원해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에게 되도록 해를 덜 끼치며, 때로는 약간의 선까지 행하도록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을 죽게 만들거나 또는 죽게 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모든 걸 거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이번 유행병에서 배운 것이라고 하나도 없고, 있다면 당신들 편에 서서 그 병과 싸워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그렇습니다, 리외.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 만사를 다 알고 있지요),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피고 있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리외,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하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시켜줄 것 같지 않은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 죽이는 것을 단념한 순간부터 나는 결정적인 추방을 선고받은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사람들을 표면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성적인 살인자가 될 자격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우월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로 했고 겸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나는 지상에 재앙과 희생자들이 있으니 가능한 재앙과 희생자들이 있으니 가능한 한 재앙의 편을 들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렵니다. 아마 좀 단순하다고 보실지도 모릅니다. 단순한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여러 가지 이론들을 들어서 머리가 돌아버릴 뻔했고 그 이론들 때문에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살인 행위에 동의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도를 걸어가기 위하여 정확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재앙과 희생자가 있다고만 말할 뿐, 그 이상은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내 자신이 재앙 그 자체가 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에 동조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차라리 죄 없는 살인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보시다시피 이건 그리 큰 야심이 아닙니다.
 


물론 제3의 카테고리, 즉 진정한 의사로서의 카테고리가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이런 것은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더구나 그것은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경우에는 희생자들 편에 서서 그 피해를 되도록 줄이기로 마음먹는 것입니다. 희생자들 가운데서 나는 적어도 어떻게 하면 제3의 카테고리, 즉 마음의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탐구할 수는 있습니다(432-444).
 


의사는 몸을 약간 일으키면서 타루에게,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서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본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 “물론 그건 공감이죠.” / [...] / “결국.” 하고 솔직한 어조로 타루가 말했다. “내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신은 안 믿으시면서?” / “바로 그렇기 때문이죠. 오늘날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구체적 문제는 사람이 신이 없이 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 [...] / 의사가 대답했다.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연대의식을 느낍니다. 아마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자 같은 것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 “그럼요,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다만 내가 야심이 덜할 뿐이죠.”(442-443)
 


“우리들이 우정을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아세요?” 하고 그가 물었다. / “좋으실 대로 합시다.” 리외가 말했다. / “해수욕을 하는 거죠. 미래의 성인에게 그것은 어울리는 쾌락입니다.” / 리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우리가 가진 통행증이면 방파제까지 갈 수 있어요. 정말이지 페스트 속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건 너무 바보 같아요. 물론 인간은 희생자들을 위해서 싸워야 하죠. 그러나 사실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게 되고 만다면 투쟁은 해서 뭣하겠어요?”(442-444)
 
 


그리고 리외 자신도 그 늙은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는 이 세계는 죽은 세계와 다를 바 없으며, 사람에게는 반드시 감옥이니 일이니 용기니 하는 것들에 지친 나머지 한 인간의 얼굴과 애정 어린 황홀한 가슴을 요구하게 되는 때가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450-451).
 


리외는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아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슬픔은 리외 자신의 슬픔이었고, 그때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같이 나누고 있는 고통 앞에서 문득 치솟는 견딜 수 없는 분노였다(451).
 


‘나의 사랑스런 잔, 오늘은 크리스마스요 ......’ ‘5월의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어떤 날씬한 여인이 눈부신 밤색 암말에 몸을 싣고, 꽃이 만발한 사이를 뚫고 숲의 오솔길을 누비고 있었다 ......’(453)
 


제5부
 


의사는 결국 타루가 평화를 다시 찾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다시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 또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라든지 친구의 시체를 묻어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다시는 휴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483-484).
 


“그 사람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죄악은, 어린아이들 그리고 인간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옳다고 긍정했다는 점입니다. 그 외의 것은 나도 이해가 가요. 그러니 그 외의 것은 용서하지 않을 수 없어요.”(499)
 


의사 리외는,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기록해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 그러나 그래도 그는 이 연대기가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기록은 다만 공포와 그 공포가 가지고 있는 악착같은 무기에 대항하여 수행해나가야 했던 것, 그리고 성자가 될 수도 없고 재앙을 용납할 수도 없기에 그 대신 의사가 되겠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행해나가야 할 것들에 대한 증언일 뿐이다. /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외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군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 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506-507).





알베르 카뮈 - 시지프 신화

1권 : 젊은 시절의 글. 안과 겉. 행복한 죽음. 결혼. 칼리굴라. (1931~1939)
2권 : 작가수첩1. 시지프 신화. 이방인. (1939~1942)
3권 : 오해.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페스트. (1944~1947)
4권 : 여행일기.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시사평론. (1947~ 1950)
5권 : 작가수첩2. 반항하는 인간. (1950~1951)
6권 : 여름. 전락. 단두대에 대한 성찰. 적지와 왕국. (1951~1957)
7권 : 작가수첩3. 스웨덴 연설. 문학비평 (1957~1959)
 
* 『시지프 신화』, 1942


 
“오, 나의 영혼아,
불멸의 삶을 애써 바라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 핀다로스, <아폴론 축제 경기의 축가 3>
 


I. 부조리의 추론
 


1. 부조리와 자살
 


참으로 진지한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 밖에,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그보다 먼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니체가 주장했듯이, 어떤 철학자가 존중받는 존재가 되려면 마땅히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여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 다음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행동이 뒤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마음속으로 느낄 때는 자명(自明)한 것이지만 막상 이성의 차원에서 분명히 밝히려면 깊이 파고들어가 연구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질문이 다른 질문보다 더 절박하다고 할 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한 사람이 마땅히 뒤이어 실천으로 옮겨 보여주어야 할 행동이야말로 바로 그 판단 기준이라고 말하고 싶다. [...] 그러므로 내가 판단하건대, 삶의 의미야말로 질문들 중에서도 가장 절박한 질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267-268).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장치 사이의 절연(絶緣),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 스스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을 터이므로,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런 감정과 허무에의 갈망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쯤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시론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부조리와 자살 사이의 관계를 밝히고 자살이 어느 만큼이나 부조리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려는데 있다(270-271).
 


2. 부조리의 벽
 



어떤 책의 첫 페이지 속에는 이미 그 마지막 페이지의 암시가 담겨 있는 법이다. 이와 같이 처음과 끝의 관련은 불가피하다(278).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 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ㆍ화ㆍ수ㆍ목ㆍ금ㆍ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 여기서 나는 이 권태가 이로운 것이라고 결론지어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의식에 의하여 시작되며, 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면 그 무엇도 가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건대, 단순한 ‘관심’이 모든 것의 기원인 것이다. / 이와 같은 식으로,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 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 그는 내일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존재를 다 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할 내일을. 이러한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 / [...] 세계의 두꺼움과 낯섦,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279-281).
 


인간들 역시 비인간적인 것을 분비한다. 명철성(lucidité)이 살아나는 어떤 순간에는, 인간들이 하는 행동의 기계적인 면과 의미 없는 무언극으로 인하여 그들 주위의 모든 것이 다 어리석게 보인다(281). / [...] / 영원히 나는 나 자신에게 이방인일 것이다(286). / [...] 그런데 당신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천체계 이야기를 하면서 그 속에서 전자들이 어떤 핵 주위를 회전한다고 설명한다. 결국 당신은 이 세계를 어떤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는 당신이 시(詩)에 이르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287). / [...] / 앞에서 나는 이 세계가 부조리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말이었다. 그 자체로 볼 때 이 세계는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비합리와, 명확함에 이르려는 필사적인 열망의 맞대면인 것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명확함을 얻고자 하는 호소가 메아리치고 있다. 부조리는 인간과 세계에 똑 같이 관련되어 있다. 지금으로서는 부조리만이 그들이 이어주는 유일한 매듭이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 셰스토프, 현상학자들에서 셸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사상들은 그 야심이 어떤 것이든, 어떤 것이었든 간에 모두가 모순과 이율배반과 고뇌, 혹은 무력이 지배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세계로부터 출발했다(291).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러한 비합리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지닌 유일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이 세계는 엄청난 비합리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 [...] / 노력의 단계에서 인간은 비합리와 마주서게 된다. 그는 자신 속에 행복과 합리에의 욕구를 느낀다. 부조리는 바로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바로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꼭 매달려야 한다. 한 일생의 모든 귀결이 송두리째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잇기 때문이다. 비합리, 인간의 열망 , 그리고 양자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드라마지만 말이다(291-296).
 


3. 철학적 자살

  
부조리는 인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이와 같은 은유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말이지만), 세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양자가 함께 있는 가운데 있을 뿐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부조리야말로 양자를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 여러 가지 특징 중 으뜸가는 특징은 바로 [인간-부조리-세계의] 삼위일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세 가지 항목 중 어느 한 항목이라도 파괴되면 그것은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인간의 정신 밖으로 벗어나면 부조리는 있을 수 없다. [...]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여건(與件)은 부조리이다. 문제는 어떻게 그 부조리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과연 부조리는 자살로 귀착되어야만 하는가를 알아보는 데 있다. [...] 이 부조리의 논리를 극한까지 밀고 나갈 경우 나는 투쟁이 희망의 전적인 부재(이것을 절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계속적인 거부(이것을 포기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의식적인 불만족(이것을 젊은 시절의 불안과 동일시 할 수는 없을 것이다)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299-301).
 


