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1.

15. 이 사람을 보라/반시대적 고찰

*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니체전집 15. 바그너의 경우ㆍ우상의 황혼ㆍ안티크리스트ㆍ이 사람을 보라ㆍ디오니소스 송가ㆍ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책세상, 2002.
 

* 「이 사람을 보라.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 Ecce Homo」, 1889.
  
서문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바그너의 경우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 서문

 
2. [...] 인류를 ‘개선’한다는 따위는 나는 결코 약속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떠한 새로운 우상도 일으켜 세우지 않는다: 옛 우상들은 진흙으로 만든 다리가 무엇인지 알게될 것이다. 우상(‘이상’을 표현하는 내 단어)의 파괴 - 이것은 이미 내 작업의 일부이다. 이상적 세계가 날조되었던 바로 그 정도만큼, 실재와 가치와 의미와 진실성은 사라져버렸다 ...... ‘참된 세계’와 ‘가상 세계’ - 사실대로 말하자면: 날조된 세계와 실재 ...... 이상이라는 거짓말은 이제껏 실재에 대한 저주였고, 이 거짓에 의해 인류의 가장 심층적인 본성마저도 부정직해지고 그릇되어버려 - 인류는 그들의 성장과 미래와 미래에 대한 고도의 권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가치와는 정반대되는 가치를 숭배하기에 이르렀다(324).
 

3. [...]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얼음과 높은 산에서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삶의 낯설고 의문스러운 모든 것을, 이제껏 도덕에 의해 추방당해왔던 모든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금지된 것들 사이에서 그렇게 방랑했던 내 오랜 경험에 의해, 나는 지금까지 도덕화와 이상화를 행했던 원인들을 그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 철학의 숨겨진 역사, 철학이라는 위대한 이름의 심리가 내게 분명해졌다. - 어떤 정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는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 이것이 나에게는 점점 진정한 가치 기준이 되었다. 오류(-이상에 대한 믿음-)는 맹목이 아니다. 오류는 비겁이다. ...... 인식의 모든 성과와 발전은 용기에서, 자신에 대한 엄격과 순수함에서 나온다... [...] (325).
  
4. - 내 작품 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독보적이다. 이 책으로 나는 인류에게 지금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 여기서는 광신자가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설교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믿음이 요구되지 않는다 [...] 그는 다르게 말할 뿐만이 아니다. 그는 다른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홀로 가련다! 너희도 각각 홀로 길을 떠나라!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 맞서라! 더 바람직한 것은: 그의 존재를 부끄러워 하라! 그가 너희를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인식하는 인간은 자신의 적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벗을 미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 하지 않는가?
너희는 나를 숭배한다: 하지만 어느 날 너희의 숭배가 뒤집히게 되면 어찌할 것인가? 신상에 깔려죽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너희는 차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하는가?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뭐 중요하단 말인가! 너희는 나의 신도다. 하지만 신도가 뭐 중요하단 말인가!
너희는 너희 자신을 아직도 찾아내지 않고 있었다: 그때 너희는 나를 발견했다.
신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모양이다: 그러니 신앙이란 것이 하나같이 그렇고 그럴 수밖에.
이제 너희에게 말하니, 나를 버리고 너희를 찾도록 ㅎ라; 그리고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할 때에야 나는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
 

프리드리히 니체 (326-328)
  
* 어찌 내가 나의 온 생애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나의 삶을 이야기한다(330).
 

*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1. [...] 내 독자들은 내가 어떤 점에서 변증법을 데카당스(頹廢, decadence)의 징후로 고찰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가장 유명한 경우를 예로 들면서: 즉 소크라테스의 경우를. 지성의 온갖 병적인 장해, 심지어는 열광을 수반하는 반마취 상태는 나에게는 오늘까지도 철저히 낯설며 [...].


병자의 광학으로부터 좀 더 건강한 개념들과 가치들을 바라본다든지, 그 역으로 풍부한 삶의 충만과 자기 확신으로부터 데카당스 본능의 은밀한 작업을 내려다본다는 것 - 이것이 나의 가장 오랜 연습이었고, 진정한 경험이었다. 어딘가에서 내가 대가가 되었다면, 바로 여기서다. 이제 나는 관점을 전환할 근거를 가지고 있고, 관점을 전환할 도구를 가지고 있다: 왜 오로지 나에게만 ‘가치의 전환’이 도대체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첫 번째 이유이다. - (332-333)
 

2. 내가 데카당(decadent)이라는 사실은 별도로 하고, 나는 데카당의 반대이기도 하다. [...] 나는 총체로서 건강했으나, 특정한 각도로서나 특수한 면에서는 데카당이었다. [...] 나는 내 자신을 떠맡아, 내 스스로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었다: 그럴 수 있었던 전제 조건은 - 모든 생리학자가 인정할 것이지만 - 사람들은 근본적으로는 건강하다는 사실이었다. [...] 내 건강에의 의지와 삶에의 의지를 나는 나의 철학으로 만들었다. [...] 그[제대로 잘된(Wohlgerathenheit) 인간]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 그가 선택의 원칙이고, 그는 많은 것을 버려버린다. 그가 교제하는 것이 책이든 사람이든 지역이든 그는 언제나 자기의 사회 안에 처해 있다: 선택하면서, 용인하면서, 신뢰하면서 그는 경의를 표한다. [...] 그는 ‘불행’도 ‘죄’도 믿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잘 조절하며, 잊어버릴 줄도 안다 - 그에게는 모든 것이 최대한 제공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는 충분히 강하다. - 자, 나는 데카당의 반대이다: 다름 아닌 나 자신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진술한 것이니(334-335).
 

