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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14.

동물해방


 
‘동물해방’을 바라보는 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의 옹호』
 
 
 
1792년 오늘날 ‘여성 인권운동 이론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영국의 작가ㆍ철학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는 『여권의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라는 제명의 책을 출간했다.
 
   
 
 
 
존 오파이가 그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초상(1797)
 
                                   





   
 
- 『여성권리의 옹호』, 1792년 미국 판의 표지
 

 
 
최근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이 책의 주된 논지는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여성이 남성보다 선천적으로 열등한 것이 아니며 다만 교육의 부재가 그러한 결과를 불러왔을 따름이고, 따라서 사회는 여성에게 교육의 평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일견 평범한 주장이다. 계몽주의 및 영국의 전통적인 경험주의적 사고에 기반한 공리주의적 경향의 이 저작은 결국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이른바 ‘선천적인’ 차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후천적인’ 교육의 존재 여하에 따라 남여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각각의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하나의 ‘인간’인만큼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정치ㆍ경제ㆍ문화ㆍ교육 등등의 제반 사회적 권리 및 의무의 측면에서 차등을 둘 수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논지의 핵심은 여성과 남성이 모두 동등한 인간으로서 동등한 이성 혹은 합리성과 감수성을 자연적으로 타고나므로 남여가 동등한 교육에 의해 이러한 자연적 권리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사회가 여성들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테일러의 『수권(獸權)의 옹호』

 
 
그러나 사실상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의 주장은 당시 보수적이며 남성중심주의적인 18세기 말의 영국사회에서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모하고도’ ‘비합리적’ ‘비상식적인’ 주장으로 치부되었고, 그 결과 저작은 엄청난 비판과 비난에 직면했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권의 옹호』, 손영미 옮김, 한길사, 2008.
 
 
 
그러한 비난 혹은 비판의 일환으로, 이 책이 출간된 같은 해에 영국에서는 『수권(獸權)의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Brutes)라는 익명의 ‘풍자서’(?)가 출간되었다. 책의 저자는 오늘날 그 책의 저자는 캠브리지 대학의 저명한 철학자 토마스 테일러(Thomas Taylor)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이른바 ‘당시 영국 혹은 유럽 제도권 최고 명문 대학의 명망 있는 정통 철학자’가 저술한 것으로 볼 수 있을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논지의 전개를 통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여성의 평등에 대한 주장이 건전하다면 그와 같은 논증이 개나 고양이, 또는 말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추론은 이러한 ‘짐승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짐승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짐승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추론은 건전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짐승이 권리를 갖는다는 추론이 건전하지 못하다면 여성들이 권리를 갖는다는 추론 또한 건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경우에 동일한 논증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 토마스 로렌스 경이 그린 토마스 테일러의 초상(1812년 경)
 
 
 
 
 
 
제러미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그런데 이 모든 논쟁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동물해방의 논리가 여성인권의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토마스 테일러가 적절히(?) 지적하고 있듯이 ‘두 경우에 모두 동일한 논증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이른바 의무론이라 불리는 칸트주의와 함께, 가장 강력한 윤리학설 중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영국 공리주의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아야 한다. 근대 영국 공리주의의 역사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영국의 법학자이자 철학자인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저술하여 1780년 인쇄되었으나 1789년에 정식으로 간행된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에서 처음으로 학문적 이론의 형태로 제출되었다.
 
 
                                   

   
 
- 근대 영국 공리주의의 창시자 제러미 벤담
 
 
 
적어도 서양사상에서 최초로 종교에 호소하지 않는 세속적ㆍ인간주의적 윤리학 혹은 철학적 윤리학으로 간주되는 공리주의의의 기본원리는 벤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자연은 인류를 쾌락(pleasure)과 고통(pain)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 아래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지시하는 것도 오로지 이 두 군주에 달려있다. 한편에 있어 옳음(right)과 그름(wrong)의 기준, 다른 한편에 있어서의 원인과 결과의 고리는 그들의 옥좌에 달려있다.” 서양 윤리학사에서 벤담의 의의는 그가 그의 이전까지는 그저 단순히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라는 주관적 호오, 취미 판단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던 기존의 논리를 뒤집어, 그것을 ‘옳고ㆍ그름을 판정해주는 도덕적 기준’으로까지 격상시킨 점에 있다고 말해진다. 간단히 말하면 이전까지의 윤리 이론들에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본성을 갖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상이한 성질들로 간주되었으나, 이제 벤담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를 즐겁게 혹은 행복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덕적으로도 옳은 것’이라 보게 되었다.
 
