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philosophy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philosophy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2. 12. 18.

도올 김용옥, "혁세격문(革世檄文)"


 
 
* 혁세격문 도올 목소리로 들으며 읽기
 
 
 

 
 
 
 


* 혁세격문(革世檄文) - "유권자의 90%가 투표하면 역사는 올바른 방향으로 늘 흘러간다!"




지금 조선의 들판이 혁명의 불길로 붉게 타오르고 있다. 지금 조선의 먼동은 "다시 개벽"의 눈부신 햇살을 발하고 있다. 자고 있는 자들이여, 모두 깨어나라! 새 시대, 새 정치의 함성이 그대를 부른다. 깨어난 4천만의 유권자들이여, 남녀노소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투표장으로 가라! 19일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혁명의 물결이 이 아사달 신시를 휘덮으리라! 조선의 깨인 자들이여! 남김없이 혁명의 대오에 어깨를 엮어라!

 

환인 하느님께서는 이 신시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거룩한 건국 치세이념을 내리셨다. 그런데 지금 어떠한가? 지금 우리는 홍익(弘益)이 아닌, 홍해(弘害), 홍살(弘殺)의 정치를 자행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정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인의(仁義)를 망각하고 솔수식인(率獸食人)의 사리(私利)를 앞세우며, 진현(進賢)의 정도(正道)를 거부하고 착복과 부패의 한계를 없이 하며, 국고를 털어 치자(治者) 본인의 사욕을 충족시키며 주변의 승냥이들에게 떡고물을 분배하고 있다. 국토의 산수대강(山水大綱)을 파괴하고 4대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왜곡·오염시키며, 백두대간의 대혈인 국립공원에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케이블카의 설치를 획책하고, 인천공항과 같은 공익의 자산을 사유의 질곡으로 전락시키려 하고 있다. 농촌을 해체시키고 도시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양극화의 괴리는 재벌의 독재를 흥륭(興隆)케 하며 서민대중의 삶을 노예 이하의 나락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추락은 영락이요 죽음이다. 그런데 서민대중의 죽음을 현 정권의 치자들은 환호하고 재벌은 환희의 박수를 친다. 그리고 전국 골목골목의 상권을 대형마트라는 탱크와 기관총으로 후려 갈겨대고만 있다. 어찌 미국의 총기난사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쳐다보고만 있는가? 자기 가슴에 총알이 박히고 있는 바로 그대들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우리가 지도자를 잘못 뽑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국민이 교사(巧邪)와 허언(虛言)의 달인(達人)을 지도자로 떠받들 수 있는가? 민주라는 허명에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메이저 언론의 정보조작과 선거를 둘러싼 가치의 혼란이 민중의 너무도 정당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중이 민주의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호도하는 온갖 정교한 부정이 민주주의라는 타자(他者)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민중이여! 또 당할 셈인가? 현 정권의 죄악을 반성 없이 반복할 셈인가? 이제 또 안보의 위협에 대책 없이 속을 셈인가? 마지막 순간을 앞둔 깜짝쇼에 대의(大義)의 정조(情調)를 굴복시킬 셈인가? 민생의 감언에 또다시 도덕을 망각할 셈인가? 민중이여! 두 손에 가슴을 얹고 잘 생각해보라! 누가 과연 그대들의 민생을 도와주었는가? 누가 과연 그대들에게 돈 한 푼이라도 거저 준 적이 있는가? 민생은 아사달의 신시로부터 지금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민중 스스로 해결해온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 정치는 민생을 해결하지 못한다. 민생은 어디까지나 민중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민중의 간절한 염원이란 그 민생결단의 번영을 훼방하는 행위를 정치가 제발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일 뿐이다. 오늘과 같은 악랄한 대기업의 횡포는 정부와 공권력의 비호가 없다면 당장 민중의 힘으로 타도될 것이다. 기업과 정부권력의 유착, 자본의 끝없는 폭리확대와 공무행정의 부패의 연환(連環)은 대중민생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이 희생에는 이제 부르죠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자산가, 임금노동자를 불문하고 모든 대중이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공약으로 "민생"을 우선시 한다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위선자일 뿐이다. 민중이 원하는 것은 민생이라기보다는 도덕의 구현이며 정의의 확립이요 인정仁政의 구체적 실천이다. 위장된 웃음의 눈꼬리를 가장하며, 정의와 도덕을 외면하고 반성과 실천을 거부하는 위선의 심장에 이제 종지부를 찍자! 더 이상 속지 말자! 민생이 아닌 도덕의 기강을 바로잡자! 그리하면 민생은 저절로 해결된다. 도덕이 바로서고 민생이 풍요롭게 되지 아니 하는 역사는 인간세에 있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도덕을 어떻게 바로잡는가? 그 너무도 쉬운 해결방안이 그대 손에 쥐어져 있다. 부패와 사악의 정권을 바꾸면 된다. 어떻게 바꾸는가? 투표장으로 가라! 그대의 신성한 혁명의 권리를 행하라! 나와 같이 수십만 권의 장서를 수십 년에 걸쳐 뇌리에 입력한 자나, 만 20세의 청순한 홍안의 유권자나, 동일한 한 표의 권리가 평등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혁명은 어렵지 않다. 이 인간 오성의 보편적 권리에 대한 신념은 반만년 인문정신의 기나긴 투쟁의 결과로서 획득된 것이다. 어찌 이 고귀한 권리를 나태와 냉소와 방임으로 포기할 셈인가? 혁명은 어렵지 않다. 유권자의 90%만 매번 투표에 참여한다면 역사는 항상 선을 지향하며 뒤바뀌게 되어있다. 그런데 유권자 한 명이라도 더 투표장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정치세력이 과연 수권(受權)의 자격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국가기관이나 공영언론조차도 투표를 독려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 직무유기를 일삼는 것이다. 국민이여! 분노하라! 분노하라! 실상을 직시하라!
 


과거에는 최고의 권좌, 그 천명(天命)을 바꾸는 혁신(革新)의 대업에는 수없는 인명의 희생이 있어야만 했다. 삼일운동을 기억하라! 동학의 우금치전투를 상기하라! 정주에서 폭파된 홍경래의 염원을 다시 한 번 상상해보라! 그 얼마나 처절한 고립무원의 항쟁이었던가? 그대들이 손에 쥐고 있는 투표용지는 이들 선열(先烈)의 잘린 모가지처럼 피가 흐르고 있다. 민주의 나무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랐다. 대한민국처럼 비서구권에서 서구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을 수용하고 직접선거의 최소한의 공정성을 확보하여 정권의 평화로운 교체를 이룩한 선례를 축적하여온 나라도 별로 없다. 이것은 오직 선현(先賢)들의 피흘림의 투쟁으로만 가능하였던 것이다.


 
체제 밖에서 천 리를 가는 것보다 체제 안에서 한 치를 가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체제 안에서 천 리를 갈 수가 있다. 우리 민중 모두가 19일 투표함으로 가기만 한다면 혁명은 이루어진다.


 
혁명은 왜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가? 이제 혁명은 폭력이 아니다. 이제 혁명은 광포한 영감이 아니다. 이제 조선의 혁명은 체제의 룰에 따라 도덕의 기강을 바로잡는 정의로운 상식적 작업이다. 그러나 이번 우리의 혁명은 바스티유감옥의 철창을 터뜨린 불란서인들의 인권선언보다, 차르왕정을 무너뜨린 러시아혁명보다, 아편전쟁 이래 열강의 침탈을 종식시킨 마오쩌뚱의 공산혁명보다도 더 막중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혁명이다. 우리의 혁명은 열강의 모든 근대적 노략질과 이데올로기적 대결의 결과물인 세계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 진정한 세계평화의 출발이다. 동·서의 언어적 편견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며 남·북의 불필요한 이념의 기미(羈縻)를 절단하며, 문명과 자연의 조화를 회복하고, 도농(都農)의 균형을 꾀하고, 세조의 찬탈 이래 끊임없이 왜곡되어온 정의의 패배를 설욕하는 대업이다. 훈구파들의 끊임없는 득세, 선조의 파렴치한 임란책임회피, 그 뒤로 이어지는 노론의 장악, 세도정치, 일본제국의 식민지통치와 친일파의 발호, 이승만의 권력찬탈과 무능한 6·25전쟁대처, 일제 만군출신 박정희의 쿠데타와 유신폭정, 이 모든 흐름이 "불의라도 박박 우겨대면 역사의 정의가 된다"는 왜곡된 가치관에 대한 통렬한 국민적 반성의 기회를 박탈해왔다. 반성이 없는 역사는 미래가 없다.