3. [...] 여기서 나는 혈통 문제를 언급하려 한다. 나는 나쁜 피는 하나도 섞이지 않고 독일 피는 거의 섞여 있지 않은 폴란드 정통 귀족이다. 나와 가장 철저하게 대립하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스러운 본능을 찾아보게 되면, 언젠가 나는 내 어머니와 여동생을 발견한다 - 이런 천민들과 내가 친족이라고 믿는 것은 나의 신성함에 대한 하나의 불경이리라. 내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를 대했던 것에 관한 내 경험은 지금 이 순간에까지도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공포를 내게 불러일으킨다: 이럴 때, 하나의 완벽한 시한폭탄이 작동을 시작한다. 그것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람들을 피투성이로 만들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 내 최고의 순간에 말이다 ... 내게는 독벌레에 저항할 힘이 없기에 ... 그들과 나와의 생리적인 근접이 그런 예정된 부조화를 가능케 했다 ... 하지만 고백하거니와 나의 진정한 심연적 사유인 ‘영원회귀’에 대한 철저한 반박은 언제나 어머니와 여동생이다. [...] 사람들은 자기 부모를 가장 적게 닮는다: 자기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비천함을 표현해주는 가장 강력한 표시이다(336-337).
 

6. 원한에서 해방되고, 원한의 진상을 규명했다는 것 - 결국 내가 이런 점 때문에 내 오랜 병에 얼마나 감사해야만 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 병들어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일종의 원한이다. [...] 원한은 병자에게는 그 자체로 금물이다 - 이것은 그에게는 악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가장 자연적인 성향이기도 하다. - 심오한 생리학자인 부처는 이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종교’를 그리스도교 같은 비참한 것들과 섞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생법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불교의 효력과 원한에 대한 승리는 상호 의존적이다: 불교는 영혼을 원한으로부터 아예 해방시켜버린다 -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회복에 이르는 첫걸음인 것이다. “적대는 적대를 통해서는 종결되지 않고, 우호를 통해서 종결된다”: 이것이 부처의 가르침에서 서두를 차지하고 있다 - 도덕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리학이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341-342)
 

8. 내게 인간과의 교제는 내 인내심에 대한 작지 않은 시험인 것이다: 내 인간애는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내가 그들과 공감한다는 것을 참아내는 데 있다 ... 내 인간애는 끊임없는 자기 극복이다. - 하지만 나는 고독이 필요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게는 회복, 내 자신에게로 되돌아옴, 자유롭고 가볍게 유희하는 공기의 숨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346).
 

*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1. [...] 양심의 가책에 대해 들리는 말에 의거해보면, 그것은 별 주목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것 같다 ... 나는 어떤 행위를 취한 다음 그 행위를 돌보지 않은 채 그냥 떠나버리고 싶지 않다. 나는 어떤 행동의 나쁜 결과나 귀결들을 가치문제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것을 선호한다. 나쁜 결과들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너무나 쉽사리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이란 내가 보기에는 일종의 ‘사악한 시선’인 것 같다. 실패한 것을 그것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인해 더욱 중히 여긴다는 것 - 오히려 이것이 내 도덕에 속한다. - ‘신’, ‘영혼불멸’, ‘구원’, ‘피안’은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조차도 주목하지도 시간을 투자하지도 않았던 개념들이다 - 내가 정녕 어린아이답지 않았던 것일까? - 나는 무신론을 결코 결과라고는 이해하지 않는다. 사건으로서는 더더욱 아니다: 무신론은 내게서는 즉각적으로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너무 호기심이 많고, 의문이 많으며, 오만하여 조야한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다. 신이란 하나의 조야한 대답이며, 우리 생각하는 사람들의 구미에는 맞지 않는다 - 심지어 그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조야한 금지를 하는 것일 뿐이다: 너희는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를 말이다 ... 나는 완전히 다른 문제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데, 그것은 ‘인류의 구원’이 신학자의 어떤 기묘함에 보다도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문제이다: 영양 섭취라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사용할 수 있게끔 정식화시켜보면: “네 힘의 극대화에, 르네상스 양식의 덕의 극대화에, 허위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운 덕의 극대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너는 어떤 영양 섭취를 해야 하는가?”(349-350) [...] (1866년이 나의 전환점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 (351)
  
2. 영양 섭취의 문제는 장소풍토 문제와 가장 유사하다. 어디서든지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풍토는 신진대사에, 그 방해와 촉진이라는 면에서 아주 큰 영향을 끼친다. 장소와 풍토 선택에 실패하는 자는 자기 과제에서 멀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아예 과제가 억류당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그 과제가 그에게 알려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 ‘정신’ 자체가 진정 신진대사의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353-354)
 

3. 영양 섭취의 선택; 풍토와 장소의 선택; -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결코 실책을 범해서는 안 되는 세 번째 선택은 자기 자신의 휴양을 취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356)
 

4. [...] 나는 세익스피어보다 더 가슴을 찢는 비통한 작품을 알지 못한다: 어릿광대에야 할 필요가 있었던 그 인간은 어떤 고통을 겪어야 했단 말인가! - 햄릿을 이해하겠는가? [인간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이다 .... 하지만 그렇게 느낄 수 있으려면 깊이가 있어야만 하고, 심연이어야만 하며, 철학자여야만 한다 ... 우리 모두는 진실을 두려워 한다 ... (360-361)
 

8. 이 모든 것에서 - 영양 섭취, 장소와 풍토, 휴양의 선택에서 - 자기 방어 본능으로서 스스로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자기 보존 본능이 명령을 내린다. (366)
 

9. 이 대목에서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진정한 대답을 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로써 나는 자기 보존 기술의 걸작을 잠시 언급하게 된다 - 즉 이기적임을 ... 자기의 과제, 천명, 과제의 운명이 평균적인 대중을 넘어서고 있다고 상정해보면, 이 과제를 지니고 있는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은 자기 모습이 되는가는 자기가 본래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희미하게라도 예측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삶의 실책들마저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369).
 