 
고전적 공리주의의 세 가지 원리
 
 
 
벤담은 이러한 인간적 욕망과 호오에 기초한 새로운 자신의 윤리학을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라 이름붙이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도덕 판단의 기준 혹은 원리를 제시하였다.

 
 
첫째 어떤 행위가 옳은가 그른가를 판정해주는 기준, 즉 다시 말해 도덕 판단의 제일원리는 기존의 여하한 신학적ㆍ종교적ㆍ초월적 명령ㆍ원리 혹은 의무감이 아니라, 그 행위가 그 행위자 및 그 행위의 결과에 의해 영향 받는 존재들의 쾌락과 고통의 유무이다. 즉 도덕 판단의 제일원리는 종교적 혹은 신학적 교의와의 일치 여부가 아니라, 그 행위가 ‘얼마나 많은 쾌락 혹은 행복을 가져 오는가 또는 얼마나 적은 고통 혹은 불행을 가져 오는가’이다. 이제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는 가능한 여러 행위들 중 ‘더 많은 쾌락을 가져오는 행위’ 혹은 ‘더 적은 고통을 가져오는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악한 행위’란 여러 가능한 행위들 중 ‘더 적은 쾌락을 가져오는 행위’ 혹은 ‘더 많은 고통을 가져오는 행위’이다. 이러한 윤리학의 제일원리에 입각하여 벤담은 ‘윤리학’을 ‘이해관계에 있는 당사자들에게 가능한 한 최대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도록 그 사람들의 행위를 지도하는 기술(art)’이라 새로이 정의한다. 단적으로 말해, 공리주의 윤리학은 ‘쾌락 즉 행복의 추구와 고통 즉 불행의 회피’를 누구나 바라는 유일하고도 옳은 행위의 목적으로 바라본다. 공리주의의 이 첫 번째 원리를 벤담은 쾌락주의(hedonism)라 불렀다.
 
 
두 번째는 이른바 ‘결과주의’(consequentalism)라 불리는 것으로서, 하나의 행위는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로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어떤 행위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닌 것처럼 어떤 동기 혹은 의도는 그 자체로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동기가 좋으면 더 좋겠지만 그것은 그 행위의 윤리적 판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부차적 사항이며, 오직 중요한 것은 그 행위가 가져온 결과일 따름이다. 요약하면, 공리주의는 오직 더 많은 쾌락 혹은 더 적은 고통을 결과적으로 산출하는 행위를 ‘선’으로, 더 많은 고통 혹은 더 적은 선을 결과적으로 산출하는 행위를 ‘악’으로 바라본다.
 
세 번째는 ‘보편주의’(universalism)라 불리는 입장으로, 간단히 말해 민주주의의 원리이다. 이는 벤담의 “모든 사람은 한 사람으로 계산되어야 하며, 아무도 한 사람 이상으로 계산되지 않는다.”(Everybody to count for one, nobody for more than one)는 말에 잘 나타나 있는데, 오늘날 보면 평범한 주장으로 보이지만, 이는 18세기 말 당시 왕정 하의 영국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이 보편주의는 이후 오늘날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적 선거의 4대 원리’인 평등ㆍ비밀ㆍ직접ㆍ보통 선거의 철학적 기초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놀라운 주장인가 하는 점은 벤담의 동시대인 우리나라 영ㆍ정조 시기의 어느 학자가 당시의 국시인 유학을 부정하며 “노비와 상놈,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1인 1표의 평등한 투표권을 부여하여 왕을 선출하자.”는 이론을 제안했다고 가정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정신은 이후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무수한 사회적 개혁가들을 낳게 되는데, 공리주의의 이러한 발전을 가능케 한 벤담의 유명한 명제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옳고 그름의 기준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라는 말이다.
 