극히 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자명한 사살이 한 가지 있다. 즉 인간은 항상 자신의 진리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일단 그 진리들을 인정하고 나면 그는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된다(301). 그런데 여러 가지 실존철학들에만 국한하여 고찰해볼 때 나는 그 철학 모두가 한결같이 도피(逃避, évasion)를 권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 강요된 희망의 본질은 종교적인 것이다(302). 그런데 부조리가 희망의 반대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셰스토프의 경우 실존 사상은 부조리를 전제로 하기는 하지만 그 부조리를 증명해 보이는 목적이 오로지 그것을 없애버리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셰스토프(Lev lsakovich Shestov, 1866~1938)가 볼 때, 이성은 헛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성 저 너머에 무엇인가가 있다 부조리의 정신이 볼 때, 이성은 헛된 것이고 이성 저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305-306). 중요한 것은 고난에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더불어 사는 것이라고 갈리아니 신부는 데피네 부인에게 말한 바 있다(309). ‘부조리란 신 없이 존재하고 있는 죄다’. [...] 문제는 부조리의 상태, 그 안에서 사는 일이다(310-311). 철학적 자살이란 철학의 자살이다.
 


실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비합리(irrationalité)의 테마는 정신이 흐려진 이성, 그리하여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해방되는 이성 바로 그것이다. 부조리는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이다. [...] 나의 추론은 추론을 유발시킨 자명함 자체에 충실하고자 원한다. 그 자명함이란 곧 부조리이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주는 세계 사이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양자를 한데 비끄러매놓는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열과 더불어 살고 생각하는 것이며,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다. 자명한 것을 은폐하거나 방정식의 한쪽을 주인함으로써 부조리 자체를 제거해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로 살아갈 수 있는가, 아니면 논리는 부조리로 말미암아 주을 수밖에 없다고 명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철학적 자살이 아니라 그냥 자살 그 자체다. 나는 다만 자살에서 감정적인 내용을 걸러내고 그것의 논리와 정직함을 알고 싶을 뿐이다. [...] 현기증 나는 순간의 모서리 위에서 몸을 지탱할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성실성이다. 그 외의 것은 속임수일 뿐이다(319-321).
 


4. 부조리한 자유
 



어떤 경험, 어떤 운명을 산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려놓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에우리디케의 경우와는 반대로, 부조리는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시하던 눈길을 딴 데로 돌려버릴 때 죽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고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항은 갈망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반항은 짓눌러오는 운명의 확인이다. 그러나 그런 확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한 채의 확인인 것이다. / 바로 여기서 우리는 부조리의 경험이 자살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 자살은 그것 나름의 방식으로 부조리를 해소해버린다. [...] 부조리는 죽음의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에서 벗어난다. [...] 자살자의 반대, 이것은 다름 아닌 사형수이다. [...] 의식과 방항이라는 거부는 포기와는 정반대이다. 인간 가슴속에 깃들인, 환원될 수 없고 정열에 찬 모든 것이 다 함께 그의 삶에 맞서서 거부를 고무한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다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최극단의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매일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서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325-328). 당장은 미래에 대한 무관심과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소진하겠다는 열정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 인간은 과연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가? 이 문제가 바로 나의 관심의 전부다(333).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335) 끊임없이 의식의 날을 세워가지고 있는 영혼 앞에 놓이는 현재, 그리고 줄지어서 지나가는 수많은 현재들, 그것이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이상이다(336).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만을 통해서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337).
 


II. 부조리한 인간
 


그러나 부조리의 인간은 바로 신의 밖에서 살고 있다. [부조리한 인간의] 이 무죄는 무서운 것이다.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이반 카라마조프는 외친다. [...] 부조리는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결박한다. 부조리가 무슨 행동이든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아무 것도 금지되는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부조리는 다만 이러한 행동들의 결과에 한결같은 등가치를 부여할 따름이다. 부조리는 범죄를 저지르라고 권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다만 부조리는 후회에 그것 본래의 무용함을 회복시켜 놓는다(342-343).
 


1. 돈 후안주의
 


어째서 드물게 사랑해야만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인가? [...] 돈 후안은 알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며 결코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예술가들, 그리하여 자신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는 이 덧없는 한시적 공간 속에서도 대가답게 놀라운 넉넉함을 보이는 예술가들을 연상케 한다. 이런 것이 바로 천재, 자신의 한계를 아는 지성인 것이다. [...] 돈 후안은 하늘 자체와 맞서서 내기를 함으로써 이를 입증한다. [...] 파우스트는 지상의 행복을 요구했다. 그 불쌍한 사람은 그냥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기쁘게 해줄 줄 모른다는 것은 이미 그 영혼을 팔아버린 것이나 다름 없다. 그와 반대로 돈 후안은 흡족할 정도의 쾌락을 맛보라고 영혼에게 명한다. 그가 한 여인을 떠나는 것은 꼭 그녀를 더 이상 원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항상 욕망의 대상이니까. 그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다른 여인을 원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 두 가지 이유가 결코 똑 같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348).
 

2. 연극


3. 정복
 


III. 부조리한 창조
 


1. 철학과 소설


2. 키릴로프


3. 내일 없는 창조
 


IV. 시지프 신화
 



호메로스의 말에 의하면 시지프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신중한 자였다. 그러나 또 다른 설화에 의하면 그는 강도가 직업이었다고 전해진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그가 지옥에서 무용한 노동을 하도록 벌 받게 된 원인에 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첫째로, 그는 신들을 대함에 있어서 경솔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신들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이다. 아조프의 딸 에기나는 주피터에게 납치되었다. 딸의 실종에 놀란 그의 아버지는 시지프에게 사정했다. 이 납치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던 그는 코린트 성에 물을 대어 준다면 아조프에게 비밀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하늘의 노여움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물의 혜택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받았다. 호메로스는 또한 시지프가 사신(死神)을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플루톤은 텅 비고 조용하기 만한 그의 왕국의 정경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쟁의 신을 급파하여 사신을 승리자의 손에서 해방시켰다. 또 전하는 이야기로는 시지프는 죽을 때가 가까워 오자 경솔하게도 아내의 사랑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 명하기를, 자신의 시체를 묻지 말고 광장 한복판에 내다 버리라고 했다. 시지프는 지옥에 떨어졌다. 이렇게 되자 인간적 사랑을 저버린 채 시킨 대로 복종한 아내에게 분격한 나머지 시지프는 아내에게 벌하려고 플루톤에게 지상으로 되돌아가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이 세상을 다시 보고 물과 태양, 따뜻한 돌들과 바다의 맛을 보자 그는 지옥의 어둠 속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수차례의 걸친 소환, 분노,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여러 해 동안 그는 둥글게 굽은 만과 눈부신 바다 그리고 미소 짓는 대지를 눈앞에 보며 살았다. 이렇게 되자 신들의 판결이 불가피했다. 메르쿠리우스(주피터의 아들이고 제신의 사자)가 와서 이 뻔뻔스러운 자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그를 쾌락에서 끌어낸 다음 굴려 올릴 바위가 준비된 지옥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409-410). 



 
부록 -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
 
 

문제는 어떻게 그 부조리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과연 부조리는 자살로 귀결되어야만 하는가를 알아보는데 있다. 나의 탐구의 최초의 조건 , 그리고 사실상 유일의 조건은 나를 밟아 뭉갤 듯이 짓누르고 있는 것 자체를 없애버리지 않고 보존하는 일, 따라서 그것 가운데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회피하지 말고 존중하는 일이다(53).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반항은 어떤 불가능한 투명에의 요구다. 반항은 한순간 한 순간마다 세계를 재고할 대상으로 문제 삼는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항은 갈망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반항은 짓눌러오는 운명의 확인이다. 그러나 그런 확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한 채의 확인인 것이다... 정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이 규율, 불속에서 통째로 단련해낸 이의지, 그리고 정면대결 에는 무엇인가 강력하고 비범한 것이 있다(83-85). 





알베르 카뮈 - 결혼

* 『결혼』, 1938.


- 「티파사에서의 결혼」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낄 것 없이 사랑할 권리. 이 세상에는 사랑이란 단 한 가지뿐이다. 여자의 몸을 껴안다는 것,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오는 신기한 기쁨의 빛을 자신의 몸에 껴안는 것이다. 잠시 후 내 몸속에 그 향기가 스며들게 하기 위하여 내가 압생트 위에 몸을 던지게 되면 나는 모든 선입견을 물리치고 하나의 진실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리라. 그 진실은 태양의 진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나의 주음의 진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지금 도박하고 있는 것은 분명 나 스스로의 삶이다. 뜨거운 돌의 맛이 나는 삶, 바다의 숨결과, 이제 막 노래하기 시작하는 매매 소리로 가득한 삶. 미풍은 서늘하고 하늘은 푸르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이 사람을 사랑한다. 이 삶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보고 싶다. 이 사람은 나의 인간 조건에 대하여 긍지를 갖게 해준다. “뭐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건 없어.”라고 사람들은 흔히 말하지만, 분명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 있다. 이 태양, 이 바다, 젊음이 용솟음치는 이 가슴, 소금 맛이 나는 나의 몸, 그리고 부드러움과 영광이 노란빛과 푸른 빛 속에서 서로 만나는 장대한 무대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것을 정복하기 위하여 나의 힘과 능력을 모두 바쳐야 한다. 여기서는 그 무엇도 내 본연의 모습을 그르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그 어느 부분도 버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는다. 그네들의 모든 처세술 따위에 못지않은 저 어려운 삶의 지혜를 참을성 있게 깨우쳐가면 되는 것이다. / 나는 두 눈을 활짝 열고 본다. 바다 위에는 정오의 엄청난 침묵. 아름다운 존재들은 저마다 제 아름다움에 대한 타고난 긍지를 지니고 있다. 세계는 오늘 온 사방으로 저의 긍지를 스며나게 한다. 이런 세계 안에서 무엇 때문에 내가 삶의 기쁨을 부정하겠는가? 그렇다고 사람의 기쁨 속에만 온통 빠져 있을 것도 아닌 바에는, 행복해진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바보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향락을 두려워하는 자를 나는 바보라고 부른다. .오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귀가 아프도록 얘기 들은 바 있다. “알고 있겠지요. 그건 사탕의 죄악이랍니다. 조심해야 돼요. 그러다가는 탈선을 하게 되고 정력을 낭비하게 된답니다.”라고 사람들은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 나는 오직 내 몸 전체로 살고 내 마음 전체로 증언하면 된다. 티파사를 살고 그것을 증언할 일이다. 예술 작품은 그 뒤에 올 것이다. 거기에 바로 자유가 있는 것이다(500-501).