 
올해가 임진왜란 일곱 환갑! 그 부끄러운 통치자들의 행위가 빚어낸 참혹한 민중의 삶을 일순간이라도 연상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의 좌표는 명료해진다. 그대들은 아는가? 가도입명(假道入明)의 명분으로 이 땅을 짓밟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침략군의 저주보다, 이 나라를 구해주겠다고 원정 온 명군(明軍)의 작태가 민중의 삶에 끼친 폐해가 구체적으로 더 심원했다는 사실을 그대는 정말 아는가? 임란 극복의 원동력은 이순신의 서남해상권 제패와 수군의 활약과 의병의 분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장렬한 최후의 진로를 선택해야만 했고, 의병장 김덕령은 모진 고문 속에 죽어야만 했고, 홍의장군 곽재우는 신선을 가장하고 소리 없이 스러져야만 했다. 선조는 이들 구국의 지도자들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명군의 "재조지은(再造之恩)"만을 찬양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여송의 사당을 만들었고 명군을 위하여 동대문 밖에 관묘를 지었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주었다는 은혜, 즉 재조지은의 찬양은 결국 불과 30년만에 정묘·병자의 양 호란(胡亂)이라는 처참한 비극을 다시 불러왔다. 이러한 민중의 비운의 역사의 배면에는 6·25전쟁 등 현대사의 명암이 겹치고 있다.


 
물론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다. 그러나 우리의 친미는 미국과의 정당한 거리감을 확보함으로써 미국을 도덕적으로 만들어주는 인도주의적 친미가 되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남·북한의 화해를 돕도록 만들어야 하며, 역으로 우리는 남·북한의 화해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이 협력하여 세계평화를 이끌어가도록 만드는 21세기 인류 최대의 염원을 달성케 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민생(民生)이라기보다는 민본(民本)이다. 민중 스스로가 자결의 주체성을 갖는 역사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손에 쥔 투표용지 하나로 인류의 역사를 전쟁과 대결의 국면에서 평화와 화해의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사의 기나긴 좌절과 절망을 승리와 희망으로 회향시킬 수 있다.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30만 우국지사들의 원혼을 기억하라! 좌절된 반민특위의 역사를 반성하라! 이제야말로 우리는 투표용지 하나로 반민족행위자들의 작태를 일소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 투표장에 국민이 오는 것을 꺼려하는 모든 반민족행위자들의 생애에 종막을 드리워라! 그것도 아주 평화롭게! 19일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 땅의 깨인 자들이여! 모두 남김없이 투표장으로 가라! 그대들의 투표가 이 민족 모두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리라. 주변의 모든 동포를 설득하여 투표장으로 가라! 이 민족의 기나긴 불의와 독선과 배타와 불인(不認)의 역사를 끝장내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되돌아갈 수 없다! 모든 반동은 그 자체의 힘에 의하여 분쇄된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투표장으로 가라!


 
 
 
 

2012. 12. 14.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헤겔, <정신현상학1>(1807), 임석진 옮김, 한길사, 2005.
 
 
 
 

 
 
 
IV. 자기 확신의 진리
 
 
1.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지배와 예속
  
자기의식은 또 하나의 자기의식에 대하여 융통자재(融通自在)하는 가운데 바로 이를 통하여 상생상승(相生相勝)한다. 즉 자기의식이란 오직 인정된 것(ein Anerkanntes)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중화한 의식이 통일된다는, 자기의식 속에 실현되어 있는 무한성의 개념은 다면적이고 다의적으로 착종되어 있어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요소를 정확하게 식별하여 구별된 가운데서도 동시에 구별되지 않는 것, 또는 구별된 것과는 정반대되는 의미를 잡아내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구별된 것이 이중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자기의식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니, 즉 자기의식이란 스스로 무한한 운동을 펴나가는 가운데 일단 정립되고 난 성질과 정반대의 것으로 즉각 전화(轉化)한다. 이렇듯 이중화한 자기의식의 정신적 통일이란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주는 것이 ‘인정’의 운동이다.
  
자기의식에 또 하나의 자기의식이 대치될 때 자기의식은 자기의 밖에 벗어나 있다. 여기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의식이 자기를 상실하여 타자를 두고 자기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를 참다운 자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본다는 식으로 타자를 지양한다는 의미이다.
 
 
이제 자기의식은 자기를 타자로 보는 그런 일은 지양해야만 한다. 이는 지금 얘기된 이중의 의미를 지양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되면서 여기에는 또 다른 이중의 의미가 발생한다. 하나는 자기의식이 자기 이외의 다른 자립적 존재를 지양하고 이로써 자기야말로 본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이 타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므로 이제는 자기 자신을 지양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중의 의미를 지닌 타자의, 이중적인 의미에서의 지양은 동시에 이중의 의미에서 자체 내로의 복귀(eine doppelsinnige Rückkehr in sich)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자기가 타자라고 하는 상태를 벗어나 자기와 일체화된 자기의식은 자기를 되돌려왔기 때문이며, 둘째로 자기의식은 타자 속에 있던 자기의 존재를 지양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완전히 방임함으로써 여기에 다시금 또 하나의 자기의식이 이쪽 편에 대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의식과 다른 자기의식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운동이 여기서는 한쪽 편의 행위로만 표상되어 있지만, 한쪽의 행위라는 것은 이미 한쪽 당사자의 행위인 동시에 또 다른 쪽에서의 행위이기도 하다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타자도 역시 자립적인 완연한 존재이므로, 그 자신 속에 있는 것은 모두가 그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의 자기의식도 단지 욕망(Begierde)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생명체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자존하는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무엇을 하려 하건 간에 상대 쪽에서도 자기가 그에게 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실현될 수가 없다.
 
 
따라서 운동은 어김없이 두 개의 자기의식이 행하는 이중의 운동으로서, 양쪽 모두가 상대방이 자기와 동일한 것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된다. 양쪽 모두가 자기가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을 스스로 행하고 상대방이 그와 동일한 것을 행하는 한에서만 자기도 또한 동일한 것을 해하게 되므로 한쪽에서만의 행위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고, 정말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오직 쌍방의 행위를 통하여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행위는 일차적으로 자기에 대한 행위인 것 못지않게 타자에 대한 행위라는 점에서 이중의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서로가 불가분 한쪽의 행위인 것 못지않게 또한 다른 쪽의 행위라는 점에서도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운동 속에서 우리는 일찍이 힘의 유희로 표현되던 과정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다만 여기서는 그것이 의식 내부에서 행해지고 있다. 힘의 유희에서는 방관자인 우리에게만 보여졌던 것을 여기서는 양극에 위치한 두 개의 자기의식이 바라보고 있다. 이 양쪽 중심에 있는 것도 자기의식으로서, 이것이 양극으로 분열되면서 두 개의 극이 서로의 역할을 교환해가며 저마다 반대의 역할로 무한히 이행한다.
 
 
물론 이것은 의식의 운동인 이상 자기의 밖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자기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동시에 자체로 되돌아와 자기를 고수하는 것이어서 결국 자기가 자기의 밖으로 벗어나 있다는 것이 명확히 의식되어 있다. 자기가 직접 타자의 의식이면서 또한 타자의 의식은 아니라는 것이 자각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타자가 독자적 존재가 되는 데서도 스스로 독자적 존재임을 포기하여 타자의 독자성 속에서 스스로를 자각하는 상태가 이루어져야 한다.
 
 
각자마다가 상대방에 대하여 중간 위치를 차지하고, 이렇듯 중간항을 이루는 상호적인 타자를 매개로 하여 각기 저마다가 자기와의 매개 아래 자기와 합일된다. 결국 각자마다가 자기와 타자에 대하여 직접 독자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로 나타나긴 하지만 이러한 독자성은 동시에 타자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얻어진다. 두 개의 자기의식은 교호적인 인정 상태에 있는 의식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이중화한 자기의식이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 인정의 순수한 개념으로서, 이제 이 인정의 과정이 자기의식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고찰해야만 하겠다. 우선 처음에 타나나는 것은 두 개의 자기의식이 서로 부등한 위치에 있는 경우인데, 여기서는 매개체로서의 중간항이 양극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가운데 한쪽은 인정될 뿐이고 다른 한쪽은 인정하기만 하는 관계가 이루어진다.
 