 
유정적 존재,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결국 이러한 벤담의 공리주의 이론은 윤리와 도덕의 근거를 그 윤리적 행위의 수행자 혹은 수혜자가 ‘이성적 존재인가 아닌가’에 따라 판단하는 기존의 윤리학을 부정하고, 이를 그 수행자 및 수혜자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전환시킨 것이다. 벤담은 말한다. “문제는 그들이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또한 그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가, 아닌가도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벤담은 이렇게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를 ‘유정적(有情的) 존재’(sentient being)라 불렀다. 어떤 존재가 윤리적 고려의 대상인가 아닌가는 이제 그가 이성적인 존재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 존재가 유정적 존재, 즉 쾌락과 고통을 느낄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우리가 충분한 이성적 능력을 가진 존재만을 윤리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당시의 어린아이와 교육받지 못한 여성은 물론 서구인이 아닌 모든 인종, 노예, 혹은 정신적ㆍ신체적 장애로 인하여 이른바 ‘정상적인’ 이성적 활동을 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모두 배제하는 논리적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이러한 벤담의 ‘유정적 존재의 이론’은 이후 우리가 역사에서 실제로 목도한 바와 같이 여성ㆍ흑인ㆍ노예ㆍ동성애를 위시한 여타 피압박 집단ㆍ계급ㆍ인종ㆍ민족의 해방 이론으로 기능하며 헤아릴 수 없는 인류의 도덕적 발전에 기여하였다.
 
 
공리주의 이론의 필연적 귀결, 동물해방
 
 
그리고 오늘 드디어 공리주의의 세 가지 원리는, 토마스 테일러에 반하여, 우리에게 묻는다. 생명의 존엄성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한정되어야 하는가? 동물이 ‘유정적’ 존재라면, 즉 동물이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들을 윤리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만 하지 않겠는가? 동물해방의 이론은 바로 이러한 공리주의 이론의 필연적 귀결이라 볼 수 있다. 측정 기준과 방법의 문제는 있을 수 있겠지만, 동물 해방론자들은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볼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없다고 본다. 사실상 만약 우리가 지금 여기 고양이 혹은 개를 한 마리 잡아 가위로 한쪽 다리를 마취 없이 자른다면, 그 고양이 혹은 개가 몸부림을 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동물 해방론자들은 동물들이 유정적 존재이며, 고통이나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이렇게 사실상 오늘날의 입장에서 사후적으로 조감해 본다면, 오늘날 동물해방의 이론은 이러한 18세기 말 벤담 공리주의의 세 가지 원리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는 것이었으며, 실제로도 벤담은 오늘날 노예 해방 및 동물 해방이라 부를 수 있는 여러 사항들에 관해 진보적 입장을 취하였다.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 『동물해방』의 저자 피터 싱어, 미 프린스턴대학교 교수
 
 
                                   
 
   
 
- 피터 싱어, 『동물해방』, 김성한 옮김, 인간사랑, 1999.
 
 
 
 
 

 
 
 
 
 
그리고 1975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의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을 발간한다. 그리고 그의 저작은 바로 앞서 인용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제러미 벤담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한다(벤담과 싱어의 논의를 잘 정리한 입문서로는 최훈의 『벤담ㆍ싱어』(김영사, 2007)가 참조할 만하다). “이 책은 인간의 ‘인간이 아닌 동물들’(non human animals)에 대한 폭정에 관한 책이다. 벤담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학정을 고발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동물은 이제 더 이상 도덕적 고려의 외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도덕적 고려 가장자리의 어떤 특별한 구역이다. 그들의 이익은 인간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 한 약간의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 충돌이 발생한다면, -심지어 그것이 동물의 일생 동안의 고통 및 사망과 인간의 식도락적 취미 사이의 대립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아닌 존재의 이익은 간단히 무시된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이러한 논증의 궁극적 정당화가, 어떤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합리적인 기본적 도덕원리에 대한 호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의 공리주의자인 싱어에게 있어 동물해방의 논리는, 어떤 정서적 요구 혹은 권고가 아닌, 이성과 당위의 요구이다. “나는 이 책이 논거로 삼고 있는 원리에 근거하여 육식과 관련된 당신의 이익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한 분명히 그렇게 요구한다.” 싱어는 “일상적으로 우리는 ‘동물’이라는 단어를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을 의미하는데 사용하며, 이러한 용례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지우며 우리 스스로가 동물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하나, 생물학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그러한 진술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동물 해방’을 ‘동물 사랑’ 혹은 ‘동물 애호 혹은 사랑’과 혼동한다. 그것은 동물을 ‘사랑하고 애호하는’ 문제가 아니라, 동물이 자신의 본성대로 자연적 수명을 누리며 살 권리가 있음을, 인간이 동물을 죽일 권리가 없음을 말하는 주장이다. 즉 우리가 흑인이나 여성들의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그들을 ‘사랑하고 안아 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동물을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개를 ‘중성화’시키고, ‘성대제거 수술’을 행하는 것이 결코 동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폭력주의 동물해방 운동
 
