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9.

『이방인』과 『감시와 처벌』


  
* 유기환, 『알베르 카뮈』, 살림지식총서 51, 살림, 2004.




 
* 사회학 - 재판의 재판
 
<<이방인>>을 통해 카뮈는 어떤 면에서 '재판에 대한 재판'을 시도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방인>>의 법정은 뫼르소가 살인을 했기 때문에 범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이기에 살인을 하게 되었다는 턱없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뫼르소는 살인을 하지 않았더라도 형벌을 받아야 하리라.) 법률상의 범죄는 아랍인 살해이지만, 법정에서 시종 문제가 되는 것은 평소의 도덕성이다.
 
재판의 쟁점을 정리해보자. 뫼르소는 어머니를 왜 양로원에 보냈는가? 왜 어머니의 시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는가? 왜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잠을 잤는가? 왜 장례식 다음 날 해수욕을 갔으며, 거기서 만난 여인과 코미디 영화를 보고 섹스를 즐겼는가? 왜 레몽 같은 패륜아를 친구로 사귀고 추잡스런 정사 사건의 증인 역할을 수락하였는가? ......
 
이 같은 평소의 비도덕성은 그의 살인을 고의적 계획적 살인으로 만든다.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는 뫼르소의 진술은 비웃음을 살 뿐이다. 그날 살해 현장에서의 문제는 단도를 뽑는 아랍인과의 인간적 대결이 아니라 끓는 금속의 바다 위로 불비를 쏟아 붓는 저 태양과의 우주적 대결이었는데도 말이다. 검사의 논고에 따르면 이 사건은 고의성이 전제된 계획적 살인인데, 첫번째 발사와 두번째 발사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그 결정적 증거이다. 게다가 체포된 뫼르소에게서 단 한번도 뉘우치는 기색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이 범죄의 악질성을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결국 <<이방인>>을 정독할 때, 뫼르소가 사형당하는 진정한 이유는 살인이 아니라 기성질서와 고정관념의 위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했기 때문에 기소된 겁니까. 살인을 했기 때문에 기소된 겁니까?"라는 변호사의 외침에 검사는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 어머니를 매장했기 때문에 나는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하는 바입니다."라고 득의마나만하게 대답한다. 이런 판결 기준은 판사, 검사, 변호사, 배심원, 방청객, 기자 등 법정 일반에 의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카뮈는 <<이방인>>을 이렇게 해설한 바 있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결국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이종의 유희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형당했다는 것이다. 어떤 유희? 거짓말하는 유희. 카뮈에게 있어서 거짓말이란 '있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카뮈가 뫼르소를 우리의 분수에 맞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일컫는다면, 그것은 뫼르소가 구원의 사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의 수호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뫼르소가 이방인으로, 급기야 사형수로 단죄받은 진정한 이유는 바로 감정의 은폐 없이 삶의 진실만을 말했다는 데 있다.
 
만일 <<이방인>>의 법정의 잣대로 재자면 <<이방인>>의 등장인물들 중 윤리적 범죄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누구일까?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기에 안전하게 방에 앉아 <<이방인>>의 이방감을 즐기고 있는 우리의 처지 또한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어느날 우리 역시 사람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순간, 그리고 그 진실을 끊임없이 밀고 가는 순간 <<이방인>>의 법정에 서지 말란 법이 어디 있을까? 애초에 탄생이란 것이 우연이고 보면, 또 다른 우연이 우리를 사형으로 몰고간다 한들 뭐 그리 놀라운 게 있을까?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들이 뫼르소를 평온한 수면으로 인도할 수도 있고, 캄캄한 지옥으로 인도할 수도 있는 것처럼 ......"(37~40)
 
- 대강 옳다. 단, 뫼르소가 '진실의 수호자, 구원의 사도' ... 운운하는 부분은 제외하고.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1975), 오생근 옮김, 나남, 2003.




  
“다시 말해 '범죄'의 형식적 정의에 관련된 변화 이상으로, 오히려 그 특질이나 그 성질, 처벌 구성요소의 바탕이 되는 이른바 그 실질이 변화한 것이다. [...] 동시에 사람들은 정념, 본능, 비정상, 불구, 부적응, 환경 혹은 유전의 영향을 재판한다. 사람들은 공격적 행위에 대해 재판하지만, 이를 통해 공격적 성향을 재판하는 것이다. 강간을 재판하지만, 이를 통해 성도덕의 타락을 재판하는 것이고, 살인 행위를 재판하면서 충동이나 욕망을 재판하는 것이다.”(45)
 
“범죄자의 영혼을 재판의 대상으로 삼는 데 과장된 언어가 사용되고, 이해심으로 가득 찬 관심이 기울여지고, 엄청난 '과학적' 열정이 보이는 것은 범죄와 동시에 그 영혼을 재판하기 위해서이고, 처벌에 있어 그 영혼을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이다.”(46)
 
“과거의 150년 또는 200년에 걸쳐 유럽에서는 새로운 형벌 제도가 시행되어 왔는데, 그 이후 점차적으로 매우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온 과정에 의거하여 자판관은 범죄 이외의 것, 곧 범죄자의 영혼을 재판하기 시작한 것이다.”(47)
 
“광기의 문제는 [프랑스 1810년 형법전] 제64조의 본래적 의미에서 중죄를 소멸시키기는커녕,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중죄, 극단적으로는 모든 범죄가 그 자체 속에서 정당한 의혹으로서 그리고 또한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서의 광기의 가설, 비정상의 가설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유죄이든 무죄이든 선고는 단순히 유죄 판결 혹은 처벌을 내리는 법적 결정에 그치지 않는다. 판결은 정상성[규범성]의 평가 및 정상화[규범화] 가능성에 대한 기술적 명령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재판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판사든 배심원이든 '재판'과는 다른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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