 
자기의식은 우선 단일한 독자존재로서, 일체의 타자를 배제하는 자기동일성을 지닌다. 이때 자기의식의 본질이며 절대적 대상이 되는 것은 ‘자아’로서, 자기의식은 직접 이 ‘자아’와 어우러진 가운데 ‘자아’라는 독자적 개별자로서 존재한다. 이 개별자는 타자와 맞서 있는데, 이때 타자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성격지어진 비본질적인 대상이다. 그러나 이 타자 역시 자기의식인 까닭에 여기에는 개인과 개인의 대립이 형성된다.
 
 
그러나 갓 출현했을 때의 이들 개인은 서로가 마주치는 대상일 뿐이어서, 비록 독립된 형태를 띠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의식은 생명(Leben)이라는 존재-여기서는 생명과 대상이 같은 존재이다-속에 매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의식은 서로가 직접적인 자기존재를 송두리째 말소해 자기동일적 의식을 지닌 순수한 부정적 존재로서 감당해야 할 절대적인 추상화운동을 행하는 데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어서, 서로가 순수한 독자존재 또는 자기의식으로 대치하고 있지는 않다.
 
 
결국 이들은 저마다 자기존재를 확신하고는 있으면서도 타자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아직 스스로에 대한 자기확신이 진리가 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진리일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독자존재가 자신에게 자립적 대상으로서, 다시 말해서 순수한 자기확신으로서 나타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가 인정 개념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타자가 자기에 대해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타자에 대해서 있고, 또 각기 서로가 자기 자신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타자의 행위를 통해서도 저마다 독자존재일 수 있는 순수 추상화운동(diese reine Abstraktion des Fürsichseins)을 펼쳐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자기의식의 순수한 추상운동으로서 상호간의 행위가 나타날 때, 이들은 각기 자기의 대상적인 양식을 순수하게 부정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일반적인 개별 사안이나 심지어 생명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는 이중의 행위로서, 즉 타자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이 타자의 행위인 한은 각자가 서로 타자의 죽음을 겨냥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둘째로 또한 자기의 행위도 포함되어 있으니, 타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곧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개의 자기의식의 관계는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 각자마다 서로의 존재를 실증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쌍방이 이러한 투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라고 하는 자기확신을 쌍방 모두가 진리로까지 고양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유를 확증하는 데는 오직 생명을 걸고 나서는 길만이 있을 수 있으니, 자기의식에게는 단지 주어진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삶의 나날 속에서 덧없는 세월을 보내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함을 되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도 결코 놓칠 수 없는 순수한 독자성(reine Fürsichseins)을 확보하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마저도 생명을 걸고 나서지 않고서는 확증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생명을 걸고 나서야 할 처지에 있어보지 않은 개인도 인격으로서 인정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개인은 자립적 자기의식으로 인정받는 참다운 인정상태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때 각자는 자기의 생명을 내걸 뿐만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아야만 한다. 타인은 추호도 자기 이상으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본질을 자기 안에 지니지 않고 자기의 밖으로 벗어나 있으니, 밖으로 벗어나 있는 존재는 지양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타자는 다양한 일상사에 매여 있는 그런 의식이지만, 자기의식이 스스로의 타자로서 맞서려고 하는 것은 순수한 독자존재 또는 절대적 부정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타자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의한 이러한 확증을 필경 이로부터 발현되어야 할 진리는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 확신마저도 전적으로 무산시켜버린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의식을 떠받쳐주는 자연적인 기점(基點)이며 절대적 부정성까지는 갖추지 않은 자립적인 힘으로서, 그의 자연적인 부정 상태로서의 죽음은 아무런 자립성도 없는 부정성을 뜻한다는 점에서 여기서 요구되는 바와 같은 인정의 의의를 담보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을 통하여 두 개의 자기의식이 서로 목숨을 걸고 상대방의 생명을 업신여기는 것은 확증되지만, 이러한 확증은 싸움을 견뎌낸 당사자에게 안겨지지는 않는다. 죽음을 걸고 맞서 있는 두 당사자는 자연적 존재라는 생소한 토대에 뿌리내리고 있는 의식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파기하고 자립성을 고수하려는 양극에 자리한 자기의식으로서 서로가 맞서는 경우라고는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개의 자기의식은 교호적인 관계 속에 양극으로 대립해 있다는 본질적인 게기는 상실한 채 다만 죽은 통일체라고나 할 중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니, 이렇게 죽음의 궁지로 내몰린 상태에서는 이 중간 지점도 역시 대립 없는 양극에 묻혀버리게 된다. 양극이 더 이상 의식적으로 대응하면서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물체가 아무런 관련도 맺지 않은 채 거기에 내던져져 있을 뿐이다. 생사를 건 투쟁은 무의미한 부정으로서, 이는 상대를 타파하면서도 또한 그것을 보존하고 유지함으로써 파국을 견뎌내고 살아남는 의식의 부정과는 다른 것이다.
 
 
이 경험의 와중에서 생명이 순수한 자기의식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본질적이라는 것이 자기의식에게 깨우쳐진다. 간신히 자기를 의식하기에 이른 의식에게는 단순한 ‘자아’가 절대적 대상이지만 이 대상은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매개를 거쳐 나타난 것으로서, 자립적 생명을 본질적인 요소로 하고 있다. ‘자아’라는 단순한 통일체는 최초의 경험의 결과로서 와해되고 만다.
 
 
이로 인하여 여기에 순수한 자기의식과 순수히 자립적이 아닌, 타자와 관계하는 의식, 즉 사물의 형태를 띠고 존재하는 의식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의식에게는 모두가 본질적이다. 그러나 일단 이 양자는 서로 부등한 상태에서 대립해 있는 가운데 서로가 통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잡이는 아직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의식형태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쪽이 독자성을 본질로 하는 자립적 의식이고 다른 한쪽은 생명, 즉 타자에 대한 존재를 본질로 하는 비자립적인 의식이다. 여기서 전자가 ‘주인’(der Herr)이고 후자가 ‘노예’(der Knecht)이다.
 
 
주인은 자주ㆍ자립적인 의식으로서, 단지 개념상으로만 그런 존재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형태를 띤 자립적인 존재와 함께 묶여 있는 타자의 의식과 매개된 가운데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이다. 주인은 욕망의 대상인 사물 그 자체와 물성을 본질적으로 여기는 의식이라는 두 개의 요소와 관계한다. 이때 주인으로서의 자기의식은 ① 독자적으로 직접 상대방과 관계하는 측면과 ② 타자를 통하여 비로소 자립적일 수 있는 매개의 측면을 지니는 것과 함께, ① 위의 두 측면과 직접 관계하는 경우와 ② 어느 한쪽을 매개로 하여 타자와 관계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주인은 사물이라는 자립적인 존재를 매개로 하여 노예와 관계한다. 노예는 바로 사물에 속박되어 있다. 노예는 생사를 건 싸움에서 사물에 의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물성(物性)을 띠지 않고는 자립할 수 없는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이에 반하여 주인은 싸움을 치르는 가운데 사물의 존재란 소극적인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주인의 지배 아래 있는 사물은 주인에 대치하는 노예를 지배하는 힘을 지니는 까닭에 이 지배적인 힘의 사슬 속에서 주인은 노예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주인은 노예를 매개로 하여 사물과 관계한다. 노예로서도 자기의식은 갖고 있으므로 사물에 부정적인 힘을 가하여 사물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물은 노예에 대하여 자립적인 존재이므로 노예는 부정의 힘을 가한다 해도 사물을 아예 폐기해버릴 수는 없고 사물을 가공하는 데 그친다. 이에 반하여 노예를 통하여 사물과 관계하는 주인은 사물을 여지없이 부정할 수 있으므로 주인은 마음껏 사물을 향유한다.
 