 
한편 싱어는 동물해방을 위해 실험실에 폭탄을 설치하여 실험자들을 죽이기도 하는 폭력적 유형의 동물해방 운동에 명시적으로 반대한다. “동물 해방 운동 진영 내의 모든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물해방을 지탱하는 힘은 실천에서 나온다. 동물 해방을 지지하는 우리들은 좀 더 높은 도덕적 토대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억압자의 손에 놀아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간디와 마르틴 루터 킹이 승리를 거둔 이유는 그들 주장의 정의로움이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며, 그들의 행위가 반대자들의 양심마저도 울렸기 때문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다른 종들에게 가하는 우리의 잘못도 부정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우리의 운동이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의 여부는 폭발물로 두려움을 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장하는 바가 올바른가에 달려있다.”
 
 
실험동물들의 고통?
 
 
싱어는 이 책에서 어느 저명한 과학자의 강연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과학자의 강연이 끝난 후 누군가가 과학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의 실험에 사용된 동물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학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왜 동물들한테까지 신경을 써야하는가?” 싱어는 이에 대해 “위대한 과학자가 반드시 좋은 철학자인 것은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사실상 그들의 동물에 대한 발언은 그들이 철학적으로 아주 무지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오늘날의 전문적인 철학자가 쓴 글로서 우리의 윤리 체계에 동물을 포함시키는 것이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데에 동의하는 글을 본 적이 없다. 또한 동물 실험이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하는 글도 본 적이 없다. 철학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지구는 평평하다고 우기는 것에 비할 만한 무지한 주장이다.” 피터 싱어는 유대인이다. 그는 역시 유대인인 작가 아이작 싱어의 말을 빌려 인간의 ‘인간이 아닌 동물들’에 대한 학정을 이렇게 고발한다. “동물의 처우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나치이다.”
 
 
종차별주의의 간략한 역사
 
 
이어 싱어는 고대 그리스ㆍ로마 시대 이래 서양 동물학대의 역사를 간략히 다룬다. 싱어는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해 비판적인데 이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일반이 동물해방의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했으며, 실상은 동물학대 논리의 주요한 한 원천을 이룬다는 점에서 쉽게 수긍할만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의 교리를 확립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를 신에 대한 죄, 자신에 대한 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죄라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으며, 이른바 ‘동물에 대한 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학적,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싱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이 동물에게 동정어린 관심을 나타냈을 때, 그는 그만큼 더 동료 인간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정의로운 자는 야수의 생명을 중시한다.’(「금언」 10절)라고 쓰여 있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그 어떤 논의도 종차별주의의 본질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마치 지금이 일본제국주의의 강점 시기이고, 어느 일본인 학자가 “조선인들에게 동정어린 관심을 나타냈을 때, 그는 그만큼 더 동료 일본인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정의로운 일본인은 조선인의 생명을 중시한다.’라고 고전에 쓰여 있다.”는 말을 했을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이 말이 종차별주의의 본질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싱어의 지적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동물실험의 딜레마?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즉시 모든 육식을 중지하고, 동물실험을 중단해야 할 것인가? 물론 피터 싱어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이는 현대 윤리학의 딜레마이다. 동물해방의 논리는 실상 현대 윤리학의 주된 이론 중 하나인 고전적 공리주의의 가능한 필연적 귀결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공리주의를 받아들인다면 동물해방의 논리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무지는 논증이 아니다. 내가 몰랐고, 모른다는 사실이 도덕적 면책 사유는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오늘 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동물 해방 이론의 논거 혹은 논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동물해방 이론은 그저 브리짓 바르도 류의 몰상식한 서구 우월주의, 가끔 해외토픽에 나오는 운동가들의 나체 시위, 재미 혹은 취미 혹은 배부른 서구인들의 괴상한 짓거리 정도로 바라보는 피상적 시각이 엄존한다. 이는 물론 언론의 영향이 가장 크다 하겠으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문학 자체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가 그 근본원인이라 생각된다.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교양계급의 경우에서조차 철학ㆍ윤리학 혹은 인문학이란 배부른 고상한 유한계급의 말장난 혹은 고리타분한 훈장님들의 고전에 대한 도덕적 고담준론 혹은 윤리적 설파 정도로 생각하는 일제시대의 이미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엄마, 소가 불쌍해! 왜 이렇게 맛있지?”
 