- 「제밀라의 바람」



포기와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는 거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 내가 이 세상의 모든 ‘훗날에’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나의 눈앞에 있는 현재의 풍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 다음에는 또 다른 삶이 온다고 믿는 것이 내겐 즐겁지 않다. 내게 죽음이란 닫혀버린 문과도 같은 것이다. 죽음이란 그저 내딛어야 할 한 발짝 발걸음이 아니라 끔찍하고 추악한 모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 젊은 사람은 세계를 정면에다 놓고 바라본다. [...] 나는 한 일생의 종말에 가서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인간이라면 그 같은 정대면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서 자시느이 운명을 정면 대좌한 고대인들의 시선 속에서 빛나고 있는 저 무구(無垢)와 진실을 다시 찾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었다. [...] 그 때 나는 문명의 참다운 단 하나의 진보, 한 인간이 이따금씩 마음을 두게 되는 그 진보는 바로 스스로 뚜렷이 의식하는 죽음을 창조하는 것임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508-509).


- 「알제의 여름 - 자크 외르공에게」


“통만드는 공장의 노동자이며 평형의 청년부 챔피언인 내 친구 뱅상은 이 점에 대해 더욱 분명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여자 생각이 나면 같이 잘 여자를 물색하며,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결혼을(그런 사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좀 낫군!” - 이것은 우리가 흡족함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변호를 씩씩하게 요약하는 표현이다.”(516)


인생은 건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연소시켜야 할 대상이다(521).



이 하늘과 그것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있는 이 얼굴들 가운데에 어떤 신화나 문학이나 윤리, 혹은 어떤 종교가 발붙일 곳이라곤 없다. 있는 것은 오직 돌들과 육체와 별들과 손으로 만져보고 느낄 수 있는 이 진실들뿐. / [...] 통일은 여기서는 태양과 바다라는 항으로 표현된다. 나는 세상에 초인적인 행복이란 없다는 것을, 하루 해의 곡선을 초월한 저 너머의 영원이란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 덧없으나 근본적인 부(富), 이 상대적인 진실들만이 나를 감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 삶을 고양시키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나 동시에 삶의 부조리도 증가시키기 마련이다. [...] / [...] 내가 한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죄라는 말이다. [...]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희망은 체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525-527).


- 「사막 - 장 그르니에에게」



가장 강한 혐오감을 자아내는 유물론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죽어버린 생각을 살아있는 현실이라고 믿도록 만들고자 하며 우리들 속에 내재하는 영원히 죽어 없어지게 마련인 것에 대하여 우리가 기울이는 집요하고도 맑은 의식의 관심을 돌려 불모의 신화 쪽으로 쏠리게 하고자 하는 유물론이다. [...] 그러나 아니다. 나의 반항이 옳다. [...]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아니라고 말했다. [...] 그러나 오늘까지도 나는 무용(無用)함으로 인해서 내 반항의 그 무엇이 의미 없어진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사람이 무용하기 때문에 반항은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 하나의 진실, [...]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도원에 핀 철늦은 작은 장미꽃송이들로부터 피렌체의 그 아침나절에 만났던 엷은 옷 속에 젖가슴이 자유롭고 입술이 촉촉한 여인들에 이르는 하나의 진실 말이다. [...] 그 꽃들 속에서나 그 여인들 속에서나 다 같이 어떤 너그러운 풍만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한 쪽에 욕망을 가지는 것이 다른 한쪽에 탐욕을 느끼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쪽에나 마음만 깨끗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한 인간이 자기의 마음이 깨끗하다고 느끼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에는 적어도 자기를 그토록 기묘하게 순화시켜준 그 힘을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의 의무다. 비록 그 진실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떤 독신(瀆神) 행위로 보일지라도. [...] 돌기둥과 꽃들 사이에 갇혀 사는 그 [피렌체] 수도사들의 삶과 알제의 파도바니 해수욕장에서 1년 동안 줄곧 햇볕을 쬐며 지내는 젊은이들의 삶 속에서 나는 어떤 공통된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헐벗은 채 사는 것은 보다 큰 삶을(또 다른 내세의 삶이 아니라) 위한 것이다. 전라 상태라는 것은 언제나 어떤 육체적 자유의 의미를, 손과 꽃들 사이의 일치를, 인간성으로부터 해방된 인간과 대지의 저 연인 같은 공감을 담고 있다. 아! 그 공감이 아직 나의 종교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는 그쪽으로 기꺼이 개종하리라! 아니다. 그것이 독신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 [...] 이 돌과 하늘과 물의 복음서에는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부활하지 못한다고 씌어있다. / [...] 그러나 행복이란 한 존재와 그가 영위하는 삶 사이의 단순한 일치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오래오래 지속되고자 하는 욕망과 반드시 죽어 없어지게 마련인 자신의 운명이라는 이중의 의식 이외에 인간을 그의 삶에 이어주는 더 온당한 통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537-541)


이미 수없이 많은 눈들이 이 풍경을 응시했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데 내게는 그 풍경이 마치 하늘의 첫 번째 미소와도 같이 여겨졌다. 그것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나를 나의 밖으로 끄집어내놓는 것이었다. 나의 사랑과 이 돌의 아름다운 절규가 없다면 모든 것이 다 용하다는 것을 그 풍경은 내게 확신시켜준다. 세계는 아름답다. 이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그 풍경이 내게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위대한 진실은 바로 정신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마음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햇살에 따뜻해진 돌, 혹은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서 흠씬 키가 크듯 위로 솟구치는 시프레나무, 그것이 바로 ‘이치에 맞는다’[=條理]라는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를 금그어주는 경계선이라는 사실이다. 유일한 세계란 다름 아닌 인간이 없는 자연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나를 무화(無化)한다. [...] / 더 이상 나아가지 말고 걸음을 멈추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 균형의 위이다. 정신성이 도덕성을 거부하고, 행복이 희망의 부재에서 태어나며, 정신이 육체에서 근거를 얻는 이 절묘한 순간, 진실은 어느 것이나 그 속에 쓴맛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부정은 어느 것이나 ‘긍정’의 꽃필 날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관조로부터 태어나는 저 희망 없는 사랑의 노래 역시 가장 효과적인 행동 규범을 형상화해줄 수 있다. [...] / 여기서도[이탈리아] 역시 진리가 썩어서 없어질 수밖에 없다니 이보다 더 열광적인 것이 있을까? 비록 내가 진리를 원한다고 한들 결국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진리를 무엇에다 쓸 것인가? 그런 진리는 나의 분수에 맞지 않는다. 그런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가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리라. [...] / 보볼리 공원에는 내 손이 닿을 만한 곳에 금빛의 커다란 감이 여러 개 달려 늘어져 있었는데 껍질이 터진 살에서는 진한 단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가벼운 산 언덕으로부터 단물이 잔뜩 괸 저 과일에까지, 나를 세계와 하나가 되게 해주는 이 은밀한 우정으로부터 내 손 위로 늘어진 저 오렌지빛 과육을 향하여 나를 떠미는 배고픔에까지, 나는 어떤 사람들을 금욕에서 쾌락으로, 헐벗음에서 관능의 풍요로 인도해주는 그 흔들림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인간을 세계와 맺어주는 저 유대와 저 이중의 반영을 찬탄하였고, 지금도 찬탄하고 있다. 그 이중의 반영 속에서는 나의 세계가 인간의 행복을 완성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는 정확한 한계에 이를 때까지, 내 마음이 개입하여 그 행복을 받아 써볼 수 있는 것이다. 피렌체여! 내 반항의 한 가운데에는 어떤 동의가 잠자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 유럽의 몇 안 되는 고장들 중 하나여. 눈물과 태양이 한데 섞인 이 고장 하늘 속에서 나는 이 땅의 뜻을 받아들이고 축제의 어두운 불꽃 속에 훨훨 타오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나는 실감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무슨 무분별을? 사랑과 반항의 일치를 어떻게 축성하면 좋단 말인가? 대지여! 정신들이 황량하게 비워놓고 떠나버린 이 거대한 사원 속에서 나의 모든 우상들의 발은 진흙으로 되어 있다(543-546).