10. [...] 나는 위대한 과제를 대하는 방법으로 유희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위대함의 징표이자, 본질적인 전제 조건이다. [...] 인간에게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운명애(amor fati)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필연적인 것을 단순히 감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은폐는 더더욱 하지 않으며 -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는 허위다 -,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 ...... (373-374)
 

*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1. 나와 내 작품들은 별개다. - 내 작품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기서 나는 그것들이 이해되고 있다는, 혹은 그것들이 이해되지 못한다는 문제를 다루어본다. [...] 나 자신의 때도 아직은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 언제가는 내가 이해하는 사람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살도록 하고 가르치게 될 기관들이 필요할 것이다: 심지어는 『차라투스트라』를 해석해내는 일을 하는 교수직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진리들을 위한 귀와 손들을 벌써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리라. 오늘날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일일 뿐만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정당한 것 같다. 나는 혼동되고 싶지 않다 - 나 자신에 의해서도. [...]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 단계에 ‘현대’ 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거리감을 느끼면서 내가 어찌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 읽히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나의 승리는 쇼펜하우어의 승리와는 정반대다. - 나는 “나는 읽히지 않는다, 나는 읽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내 작품을 부정하는 순수함이 내게 여러 번 주었던 즐거움을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무게 있는, 너무나 무게 있는 나의 작품에 의해 작품들 전체의 평형 상태를 깨버릴 수 있었던 이 여름에도, 베를린 대학의 한 교수는 내가 다른 형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호의적으로 암시했었다: 그런 것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이 얻어들을 수는 없는 것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 가장 단적인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책에서 자주 일어나거나 아니면 드물게라도 일어나는 경험의 가능성에서 전적으로 벗어나 있는 경험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치자 - 일련의 새로운 경험들에 대해 처음으로 말하고 잇다고 치자. 이런 경우에는 전혀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착각이 인다 ... 이것이 결국 내 평균적인 경험이며, 원한다면 내 경험의 독창적인 면이라고 불러도 좋다. 나에 대해서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믿던 자가 했던 일은, 나에게서 자기의 상에 맞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 나와는 반대되는 것을, 이를테면 ‘이상주의자’를 만들어내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375-377).
 

5. 내 작품들에서 는 비교할 만한 상대가 없는 심리학자 한 명이 말하고 있다는 통찰. [...] 통속 철학자들이나 도덕주의자들이나 여타의 속이 텅 빈 자들이나 바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근본적으로 온 세상이 동의하는 명제들이 - 내 작품 안에서는 순진한 실책으로 드러난다: ‘이기적’과 ‘비이기적’이 반대라는 명제는 그 예이다. 자아 자체는 ‘고등 사기’의 하나이자 ‘이상’일 뿐이니까 ... 그래서 이기적 행동이란 것은 없으며, 비이기적인 행동도 없다: 두 개념이 다 심리적인 자가당착인 것이다. 또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명제 ... “행복은 덕에 대한 보상이다”는 명제 ... 또는 “쾌와 불쾌는 반대다”는 명제도 마찬가지다 ... 인류의 키르케(Kirke)인 도덕이 모든 심리적인 것들을 철저히 왜곡해버린 것이다 - 도덕화시켜버린 것이다 - 사랑이란 것이 ‘비이기적’이어야 한다는 섬뜩한 난센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 내 도덕 법전으로부터 악덕에 관한 한 항을 옮겨보겠다: 악덕이란 말로 나는 모든 종류의 반자연에 대한 싸움을 벌인다. 아름다운 말을 더 좋아한다면 이상주의에 대한 싸움을 벌인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아무튼 그 항의 구절은 이러하다: “순결에 대한 설교는 반자연으로의 공공연한 도발이다. 성생활에 대한 모든 경멸, 성생활을 ‘불결하다’는 개념으로 것은 다 삶에 대한 범죄 자체다 - 삶의 성령에 대한 진정한 죄이다.” - (386)
 

* 비극의 탄생(1872)
 

1. [...] 사람들은 그 책에서 바그너의 예술과 의도와 과제에 대한 하나의 정식을 듣는 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 그 책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으로 가치 있는 점은 흘려듣고 만다. “그리스 정신과 염세주의”: 이것이야말로 그 책에 대한 좀더 명료한 제목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그리스인들이 염세주의를 잘 해결했는지를 최초로 알려주는 가르침으로써 - 무엇을 가지고 그들이 염세주의를 극복했는지에 대한 가르침으로써 말이다 ... 비극이야말로 그리스인들이 염세주의자들이 아니었다는 점에 대한 증거이다. [...] 거기서는 하나의 ‘이념’이 - 디오니소스적과 아폴론적이라는 대립이 -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옮겨졌다; 역사 자체가 이 ‘이념’의 전개 과정이며; 비극에서 그 대립이 통일로 지향된다 [...] 이 책에는 결정적으로 두 가지 새로운 점이 있다. 그 하나는 그리스인들에게서의 디오니소스적 현상에 대한 이해이다: 이 책은 그것에 대한 최초의 심리학이며, 그 현상을 그리스 예술 전채의 한 가지 뿌리로 본다. 또 다른 새로운 점은 소크라테스주의에 대한 이해이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를 그리스 용해의 도구이자, 전형적인 데카당으로 최초로 파악해냈다. 본능 ‘이성’. 그 어떤 대가를 치르든 ‘이성!’ 이라는 것이 위험하고도 삶을 파괴해버리는 힘이라는 것. 그 책 전체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적 침묵이 흐른다. 그리스도교는 아폴론적이지도 않고 디오니소스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미적 가치를 부정한다 - 『비극의 탄생』이 인정하는 유일한 가치를 말이다: 그리스도교는 가장 심층적인 의미에서 허무적이다. 디오니소스적 상징 안에서는 긍정이 그 궁극적인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는 반면 말이다. (389-391)
 