나 자신은 학부 시절 불문과를 다녔지만 철학을 부전공하면서 “인간은 타인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뭘까?”를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있다. 물론 그러한 행위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한 번도 사실상 어느 누구에게서도 인간이 인간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은 존엄하며, 따라서 결코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되며 오직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을 뿐이었다. 물론 인간은 존엄하다지만, 그리고 모두들 타인은 존엄하겠지만, 내게는 결코 아무도 ‘나’를 존엄하다고 느끼지 않는 상태인 것으로 느껴졌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존엄하지만, 살아있는 오늘 여기의 ‘나’는 감히 존엄하지 않으며, 오히려 차라리 온갖 이기심과 욕망에 의해 일그러진 존재로서만 느껴지는 것, 내게는 바로 그것이 ‘주어진 전제에 대한 이해와 비판 작업’으로서의 참다운 철학이 아닌, ‘암기로서의 철학’만을 해온 나 그리고 우리 사회의 현실로만 보였다. 한 마디로 우리의 교육은 “왜?”를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회의 주어진 전재들을 아직 다 ‘습득’하지 못한 어린아이는 모두 철학자이다. 싱어가 지적한대로, 종차별주의가 만연한 현대 서구 사회에서, 그리고 오늘날 그만큼 서구화된 우리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동물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느끼며 동시에 육식을 한다. 쇠고기를 맛있게 먹으며 “엄마, 소가 불쌍해. 왜 이렇게 맛있지?”하고 미소를 머금고 말하는 천진한 영혼에게 우리 세대의 부모가 들려준 이야기는 “얘, 밥맛 떨어지게 왜 그런 얘기를 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밥이나 먹어.” 정도가 다였다.
 
 
‘사람의 아픔’, 혹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아픔’
 
 
결국 나는 인간을 죽이면 안 되는 ‘왜’(why), 그러니까 이유(reason)를 찾다가 그가 죽기를 원하기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즉 “그가 고통을 원하지 않으며, 죽음은 그에게 고통이므로, 나는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더욱이 나 역시 그런 일을 타인으로부터 당하고 싶지 않으므로 나 역시 타인에게 그런 일을 할 권리가 없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바로 공리주의의 쾌락원칙에 해당되는 논리였다. 그리고 언젠가 『사람의 아픔』이란 책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알베르 카뮈의 말대로, “인간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에 너무도 공감했기 때문이다. 나는 윤리와 도덕의 기준이란 인간의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하는 즉시, 나는 그러한 논리가 인간에게만 한정되지 않으며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포괄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할 것임을 이해했다. 나는 먼 훗날 내가 쓰려는 책의 제목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아픔』으로 바꾸었다. 지금 생각하면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학부 시절이던 1980년대 중반 경에 정말 타인의 영향 없이 혼자서 ‘고안’해낸 생각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후 육식은 물론 심지어 채식마저도 그만두어야 할 것 같은 ‘죄책감’(?)에 마치 이 세상의 비밀을 나 혼자 알고 있는 것처럼 두려워했다. 그런데 학부를 마칠 무렵 윤리학 관련 수업에서 나의 이러한 생각이 이미 200년도 더 전에 영국의 어떤 사상가, 즉 제러미 벤담이라는 사람에 의해 ‘공리주의’라는 이름으로 체계화 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즉시 ‘공리주의자’가 되었다.
 