* 『칼리굴라』,


“칼리굴라: 너는 논리적이 되려고 결심했지, 어리석은 놈. 문제는 다만 그게 어느 한계까지 갈 수 있느냐 이거야. (빈정거리며) 달을 따다 주기만 한다면, 모든 게 달라지겠지, 안 그래?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단번에 모든 양상이 달라질 텐데. 칼리굴라는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 누가 알아? (주위를 돌아보며) 내 곁에는 사람들이 차츰 없어져가고 있어, 이상한 일이야. (거울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죽은 사람들이, 그래서 텅 비게 되는 거야. 누가 달을 갖다 준다 할지라도, 이제 나는 그 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어. 설령 죽은 사람들이 따뜻한 햇볕을 받고 되살아나 꿈틀거린다 해도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땅 속으로 사라져 없어져버리지는 않는단 말이야. (노한 어조로) 논리야. 칼리굴라, 끝까지 논리를 밀고 나가는 거야. 권력도 끝까지, 이것저것 다 버리고 끝까지. 안 되지. 뒤돌 되돌아갈 수는 없어. 바닥이 날 때까지 가보는 거야!”(649-650)





알베르 카뮈 - 안과 겉

* 『안과 겉』(책세상, 2010)


 
- 「재판 서문」, 1957




예술가는 저마다 마음속 깊이, 일생 동안 그의 됨됨이와 그가 말하는 것에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유일한 원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나로서는 나의 원천이 『안과 겉』 속에, 내가 오랫동안 몸담아 살아온 그 가난과 빛의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세계의 추억이 지금도, 모든 예술가들을 위협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위험, 즉 원한과 만족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있다. / 우선 가난이 나에게 불해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빛이 그 부(富)를 그 위에 뿌려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의 반항까지도 그 빛으로 밝아졌었다. 나의 반항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위한, 모든 사람들의 삶이 빛 속에서 향상되도록 하기 위한 반항이었다는 것을 나는 거짓 없이 말할 수 있다. [...] 나의 타고난 무관심을 고칠 수 있도록 나는 빈곤과 태양의 중간에 놓인 것이다. 빈곤은 나로 하여금 태양 아래에서라면, 그리고 역사 속에서라면 모든 것이 다 좋다고 믿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태양은 나에게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내게는 신과 같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안 된다. [...] / 아무튼, 나의 어린 시절 위로 내리쬐던 그 아름다운 햇볕 덕분에 나는 원한이라는 감정을 품지 않게 되었다. 나는 빈곤 속에 살고 있었으나 또한 일종의 즐거움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무한한 힘을 나 자신 속에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힘을 쏟을 만한 곳을 발견하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가난은 그러한 나의 힘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바다와 태양은 돈 안 들이고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202-203).
 



그래, 바로 그거야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 즉 그 노파, 말 없는 어머니, 가난, 이탈리아의 올리브나무 위로 쏟아지는 햇빛, 고독하지만 충만한 사랑, 내 눈으로 볼 때 진실을 증언해주고 있다고 믿어지는 모든 것 말이다(211).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이렇게 나는 그 글 속에서 제법 엄숙한 어조로 썼었다. 그 당시에 나는 그 말이 얼마나 옳은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아직 진정한 절망의 시기를 지내보지 못했던 것이다(212).
 



그렇다, 적어도 내 그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나니, 바로 이 유적(流謫)의 시간에일지라도 인간에 의하여 이룩되는 작품이란, 예술이란 우회의 길들을 거쳐서, 처음으로 가슴을 열어보였던 두세 개의 단순하고도 위대한 이미지들을 다시 찾기 위한 기나긴 행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꿈꾸어보지 못하게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216).



  
- 「아이러니」




 
이 모든 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기막힌 진실. 영화 구경을 가느라고 내버려둔 여자,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없어진 노인, 아무런 속죄도 못하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이 세상에 가득한 저 모든 빛. 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세 가지 운명의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그러나 각자에게는 저마다인 죽음. 하여간 그렇기는 해도 역시 태양은 우리의 뼈를 따뜻하게 데워준다(230).
 



- 「긍정과 부정의 사이」
 



단순함이라는 말 속에는 어떤 위험한 힘이 있다. 투명하게 비쳐보이는 정도가 어느 만큼에 이르면 그 어느 것도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자살하고 싶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밤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나이가 고통을 당하며 거듭되는 불행을 겪는다. 그는 그 불행을 참고 자기의 운명 속에 자리를 잡는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다 어느 날 저녁에 모든 것이 허망해진다. 몹시 좋아하던 한 친구를 만난다. 친구는 그에게 아주 무심한 어조로 별 뜻 없이 이야기를 한다. 집으로 돌아오자 사나이는 자살을 한다. 사람들은 무슨 말 못 할 고민거리나 남모를 비극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만약 원인이라는 게 꼭 필요하다면, 한 친구가 그에게 무시한 어조로 별 뜻 없이 말을 했기 때문에 그는 자살한 것이다. 그처럼 세계의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언제나 감동시키는 것은 이 세계의 단순함이다. 오늘 저녁에는 나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그 기이한 무관심(240-241). 사실 이 방 안에 그를 붙들어두는 것은 언제나 차라리 그편이 낫다는 확신, 세계의 모든 ‘부조리한’ 단순성이 이 방 안에 깃들어 있다는 느낌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겠는가?(243)
 




- 「영혼 속의 죽음」





 
그러나 두 도시[프라하와 비첸체]가 다 내게는 귀중한 존재이며, 나는 빛과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을, 내가 묘사하고자 한 그 절망적인 체험에 대한 나의 숨은 애착과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렵다. 독자들은 이미 알겠지만, 나는 그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 「삶에의 사랑」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268).





 
- 「안과 겉」



 
만일 내가 나 자신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햇빛의] 광선 속에서다. 그리고 세계의 비밀을 전해주는 이 미묘한 맛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맛보려고 애를 쓴다면 그때 우주 저 깊숙한 곳에서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나 자신, 다시 말해 나를 무대 장치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이 극도의 감동 말이다(275).
 


중요한 것은 인간적이 되고 단순해지는 일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고 또 잠시 후에는 실제로 그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 지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 즉 인간적인 것도 단순함도 거기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곧 세계일 때보다도 더 진실해지는 때가 과연 언제이겠는가? 나는 갈망하기도 전에 만족되었다. 영원이 눈앞에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바랐던 것이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명철한 의식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 한 사람은 관조하고 한 사람은 자기의 무덤을 판다. 어떻게 그들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들과 그들의 부조리를 어떻게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 그러나 사랑해야 할 사람들의 눈과 목소리가 여기 있다. 나는 나의 모든 몸짓을 통해서 세계에 연결되어 있으며 나의 모든 연민과 감사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연결되어 있다. 세계의 이 안과 겉 중에서 나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고 또 남이 선택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 / 나는 사람들이 속임수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큰 용기란 빛을 향하여서도 죽음을 향하여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일이다. 게다가 삶의 이 치열한 사랑으로부터 이 은밀한 절망으로 인도하는 이 연계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사물들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아이러니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그것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277).
 



* 『안과 겉』(책세상, 2000)
 



"젊은이들은, 경험을 했다는 건 하나의 패배라는 것을, 모든 걸 다 잃고 겨우 뭔가 좀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아이러니, 40)
 



"왜냐하면, 망각의 밑바닥으로부터 내가 건져 올리는 이 시간들 속에는 무엇보다도 어떤 순수한 감동의, 영원 속에 정지하고 있던 한순간의 추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속에서 오직 그것만이 진실한 것인데도, 나는 언제나 그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다. 우리는 어떤 동작의 유연함이라든가 풍경 속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의 알맞은 자태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을 재현시켜보고자 할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은 하찮은 작은 사실뿐이지만 - 너무나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방의 냄새, 길 위에 울리는 야릇한 발걸음 소리 같은 -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 당시 내가 나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사랑에 잠길 수 있었다는 것은 마침내 나는 나 자신일 수 있었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게 해주는 것은 사랑밖에 없기 때문이다."(긍정과 부정의 사이, 52)
 



"나는 저 위험한 비탈길을 이제 더는 내려가고 싶지 않다. 사실 나는 항만과 그 불빛들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에게로 올라오는 것은 보다 나은 날들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나 자신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차분하고 원초적인 무관심이다. 그러나 이 너무나 맥없고 너무나 안이하게 되어가는 마음의 흐름을 깨뜨려야 한다. 그리고 나는 명철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모든 것은 단순하다. 사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들이다. 우리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는 말라. 사형받은 자를 가리켜 "그는 사회에 대하여 죄값을 치르려하고 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의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보기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기의 운명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긍정과 부정의 사이, p.63)
 



"내가 권태를 느끼지 않는 고장은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고장이다."(영혼 속의 죽음, 70)
 