 
이로써 욕망의 의식으로서는 이루지 못했던 것, 즉 사물을 마음 내키는 대로 처리하고 소비하는 가운데 만족을 누리는 일을 주인은 해낼 수 있게 된다. 결국 사물의 자립성으로 인하여 욕망의 의식에게 그러한 결과가 성취되지 못하던 참에 주인은 사물과 자기 사이에 노예를 개재시킴으로써 사물의 자립성을 미끼로 하여 사물을 고스란히 향유한다. 이때 사물의 자립성이라는 측면은 노예에게 위임되고 노예는 이를 가공하는 것이다.
 
 
위의 두 관계 속에서 주인은 노예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 두 관계 가운데 어느 경우도 노예는 비본질적인 존재로서, 한편으로는 사물을 가공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물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노예로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사물을 지배하고 사물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 쪽에서 보면 노예라는 타자의 의식이 스스로의 자립성을 포기하고 주인인 자기가 상대방인 노예에게 할 일을 노예 자신이 행한다는 의미에서 인정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노예가 행하는 것은 본래는 주인이 행해야 하는 것이므로 노예의 행위는 곧 주인 그 자신의 행위라는 의미에서도 인정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독자성을 지닌 본질적 존재로서의 주인은 사물을 홀대하는 순수한 부정의 힘을 행사함으로써 이 관계 속에서 순수한 본질적 행위자에 해당되는 데 반하여 노예는 자기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비본질적인 행위자이다. 그러나 노예에 의한 주인의 인정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주인이 상대에 대해서 행하는 것을 주인 그 자신에 대해서도 행하고, 또 노예가 그 자신에 대해서 행하는 것을 역시 그의 상대인 주인에 대해서도 행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여기에 조성되어 있는 상태는 일방적인, 부등한 인정의 관계이다.
 
 
이렇게 해서 비본질적 의식이야말로 주인에게 있어서의 대상이며 또한 주인의 자기확신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주는 진리라고 해야만 하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대상은 본질적인 의미의 자기의식이라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주인의 자기실현으로 여겨지는 이 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은 자립적인 의식과는 전혀 별개의 비자립적인 의식이다. 따라서 주인은 의식의 독립성을 객관적 진리로서 확신하는 것은 아니며 거기에 객관적 진리로서 있는 것은 비본질적 의식과 이 의식에 의한 비본질적인 행위이다.
 
 
이렇게 되면 자립적 의식의 진리는 노예의 의식에 있는 것이 된다. 물론 노예의 의식은 일단 자기를 상실한 상태에서 자기의식의 진리를 체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배의 과정에서 바로 이 지배의 본질이 스스로를 지향했던 것과는 반대의 것으로 전도되었듯이 예속의 본질도 역시 그것이 관계가 실현되는 가운데 직접 드러나 보이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도된다. 노예의 의식은 자체 내로 떠밀려 들어가서 자기복귀할 때 참다운 자립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은 지배와의 관계 속에서 예속은 어떤 위상을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속되는 것도 자기의식이므로 이런 점에서 예속이 의미하는 그의 전체적인 실상이 고찰되어야만 하겠다. 우선 예속된 의식에서는 주인이 본질적인 존재이므로 주인 쪽의 자립 자존하는 의식이 예속된 의식에서 객관적 진리를 이루지만 아직도 이 진리는 예속된 의식에서 실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가운데 실은 예속된 의식이야말로 스스로가 부정성을 지닌 독자존재라는 진리를 사무치게 깨우친다고 하겠으니, 노예는 주인의 존재를 몸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예속된 의식이 안고 있는 불안은 단지 우발적으로 나타난 어떤 것에 고나한 불안도 그리고 특정 순간에 닥치는 불안도 아닌, 그야말로 자기의 존재에 흠뻑 닥쳐오는 불안으로서 이것이 무한정한 힘을 지닌 주인에게서 닥쳐오는 죽음의 공포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내면으로부터의 파멸에 직면한 노예는 걷잡을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면서 그를 지탱해왔던 모든 것이 동요를 일으킨다. 도처에 생겨나는 이 순수한 운동, 즉 존립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인 유동화는 자기의식의 단순한 본질인 절대적 부정성의 발로로서, 자기의식의 순수한 자립성이 이러한 모습으로 노예의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주인에게 갖추어져 있는 순수한 독자적 요소도 그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에 노예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도 자립성을 감지하기에 이른다.
 
 
그뿐만 아니다. 이것은 노예의 의식에 단지 막연한 심정상(心情上)의 자괴감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노예노동 속에서 현실적인 붕괴에 직면하게 한다. 이렇듯 노동을 수행하는 매순간마다 노예는 자기에게 가해진 물리적 속박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뜻에서 사물을 가공하고 변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감정상으로나 공포 속에서 행해지는 개별적인 노예노동에서도 감지되는 주인의 절대권력은 붕괴를 예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바, 비록 주인에 대한 공포가 지혜의 실마리를 이룬다고는 하지만 의식은 여전히 대상에 얽매인 채 독자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결국 의식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데는 노동이 개재해야만 하는 것이다(Durch die Arbeit kommt es aber zu sich sewlbst).
 
 
주인의 의식에서 욕망에 해당하는 것이 노예의 의식에서는 노동이 되는 셈인데, 어쨌든 노동에서 사물의 자립성이 유지되는 이상 노예는 사물에 대하여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듯이 보인다. 욕망이라는 것은 대상을 전적으로 부정하며, 그럼으로써 티 없는 자기 감정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니만큼 또 거기서 얻어지는 만족감은 그대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때 욕망에는 대상의 존립이라는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노동의 경우는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사물이 탕진되고 소멸되는 데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사물의 형성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관계란 대상의 형식을 다듬어가며 그의 존재를 보존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노동하는 노예에게 대상은 어디까지나 자립성을 띤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을 부정하는 가운데 형식을 다듬어가는 행위라는 이 매개적인 중심은 동시에 의식의 개별성 또는 순수한 독자성이 발현되는 장(場)이기도 한데, 결국 의식은 노동하는 가운데 자기 외부에 있는 지속적인 터전(die Element des Bleibens)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동하는 의식은 사물의 자립성을 곧 자기의 자립성으로 직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물의 형성은 봉사하는 의식의 순수한 독자성이 존재하는 모습을 띤다는 긍정적인 의의를 지닐 뿐만 아니라 공포라고 하는 첫째가는 요소를 불식시키는 부정적인 작용도 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봉사하는 의식이 사물을 형성하는 데 따른 그의 자립적 부정성은 당면해 있는 사물의 형식을 타파하는 과정을 거쳐서 대상화되지만, 이 부정되는 대상이야말로 노예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했던 그 낯선 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노예는 이 낯선 부정적인 힘을 파괴하여 스스로가 부정의 힘을 지닌 것으로서 지속적인 터전에 자리를 차지하여 독자존재로서의 자각을 지닌다. 주인에게 봉사할 때 독자적인 존재는 타자로서 자기와 맞서 있다. 말하자면 주인에 대한 공포 속에서 스스로 독자적인 조재임이 몸소 깨우쳐지는 것이다. 사물을 형성하는 가운데 스스로가 도자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면서 마침내 그는 완전무결한 독자존재임을 의식하기에 이른다. 사물의 형식은 외면에 자리 잡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의식과 별개의 것은 아니며, 오직 형식만이 봉사하는 의식의 순수한 독자성을 갖춘 진리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의식은 타율적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노동 속에서 오히려 자력으로 자기를 재발견하는 주체적인 의미(eigner Sinn)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봉사하는 의식이 이렇듯 반성적인 자기복귀를 이루는 데에는 공포와 봉사라는 두 요소와 함께 사물의 형성이라는 또 하나의 요소가 필요하며 더욱이 이들 요소가 노예생활 전반을 뒤덮고 있어야만 한다. 봉사와 복종의 기강이 잡히지 않고서는 공포는 형식적인 데 그칠 뿐, 현실생활에 의식적으로 퍼져나가지는 않는다. 또한 사물의 형성이 없이는 공포는 내면에 잠겨있을 뿐이어서 의식이 이를 명확하게 의식할 리가 없다. 더욱이 최초의 절대적인 공포를 느끼지 않은 채 의식이 사물을 형성하게 된다면 의식은 다만 자기의 허영심을 채우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형식에 나타난 의식의 부정성이 역시 자기마저도 부정하난 힘이었다고 느껴지지 않으며, 따라서 사물을 형성하더라도 이것이 본질적인 자기실현이라고는 의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절대적인 공포를 실감하지 않은 채 다만 어쩌다 불안감에 젖어들 뿐이라면 자기를 부정하는 힘은 자기 밖을 맴도는 데 그치며, 자기의 심혼마저도 뒤흔들어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기의 일상적인 의식이 안주해 있던 스스로의 지반이 여지없이 동요하는 데까지 내몰리지 않는 한 어딘가에 기댈 만한 언덕이 남아 있겠지만, 그런 상태에서 자기존립을 지탱할 수 있다고 지레짐작한다는 것은 속절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자유라는 것도 예속된 상태의 자유에 그칠 뿐이다. 사물의 순수한 형태가 그대로 자기의 본질로 화하지 않는 한, 개개의 사물에 각인된 모습이 의식 전체를 감싸 안는 절대적 개념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사물을 잔재주를 통하여 가공하는 손놀림에 그칠 뿐, 보편적인 자연력이나 대상 세계 전체를 압도하는 것과 같은 그런 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 220~234쪽
 