 
대학원 시절 읽었던 『동물해방』의 충격, 그리고 번역
 
 
그리고 이후 또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과정 학점을 이수하던 중, 나는 윤리학 관련 수업에서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을 원서로 읽게 되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고, 이 책을 내가 반드시 우리말로 번역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박사과정에 올라가서 당시 전공 관련 번역서를 몇 권 냈었던 나는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한 출판사의 사장님께 이 책의 번역 저작권을 문의하여 우리말 번역 판권을 따냈다. 그러나 나 자신은 이미 계약되어 있던 다른 전공서적의 번역과 논문으로 시간을 도저히 낼 수가 없어 책의 번역은 한 없이 늦어질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이런 상태로 책을 붙잡고 있다가는 내가 결국 몇 년은 더 있어야 이 책을 번역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평소에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내가 전적인 신뢰를 보내던 나의 대학원 윤리학 석ㆍ박사 과정 동기인 김성한 박사에게 번역을 문의하여 보았다. 고맙게도 김성한 박사는 번역에 흔쾌히 응하여 주었고, 마침내 1999년 너무나도 유려하고 훌륭한 번역으로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번역을 흔쾌히 허락해준 김성한 박사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한다.
 
 
해월 최시형의 이천식천
 
 
이후 나는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모든 육식을 금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식물은 먹어도 되는 것일까? 그럼 나는 굶어죽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초등학교ㆍ중학교 시절 했던 저 동물 실험은? 쾌락과 고통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싱어는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결정적 보고가 없으므로 식물은 먹어도 되고, 동물로서는 굴을 그 기준으로 삼던데, 나도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도덕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그 고통의 존재를 측정할 기술적 기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식물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절대적으로 단언할 수 있을까? 또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모든 식물ㆍ동물 실험을 중단하고 온갖 고통으로 죽어가는 저 환자들이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일까? 또 온갖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할 궁극적으로는 환자들을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오늘도 밤을 새우며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는 저 연구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콩으로 만든 고기가 있다던데, 언젠가 육류를 대신할 수 있고 자연 육류에 버금가는 영양소를 가지고 있으며 또 경제적으로 타산성이 맞는 대체 육류가 개발된다면, 살생을 하지 않고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도, 육식을 하고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있을 텐데...
 
 
                                   
 
 
   
 
- 이천식천! 하늘로써 하늘을 먹인다! 해월 최시형 선생(1827-1898). 동학의 창세 교조 최수운 선생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37년간 지하포교를 하다 잡혀 현재 단성사 자리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61세. 사진은 순교당하기 직전 관원에 의해 찍힌 모습.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나는 책을 읽다가 이후 마음 속 깊이 존경하게 된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선생을 만났다(부언하면, 물론 나는 종교가 없으며, 동학에 대해서도 오직 학문적 관심만을 가지고 있다). 기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간단하고 단순한 논리이지만, 진리는 때로 가장 쉽고 간단한 것, 심플한 것이다. 우리에게 동학의 제2세 교조로 잘 알려져 있는 해월 선생은 기초적 한문 독해 수준 만을 가진 이른바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언어는 지식인의 말장난이 배제된 성실하고 소박한, 한 평생을 자신의 진리를 믿고 그렇게 살아간 인간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소박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 “모든 이가 자신 안에 한울님을 품고 있다.”라는 동학의 명제를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로 확장하여, 여성, 어린아이를 포함한 모든 인간, 그리고 식물ㆍ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위에 적은 나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인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귀하다. 그러나 하늘의 이치는 서로 먹고 먹힌다. 인간도 살기 위하여서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살기 위하여서만’. 결코 취미나 오락이나 재미나 사치로서가 아니다. 자기 합리화이거나 부당한 착취이거나 영악한 장삿속이거나 거대기업의 논리로서가 아니다. 오직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먹이기 위해서만. 그리고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만.
 
 
 
동물 실험을 할 자격이 있는 자란 바로 자신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식물 혹은 동물들에 대하여 감사와 존중의 마음을 품은 자, 그러한 과정에서 결코 그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자,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고통과 죽음이 오직 생명을 살리겠다는 보다 더 큰 목적에 봉사할 때만 그러한 일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나가면서
 
 
 
오늘 내가 적은 이 모든 말들은 어떤 이에게는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글로써, 혹은 어떤 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나가는 글로써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동물해방의 논리가 ‘견딜 수 없는 진리’, 이 말이 너무 강하다면 일종의 ‘견딜 수 없는 진실’로서 느껴졌었다. 그런데, 니체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한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얼마나 많은 양의 ‘견딜 수 없는 진리’를 견뎌내는가에 달려있다.” 진리란 자신이 ‘그랬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지금 그런 것’에 더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2009년 12월,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 피터 싱어, 『동물해방』, 김성한 옮김, 연암서가, 2012(개정완역판).