2. [...] 도덕 자체가 데카당의 징후라는 것은 인식의 역사에서 새롭고도 유일한 제1급 인식이다. [...] 나는 진정한 대립을 최초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 삶에 대해 가장 지하적인 복수욕을 가지고 저항하는 퇴화하는 본능(- 그리스도교, 쇼펜하우어의 철학, 어떤 의미로는 이미 플라톤 철학도 그렇고, 이상주의 전체가 그 전형적 형태다), 그리고 충만과 과잉에서 태어난 최고의 긍정 형식, 고통 자체와 죄 자체와 삶 자체의 모든 의문스럽고 낯선 것들에 대한 아무런 유보 없는 긍정이라는 대립을 말이다 ... 이 두 번째 것, 즉 삶에 대한 가장 즐겁고도 가장 충일하면서도 들뜬 긍정은 최고의 통찰일 뿐만 아니라, 진리와 학문에 의해 가장 엄격하게 확인되고 유지되는 가장 심오한 통찰이다. 존재하는 것에서 빼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없다. (391-392)
 

3. 이렇게 해서 내가 어느 정도로 ‘비극적’이란 개념을, 비극의 심리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결정적인 인식을 발견했는지에 대해서는 『우상의 황혼』, 139쪽[184-185쪽]에서 표명한 바 있다.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한다;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희생시키면서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 - 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나는 비극 시인의 심리에 이르는 다리로 이해했다. 공포와 동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아니고, 위험한 감정을 격렬히 방출시켜 그 감정에서 자기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공포와 동정을 넘어서서 파괴시의 기쁨도 포함하고 있는 생성에 대한 영원한 기쁨 그 자체이기 위해서이다 ...” 이런 의미에서 나느 나 자신을 최초의 비극적 철학자로서 - 말하자면 염세적 철학자에 대한 극단적 대립이자 대척자로서 이해할 권리가 있다. 나 이전에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이렇게 철학적 파토스로 변형시키지는 않았었다: 비극적 지혜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 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두 세기 간의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 그런 지혜를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내가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그의 곁에서 더 따뜻하고 좋은 기분을 느끼는 헤라클레이토스만큼은 약간의 의문점이 남아있다. 디오니소스적 철학의 결정적인 면, 즉 유전과 파괴에 대한 긍정, 대립과 싸움에 대한 긍정, 생성, ‘존재’ 개념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까지 - 이런 점에서 나와 그는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가장 유사하다는 점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원회귀’에 대한 가르침, 즉 무조건적이고 무한히 반복되는 만사의 순환에 대한 가르침 - 차라투스트라의 이 가르침은 결국 헤라클레이토스가 먼저 가르쳤을 수도 있었으리라.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그들의 거의 모든 근본적인 생각들을 물려받았던 스토아학파는 적어도 그 흔적은 갖고 있다. -”(393-394)
 

4. 이 에세이[『비극의 탄생』]에서 심리학적으로 결정적인 곳에서는 전부 내가 그 이야기의 대상이며 - 그 텍스트에서 바그너라는 단어가 나오면, 거기에 내 이름이나 ‘차라투스트라’라는 단어를 한 점 주저함이 없이 세워도 무방하다. [...] 그 에세이에서 미리 고지되고 있는 것들은: 그리스 정신의 회귀가 가까이 있다는 것, 알렉산더가 풀어놓았던 그리스 문화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다시 묶는 알렉산더의 반대자들이 필연적이라는 것 등이다 ... (395)
 

* 반시대적 고찰
 

1. 네 편으로 된 『반시대적 고찰』은 전적으로 호전적이다. [...] 첫 번째 공격(1873)은 내가
그 당시 이미 사정없이 경멸하며 얕보았던 독일 교양으로 향했다. [...] 두 번째 반시대적 고찰(1874)은 우리 학문 경영 방식의 위험한 요소, 삶을 갉아먹는 요소, 삶을 독살하는 요소를 백일하에 폭로하고 있다 - : 거기서의 탈인간적인 톱니바퀴와 메커니즘으로 인해, 노동자의 ‘인격화’로 인해, ‘노동분업’이라는 잘못된 경제학으로 인해 삶은 병이 든다. 목적이 상실되고, 문화가 상실되어 간다: - 이렇게 만드는 수단이 현대적 학문 경영은 야만화된다 ... 이 에세이는 금세기의 긍지인 ‘역사적 감각’이 최초로 병증으로서, 퇴락의 전형적 징후로서 간파되었다. - 세 번째네 번째 반시대적 고찰은 고급한 문화 개념을 향한, ‘문화’ 개념의 재건을 향한 힌트로서 가장 엄격한 자기 사랑자기 도야라는 두 가지 상을 제시한다. 이것들은 전형적인 반시대적 유형들로, 이것들을 둘러싸고 있던 ‘독일제국’, ‘교양’, ‘그리스도교’, ‘비스마르크’, ‘성공’ 등으로 불리던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 경멸로 가득 차있다. - 쇼펜하우어와 바그너 혹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니체이다 ... (397-398)
 

2. 교양 속물(Bildungsphilister) [...] 맥줏집 복음. [...] 나는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이다 -. (398, 401)
 

3. 근본적으로 나는 이 에세이를 가지고 심리학과는 다른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다: - 그래서 비할 바 없이 중요한 교육 문제, 가혹할 정도의 자기 도야자기 방어라는 새로운 개념, 위대함과 세계사적 과제로 향하는 길에 대한 표현이 최초로 요청되었던 것이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두 속편들.
 