 

2012. 11. 29.

emmanuel levinas


엠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95
 
 
 
Emmanuel Levinas on his early relationship with Maurice Blanchot.
From Hugo Santiago's 'Maurice Blanchot' (1998).

 
 
 
 
 
Levinas: The Strong and the Weak (English Subtitles)
 
 
 
 
 
On June 29 1993 Michel Field interviewed Emmanuel Levinas on the occasion of the recent publication of "Dieu, la Mort et le Temps", a collection of Levinas's course materials. Field questions Levinas about the lateral character of his approach to philosophy at the crossroads of different civilizations. Levinas also talks about one of his favourite themes, the relation between one human and another, which consists of transcendence, "the exit from oneself".
 
 
 
 
 
Emmanuel Levinas: Being in the Principle of War (English Subtitles)
 
 
 
 
 
 
 
 

 

2012. 11. 28.

michel foucault - les mots et les choses + docu

 
 
 
Michel Foucault interviewé à propos de son livre
«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 (1966)
par Pierre Dumayet.

Source : Archives INA, 1966.
 
 
 
 
Michel Foucault - French Documentary - arte-france
 
 
 
1
 
 
2
 
 
 
3.
 
 
 
4
 
 
 
5
 
 
 
6.
 
 
 
7.
 
 

michel foucault - le corps utopique + les heterotopies




Michel Foucault - Le Corps utopique [Radio Feature 1966]

1

 
2

 



Michel Foucault - Les Hétérotopies [Radio Feature 1966]

1

2

3

michel foucault - mal faire, dire vrai + the culture of the self

 
mal faire, dire vrai
- Michel Foucault à l'Université Catholique de Louvain en 1981
 
 
 
 


Michel Foucault - The Culture of the Self [in english]

 
This video presents one of lectures in which French philosopher Michel Foucault examines Western culture's conceptual development of individual subjectivity. Foucault gave these lectures, in English, at UC Berkeley, beginning on April 12, 1983, roughly a year before he died. There are some negligable distortions in the recordings.
Focault answers the questions in the last 1:45 hour of this video.
 
  
 
 
 
 
 

2012. 11. 14.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 [저술 초안]



대한민국을 포함한 일본, 중국, 대만, 곧 동아시아 학문이 사용하는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메이지 시대의 일본학자들에 의해 번역된 것이다. 메이지 시기의 일본 학자들은 유학을 가거나 서양학문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사서삼경에 정통한 유교적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다. 이들이 다양한 경로로 서양학문을 접한 후, 서양의 용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어의 특성상 서양의 제반 개념들이 한자표기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메이지 시기 학자들의 번역 및 그들 사이의 논쟁을 거친 제반 서구 번역어들, 곧 新漢語는 이후 결정적으로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기점으로 동아시아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시기 이래 다양한 침탈의 과정을 통해 이러한 현상을 수용한 대표적인 국가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학술용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노가다' 판에서 '야구'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 전반에 걸친 전면적 수용 현상을 가져왔는데, 이 책은 이러한 일본식 서구 번역어 곧 신한어의 한반도에로의 전면적 유입 과정을 대표적인 몇몇 일상 및 학술 용어의 사례를 들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나는 이를 통해 오늘 우리의 서양 사상에 대한 주체적 수용 및 자생적 우리 학문의 가능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일본어 번역어에 (사실상 '무비판적으로') 의존한 대한민국 학문의 인식론적 층위에 대한 개념사적, 계보학적 검토 작업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렇게 메이지 시대 일본 학자들에 의해 번역된 신한어 개념이 대한제국 및 일제 강점기, 이후 대한민국의 시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오늘-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가령 법률(法律)이라는 한자어 조합은 중국어가 아니라 신한어이며, 이는 오직 law라는 서구어를 번역하기 위해 기존 중국어의 法과 律을 조합한 단어로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예로 본서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단어는 他人, 他者, 主體, 客體, 主觀, 客觀, 絶對, 相對, 民族, 哲學, 理性, 社會, 眞理, 科學, 藝術, 眞善美, 自由, 普遍性, 合理性, 近代性 등등의 제반 개념이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현대 학문의 인식론적 근본 조건을 규정하고 있는 일본 메이지 시기의 신한어들을 우리로부터 타자화내지는 외화시킴으로써 이들 용어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을 가능케하는 동시에, 이러한 용어가 우리나라에 수입되면서 어떻게 오늘 우리의 인식을 규정하였는가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용어들을 새롭게 전유, 해석하여 우리의 고유한 학문적, 일상적 용어를 창출하고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오늘 우리의 '보편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 메이지 효과란 무엇인가?
2. 메이지 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의 상황
3. 메이지 용어의 성립 과정
4. 메이지 용어의 동아시아 전파
5. 메이지 용어의 한반도 전파
6. 메이지 용어의 사례들 - 개념사적/고고학적-계보학적 분석
7. 나가면서 - 새로운 '보편학'의 가능 조건


2012. 10. 30.

공개와 연대


서평
 
푸코, 역(逆)패놉티콘 사회, 민주주의
 
 
 
 
  
 
 
 
 
 
존 김 지음, <공개와 연대. 위키리크스와 페이스북의 정치학>, 한석주ㆍ이단아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게이오대학교 디지털미디어콘텐츠 통합연구기구의 준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존 김이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산하의 저명한 인터넷 관련 연구소인 버크만센터에서 행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책의 논지는 ‘머리말’에 잘 드러나 있다.
 
 
  
“예전에 미국의 대학원에서 유학했을 때, ‘정보사회의 기원 The Origin of Information Society’이라는 수업에서 프랑스의 철학자인 미셸 푸코가 쓴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을 읽은 적이 있다. ‘처벌’과 ‘감옥’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쓰인 책이었는데, 그 책에서 푸코는 ‘패놉티콘Panoptic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번역하자면 ‘전망대 감시 시스템’ 정도가 될 것이다. [...] 위키리크스나 페이스북 혁명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나는 패놉티콘을 떠올렸다. 단, 구도가 반대가 되어야 한다. 즉, 일반적으로 패놉티콘이라 하면 정부가 감시탑에 있고 독방에 들어있는 시민들이 감시당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위키리크스가 불쑥 등장하며 제시한 것은 우리들 시민이 감시탑에서 정부를 감시하는 구도인 것이다. 역패놉티콘이라고 불러야 할까. / 정부나 대기업을 비롯한 기존의 권위는 정보의 점유와 통제를 통해 그 권위를 구축하고 유지해왔다. 하지만 위키리크스나 페이스북이 정보의 투명화를 극단까지 밀어붙여서, 기존의 권위는 붕괴되고 새로운 권위 체제가 구축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 이 책에서는 위키리크스나 페이스북 혁명의 분석을 통해 ‘역패놉티콘 사회의 도래’에 대해 논해 보려고 한다.”(ix-xi)
 
 
  