""그리고 여행에서 그 밖에 어떤 다른 이득을 얻고자 한단 말인가? 이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벌거숭이다. 내가 간판도 읽을 수 없는 도시, 친근감을 주는 아무것도 깃들여 있지 않은 이상한 문자들.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으며 심심풀이도 없다. 낯선 도시의 소음이 들려오는 이 방으로부터 나를 끌어내어 어떤 집이나 어느 정든 곳의 사사로운 빛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람을 부를까? 소리를 질러볼까? 그래봐야 낯선 얼굴들만 내다볼 것이다. 교회당, 황금빛의 제단과 성향(聖香), 모든 것이 나를 일상생활로 떠다밀고 거기서 나의 불안은 모든 사물에 그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제 습관의 장막, 마음을 잠재우는 몸짓과 말들의 편리한 보자기가 서서히 걷히고 마침내 불안의 창백한 얼굴이 노출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 나는 그가 행복할 수 있을지 극히 의문스럽다. 그러나 그렇기에 여행은 인간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하나의 커다란 부조화가 그와 사물들 사이에 생겨난다. 전보다 덜 단단해진 그 마음속으로 세계의 음악이 더 쉽게 흘러든다. 그렇기에 그 커다란 헐벗음 속에서는, 덩그러니 서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한 그루 나무일지라도 가장 부드럽고 가장 진귀한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예술작품과 여인의 미소, 저희 땅 속에 뿌리박은 인종, 수세기의 과거가 요약되어 있는 고적들, 그것은 여행이 마련해주는 감동적이고도 생생한 풍경이다. 그리고 하루가 끝나면 다시금 영혼의 굶주림처럼 무엇인가가 내 마음속에 깊은 공허를 만들어놓는 호텔 방.""(영혼 속의 죽음, 72)
 



"왜냐하면, 여행을 귀중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던 일종의 내면적 무대장치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속임수를 써볼 수가 없다 - 사무실과 작업장에서 일하며 보내는 시간들 뒤에 숨어서 가면을 쓰고 지내는 짓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에 대해 우리는 그토록 심하게 불평을 해대지만, 실은 고독의 괴로움으로부터 그토록 확실하게 우리를 방어해주는 것도 그러한 시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주인공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소설들을 쓰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아내가 죽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내일까지 꾸며야 할 한 무더기의 발송 서류가 잔뜩 남아 있다." 여행은 이 피난처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가고 만 것이다. 우리의 가족 친지와 우리의 언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의지가 되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우리의 가면도 벗겨버린 채(전차의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그런 식이다) 우리는 완전히 우리 자신의 표면 위로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다 또한 우리 자신의 영혼이 앓고 있음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다가 그 기적적인 가치를 회복시켜주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춤추는 여자, 커튼 뒤로 보이는 테이블 위의 술병 - 이미지 하나하나가 제각기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의 인생이 거기에 요약되는 만큼 삶은 거기에 송두리째 반영되는 것같이 생각된다. (삶에의 사랑, 88)
 



"삶에 대한 나의 모든 사랑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내 손에서 빠져 나가버리려고 하는 것에 대한 말없는 정열, 불길 밑에 감추어진 쓰디쓴 맛이다. 매일 나는, 짧은 한순간 동안 이 세상살이의 시간 속에 아로새겨진 채 마치 나 자신에게서 앗겨가듯이, 그 승원을 떠나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왜 그때 내가 도리아 식으로 새겨진 아폴론의 시선 없는 눈, 또는 지오토가 그린 불타는 듯 응결된 인물들을 생각했는지 알고 있다. 그러한 순간에 나는 그러한 나라들이 나에게 갖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중해 연안에서 사람들이 삶의 확신과 규범을 찾아내고 또한 이성을 만족시키며 낙관주의와 사회적 감각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데 감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요컨대, 그 당시 내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인간의 척도에 맞추어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 고장들의 언어가 내 속에서 깊이 울리는 그 무엇과 일치되었던 것은, 그것은 나의 질문들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내 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의 행위들이 아니라 태양에 짓눌린 풍경 앞에서가 아니고는 탄생할 수 없는 그 '나다(nada, 허무)'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삶에의 사랑, 91)"
 



"나는 말할 수 있고 또 잠시 후에는 실제로 그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 지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 즉 인간적인 것도 단순함도 거기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곧 세계일 때보다도 더 진실해지는 때가 과연 언제이겠는가? 나는 갈망하기도 전에 만족되었다. 영원이 눈앞에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바랐던 것이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명철한 의식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안과 겉, 100-101)
 




"큰 용기란 빛을 향하여서도 죽음을 향하여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일이다."(안과 겉, 101)
 



- 『행복한 죽음』, 1936-1938
 



- 「창작경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죽음마저도 행복한 것이 될만큼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283) / 1937년 8월, “소설: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부자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리하여 그 돈을 손에 넣기 위하여 전력투구하고 끝내 성공하여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사람”(287). / 11월 17일, “‘제대로’ 태어난 한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해진다는 것은 곧, 포기의지를 가지고서가 아니라, 행복의 의지를 가지고서 만인의 운명을 거머쥐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에게 있어서도 행복은 오랜 인내이다. 그런데 우리는 돈의 필요 때문에 시간을 빼앗긴다.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있다. 무엇이건 돈으로 살 수 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행복해질 시간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해질 자격이 있을 때는 말이다”(287-288). / 1937년 8월, “사람들이 흔히 이런 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는 세계(결혼, 출세 등등) 속에서 삶을 모색했던 사람, 그러다가 돌연히 어떤 패션 카탈로그를 뒤적이던 중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삶(패션 카탈로그에서 이것이 사람이라고 간주되는 바의)에 대하여 이방인이었는가를 깨달은 사람”(291). / 원고의 부제는 ‘이방인 혹은 어떤 행복한 인간’(295).

  
- 제1부 자연적인 죽음


 
“난 엄숙하게 말하는 걸 안 좋아해요. 그렇게 말할 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꼭 한 가지밖에 없거든요. 자기 인생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 말입니다. 그럼 난 내 잘라진 다리를 어떻게 정당화시켜야 될지 알 수가 없어요”(332). / “당신의 유일한 의무는 사는 것, 행복해지는 것이라오.”(333) / “나에 대한 남들의 사랑이 나를 속박할 수는 없어요.”(337) / “돈이 없으면 행복해질 수 없어요. 그뿐입니다. 나는 안이함도, 낭만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가만 보면, 소위 엘리트라는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서 돈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종의 속물근성을 갖고 있어요. 그건 바보스럽고 그릇된 생각이에요. 어느 모로 보면 비겁하기도 해요.”(338) / “메르소, 난 스물다섯 살 때 이미 누구든 행복의 감각과 의지와 욕구를 가진 사람은 부자가 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행복의 욕구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되더군요. 그러자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족해요.”(339).
 


- 2부. 의식적인 죽음



 
“카트린,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돼. 너는 내면에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어. 무엇보다 가장 고귀한 것으로, 행복의 감각을 가졌어. 오로지 한 남자에게서만 삶을 기대해서는 안 돼. 그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너 자신에게서 삶을 기대해야 해.”(401) / “카트린, [...] 중요한 것은 말이지, 다만 행복의 의지이고 언제나 뚜렷하게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야. 그 나머지 것들, 여자, 예술작품, 또는 속세의 출세 등은 구실에 지나지 않아.”(421)
 


그리고 운명이 인간 속에서 창조하는 선택을 그는 의식과 용기 속에서 행했던 것이다. 바로 거기에 그의 모든 삶과 죽음의 행복이 있었다. 짐승처럼 미쳐 날뛰면서 그가 바라보았던 죽음, 그는 이제 그 죽음을 겁낸다는 것은 바로 삶을 겁낸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439).
 


의식한다는 것, 그것은 기만하거나 비겁해지지 않은 채 - 자신과 일대일로 자기 육체와 대면하여-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죽음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내들 사이의 문제였다. 아무것도, 사랑도 장식도 없이, 오직 행복과 고독의 끝없는 사막이 있을 뿐이었다(442).
 





알베르 카뮈 - 젊은 시절의 글들

알베르 카뮈(1913-1960) - 젊은 시절의 글들
 


* 「제앙 릭튀스 - 가난의 시인」, 1932

  
“가난한 사람, 모든 사람이 다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은 항상 말이 없는, 그 착한 가난뱅이인 누군가에게 마침내 뭔가를 말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시도해 본 것이다. - J.R .”(26)

  
모모한 현대 작가들의 유식한 수다가 아니라, 비참한 사람들이 영원한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데 쓰는 그런 말투, 고통으로 하여 놀라운 발견들이 솟구쳐 오르는 저 귀족적인 비속어로 말했던 것이다(27). 그는 병적인 불행에 매몰된 인간을 사로잡는, 사랑에 대한 저 병적 굶주림을, 애정에 대한 저 목마름을 뜨거운 언어로 말했다. 그는 편히 쉴 수 있는 사랑의 항구를 갈구하는 불행한 사람들의 막연한 열망들을 모두 다 말했다. 집 없는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떠돌이들에게도 심장이 있고 영혼이 있다. 그 영혼은 누구보다도 더한 욕망으로 부풀어 있어 그만큼 더 아름다운 것이다. / 이 고통의 절규 속에 사실은 어떤 주장 같은 것이 담겨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밝혀보고자 한다. 「가난뱅이의 혼잣말」은 불행한 사람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표현이다. [...]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무나 자주 모진 현실이 그의 꿈을 흩어버린다. 그래서 바로 그때 부당한 운명에 대한 격한 반항이 솟아오른다. 딱하게도 너무나 정당한 반항인 것이다(28).