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어떤 위기의 기념비이다. 이 책은 자유정신들을 위한 책이라고 자칭한다: 그 책의 거의 모든 문장이 승리를 표현하고 있다 - 나는 이 책을 통해 내 본성에 속하지 않는 것들에서 나를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 제목은 “너희가 이상적인 것들을 보는 곳에서, 나는 - 인간적인, 아아, 인간적인 것만을 본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인간을 더 잘 알고 있다 ... ‘자유정신’이라는 말은 여기서 어떤 다른 의미로도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유정신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시 소유하는 자유롭게 된 정신인 것이다. [...] 이것이 진정 진보였다 - 나로의 진보다. (404-405)
 

4. 병증이 서서히 나를 분리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를 격렬하지 않게, 모든 난폭하고도 충돌적인 행보를 하나도 하지 않게 만들었다. 당시 나는 호의를 잃지 않았고, 더 많은 호의를 얻었다. 마찬가지로 내 병은 내게 나의 모든 습관으로 완전히 되돌아갈 권리를 주었다: 내 병은 망각을 허락했고, 망각하라고 명령했다: 내 병은 내게 조용히 누워 있는 것, 하가로움, 기다림과 인내의 필요를 선사했다 ...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 내 눈이 온갖 책벌레들에 안녕을 고했다. 꾸미지 않고 말하자면: 문헌학에 안녕을 고했다; 나는 ‘책’에서 구제되었으며, 몇 년간 더 이상 독서하지 않았다 - 이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베푼 최고의 은혜였다! - 다른 자아(-즉 독서하는!)의 말을 끊임없이 들어야만 해서, 말하자면 그 밑에 파묻혀 버리고 말이 없어져버렸던, 가장 밑바닥의 자아가 서서히 수줍어하고 미심쩍어 하면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 그리고 마침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삶에서 가장 아팠고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에 내가 느꼈던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나는 결코 가져보지 못했다: 이러한 ‘나로의 귀환’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면 『아침놀』이나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를 보면 된다: 그것은 최상의 회복 그 자체이다! ... 다른 것들은 여기서 파생되는 것들일 뿐이다. - (409-410)
 

6. 그 당시(1876)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어떤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내가 내 과제와 내 과제의 세계사적인 면을 명백히 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 전체가, 특히 아주 명쾌한 몇 부분들이 증언하고 있다. [...] 『도덕의 계보』 서문을 다시 읽어보라. - 거기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대담하고 냉철한 사유가 중의 하나인 『도덕감의 기원에 관하여』의 저자가(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인 니체라고 읽을 것) 인간 행동에 대한 자기의 결정적이고도 통렬한 분석에 의해 이른 자기의 핵심 명제는 무엇인가? “도덕적 인간은 생리적인 인간보다 예지계(睿智界)에 더 근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왜냐하면 예지계란 없기 때문이다 ...” 이 명제가 역사적인 인식의 망치질(가치의 전도라고 읽을 것)에 의해 단단해지고 날카로워지면 언젠가는, 아마도 미래의 언젠가는 - 1890년에는! - 인류의 ‘형이상학적 욕구’의 뿌리를 발본색원하는 도끼가 될 것이다. - 이것이 인류에게 더 많은 축복일지 더 많은 저주일지,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어쨌든 가장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명제로서, 많은 결실을 맺으면서도 동시에 공포스러운 명제이자, 모든 위대한 인식이 갖고 있는 이중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명제이다 ... (411-412)
 

* 아침놀. 편견으로서의 도덕에 관한 사유들.
 

1. 이 책으로 도덕에 대한 나의 전투가 시작된다. “아직은 빛을 발하지 않은 수많은 아침놀이 있다” - 이 인도의 비문이 이 책 출입구에 적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어디서 새로운 아침을, 다시 새로운 아침을 여는 이제껏 발견되지 않았던 은근한 붉은 빛을 찾는가? - 아아, 새로운 날들의 연속과 새로운 날들의 세상 전체를 여는! 그것은 모든 가치의 전도에서이다. 모든 도덕 가치들로부터의 해방에서, 지금까지 부정되고 의심되며 저주받아왔던 모든 것에 대한 신뢰와 긍정에서이다. 이 긍정하는 책은 자기의 빛과 사랑과 부드러움을 순전히 나쁘기만 한 것들에 대한 고도의 권리와 특권을 다시 되돌려준다. (414-415)
 

2. 내 과제는 인류 최고의 자기 성찰의 순간인 위대한 정오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 때 인류는 과거를 회고하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우연과 사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왜?, 무슨 목적으로? 라는 질문을 최초로 전체적으로 제기할 것이다. [...] 도덕 가치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에 도덕 가치의 기원이라는 문제는 내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가장 확실한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성서라는 책 한 권이 인류의 운명에 대한 신의 지배와 지혜에 관해 우리를 최종적으로 안심시켜준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요구는, 의지가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비참한 진리를 등장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다시 번역할 수 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인류는 가장 나쁜 것의 수중에 있었다는 사실로, 인류가 좋은 처우를 받지 못한 자들, 교활하고 복수욕에 불타는 자들, 소위 말하는 ‘성자들’의 세계 비방자와 인간 모독자에 의해 지배당해왔다는 사실로 말이다. 사제가(- 사제가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 철학자도 포함하여) 특정한 종교 집단의 내부에서만 있지 않고, 전반적인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데카당스 도덕, 종말에의 의지가 도덕 그 자체로 간주된다는 것. 이에 대한 결정적 표시는 바로 비이기적인 자에게 어디서든 부여되는 무조건적인 가치와 이기적인 자에게 어디서든 표출되는 적대감이다. [...] - 중심의 상실, 자연적 본능에 대한 저항, 한마디로 ‘무사(無私, Selbstlosigkeit) - 이것이 이제까지 도덕이라고 일컬어졌다 .... 『아침놀』과 더불어 나는 먼저 탈아(脫我, Entselbstung)의 도덕에 대한 전투를 시작했다. - (416-417)
 

