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5.

아버지의 자리




 




우연한 기회에 아니 에르노라는 프랑스 작가의 이름을 몇 번 듣게 되었고, <칼 같은 글쓰기>라는 대담집을 읽고 큰 흥미를 느껴, 현재까지 소설 <단순한 열정>과 <남자의 자리> 두 권을 읽었다. 놀랍다. 불가능하리라고 여겨졌거나,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 그녀에게는 가능한 문학이 되었다. 앙드레 브르통의 <나쟈>에서 사르트르의 <구토>까지 그녀는 실로 '오늘'을, '현대 소설'을 다시 쓴다. 문학이란 이런 것이라거나, 이런 것이라야만 한다는 말은 도대체 누가 정한 것이었던가?


***



"이렇게 한번 설명해 보련다. 글쓰기란 우리가 배신했을 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이다. - 장 주네"(5)



"'운명이야......' 이것이 이 모든 것에 대한 감정이었다."(51)



"나는 여기서 자주 '우리'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나 역시 오랫동안 이런 방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걸 언제 멈추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65)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예절 바르게 대하는 모습은 내게는 오랫동안 신비로 남아 있었다. 또 나는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들이 간단한 인사말을 건넬 때에도 극히 부드러운 어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어조의 인사말을 듣게 되면 난 부끄러웠다. 난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내게 어떤 특별한 호의를 품고 있다고 상상하기까지 했다."(78-79)



어느날,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책이나 음악은 너한테나 좋은 거다. 난 사는데 그런 거 필요 없다."(92)



"그동안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으니, 잊어버린 사실들을 되살려 내는 일은 이야기를 새로 지어 내는 일만큼 쉬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112-113)



"내가 부유하고 교양잇는 세계에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내려놓아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작업을, 난 이제 이렇게 끝냈다."(125)



"아버지 자신을 멸시한 세계에 딸인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버지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아버지 삶의 이유였는지도 모른다."(127)



***



"이 소설로 수업을 한 적이 있다. 발표를 하던 학생이 말했다. '저는 그저 좋은 소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제 책을 빼앗아 읽으시던 어머니가 많이 우셨어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깊이 이해되는 이 슬픔은 핏줄의 정서가 불러오는 원시적 슬픔이 아니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부모들에게 헌정하는 슬픔도 아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삶과 문화를 위해 자신이 살아온 삶과 몸 담았던 문화를 하나씩 하나씩 부정해야 했던, 자기를 바친 것이 아니라 없애 버린 사람들의 운명이 거기 있다. - 고려대 불문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황현산"(책의 뒤표지)




***
 



그렇다. 삶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삶. 객관적 합리성이 아니라, 상황의 합리성이다. 말이 삶을 실현하지 못한다면? 언어와 진실? 물론, 층위가 다르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다.



그 기억에 더하여, 내가 어린 시절 아니 에르노와 똑 같이 '지성의 세계'에 들어가면서(그녀는 '지적 속물의 세계'에 들어갔다, 그 점이 나와의 차이점이다) 내가 그들(부르크하르트나, 토마스 만, 존 스튜어트 밀)과는 아예 처음부터 '출신', '가문'이 다르다는 지독한 '가문의 지적 컴플렉스'에 시달렸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난 언제나 이런 사람들을 나의 경쟁 대상이자, 나의 진정한 친구, '나와 같은 피를 나눈 자들'로 생각했다. 그들은 단지 자신만이 아니라 아버지, 아버지도 아니라 할아버지, 아니 그 저 윗세대부터 원래 학자요 교수요 석학 집안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나 같은 '천출'(賤出)이 아니었다). 컴플렉스의 한 궁극은 가히 '지적 컴플렉스'가 아닐까?



글로, 말로 하지 않은 모든 것이 사실상 '무의식'이다.





댓글 5개:

  1. 이 글을 읽고 무조건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책 표지도 무척 맘에 들엇거든요)구입해 읽었습니다. 책을 덮고 부지런히 다음책을 주문해 단순한 열정을 읽었습니다.
    어떤 책을 읽으며 작가가 써 놓은 그 무엇이라도 이렇게 속속들이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이 예전에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작가의 다른 책들도 모두 읽어볼 예정입니다.
    아니 에르노 식으로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아무에게 보여줄 수 없다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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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 그러시다니 듣기에도 즐겁네요. 아니 에르노는 거의 소설과 르포의 정의 자체를 바꾸는 중요한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에게, 있었던 그대로를, 오갔던 그 말 그대로, 다시 온전히 복원한다는 어찌 보면 무식하고, 어찌 보면 무서운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뱀발. 저는 아니 에르노 책을 중고로만 구해서 아직 위의 세 권밖에 못 읽은 것인데, 더 구해서 보시고 나면 제게도 좀 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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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며칠전에 학교 도서관에 갔는데, 니콜라이 고골을 다 읽고.....논술과 철학교실2를 다시 꺼내어 정리하는데 머리에 쥐가 나더군요.... 뭐 괜찮은책 없을까 하다가 갑자기 이 글이 생각 났어요. 대출해서 천천히 읽었는데, 마지막이 기억에 많이 남더군요

    "내가 부유하고도 교양 있는 세계에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내려놓아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작업을, 난 이제 이렇게 끝냈다."

    신비한 경험이었어요. 뭔가 말하는것 같지만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 같지만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

    제게는 아버지의 자리가 애시당초 빨리 사라져서, 그런거 없고, 이제는 무덤덤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빈 자리'가 다른 방식으로 효과를 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배우지 못한 다 자란 남성의 모습을 "모방하고자 하는" 일종의 지옥을 만들어 냈다고 해야 할까요? 결국에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가족이 엄청난 조건이 되었던 것 같은데, 저는 그걸 되게 부정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부정을 통해, 삶을 재편하고 원하는대로만 보고, 원하는대로만 움직이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기꺼이 잊고자 했지만, 결국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떠오르면, 그걸 아예 인식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왜 괴로운지도 모르고, 그냥 괴로워만 하고. 그렇게 생각속에서만 갇혀 살았던 것 같네요.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왜 내 이야기만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왜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는지. 결국에 '아버지의 빈 자리'라는 조건을 통해 제가 겪었던 여러가지 일들의 실마리를 풀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읽는건 문제가 안되는데 생각보다 어려운책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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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블로그 댓글 사상 최대의 분량 ... 그렇구나. 괜찮다, 다 그럴만 하니까 그랬던 거고, 나도 그렇고 부모로부터 고통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물론 내가 너만 하겠냐만), 그리고 이게 시간이 걸려도 보통 엄청 걸리는 일이 아닌데 이렇게 일찍 시작을 하니, 부럽기도 하고, 고생길 창창이라는 생각도 들고, 여튼 늘 그렇듯이 건투를 빈다. 그리고 이 아니 에르노라는 사람, 난 (문학적으로 좋은 의미의) 엄청난 괴물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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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뭔가 이런 말씀을 기대하고 쓴건 아니었지만, 늘 그렇듯 이번에도 고맙습니다. 정말 좋은 기회였어요~ㅎㅎ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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