이러한 논의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위키리크스의 창시자인 어산지는 시대의 이단아로 정보의 완전 투명화를 실현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최첨단 기술 지식을 종횡으로 구사하고 국가 간 법제의 차이에서 오는 공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전제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까지도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한 실적을 불과 몇 년 만에 만들어냈다. / 정보를 독점하고 은폐하는 것으로 만들어진 권위에 대해서는, 그것이 정부이건 기업이건 종교 조직이건 간에 윤리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내부 고발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기밀을 폭로하여 권위를 붕괴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부정은 없어지고, 사회의 투명성과 정의가 담보된다. 그리고 디지털 혹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통신 기술이 뒤에서 이를 지원한다. / 위키리크스는 이런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이에 대한 정부의 선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기밀의 누설을 허락하지 않는 더욱 견고한 정보관리 체제를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기밀이 될 만한 정보 자체를 줄여 갈 것인가다. [...]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걱정한 것은 ‘빅 브라더’라는 정부가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미래 사회였다. 그러나 위키리크스나 페이스북의 등장으로 정부 활동의 어두운 이면을 포함한 모든 정보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용기 있는 시민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목숨을 건 정치 행동을 일으키기 위한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었다. 감시받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정부가 되는 ‘역패놉티콘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 위키리크스가 실현하는 ‘완전 투명화 사회’와 페이스북이 실현하는 ‘게릴라 시민운동’은 이제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147-149)
 
 
 
 
존 김의 저작은 극히 최근의 현상인 위키리크스와 페이스북 등의 현상을 통하여 중앙 행정기관의 감시자가 주위의 죄수 혹은 시민들을 감시하는 푸코의 ‘패놉티콘 사회’에 대하여, 불특정 다수의 깨어있는 시민들이 중앙 행정기관을 감시하는 ‘역패놉티콘’ 사회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하지만 우선 존 김의 문제의식과 결론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존 김이 이러한 측면을 모르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는 이 책의 기본적 지향점이 본질적으로 위키리크스로 대변되는 일련의 현상이 갖는 ‘긍정적인’ 정치적 측면 곧 민주주의의 확대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을 밝히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공적 정보 및 통신의 수단을 독점하고 이에 대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기존 권력 체제는 인터넷, 위키리크스, 페이스북 등으로 대표되는 ‘전자 민주주의적’ 경향에 의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 서게 되었다. 존 김에 따르면, 정보의 독점 및 중앙 집중, 비밀주의로 대변되는 기존 행정ㆍ관리 체제는 특히 공적 이익을 위한 감시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어산지의 위키리크스에 의해 결정적인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이는 국가 기관 혹은 국가 간의 협약에 의한 공공기관 및 국제적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기업 모두에 해당되는 현상으로, 이들 새로운 정보수단은 유사 이래 고급 정보의 독점ㆍ비밀주의에 기초한 권력을 남용하여 부당 이득을 취한 이들에 항거하는 민초들의 저항에 무기를 쥐어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이와 유사한 관점으로는 전명산의 『국가에서 마을로』(갈무리, 2012)에 등장하는 ‘홀롭티시즘 사회’의 도래를 들 수 있다. “홀롭티시즘은 판옵티콘을 완전히 뒤집은 개념으로, 판옵티콘이 소수가 다수를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구조라면, 홀롭티시즘은 다수가 공동체 전체를 볼 수 있는 구조를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홀롭티시즘의 초입에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촛불집회, 지하철 게릴라 시위, 네티즌 수사대 등 최근 우리가 새롭게 경험한 일련의 사건들이 바로 그러한 사회적 경향의 초기 모습이다. /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빅브라더’의 사회가 될 가능성과 더불어 ‘위대한 개인들’이 이끌어가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가 될 가능성이 공존한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홀롭티시즘적인 관점에서 사람들이 공동체 전체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보도자료)
 
 
 
 
 
 
 
그러나 이러한 정보ㆍ통신 테크놀로지 수단의 발달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전자민주주주의적’ 경향과 더불어 더욱 완벽한 ‘통제사회’를 가능케하는 ‘전자파시즘적’ 경향 역시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의 주체는 비단 이전과 같은 국가 기관 혹은 거대 기업만이 아니라, 웹 상에 존재하는 이른바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다. 이런 면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다수 무지와 편견에 의해 저질러지는 소수에 대한 폭력적 테러에 다름 아닌 유럽 중세 ‘마녀사냥’의 재판이 될 수도 있다(우리는 전세계에서 무차별적으로 벌어지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마녀사냥’의 최근 사례를 무수히 목격하고 있다). 하버드의 신학자 하비 콕스가 자신의 역작 『세속도시』(1965)를 통하여, 현대 거대도시의 대중사회를 분석하면서 오직 하나의 전제적인 세계관을 강요하며 모든 이들의 내면에 대한 투명하고도 완벽한 통제를 강요했던 유럽 중세사회에 대하여 익명성과 개인의 사적 영역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신의 추복이라고 갈파한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이러한 측면에서 위키리크스의 위상은 조금 다른데, 이는 평등한 주권적 시민들의 결합ㆍ계약으로 간주되는 근대 국가 혹은 그러한 국가들 사이에서 위정자 혹은 거대 기업인이 자신의 특정한 지위를 이용하여 얻은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국가 혹은 인류 전체가 아닌 자신들이 속한 특수 집단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추구할 권리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사실상 가히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기도 한데, 이는 어산지이든 혹은 그 누구든 이러한 수준의 정보 취급 혹은 해킹 능력을 가진 인물들은 앞으로도 무수히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인물들이 이러한 사이트를 개설하고, 조직의 논리에 반하여 다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기밀’ 정보를 제공하는 개인들이 존재하며, 그에 대한 동조자들이 무수한 카피 사이트를 만들고, 이를 보도하는 매체들이 존재하는 한, 그러한 폭로는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부차적 문제라고 칭하여 질 수도 있지만, 다만 문제는 ‘국가 기밀해제 시효’의 경우처럼, 이른바 ‘통치권자’가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기밀을 설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리’, 곧 장기적 관점에서 본 국가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동시대의 대중들에게 모두 알릴 수는 없는’ 통치권자의 권리에 관련된 난점이 제기된다. 이는 말하자면 ‘네가 잘못한 일 혹은 오해받을 일이 없다면, 왜 내게 네 메일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못하느냐’는 애인의 잘못된 요구의 경우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 하나의 국가 혹은 조직도 일정한 ‘내적 생활’ 혹은 ‘국가 혹은 조직의 사적 영역’이 존재하는가 혹은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존재한다 해도 그러한 영역은 과연 어떤 조건하에서 어떻게 보호받아야 하는가라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결국 이러한 모든 논의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위키리크스와 페이스북이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은 통치권 및 국가, 기업, 사생활, 권리, 공사 영역의 구분이라는 근대 정치학의 주요 개념들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만 한다는 요구와 당위성이다. 배아복제와 장기이식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보 분야에서도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우리가 이전에는 기술적 이유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문제들이 기술의 발달로 가능하게 되었을 때 과연 우리는 이러한 기술을 활용해도 되는가, 활용한다면 어떤 조건 하에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위키리크스와 페이스북은 단순한 통신 기술 발달의 결과를 넘어, 지난 수세기 동안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고 지탱해왔던 정치와 사회 영역의 모든 개념들 곧 세계관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 및 재구성의 시기가 왔음을 알려주는 시금석이다. 
 
 
 
2012.10.30. 
 
 
 
 
 

2012. 9. 30.