 
 
 



 


 

2012. 11. 29.

emmanuel levinas


엠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95
 
 
 
Emmanuel Levinas on his early relationship with Maurice Blanchot.
From Hugo Santiago's 'Maurice Blanchot' (1998).

 
 
 
 
 
Levinas: The Strong and the Weak (English Subtitles)
 
 
 
 
 
On June 29 1993 Michel Field interviewed Emmanuel Levinas on the occasion of the recent publication of "Dieu, la Mort et le Temps", a collection of Levinas's course materials. Field questions Levinas about the lateral character of his approach to philosophy at the crossroads of different civilizations. Levinas also talks about one of his favourite themes, the relation between one human and another, which consists of transcendence, "the exit from oneself".
 
 
 
 
 
Emmanuel Levinas: Being in the Principle of War (English Subtitles)
 
 
 
 
 
 
 
 

 

2012. 9. 2.

도덕성의 최근 형식













<유고 (1885년 가을-1887년 가을)>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이진우



2[191] 나의 주장 : 도덕적 가치 평가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 도덕적 감정-충동을 “왜?”라고 물음으로써 저지해야 한다는 것. “왜?”와 도덕 비판에 대한 이 열망은 바로 정직의 고상한 감각으로서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도덕성의 형식 자체라는 것. 우리의 정직, 즉 우리를 기만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 : “왜 안 되지?” -어떤 법정 앞에서?- 기만당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정복과 착취에 대한 주의, 삶의 정당 방어 본능. // 이것이 너희에 대한 나의 요구다 - 그 요구들은 너희 귀에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 : 너희가 도덕적 평가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 너희가 여기서 비판이 아닌 예속을 요구하는 도덕적 감정-충동을 “왜 예속을?”이라는 질문으로 저지해야 한다는 것. 너희가 “왜?”와 도덕 비판에 대한 이러한 열망을 지금 너희가 갖고 있는 도덕성의 형식 자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 너희가 너희 시대를 명예롭게 만드는 가장 고상한 정직의 형식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



***



내가 생각하기에, '네게 주어진 도덕적 명령, 명제 혹은 네가 느끼는 도덕 감정을 지금 현재의 네가 능동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그 행위야말로 도덕성의 형식 자체'라는 이 문장이야말로 공자, 소크라테스 이래 인류 윤리학 3000년 역사에 던져진 진정한 혁명이다.



2012. 7. 28.

앎의 본질

 






<유고 (1885년 가을-1887년 가을)>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이진우
       
5[10]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뭔가 낯선 것을 알려진 것, 익숙한 것으로 환원하는 것. 첫 번째 기본 원칙 : 우리가 익숙해진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수수께끼,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새로운 것, 낯설게 만드는 것에 대한 감정의 둔화 :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의심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 탐색은 인식하는 사람의 제일 본능이다 : 물론 규칙의 확인으로써 ‘인식된’ 것은 전혀 없다! -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의 미신 : 그들이 고수할 수 있는 곳, 즉 현상들의 규칙성이 단축시키는 정식들의 적용을 허용하는 곳에서 그들은 무엇인가가 인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안정성’을 느낀다. 그러나 지적 안정성의 배후에는 두려움의 진정(鎭靜)이 있다 : 그들은 규칙을 원하는데, 그것은 규칙이 세계에서 두려움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학문의 배후 본능이다. / 규칙성은 묻는(즉, 두려워하는) 본능을 잠들게 한다. “설명한다”는 사건의 규칙을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칙’에 대한 믿음은 자의적인 것의 위험성에 대한 믿음이다. 법칙을 믿으려는 선한 의지는 학문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특히 민주 시대에)


7[3] <제3장. 진리에의 의지> [...] C. 새로운 것공포를 일으킨다 : 다른 한편, 새로운 것을 새롭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포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 경악은 약화된 공포다. / 낯익은 것은 신뢰를 불러 일으킨다 / ‘진실한’ 것은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 관성은 외부의 어떤 인상에도 우선 동일화를 시도한다 : 다시 말해서 인상과 기억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반복을 원한다. / 공포구분, 비교를 가르친다. / 판단 속에는 의지(그것은 그러그러해야 한다)가 일부 남아 있고 쾌락의 감정이 일부 남아있다(긍정의 즐거움 :) / 주의. 비교원래 활동이 아니라 동일하게 취급하기다! 판단은 원래 어떤 것이 이러이러하다는 믿음이 아니라, 어떤 것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의지다. / 주의. 고통은 가장 거친 형태의 판단(부정하는). / 쾌락은 긍정 / ‘원인과 결과’의 심리학적 발생에 관하여



*** 




앎의 본질은 공포와 불안의 해소라는 이 말.