  
* 「음악에 대한 시론(試論)」, 1932

  
니체는 인간(그의 저작에서는 그리스인들)의 천성적인 성향들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결론에 이른다. 사실, 우리는 꿈속에서 마음이 편해지고 현실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상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개체성을 잃어버리고 인류 전체와 동화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니체가 아폴론적인 면, 즉 꿈에 의하여 현실을 변용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부르는 면이다. 그거은 황홀경에 빠진 아폴론으로 상징되는 일종의 희열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찢어질 듯한 고통의 신인 디오니소스로 상징되는 또 하나의 본능에 시달린다. 이 디오니소스적 본능은 우리를 진정한 도취 속에 빠뜨려 결과적으로 우리의 고유한 개체성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이 두 가지 본능이 합쳐진 결과 우리는 삶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 두 가지 본느이 합쳐진 결과 우리는 삶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러한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그리하여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천재의 두 가지 경향을 구분해볼 수 있다. 그리스적 인간은 우선 디오니소스적 세계 속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이고 다음으로 첫 번째 충동을 다스리기 위하여 아폴론적인 것에 호소한다. [...] 차분하게 가라앉은 아름다움, 아폴론적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그 힘은 다른 어떤 종족의 경우보다 그리스 사람들의 마음속에 훨씬 더 깊이 뿌리박은 고통의 감정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 “그리스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의 개념은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니체가 자기 이론의 토대로 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 사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구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투쟁, 야망, 질투, 온갖 종류의 폭력들에 의하여 찢어질 듯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혹자는 다른 민족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특유의 감수성과 다정다감함으로 인하여 그리스 사람들은 가장 큰 고통의 소질을 타고난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참혹하게 삶의 끔찍함을 느꼈고 그렇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야만적인 디오니소스적 고통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그 어떤 민족의 경우보다도 더 아름다운 형식들을, 아니 꿈들을 창조함으로써 사람의 그 사나운 참화들을 타개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꼈던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춤과 음악을 활용했다. 그들은 박자를 통해서 신비적인 도취를 다스렸다. 그래서 그들은 감정과 상상을 다 같이 만족시켜주는 예술을 창조해내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극을 창조한 것이다. / 사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그리스 사상의 밑바탕은 쓰디쓴 비관주의이다. (“최선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라는 그리스의 잠언보다 더 비관적인 어디에 있을까?) 그렇지만 그리스인은 그들의 몽상적 기질로 인하여 삶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보다 더 기분 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꿈을 통하여 삶을 지워버렸다. 그들은 삶을 아름다움과 도취로 대치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적 평온함이다. 그래서 쉴러가 ‘그리스적 순진함’이라고 부른 것은 전혀 순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삶을 지워버리고 꿈을 꿀 수 있는 자질이다. 즉 유일한 생존은 아폴론적인 생존이니 삶은 한갓 환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리스사람들은 항상 삶을 무시하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들은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 잔혹한 벌을 내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독이 든 당근 즙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이렇게 그리스 사람들은 꿈에 힘입어 사람의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이 바친 모든 노력은 바로 고통에서 ‘승리의 의지’를 이끌어내는 데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노력, 이런 삶의 고통에는 오직 음악만이 어떤 표현 방법을 부여할 수 있다(50-52).


  
* 「직관들」, 1932
 



“O. 1932. 나는 달리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다는 듯, 오직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 앙드레 지드”(68)
 


바로 그때 광인이 내 방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내 광기에 귀를 기울여봐. [...] 흔히들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정신의 예속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 알기를 거부하는 것이 해방이며 결정적인 일보 전진이며 영혼의 자유화라는 것.”(69) / “오늘 아침엔 다른 보통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생각에 마구 빠져들었어.”(71) / 무용한 노력들로 낭비되고 수많은 망설임들로 찢어진 나의 삶이 바로 그 망설임들로 - 그 망설임들은 나름대로의 고통들이니까 - 아름다운 것이라고 나는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87).
 


* 독서노트, 1933년 4월
 



지드에게 있어서의 정당화 욕구라고 하는 것은 지드가 느끼는, 자신의 명철한 이성의 존재와 정열의 존재를 서로 화해시켜야 할 필요를 말하는 것이다. 그의 명철한 이성의 존재는 자신의 정열의 존재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 그에게 정당화 욕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당화인 것 ......(95-96).
 


*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 1933
 



요컨대, 어쩌면 실제로, 우리의 삶은 우리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25).
 



* 모순들, 1933
 



인간 조건을 받아들인다? 그게 아니라 반대로, 반항이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 [...] 솔직해야 한다. 한사코 솔직해야 한다. 심지어 자신을 거슬러가면서까지. /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반항하느냐, 이것은 삶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것이다(131).
 




* 합일 속의 예술, 1933
 




“그래서 나는 오직 신음하면서 모색하는 사람들에게만 동의할 수 있다. - 파스칼”(137).
 




그러니까 예술은 신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예술은 신성함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이다. 혹자는 우리가 예술을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함으로써 예술의 가치를 깎아내린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 수단이 목적보다 더 아름답고 탐구가 진리 그 자체보다 더 아름답다(143).
 


인간에게는 어떤 논리적 태도를 택하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144).
 


예술의 고유한 본질은 “모호한 겉모습들 속에 떠다니는 것을 영원히 변치 않는 공식들로 고정시키는 것”(쇼펜하우어)이다(145).
 



* 멜뤼진의 책, 1934


  
기다림이 사건보다 더 풍성하고 수단이 목적보다 더 확실하다면(157)
 


나 역시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게만 동조할 수 있으므로 행복하다(159).
 

* 알베르 카뮈 전집(특별판), 책세상

 


1권 : 젊은 시절의 글. 안과 겉. 행복한 죽음. 결혼. 칼리굴라. (1931~1939)
2권 : 작가수첩1. 시지프 신화. 이방인. (1939~1942)
3권 : 오해.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페스트. (1944~1947)
4권 : 여행일기.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시사평론. (1947~ 1950)
5권 : 작가수첩2. 반항하는 인간. (1950~1951)
6권 : 여름. 전락. 단두대에 대한 성찰. 적지와 왕국. (1951~1957)
7권 : 작가수첩3. 스웨덴 연설. 문학비평 (1957~1959)
 
* 가난한 동네의 목소리들 - 나의 아내에게 1934년 12월 25일
 



우선, 이것은 생각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다(167). / 때에 따라서 그 어머니에게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하고 물으면 어머니는 “아무 생각도 안 해”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렇다. 모든 것이 다 거기 눈앞에 있다. 그러니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이다(169+이하).




  

21. 니체유고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1. 유고(1888년 초~1889년 1월 초)』,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4.

 
14 [100]
진정한 그리스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다 :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무언가가 변했다.
  
20[73]
앞을 보라! 뒤돌라보지 말라!
늘 근거들로 향하면
몰락한다
  
20[110]
그대가 우상을 파괴했다는 것이 아니라 :
그대가 그대 안에 있는 우상숭배자를 파괴했다는 것,
이것의 그대의 용기인 것이다
 

22[14]
모든 가치의 전도
안티크리스트. 그리스도교 비판의 시도
비도덕주의자. 가장 숙명적인 종류의 무지인 도덕에 대한 비판.
우리, 긍정하는 자. 허무주의 운동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비판.
디오니소스. 영원회귀의 철학.
 

22[24]

I. 그리스도교로부터의 구원 : 안티크리스트
II. 도덕으로부터의 구원 : 비도덕주의자
III. ‘진리’로부터의 구원 : 자유 정신
IV. 허무주의로부터의 구원 :
 

23[2]
예술적 잉태에서 방출되는 힘과 성교에서 방출되는 힘은 동일한 것이다 : 오로지 한 종류의 힘만이 존재한다.
 

[24 = W II 9c. D 21. 1888년 10월~11월]
 

24[1] 고통마저 자극제로 작용하는, 넘쳐흐르는 삶의 느낌으로서의 주신제의 심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우리의 염세주의자들도 오해했던 비극적 감정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열쇠를 내게 주었다. 비극은 쇼펜하우어가 의미한 그리스인들의 염세주의를 입증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비극은 오히려 그런 것에 대한 극도의 대립물이다. 삶에 대한 긍정, 심지어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대한 긍정, 자신의 최고 유형의 희생을 통해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 - 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나는 비극 시인의 심리에 이르는 진정한 다리로 파악했다. 공포와 동정을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고, 감정의 격렬한 방출을 통해 위험한 아펙트(Affekt)에서 자기를 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 그런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이었다 : 오히려 공포와 동정을 넘어서서 생성과 창조에 대한 영원한 기쁨을 즐기기 위해서, 자기의 공포와 자기의 동정을 자기 밑에 두기 위해서 ......
 


[25 = W II 10b. W II 9d. Mp XVII 8. D 25. W II 8c. 1888년 12월~1889년 1월 초]
 
  
25[7]. 5. 나는 그 어느 것도 다른 식이기를 바라지 않음며, 되돌리기도 바라지 않는다 - 나는 그 어떤 것도 달리는 원할 수가 없다 ...... 운명애 Aamor fati ...... 그리스도교마저 필수적이 된다 : 최고의 형식, 그 가장 위험한 형식, 삶에 대한 부정 안에 있는 가장 유혹적인 형식이 비로소 자신의 최고의 긍정에 도전한다 -



  

20. 니체유고

19. 니체유고

프리드리히 니체, <<유고(1885년 가을~1887년 가을): 원래 나는 나를 어느 정도 나 자신에게서 보호해주고>>, 이진우 옮김, 니체전집 19, 책세상, 2005.

 
1[115] 모든 것의 해석적 성격. / 사건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난 것은 해석하는 존재에 의해 한 무리의 현상들이 해석되고 종합된 것이다.
  