* 즐거운 학문. (La gaya scienza)
 

『아침놀』이 긍정을 말하는 책이며, 심오하지만 밝고 호의적이다. 이와 똑같은 말이 『즐거운 학문』에도 최고 의미에서 다시 적용된다: 이 책의 거의 모든 문장에는 심오함과 장난기 어린 좋은 기분이 정겹게 손을 맞잡고 있다. [...] 특히 「미스트랄에게 부침」이라는 마지막 시는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도덕을 넘어서 춤을 추게 하는 자유로운 춤곡으로, 완벽한 프로방시즘이다.. - (417-418)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1. 이 책의 근본 사상인 영원회귀 사유라는 그 도달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은 - 1881년 8월의 것이다. [...] 결국 『즐거운 학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 자체이고, 그 4부의 끝에서 두 번째 장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근본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 그 사이에 또한 「삶의 찬가」가 씌어졌다(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그 악보는 2년 전에 라이프치히의 프리취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것은 그해, 즉 내가 비극적 파토스라고 불렀던 파토스 중의 파토스인 긍정의 파토스가 내 안에 최고로 깃들어 있던 그해의 상태를 알려주는 의미심장한 징후일 것이다. [...] 그 노래는 고통을 삶에 대한 반박으로 여기지 않는다: “네가 내게 줄 행복이 더 이상 없는가. 자, 보라! 아직 네 고통을 갖고 있지 않은가 ...” (419-420)
 

2. 차라투스트라라는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생리적 조건들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그 조건은 내가 위대한 건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개념에 대한 가장 훌륭하고도 개인적인 해명은 『즐거운 학문』 마지막 5부의 한 장에서 해놓았다. (422-423)
 

5. 세 가지 위대함의 원한 (427-428)
 

8. 그[차라투스트라]는 과거의 모든 것들도 긍정하고 정당화하며 구제하기에 이른다. [...] 그리고 만일 인간이 창조하는 자나 수수께끼를 푸는 자가 아니며, 우연을 구제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점을 견뎌낼 것인가? / 과거를 구제하고 일체의 “그랬었다”를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변형시키는 것 - 이것이 내게 구제인 것이다.
 

* 선악의 저편. 미래 철학의 서곡
 

2. 이 책은 본질적으로 현대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은 현대 학문, 현대 예술, 심지어는 현대 정치마저도 제외시키지 않으며, 그 밖에도 현대적이지 않은 현대의 반대 유형인 고귀하고도 긍정하는 유형에 대한 암시 또한 포함하고 있다. 후자의 의미로 보면 이 책은 일종의 귀족학교이다. [...] 여기서는 이 시대가 긍지를 갖는 모든 것을 그런 유형과는 반대의 것이자 거의 무례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유명한 ‘객관성’, ‘고통받는 자에 대한 동정’, 낯선 취향에 대해 굴복해버리고 사소한 사실 앞에서 허리를 굽히는 ‘역사적 감각’, ‘학문성’ 등은 그 예이다. - 이 책이 『차라투스트라』를 뒤따라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책을 생겨나게 한 섭생법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는 엄청난 필요성 때문에 나쁜 습관이 들어버린 눈은 - 차라투스트라는 차르보다 더 멀리 바라본다 - 여기서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것, 우리 시대, 우리 주변을 예리하게 파악하라는 강요를 받는다.
 

* 도덕의 계보. 하나의 논쟁서.
 

이 『도덕의 계보』를 구성하고 있는 세 편의 논문들은 그 표현과 의도와 놀라게 하는 기술면에서 지금까지 쓰인 것들 중 가장 섬뜩한 것이다. [...] 첫 번째 논문의 진리는 그리스도교의 심리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 ‘정신’에서가 아니라, 원한 정신에서 탄생한 것이다 - 그것의 본성상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반동이며, 고귀한 가치의 지배에 맞선 대봉기이다. 두 번째 논문은 양심의 심리를 제공한다: 양심이란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 ‘인간 내부의 신의 음성’이 아니다. - 양심은 더 이상 외부를 향해 폭발할 수 없게 된 다음에 자기를 향해 반전하는 잔인함의 본능이다. 잔인함이 가장 오래되고 가장 떨쳐버릴 수 없는, 문화의 하부 토대라는 것이 여기서 최초로 밝혀지고 있다. 세 번째 논문은 금욕적 이상, 사제적인 이상이 전형적인 해로운 이상이고 종말의지이며 데카당스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이 갖고 있는 거대한이 어디서 유래하는지라는 질문에 답해준다. 그 대답: 보통 믿고 있는 것처럼 신이 사제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이상보다 더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 그 이상이 지금까지의 유일한 이상이어서 그것의 경쟁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를 원하기 때문이다” ... 무엇보다도 그 이상에 반대되는 반대-이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 차라투스트라를 제외하고는. - 사람들은 나를 이해했을 것이다. 모든 가치의 전도를 위한 한 심리학자의 결정적인 세 가지 준비를. - 이 책은 최초의 사제 심리학을 포함하고 있다. (442-443)
 

* 우상의 황혼. 어떻게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지.
 