부채인간 - 옮긴이 서문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부채인간>
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 미디어, 2012



알라딘:
로쟈 서평, 주간경향
 
 
 
 
 
 
 
 

한국어판 서문
해제
옮긴이 서문


머리말

I. 부채를 사회의 기반으로 파악하다

왜 금융 경제가 아닌 부채 경제에 대해 말하는가
부채의 생산
특수 권력관계로서의 부채

II. 부채와 채무자의 계보학

1. 부채와 주체성 : 니체의 공헌
1) 사회적 관계의 기초로서 채권자-채무자 관계
2) 가능성ㆍ선택ㆍ결정으로서의 부채 시간
3)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경제

2. 두 명의 마르크스
1) 매우 니체적인 마르크스
2) 《자본》에 등장하는 객관적 부채

3. 부채 논리에 있어서의 행동 및 신용

4. 들뢰즈와 가타리: 부채의 짧은 역사
1) 무한 부채
2) 야만적 흐름
3) 자본주의적 흐름

III. 신자유주의에서 부채의 영향력

1. 푸코와 신자유주의의 탄생

2. 부채에 의한 주권ㆍ규율ㆍ생명관리 권력의 재배치
1) 주권권력
2) 규율권력
3) 생명관리권력

3. 부채의 시험에 직면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헤게모니인가, 통치성인가
1)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2) 서브프라임 위기
3) 국가 부채의 위기

4. 부채와 사회적 세계
1) 세 가지 부채: 사적 부채, 국가 부채, 사회 부채
2) 부채 주체성의 테크닉 안에 존재하는 위선, 냉소주의 및 불신
3) 가치평가와 부채
4) 사회적 예속화 및 기계적 노예화로서의 부채
5. 반생산과 반민주주의

결론

주석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52838.html



경향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212019305&code=900308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2851



시사IN - [특집/'부채 인간'의 탄생] 악마의 속삭임 '부자 되세요'

빚이 삶의 중심이 된 우리는 '부채 인간' 이다. 세계적인 금융자본주의의 바람을 타고 금융기관들은 미친 듯이 서민에게 대출을 해주며 부동산·주식 열풍을 일으켰다. 이제는 빚 때문에 힘들지만 빚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현실이다.

'금융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다철학자 라차라토 인터뷰

http://www.sisainlive.com/cover2/viewContent.php?idxno=255



서울신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922018001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830679



문화일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92801032530159002






* 옮긴이 서문 [원본]




옮긴이 서문

부채인간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당신의 삶을 통제하는가?

1. 부채인간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은 당신과 우리의 오늘에 대한 책이다. 라짜라또는 청년 마르크스의 신용과 통화에 관한 소논문 「대출과 은행」 및 완숙기의 『자본』, 니체의 『도덕의 계보』, 그리고 이에 영향 받은 들뢰즈ㆍ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등을 원용하여 현대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지, 그리고 신용과 부채의 문제가 어떻게 ‘당신이 열심히 일을 할수록, 더 많은 빚은 지게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의 과정에서 라짜라또가 핵심으로 삼는 개념은 물론 특히 니체적 의미로 해석된 부채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이 책은 상기 사상가들의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저자 자신의 독창적 사유를 펼친 독자적인 저술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공정한 평가라 할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부채인간의 개념은 현대 신자유주의의 핵심적 메커니즘을 드러내주는 키워드이다. 왜 기존 경제학의 개념이 아닌, 부채인간이라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 현대 신자유주의의 분석에 요청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저자 인터뷰 중 한 대목을 살펴보자.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 즉 사실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통화를 중립적인 것, 교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서만 간주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본주의 경제는 통화 경제이고, 신용 통화란 경제적 순환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통화의 창조는 부채를 통해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신용/부채에 대해 말하지 않고 시장 경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금융화(그리고 오늘날 지상권을 갖고 있는 부채)는 사회적 생산성 및 부의 포획(capture)을 위해 작동하는 놀라운 기계입니다. 오늘날 부채 상환은 이윤을 대체해 버렸는데, 이는 기업의 이윤조차도 필연적으로 금융을 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채와 신용은 경제의 부정이 아니라, 경제의 진실입니다. 통화/부채의 발행을 통제한다는 것은 경제 금융을 통제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 발전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부채 인간은 부채 경제의 주체적 형상입니다. 나는 이 책에서 니체의 입장을 재구성하려 했는데, 그 주장의 기원은 오늘날에서야 겨우 인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사회적 관계의 기초가 경제적 교환 혹은 상징 교환에서 찾아져서는 안 되며, 대출자-채무자라는 권력 관계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권력 관계는 경제적인 동시에 주체적인 것입니다.”

핵심은 마지막 구절이다. 사회적 관계의 기초는 더 이상 경제적 혹은 상징적 교환에서 찾아져서는 안 되며, 대출자-채무자라는 권력 관계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라짜라또는 니체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 부채인간의 개념을 구성한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자신의 주요 저작, 특히 『도덕의 계보』(1887)를 통하여 근대 영혼 및 신체의 통제 메커니즘을 분석한 바 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논의의 핵심은 죄책감, 혹은 부채의 관념이 근대 사회의 인간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핵심적 메커니즘을 구성한다는 주장이다. 아래에서는 라짜라토의 책을 이해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죄책감 혹은 부채에 관한 니체의 논의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2. 니체의 죄책감, 빚

니체는 우선 죄책감, 곧 양심의 가책 기원에 대한 자신의 ‘가설’을 제안한다.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향하게 된다. - 이것이 내가 인간의 내면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이 인간에게서 자라난다. [...]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해 국가 조직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저 무서운 방어벽은-특히 형벌도 이러한 방어벽에 속한다-거칠고 자유롭게 방황하는 인간의 저 본능을 모두 거꾸로 돌려 인간 자신을 향하게 하는 일을 해냈다. 적의, 잔인함과 박해, 습격이나 변혁이나 파괴에 대한 쾌감-그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에게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니체에 따르면, 도덕의 근본적 개념 중 하나인(Schuld)는 , 곧 부채(Schulden)라는 매우 물질적인 개념에로 거슬러 올라간다(이 두 독일어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갖는 용어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곧, 손해와 고통 사이의 균형이라는 관념은 근본적으로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계약적 관계, 사법적 개인의 존재만큼이나 오래 되었으며 그 자신 교통ㆍ교환, 가치의 구입이라는 근본적 형식에로 또 다시 돌아가는 하나의 관계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이러한 관계의 원칙은 다음과 같은 고대인의 일반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어느 사물이나 그 가격을 지닌다. 모든 것은 대가로 지불될 수 있다.” 따라서, 정의 자체가 - 그 기원에 있어 - 주어진 어떤 순간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보아 “거의 대등한 힘의 상태를 전제한 보상이며 교환이다.” “‘죄’, ‘양심’,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바로 이 영역, 즉 채무법이다.” 이로부터 형을 치르는 것에 대한 하나의 은유, “빚을 갚는다.”라는 일상적 표현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모든 내적ㆍ외적 처벌의 기초로서의 양심의 가책은 하나의 ‘질병’이다.

한편, 어떤 범죄자가 스스로를 사회의 ‘적’ 혹은 ‘비행인’(?)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양심의 가책 혹은 죄책감의 내면화를 통해서이다. 그는 사회에 의해 정복 혹은 ‘포괄ㆍ이해’(conquis et "compris")된다. 이런 의미에서 가치 및 도덕의 기준은 언제나 사회적이다. 사회는 자신의 보존ㆍ보호ㆍ번영이라는 자신의 명확한 이해(利害) 기준에 따라 가치들 및 도덕들을 판단한다. 달리 말해, 모든 가치와 도덕은 오직 주어진 사회 내에서만 타당하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사회의 관심은, 결코 자신의 ‘참다운 진보’가 아닌, 오직 자신의 단순한 보존, 현상 유지(statu quo)에 있다. 사회적 가치는 근본적으로 사회의 이기주의에 의해 탄생한다. 사회적 가치는 사회적 기능에 관련된 효용성에 준하여 판단된다. 더구나 이러한 사회의 이익을 위한 덕들은 그 기원이 망각됨으로써 오늘날 이익이 아닌 어떤 순수한 동기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행해지고 있다.
“근본 동기, 즉 유용성이라는 동기가 망각된 그러한 행위들이 도덕적 행위라고 불린다. [...] 모든 도덕의 근원이며 도덕적 행위에 대한 모든 찬사의 근원인 사회는 분명 이익 이외의 다른 모든 동기가 도덕적으로 훨씬 높게 평가되도록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나 격렬하게 개인의 사리사욕과 싸워야만 했다. 그리하여 도덕은 마치 이익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은 근원적으로는 사회의 이익이며, 모든 개인적인 이익에 맞서 자신을 관철시켜나가고 더 높은 품위를 얻기 위해 애써왔다.”
하나의 사회는 자신에게 ‘부적합한’ 모든 것들을 억압하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예외들’을 자신에 대한 위험 요소로서 배제한다. “예외자를 범죄자로 다루고 억압하기 위한 심문, 불신, 관대하지 않음의 정도-자신들의 예외성으로 인해 내적으로 병들 정도로 그들 자신에게 양심의 가책을 갖게 하기 위해서.”따라서, 한편으로는 “살해하고, 고문하고, 자유아 재산을 빼앗”으며, “교육을 제한함으로써, 학교를 통해 폭력을 행사”하고, “(경찰로서)” “속이고, 기만하고 쫓아” 다니는 사회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내면화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최면에 걸리고”, “뭉그러진”, “실패한”, “길들여진” 범죄자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영혼과 신체에 있어 ‘근대인’으로 ‘형성’되고 ‘개선’되었으며 ‘변형’된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이다.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육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의무와 마찬가지로 죄,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 역시 이제는 그 기원이 잊혀진 과정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의 발명품이다. 우리는 결코 양심의 가책의 존재 이유,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 내력에 대해 묻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 도덕을 포함한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 발명된 것이며, 그 자신이 구성된 계기들, 곧 역사를 갖는다. 우리는 도덕의 계보학을 수행해야 한다.