1[120] 동일한 텍스트가 무한히 많은 해석들을 허용한다. 하나의 ‘올바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1[125] - “그것은 이러저러하다”를 “그것은 이러저러하게 되어야만 한다”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1[191] 주의. 결국 그리스 도시 전체가 개인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1[240] 반성은 여전히 순진의 표시일 수 있다.
 

1[247] 어찌하여 인간은 이처럼 신(神)으로 쇠약해져서 인간에게 소외되었는가.
 

2[77] 우리의 가치들이 사물 안으로 투입되어 해석되었다. / ‘그 자체’에는 도대체 의미가 있는 것인가?? / 의미란 필연적으로 관계-의미와 관점이 아닌가? / 모든 의미는 힘에의 의지다(모든 관계-의미들은 힘에의 의지로 해체된다).
 

2[85] 어떤 사물의 속성들은 다른 ‘사물들’에 대한 효과들이다 : 다른 ‘사물들’을 빼고 생각하면, 사물은 아무런 속도 갖지 않는다. 즉, 다른 사물들이 없으면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물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2[108] 세계는 “흐르는 강 속에” 있다. 무엇인가 형성되는 것으로서, 거듭해서 새롭게 연기되는 거짓으로서. 이 거짓은 결코 진리에 다가가지 못한다 : - 왜냐하면 ‘진리’는 없기 때문이다.
 

2[116] 저 자기 인식은 겸손이다-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감사다-왜냐하면 우리는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117] 도덕적 자기 해석은 세계부정으로 끝난다(그리스도교 비판). / 세계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 : 모든 해석은 성장 또는 몰락의 징후다.
 

2[148] 힘에의 의지는 해석한다 [...] 실제로 해석은 그 무엇인가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 자체다. (유기체적 과정은 해석을 전제한다.)
 

2[149] ‘물 자체’는 ‘의미 자체’, ‘뜻 자체’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사실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실이 있기 위해서는 항상 의미가 먼저 투입되어야 한다. / “그것은 무엇인가?”는 다른 무엇에 의해 파악된 의미-정립이다. ‘본질’, ‘실재’는 관점주의적인 것이며, 이미 다수를 전제한다. 그 밑바탕에는 항상 “그것은 나에게 (우리에게, 살아있는 만물 등에게) 무엇인가?”가 놓여 있다.
 

2[161] 나는 도덕적 가치 감정 비판을 감행한 사람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2[165] 근본문제 : 이러한 믿음의 전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도덕에 대한 믿음의 전능은? / (-그것은 삶의 근본 조건들 자체가 도덕을 위해 잘못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폭로된다 : 동물 세계와 식물 세계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 ‘자기 보존’ : 이타주의적 원칙과 이기주의적 원칙의 화해에 대한 다윈의 관점. / (이기주의 비판, 예를 들면 라 로슈푸코) / 생리적 번영이나 잘못됨, 또한 보존 및 성장 조건들에 관한 의식을 드러내주는 것인 징후와 기호 언어로서 도덕적 판단들을 이해하려는 나의 시도 : 점성술의 가치들에 관한 해석 방식. 편견들. 본능들은 이 편견들에게 넌지시 가르쳐준다(인종, 공동체, 청년기 또는 쇠퇴와 같은 다양한 단계 등등에 관해.) /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유럽적 도덕에 적용하면 : 우리의 도덕적 판단들은 쇠퇴, 에 대한 불신의 징후들이며, 염세주의의 준비다. / 우리가 모순을 실존 속에 투입해 해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결정적 중요성 : 모든 다른 가치들의 배후에는 저 도덕적 평가들이 명령하면서 서있다. 그것들이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무엇에 따라 측정하는가? 그리고 인식은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 나의 주요 명제 : 도덕적 현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 현상들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 있을 뿐이다. 이 해석조차 도덕 바깥에 근원을 갖고 있다.
 

2[167] 인과성의 부정. 모든 것에 각각 책임을 지우지 않고 또 그 어떤 것의 운명을 지탱하는 실을 너무 짧게 잡지 않기 위하여. ‘우연’은 실제로 존재한다.
 

2[168] 도덕-발전의 경향. 모든 사람은 다른 어떤 교의와 사물의 평가보다 그 자신이 잘 극복할 수 있는 교의와 사물의 평가가 유효하기를 바란다. 따라서 모든 시대의 약자와 평범한 자의 근본 경향은 좀더 강한 자를 약하게 만들고 끌어내리는 것이다 : 도덕적 판단의 주요 수단. 약자에 대한 강자의 태도는 낙인찍혀 있다. 좀더 강한 자의 좀더 고귀한 상태는 나쁜 별명을 얻는다. / 소수에 대한 다수의 투쟁, 희귀한 자에 대한 통상적인 자의 투쟁, 강자에 대한 약자의 투쟁.
 

2[170] 도덕적 판단이 이미 얼마나 많은 선회를 해왔으며, 또 얼마나 여러 번에 걸쳐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악’이 ‘선’으로 개명되었는지에 관한 지식과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이동들 중의 하나에 대해 나는 ‘도덕의 도덕성’이라는 대립을 가지고 --- / 또한 양심도 자신의 영역을 뒤바꾸었다 : 무리(群衆)의 양심 가책이 있었다 // 언뜻 개인적 책임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양심도 또한 어느 정도까지는 여전히 무리-양심인가.
 

2[172] ‘존재’ - 우리는 이에 관해 ‘산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표상도 갖고 있지 않다. - 다시 말해 죽은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2[174] 사람들은 사물들 속에서 자신이 집어넣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다시 발견하지 못한다.
 

2[182] 도덕은 본질적으로 개인을 넘어서 또는 개인의 노예화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지속시키는 수단이다.
 

2[184] 나의 문제 : 인류는 이제까지 도덕뿐만 아니라 자신의 도덕성에서 어떤 해를 입었는가? 정신 등등에서의 훼손
 

2[185] “우리 비도덕주의자들”
 

2[190] 도덕적 가치 평가는 해석이며, 일종의 해석하는 방식이다. 해석 자체는 특정한 생리적 상태들과 또한 지배적 판단들에 관한 특정한 정신적 수준의 징후다. 누가 해석하는가? - 우리의 정념들이.
 

* 2[191] 나의 주장 : 도덕적 가치 평가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 도덕적 감정-충동을 “왜?”라고 물음으로써 저지해야 한다는 것. “왜?”와 도덕 비판에 대한 이 열망은 바로 정직의 고상한 감각으로서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도덕성의 형식 자체라는 것. 우리의 정직, 즉 우리를 기만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 : “왜 안 되지?” -어떤 법정 앞에서?- 기만당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정복과 착취에 대한 주의, 삶의 정당 방어 본능. // 이것이 너희에 대한 나의 요구다 - 그 요구들은 너희 귀에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 : 너희가 도덕적 평가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 너희가 여기서 비판이 아닌 예속을 요구하는 도덕적 감정-충동을 “왜 예속을?”이라는 질문으로 저지해야 한다는 것. 너희가 “왜?”와 도덕 비판에 대한 이러한 열망을 지금 너희가 갖고 있는 도덕성의 형식 자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 너희가 너희 시대를 명예롭게 만드는 가장 고상한 정직의 형식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
 

2[192] 감정: 너희는 해야만 한다! 위반함에 있어서의 불안 - 질문: “누가 거기서 명령하는가? 우리는 거기서 누구의 분노를 두려워하는가?”
 

2[197] 신앙이 없는 사람과 무신론자, 그렇다! - 불신으로부터 신앙과 목적을, 그리고 종종 순교를 준비하는 뿌리 뽑힌 자의 괴로움과 열정 없이 : 세상은 대체로 신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상적이고 자애롭고 인간적인 척도에 따라 진행되지도 않는다는 통찰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 푹 삶아졌고 냉담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부도덕하고 신적이지 않으며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우리는 세계를 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숭배의 의미에서 해석했다. 세계는 우리가 믿었던 바의 가치가 없다 :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만들었던 위로의 마지막 거미줄은 우리에 의해 찢어졌다. 역사가 자신의 무의미성을 알게 되고 그 자체에 싫증나게 된다는 점이 바로 전체 역사의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실존에 피곤해짐, 더 이상 원치 않음에 대한 이러한 의지, (이러한 반대 의지의 표현으로서의) 자의(恣意), 자기 안녕, 주체의 붕괴. - 쇼펜하우어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이것이 최고의 경의로써 존중되기를 바랐다. 그는 그것을 도덕이라 명명했고, 모든 자기희생적 행위가 --임을 포고했다. 그는 예술이 만들어내는 무관심한 상태에서 혐오의 완전한 해방과 만족을 위한 준비를 인식하기를 바람으로써 예술의 가치를 보장한다고 믿었다.
 

2[200] 마찬가지로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다 :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교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교와 너무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과 너무 가까이 살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그리스도교로부터 성장했기 때문이다 -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기를 금지하는 것은 우리의 엄격하고 사치스러운 경건함 자체다.
 

2[203] 그러나 모든 사람은 “도덕이 여기 있다. 도덕은 주어져 있다!”라는 주요 사안에서 일치한다. 그들은 모두 정직하게, 무의식적으로, 부단히 자신들이 도덕이라 부르는 것의 가치를 믿는다. 다시 말해 그들은 도덕의 권위 하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 도덕의 가치! 바로 이 가치를 의심하는 어떤 사람이 발언권을 갖는 것을 그들은 허용할 것인가? 그는 단지 이런 측면에서만 도덕의 추론, 추론 가능성, 심리적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마음을 쓰는가?
 