1. 그 표지에 쓰인 우상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이제까지 진리라고 불리어오던 것이다. 우상의 황혼 - 치장하지 않고 말한다면: 낡은 진리가 종말에 다가간다 ... (443) 선한 인간이란 다름 아닌 옳은 길에 대해 가장 무지했던 자였던 것이다 ... 아주 진지하게 말해서 내 이전에는 누구도 옳은 길을, 즉 위로 향하는 길을 알지 못했다: 나로부터야 비로소 문화의 희망들과 과제들과 예정된 길이 다시 존재하게 되었다 - 나는 그러한 복음을 전파하는 자이다 ... 바로 이 때문에 나는 하나의 운명인 것이다. -- (444)
 

* 바그너의 경우. 한 악사의 문제.
 

1. 음악의 운명으로 인한 괴로움이라고 말했는데, 과연 나는 음악의 어떤 운명 때문에 괴로워한 것일까? 음악이 세계를 미화하고 긍정하는 자기의 특성을 빼앗겨버리고 말았다는 점 - 음악이 데카당스 음악이며 더 이상은 디오니소스의 피리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446)
 

*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
 

1. 나는 내 운명을 안다. [...]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나마이트다. 그렇다고 해도 내 안에는 종교 창시자의 그 무엇도 들어있지 않다 - 종교는 천민의 사건이다. 종교적 인간과 접촉하고 난 후에는 나는 내 손을 닦을 필요를 느낀다 ... 나는 ‘신자’를 원치 않으며, 나 자신을 믿기에는 내가 너무 악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결코 대중을 상대로 말하지 않는다 ... 내가 언젠가 신성하다는 말을 듣게 될까봐 나는 매우 불안하다. [...] 나는 성자이기를 원치 않는다. 차라리 어릿광대이고 싶다 ... 아마도 나는 어릿광대일지도 모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오히려 - 성자들보다 더한 거짓말쟁이들은 없었기에 - 나를 통해 진리가 말을 한다. - 하지만 내 진리는 끔찍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거짓이 진리라고 불리었기 때문이다. - 모든 가치의 전도: 이것이 내 안에서 살이 되고 천재가 되어 있는 인류 최고의 자기 성찰에 대한 내 정식이다. (456-457)
 

3. 바로 내 입에서 나온,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의 입에서 나온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내게 질문이 던져졌어야 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페르시아인의 역사상의 엄청난 독특성을 이루고 있는 것과 내가 말한 차라투스트라는 바로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투쟁에서 사물의 움직임의 본연적인 바퀴를 처음으로 본 사람이며 - 도덕을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즉 힘, 원인, 목적 그 자체라고 옮긴 것이 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본질적으로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숙명적인 액운인 도덕이라는 오류를 창조해냈으며; 따라서 그 오류를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도덕에 대해서 그 어떤 사유가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많이 경험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 역사 전체는 진정 소위 말하는 ‘도덕적 세계질서’라는 명제에 대한 실험적 반박인 것이다 - :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어떤 사유가보다 더 진실하다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의 가르침만이 진실성을 최고의 덕으로 삼았다 - 즉 실재성 앞에서 도피하는 ‘이상주의자들’의 비겁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사유가 전체를 모아놓은 것보다도 더 많은 용기를 지니고 있다. 진리를 말하고 활을 잘 쏘는 것. 이것이 페르시아적 덕이다. - 내가 이해되는가? ... 진실성에서 나오는 도덕의 자기 극복, 도덕주의자들의 자기의 대립물로의 자기 극복 - 내 안으로의 자기 극복 -. 이것이 내 입에서 나온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이다. (459)
 

4. 비도덕주의자라는 내 말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부정을 내포한다. 첫째, 나는 이제껏 최고라고 여겨졌던 인간 유형, 즉 선한 인간, 호의적인 인간, 선행하는 인간을 부정한다; 둘째, 나는 도덕 그 자체로서 행사되고 지배적이 되었던 도덕 유형을 부정한다 - 즉 데카당스 도덕,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교 도덕을. 두 번째 부인을 좀더 결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선의와 호의에 대한 과대평가는 크게 보면 이미 데카당스의 결과로, 약함의 징후로, 상승하고 긍정하는 삶과는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정과 파괴는 긍정의 조건이다. [...] 선한 인간의 존재 조건은 거짓이다 -: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은 현실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보려고-하지-않는다. [...] 선한 인간은 결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선한 인간은 거짓 해안(海岸)과 거짓 안전을 너희에게 가르쳤다; 선한 인간의 거짓 속에서 너희는 태어났고 보호받았다. 모든 것이 선한 인간에 의해 그 근본에 이르기까지 기만되고 비틀렸다. 다행히도 세계는 호의적일 뿐인 무리동물이 자기의 작은 행복을 발견해낼 만한 본능에 기초해서는 건축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무리동물이 되어야 한다고, 푸른 눈을 가지고 호의적이 되어야 한다고, ‘아름다운 영혼’이 도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 - 또는 허버트 스펜서 씨가 바라는 것처럼 이타적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삶에서 그 위대한 특성을 빼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인류를 거세하는 것을 의미하며, 인류를 비참한 중국인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데 바로 그런 것이 추구되어 왔던 것이다! ... 바로 그런 것이 도덕이라 불리었던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선한 인간을 때로는 ‘종말인’이라고, 때로는 ‘종말의 발단’이라고 불렀다; 특히 그는 선한 인간을 가장 해로운 인간 유형으로 여긴다. 이들이 진리미래를 희생시켜 자기네 존재를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460-461)
 

