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백치, 김근식 옮김, 열린책들.
"흠...! 재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많이 하죠. 그런데 외국에서는 재판이 여기보다 공정합니까?"
"모르겠어요. 나는 우리 나라 재판 제도에 장점이 많다고 들었어요.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는 사형 선고가 없잖아요."
"그럼 외국에선 사형을 합니까?"
"네, 사형하는 걸 프랑스 리옹에서 봤어요. 슈나이더 씨가 나를 그곳에 데리고 갔었어요."
"교수형에 처합니까?"
"아니에요. 프랑스에서는 목을 잘라요."
"그럼 사형수가 울부짖나요?"
"어떻게 그래요? 일순간에 벌어지는데. 사형수를 올려놓자마자 이만 한 작두 날이 기계 장치에 의해 떨어져요. 그 단두대를 기요틴이라고 부르는데 육중한 게 아주 힘이 세답니다... 눈도 깜빡하기 전에 모가지가 떨어져 나가요. 물론 그때까지의 과정이 괴로울 겁니다. 사형 선고문이 공표되고, 사형 도구가 준비되고, 사형수는 포박되어 단두대 위로 올라가게 되지요. 보기만 해도 끔찍해요! 그런데도 군중들이 달려들지요. 심지어는 여자들까지도요. 여자들은 그런 것을 보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데도 말이에요."
"모르겠어요. 나는 우리 나라 재판 제도에 장점이 많다고 들었어요.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는 사형 선고가 없잖아요."
"그럼 외국에선 사형을 합니까?"
"네, 사형하는 걸 프랑스 리옹에서 봤어요. 슈나이더 씨가 나를 그곳에 데리고 갔었어요."
"교수형에 처합니까?"
"아니에요. 프랑스에서는 목을 잘라요."
"그럼 사형수가 울부짖나요?"
"어떻게 그래요? 일순간에 벌어지는데. 사형수를 올려놓자마자 이만 한 작두 날이 기계 장치에 의해 떨어져요. 그 단두대를 기요틴이라고 부르는데 육중한 게 아주 힘이 세답니다... 눈도 깜빡하기 전에 모가지가 떨어져 나가요. 물론 그때까지의 과정이 괴로울 겁니다. 사형 선고문이 공표되고, 사형 도구가 준비되고, 사형수는 포박되어 단두대 위로 올라가게 되지요. 보기만 해도 끔찍해요! 그런데도 군중들이 달려들지요. 심지어는 여자들까지도요. 여자들은 그런 것을 보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데도 말이에요."
"하지만 이 순간 당사자의 영혼 상태는 어떠했겠어요? 그의 영혼은 얼마나 경련을 일으켰겠어요? 그것은 그의 영혼에 대한 모독이지,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에요! <살인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그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그를 꼭 죽여야만 됩니까?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나는 한 달 전에 그 광경을 목격했지만, 지금까지도 내 눈 앞에서 그 일이 어른거려요. 꿈을 꾼 것도 아마 다섯 번쯤 될 겁니다."
"모가지가 날아갈 때 고통이 적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군요." 시종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하지만 문제는 안 그래요!" 공작이 흥분된 소리로 외쳤다. "물론 남들도 다 당신처럼 생각해요. 또한 그런 이유에서 기요틴이란 기계도 고안된 겁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런 처형 방식보다 더 끔찍한 건 없지 않을까? [...] 그런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심한 고통은 아마 육체적인 상처에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은, 아마 당신도 아실 테지만, 한 시간 후에, 그 다음엔 10분 후에, 30초 후에, 그리고 지금 당장, 영혼이 육체에서 날아가 버리고 자기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모두 <분명>하다는 데 있어요. 가장 끔찍한 건 바로 그 확실성입니다. [...] 살인을 했다고 해서 사람들 죽이는 것은 그 범죄에 비해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오. 선고문을 낭독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살인 강도 자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혹한 짓이오. [...] 정말이지, 인간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안 그래요!" 공작이 흥분된 소리로 외쳤다. "물론 남들도 다 당신처럼 생각해요. 또한 그런 이유에서 기요틴이란 기계도 고안된 겁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런 처형 방식보다 더 끔찍한 건 없지 않을까? [...] 그런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심한 고통은 아마 육체적인 상처에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은, 아마 당신도 아실 테지만, 한 시간 후에, 그 다음엔 10분 후에, 30초 후에, 그리고 지금 당장, 영혼이 육체에서 날아가 버리고 자기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모두 <분명>하다는 데 있어요. 가장 끔찍한 건 바로 그 확실성입니다. [...] 살인을 했다고 해서 사람들 죽이는 것은 그 범죄에 비해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오. 선고문을 낭독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살인 강도 자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혹한 짓이오. [...] 정말이지, 인간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 알베르 카뮈, 《단두대에 대한 성찰》, 책세상.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을 인정하자.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저질러진 죄를 단죄하는 형벌은 사실상 복수라고 한다. 이것은 근원적인 법을 위반한 자에게 사회가 가하는 거의 산술적인 응보다. 이런 응보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이름하여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라고 한다. 즉 나를 아프게 한 자는 아픔을 당해야 하고 내 눈알을 뽑아낸 자는 애꾸눈이 되어야 하며 죽인 자는 죽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그것도 유달리 치열한 감정의 문제다. 이러한 반좌법(反坐法)은 본성과 본능에 속하는 것이지 법률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법은 당연히 본성과 동일한 규칙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본성 속에 살인 기질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법률은 이런 본성을 모방하거나 재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법률은 타고난 본성을 교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
우리는 아직도 정의를 어떤 조야한 산술적 규칙에 따라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이러한 산술적인 계산이 적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록 초보적이긴 하지만, 비록 합법적인 복수에 국한된 것이긴 하지만, 정의는 사형 제도에 의하여 지켜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희생자의 죽음을 살인자의 죽음으로 보상하는 것이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인정하기로 해보자. 그러나 사형 집행은 그저 하나의 죽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집단 수용소가 형무소와 다르듯이 사형은 본질적으로 단순한 생명의 박탈과는 다르다. 사형은 분명 생명의 박탈이며, 범한 살인의 대가를 산술적으로 치르게 하는 형벌이다. 그러나 사형 제도는 복수하는 형식을, 장차 희생될 사람이 알고 있는 가운데 공공연히 행해지는 사전 모의를, 그리고 끝으로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정신적인 고통의 원천이 되는 어떤 조직화를 그 죽음에 덧보탠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공평함이란 없다.
처형장까지의 45분 동안, 어쩔 수 없는 죽음의 확실성이 모든 것을 짓뭉개버린다.
* 장 그르니에, 《카뮈를 추억함》,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04.
"그는 늘 인간의 <사법>에 의해 형벌이 가해지는 것에 반대하는 기본적인 반발심을 품고 있었다. 해방 후 어느 날 그는 수없이 벌어지던 이른바 숙청 재판 중 하나를 방청하러 갔다. 그가 보기에 피고는 유죄로 생각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방청석을 떠났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도 연대 책임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그 사람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는 이런 종류의 재판에 다시는 참석하지 않으려 했다. 사형 집행자도 희생자도 없기를! 하고 그는 《전투》에서 역설했다. 어떤 죄인에게도 결백한 부분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67).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