2[205]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어서 다른 것을 침범하지 않는 이기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 따라서 너희가 말하는 ‘허용된’ ‘도덕적으로 무관심한’ 이기주의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의 나를 장려한다”, “생명은 항상 다른 생명의 비용으로 살아간다”. -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직 자신의 정직에 이르는 첫걸음을 떼지 않은 것이다.
 

4[7] - “질병은 사람을 개선한다” : 모든 세기에 걸쳐 만나게 되는, 그것도 현자의 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민중의 입을 통해서도 만나게 되는 이 유명한 주장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그 타당성과 관련해 한번쯤 이렇게 질문해도 될 것이다 : 도덕과 질병 사이에는 혹 인과적 결속이 있는 것인가? ‘인간의 개선’, 크게 보면, 예컨대 지난 세기에 이루어진 유럽인의 부인할 수 없는 온화함, 인간화, 순화 - 그것은 혹 오랫동안의 은밀하고 무시무시한 고통, 잘못됨, 궁핍, 쇠약의 결과인가? ‘질병’이 유럽인들을 ‘개선’했는가? 또는 달리 물으면 : 우리의 도덕성은-중국인들의 도덕성과 비교될 수 있는 유럽에서의 우리의 민감한 현대적 도덕성-생리적 퇴보의 표현인가? ...... ‘인간’이 화려하고 강렬한 유형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역사의 모든 부분은 금방 갑작스럽고, 위험하고, 폭발적인 성격을 취한가는 점을 쉽게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인간성이 나빠진다. 어쩌면 다르게 나타나고자 하는 그런 경우에는, 심리학을 심층에 이르도록 추진하고 또 거기서 일반적인 명제를 발견하고자 하는 용기나 섬세함이 결여돼 있을 것이다. ‘어떤 인간’이 더욱더 건강하고, 더욱더 강하고, 더욱더 부유하고, 더욱더 생산적이고, 더욱더 모험적일수록 그는 ‘더욱더 부도덕’해진다. 대체로 그것에 몰두해서는 안 되는! 곤혹스러운 생각! 그렇지만 우리가 그 생각과 함께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앞으로 나아간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얼마나 놀라워하며 미래를 바라보게 될 것인가!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요구하는 바로 그것보다-인간화, 인간의 ‘개선’과 증대하는 ‘문명화’보다- 우리로 하여금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덕성보다 값비싼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사람들은 덕성으로 인해 지구를 병원으로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의 간병인이다”라는 말은 마지막 결론의 지혜일 것이다. 물론 : 사람들은 무척 열망했던 ‘지상에서의 평화’를 가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또한 ‘서로에게 마음에 듦’은 적어질 것이다! 그만큼 적은 아름다움, 용기, 자만, 모험, 위험! 사람들에게 지상에서 살아가는 목적이 되어줄 만한 그런 ‘작품’들은 그만큼 적어질 것이다! 아! ‘행위들’은 이제 전혀 없다! 존립해 있고 시간의 파도에 씻겨 나가지 않은 모든 위대한 작품과 행위들 - 가장 심오한 이성으로 볼 때 그것들은 모두 위대한 부도덕성이지 않은가? ......
 

* 5[10]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뭔가 낯선 것을 알려진 것, 익숙한 것으로 환원하는 것. 첫 번째 기본 원칙 : 우리가 익숙해진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수수께끼,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새로운 것, 낯설게 만드는 것에 대한 감정의 둔화 :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의심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 탐색은 인식하는 사람의 제일 본능이다 : 물론 규칙의 확인으로써 ‘인식된’ 것은 전혀 없다! -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의 미신 : 그들이 고수할 수 있는 곳, 즉 현상들의 규칙성이 단축시키는 정식들의 적용을 허용하는 곳에서 그들은 무엇인가가 인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안정성’을 느낀다. 그러나 지적 안정성의 배후에는 두려움의 진정(鎭靜)이 있다 : 그들은 규칙을 원하는데, 그것은 규칙이 세계에서 두려움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학문의 배후 본능이다. / 규칙성은 묻는(즉, 두려워하는) 본능을 잠들게 한다. “설명한다”는 사건의 규칙을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칙’에 대한 믿음은 자의적인 것의 위험성에 대한 믿음이다. 법칙을 믿으려는 선한 의지는 학문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특히 민주 시대에)
 

5[22] 근본 해법 : 우리는 이성을 믿는다. 그러나 이성은 잿빛 개념들의 철학이다. 언어는 온갖 천진난만한 편견들 위에 건립되었다. / 그런데 우리는 불화와 문제들을 사물 속에 집어넣고 읽어낸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언어적 형식으로만 사유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이성’의 ‘영원한 진리’를 믿는다(예컨대 주어, 술어 등등. / 만약 우리가 언어적 속박을 받지 않고 행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중단할 것이다, 우리는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하나의 한계를 한계로서 보게 된다. / 이성적 사유는 우리가 던져버릴 수 없는 도식에 따른 해석이다.
 

5[50] 5) 소크라테스부터는 병의 징후로서,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준비로서의 그리스 철학.
 

5[70] 힘에의 의지와 그것의 변형들 (이제까지의 도덕에의 의지는 하나의 학파였다)
 

5[87] 인류의 위에 있는 어떤 인간으로 말하자면,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다. / 몽테스키외.
 

5[89] 우리 시대가 (유럽) 최고의 인간 유형이라는 커다란 오류에 대항하여. 오히려 : 르네상스-인간은 더 고귀했을 것이고, 그리스인들도 마찬가지다. 아마 우리는 상당히 아래쪽에 있을 것이다 : ‘이해’는 최고의 힘을 말해주는 기호가 아니라 쓸모 있는 피로의 표시일 것이다. 도덕화 자체는 ‘퇴폐’다.
 

6[15] 의미를 사물 속에서 구하지 말고 : 의미를 집어넣어라!
 

7[1] ‘본질’은 없다 : ‘변하는 것’ ‘현상적인 것’이 유일한 존재방식이다.
 

7[2] 진리와 오류의 가치 / 어떤 예술가는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거기서 시선을 돌려 뒤를 돌아보는데, 그의 진지한 견해는, 사물에서 가치 있는 것은 우리가 색체와 형태, 소리, 사상에서 얻는 그림자 같은 나머지라는 것이다. 그는 사물이나 인간이 더 섬세해지고 더 엷어지고 더 묽어지면, 그만큼 그들의 가치는 커진다고 믿는다 : 현실적일수록, 그들의 가치는 더 커진다. 이것이 플라톤주의다 : 그러나 플라톤주의는 방향을 돌리면 더욱 대담하다 : - 그것은 현실성의 정도를 가치 정도에 따라 쟀고 이렇게 말했다 : ‘이념’이 많을 수록 존재가 더 많아진다. 그는 ‘현실’ 개념을 돌려서 이렇게 말했다 : “너희가 현실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며, 우리가 ‘이념’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가까이> 진리에 접근한다”. -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은 최고의 개명(改名)이었다 : 그리고 이를 그리스도교가 수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놀라운 사실을 보지 못한다. 플라톤은 곡예사로서, 그는 곡예사였다, 실제로 존재보다 가상을 선호했다 : 다시 말해, 진리보다 거짓과 창작을, 실제로 있는 것보다 비현실적인 것을, - 그러나 그는 가상의 가치를 너무 확신했기 때문에 ‘존재’ ‘원인성’과 ‘선함’, 진리라는 속성들, 간단히 말해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나머지 모든 속성들을 그것에 부여했다. / 가치 개념 자체는 원인으로 생각되었다 : 첫 번째 통찰. / 이상(理想)에 속하는 모든 속성이 증여되고, 명예가 수여되다 : 두 번째 통찰
 

7[3] <제3장. 진리에의 의지> [...] C. 새로운 것공포를 일으킨다 : 다른 한편, 새로운 것을 새롭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포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 경악은 약화된 공포다. / 낯익은 것은 신뢰를 불러 일으킨다 / ‘진실한’ 것은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 관성은 외부의 어떤 인상에도 우선 동일화를 시도한다 : 다시 말해서 인상과 기억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반복을 원한다. / 공포구분, 비교를 가르친다. / 판단 속에는 의지(그것은 그러그러해야 한다)가 일부 남아 있고 쾌락의 감정이 일부 남아있다(긍정의 즐거움 :) / 주의. 비교원래 활동이 아니라 동일하게 취급하기다! 판단은 원래 어떤 것이 이러이러하다는 믿음이 아니라, 어떤 것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의지다. / 주의. 고통은 가장 거친 형태의 판단(부정하는). / 쾌락은 긍정 / ‘원인과 결과’의 심리학적 발생에 관하여
 

8[7] 거짓에 대한 즐거움은 예술의 어머니, 두려움과 감성은 종교의 어머니, 우리는 금지된 것
을 얻으려고 애쓴다Nitimur in vetitum와 호기심은 학문의 어머니, 잔인함은 비-이기주의적 도덕의 어머니, 후회는 사회적 평등 운동의 기원, 힘에의 의지는 정의의 기원, 전쟁은 (양심과 명랑함과) 정직성의 아버지, 주인의 권리 / 가족의 기원으로서. 불신은 정의와 관조의 뿌리
 



* 미셸 푸코 : <<비정상인들>>, 이 매력적인 텍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