7. 나를 이해했는가? - 나를 구별짓고, 나를 나머지 인류 전체에 대한 예외로 만드는 것은 바로 내가 그리스도교적 도덕을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 그리스도교에 대한 맹목은 범죄 중의 범죄이다 - 에 대한 범죄인 것이다. [...] 그리스도교적 도덕 - 이것은 가장 악의에 찬 형식의 거짓 의지이며, 인류에 대한 진정한 키르케이다: 이것이 인류를 망쳐버린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교를 바라볼 때 나를 경악하게 하는 오류로서의 오류는 그리스도교의 승리가 알게 해주는 바, 즉 정신적인 것에서의 수천 년간의 ‘선의지’와 사육과 분별과 용기의 결여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성의 결여인 것이다. 그리고 반자연 자체가 도덕으로서 최고의 명예를 부여받고, 법칙이자 정언명법으로서 인류 위에 결려 있었다는 완전히 전율스러운 사실이다! ... 한 개인이 아니고 한 민족도 아니라, 인류가 이 정도로 잘못 짚고 있었다니! ... 삶의 최고 본능을 경멸하라고 가르쳤다는 것; 육체를 모독하기 위해서 ‘영혼’과 ‘정신’을 날조해냈다는 것; 삶의 전제인 성에서 어떤 불결한 것을 느끼도록 가르쳤다는 것; 성장을 위해 가장 필요 불가결한 강력한 이기심(- 이 말이 벌써 비방적이다! -)에서 악의 원칙을 찾는 것; 그 반대로 ‘무사’(無私)와 무게중심의 상실과 ‘탈개인화’와 ‘이웃 사랑’(- 이웃 중독!)이라는 하강과 반본능의 전형적 징후에서 더욱 높은 가치를, 아니! 가치 그 자체를 본다는 것! ... 뭐라고! 인류 자신이 데카당이었단 말인가? 인류는 항상 데카당이었단 말인가? - 확실한 사실은 그들에게 데카당스만이 최고의 가치로 가르쳐져 왔다는 것이다. 탈아의 도덕은 전형적인 하강의 도덕이며, ‘나는 몰락한다’는 사실을 ‘너희 모두는 몰락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옮기는 도덕이다 - 그리고 명령으로 옮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 지금까지 가르쳐진 유일한 도덕인 탈아의 도덕은 종말 의지를 누설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심층적으로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인류의 퇴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직자라는 기생충 같은 인간만이 퇴화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런데 이들은 도덕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자기들이 인류의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속였다 - 이들은 그리스도교 도덕에서 그들을 권력에 이르게 해주는 순간을 간파해냈던 것이다 ... 그리고 실제로 통찰은 이러하다: 인류의 교사와 지도자, 신학자 전체가 통틀어 데카당이었다: 그래서 모든 가치를 삶에 적대적인 것으로 전도시켰고, 그래서 도덕인 것이다 ... 도덕의 정의: 도덕 - 에 보복하려는 숨은 의도를 갖고 있는 데카당의 특이한 성질 - 그리고 성공적이었다. 나는 정의에 가치를 부여한다. (464-466)
 

8. 이제껏 진리라고 불리어 온 모든 것이 가장 해롭고 음험하며 가장 지하적인 형식의 거짓임을 깨닫는 것; 인류를 ‘개선’한다는 신성한 구실이 삶 자체의 피를 빨아 삶을 빈혈증을 앓게 만드는 책략임을 깨닫는 것. 흡혈귀로서의 도덕 ... 도덕을 알아차리는 자는, 신뢰받고 있고 또 신뢰받았던 모든 가치가 무가치하다는 것도 더불어 알아차린다; 그는 가장 경외되었던 인간, 심지어는 성스럽다고 말해졌던 인간 유형에서도 더 이상은 존경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 그는 거기서 비할 바 없는 액운과도 같은 불구들만을 본다. 그들이 액운과도 같은 이유는 그들이 현혹했기 때문이다 ... ‘신’ 개념은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 고안되었다 - 이 개념 안에서 해롭고 독성 있고 비방적인 모든 것이, 삶에 대한 불구대천의 적개심 전체가 하나의 경악스러운 단일체가 되었다! ‘피안’ 개념이. ‘참된 세계’ 개념이 고안되었다.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이 세상을 탈 가치화 하기 위해 - 우리 지상의 현실을 위한 아무런 목표도, 아무런 이성도, 아무런 과제도 남기지 않기 위해! ‘영혼’ 개념, ‘정신’ 개념, 결국에는 ‘영혼의 불멸’ 개념도 고안되었다. 몸을 경멸하고, 몸을 병들게 - ‘성스럽게’ - 만들기 위해, 그리고 삶에서 당연히 중요한 것들 모두를, 즉 영양 섭취, 주거지, 정신적인 섭생, 벼의 치료, 청결, 기후 등의 문제들에 형편없이 경솔하게 대처하도록 하기 위해서! 건강 대신 ‘영혼의 구원’ - 이것은 참회의 경련과 구원의 히스테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조울증적 광기이다! ‘죄’ 개념은 그에 따르는 ‘자유의지’ 개념이라는 고문 기구와 함께 본능을 혼란시키기 위해, 본능에 대한 불신을 제2의 본성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기적이지 않은 인간’이라는 개념이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자’라는 개념 안에서는 진정한 데카당스의 표지가, 즉 해로운 것들에 의해 현혹됨, 자기에게-이로운 것을-더 이상-찾을 수-없음, 자기-파괴가 가치의 표시 일반으로, 인간의 ‘의무’와 ‘성스러움’과 ‘신적인 것’으로 되었다! 결국에는 - 이것이 가장 끔찍한 일인데 - 선한 인간이라는 개념은 약자와 병자와 실패자와 자기 스스로 고통받는 자, 즉 몰락해야만 하는 모든 것의 편을 들고 -, 도태의 법칙이 여기서는 어긋난다. 이상은 긍지에 차있고 제대로 잘 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반박에서, 긍정하는 인간과 미래를 확신하며 미래를 보증하는 인간에 대한 반박에서 나왔다 - 이런 인간을 지금은 악인이라고 부른다 ...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도덕으로서 믿어져왔다! - 이 파렴치한 것을 분쇄하라! -- (466-468)
 

9. - 나를 이해했는가? -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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