3. 부채의 인간학 - 경제 인간, 부채 인간

결국 라짜라또의 부채인간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메커니즘이 전통적인 기존 경제학적 관념만으로는 분석 불가능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개념적 도구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개인적인 것, 도덕적인 것, 한 마디로 ‘경제적이지 않은 모든 가치’를 경제적 효용가치로 환원한다. 오늘날의 이른바 ‘스펙’이란 용어가 학생들에게 미치는 권력 효과에서 잘 드러나듯이, 당신이 좋은 학교를 가지 못하고, 좋은 영어 성적을 받지 못하며, 좋은 직장을 가지 못했고, 혹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더구나 많은 부채를 지고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 개인의 책임이다. 그리고 이는 다름 아닌 품행을 통제하는 도덕적 가치를 구성한다.
“현실을 봐라, 너 언제까지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살래? 네가 지금 그럴 때니?”
그리고 이는 바로 니체의 단언처럼 스스로에 대하여 내면화 된다.
“아, 난 왜 이러지? 난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지, 난 왜 이렇게 끈기가 없지, 그래 모든 건 다, 내 잘못이야.”
라짜라또의 부채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구조적 문제이다. 현대 세계를 살면서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머릿속에 주입하는 도덕주의적 담론에서 근본적으로 탈피할 수 있는 개인은 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경제적 교환 혹은 상징 교환에만 의존하는 기존의 경제학적 분석은 부채인간이라는 더 큰 개념 아래 새롭게 포괄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경제적 인간의 생산과 실존적 인간의 생산은 분리불가능한 동전의 양면이다. 따라서, 부채인간의 개념은 현대 신자유주의가 그에 적합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의 분석을 위한 도구이다. 달리 말해, 부채인간의 개념은 현대 신자유주의의 비판을 위해 고안된 비판적 인간학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사회보장 연금 신청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회복지 기관의 ‘상담’을 받고 나온 신청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가 내게 주요 관심사나 일생에 하고 싶은 일 혹은 예전에 하던 일을 왜 선택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질문으로 답했죠. “그럼, 당신은 왜 이 복지 기관에서 일을 하기로 선택했나요?” 나는 그녀의 질문이 너무 지나친 질문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내 삶에 대해 그녀에게 이야기해야만 할 의무는 전혀 없는 거죠. […] 그녀가 계속 그런 질문을 고집하는 건, 나에 대해 그녀가 갖는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로부터 그녀가 나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그녀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녀가 보기에 나는 아직 나의 직업, 내 길을 찾지 못한 사람이고, 그저 내가 상황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도록 그녀가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었던 겁니다. 나는 내가 내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고, 나 자신을 정당화해야 하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혀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지요. 그녀는 나를 좀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모든 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제시하는 능력 평가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이에 더하여, 내밀함에 관련된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나는 심도 있는 능력 평가를 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이는 고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정해진 관습대로 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삶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역겨운 용어들을 쏟아 내면서 당신에게 당신의 삶에 대한 심사숙고를 강요한다.”

“수당 수령자는 ‘개별 조사’에서 자신을 설명해야만 하고, 또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주기적으로 자신의 삶과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혹은 지어내고), 그들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해야만 한다. 수당 수령자가 사생활 침해와 개인과 주체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려고 해도, 기관이 강요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노동’에 의해 그는 이 폭력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는 당신의 생각과 삶을 그들의 기준에 맞추어 도덕화하고, 당신은 이에 대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하여, 복지기관과 국가는 당신의 공적 생활은 물론 사생활을 통제하며, 이러한 통제는 당신의 가장 내밀한 곳, 곧 당신의 마음속에까지 이른다.

“더 나아가, ‘신청자의 사생활 염탐’은 복지 기관의 종사자들에 의해 점점 더 빈번히 행해지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내심으로는 가난한 자, 실업자, 임시직 종사자들을 ‘불신’하고, 그들을 ‘사기꾼’ 혹은 ‘모리배’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 기관은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수당 수령자들의 품행을 감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개인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간다. 복지 기관은 수령자의 집에 들어가 생활 방식을 조사하고 질문할 권리를 갖는다. 수당 수령자의 방을 살펴보고 화장실을 들여다보며 칫솔이 몇 개나 있는지 확인한다. 또 전기세와 전화세, 집세 영수증을 요구하고, 그의 생활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특히 그가 혼자 살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만약, 그가 어떤 배우자와 함께 살고 있다면, 이 배우자는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가야만 하는 존재로 가정되기 때문에, 복지 수당은 중단될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 학습의 과정을 거쳐, 당신은 이제 ‘스스로 알아서 하는’ 존재가 된다. 신자유주의는 다름 아닌 당신의 마음, 품행, 일상을 통제한다. 신자유주의는 당신의 사생활, 취미, 습관, 생각, 품행, 태도, 자세, 가치관, 세계관을 새롭게 빚어낸다. 당신은 그들이 제시하는 기준에 맞추어 스스로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일은 당신은 그러한 당신의 삶이 당신 자신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진짜 자기’인 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주체로서 조립ㆍ제조ㆍ생산된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잃고 그저 신자유주의적 가치에 의해 조건화 된 채로 느끼고 생각하는 자동인형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라짜라또는 이렇게 말한다.

“부채의 활동 범위는 단순히 금융과 화폐 정책을 세심히 조작하고 막대한 양의 돈을 굴리는 일에 국한되지 않으며, 사용자의 실존을 생산ㆍ통제하는 기술을 형성ㆍ배치하는 것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경제는 결코 주체를 장악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신자유주의가 당신 앞에 제시하는 삶의 양식을 거부하고 그와는 다른 게임, 다른 삶을 살 수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라짜라또에 의하면 계급투쟁이다. 더하여, 이는 또한 당신의 주체성, 정체성을 위한 투쟁이다.

가장 효과적인 지점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려면 부채에 대한 이 죄책감을 극복해야만 한다.

“이 죄책감은 신에 대한 부채가 아닌, 지상의 부채, 우리의 지갑을 짓누르고, 우리의 주체성을 조정하며 포맷하는 부채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부채를 탕감하거나 파산 신청을 내는 것이 아니라, - 이런 일들이 매우 유용할 때조차도 - 우리를 가두고 있는 담론 및 부채의 도덕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일이다. 우리는 부채에 대해 우리를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우리를 잃었다. 모든 정당화는 이미 당신을 죄인으로 만든다! 이 2차적 순수를 정복하고, 모든 죄책감과 의무,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단 한 푼도 상환해서는 안 된다. 부채를 없애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돈을 상환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재앙으로 몰아넣는 권력장치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과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와 권력의 문제이다. 이것은 시혜와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과 투쟁의 문제이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가타리의 말을 인용하여, 당신이고 나인, 그리하여 우리 모두인, 대한민국의 모든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 곧 그들의 단어로는 ‘열등생들’에게 건네는 이런 한 마디 말을 상상해본다.

“당신은 대한민국의 열등생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당신의 장점이다. 다행히도,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당신과 같은 열등생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 열등생들은, 때로는 명시적으로 또 때로는 암묵적으로, 자신에게 강요되는 이른바 ‘정상화’ 계획을 거부한다. 당신이 계속해서 불량 학생으로 남아 있기를, 그리고 우리가 좋은 친구들로 남아 있기를!”

2012년 9월 13일,

옮긴이들을 대표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