내가 모르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공포를 주며 나의 정체성과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모르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미 내가 아는 것, 이해하는 것, 곧 위험하지 않은 것, 안전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이 앎과 지식, 진리와 학문의 본질적 동기라는 니체의 이 말.

앎, 인식이란 내가 아닌 것, 나와 다른 것, 내가 알지 못하고 사실은 알 수 없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이라는 도식 속에 집어넣어 너를 잡아 먹어버리는 행위, 동일자에 의한 타자의 복속이라는 이 말.

니체의 이 말은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게 만든다!

레비나스의 "윤리는 타자로부터 온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읽혀야 한다.






진리의 적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니체전집 7)>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483.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391).

499. 친구 - 고통의 나눔이 아니라, 기쁨의 나눔이 친구를 만든다(395).



유신론의 최후 형식으로서의 무신론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니체전집 14)>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정현




* 도덕의 계보
27. 바로 우리의 문제, 즉 금욕주의적 이상의 의미에 관한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이러한 문제들을 포기할 수 있다. - 이러한 문제가 어제나 오늘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저 문제에 대해서 나는 다른 연관성에서 좀 더 근본적이고 더 엄격하게 다룰 것이다(‘유럽 허무주의의 역사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내가 준비 중인 『힘에의 의지, 모든 가치의 가치전도의 시도 Der Wille zur Macht, Versuch einer Umwertung aller Werthe 』라는 저서를 볼 것을 권한다). [...] 오늘날 정신이 엄격하게, 힘 있게, 화폐의 위조 없이 활동하는 다른 모든 곳에서, 이제 정신은 그 진리를 향한 의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이러한 절제를 나타내는 통속적인 표현이 ‘무신론’이다 - : 그러나 이러한 의지, 이러한 [금욕주의적] 이상(理想)의 잔여물은, 나를 믿어주기를 바라건대, 가장 엄격하게, 가장 정신적으로 정식화된. 저 이상 자체이며, 모든 외벽을 제거한 아주 신비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이상의 잔여물이라기보다는 핵심이다. 절대적으로 성실한 무신론(- 공기만을 우리, 이 시대의 좀 더 정신적인 인간인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은 따라서 겉보기처럼 저 이상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무신론은 그 마지막 발전 과정의 하나일 따름이며, 그 추리 형식이나 내적 논리적 결론의 하나일 따름이다. - 이것은 2천 년에 걸친 진리를 향한 훈련의 장중한 파국이며, 이것은 마침내 신에 대한 신앙의 허위를 스스로 금지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개 과정은 인도에서도 있었지만, 완전히 독립적으로 전개된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그 무엇인가를 입증한다. 똑 같은 이상이 어쩔 수 없이 동일한 결말에 이르게 된다. 결정적인 지점에 이른 것은 유럽의 기원보다 5세기 전에 부처와 더불어서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미 이것은 샹카철학 Sankyam-Philosophie 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부처에 의해 통속화되고 종교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주 엄격하게 물어본다면, 도대체 그리스도교적인 신을 이겨낸 것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나의 『즐거운 학문』 357절에 있다: “그리스도교적 도덕성 자체, 더욱 엄격하게 해석된 성실성의 개념,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과학적 양심이나 지적 결백성으로 번역되고 승화된 그리스도교적 양심이라는 고해신부의 명민함이 그것이다. 자연을 신의 선의와 보호의 증거인양 보는 것, 역사를 신적 이성에 경의를 표하기 위한 윤리적 세계 질서나 윤리적 종국 목적의 영원한 증인으로 해석하는 것, 경건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해석해왔듯이, 자기의 경험을 마치 모든 것이 섭리이며, 모든 것이 암시이며, 모든 것이 영혼의 구원을 위해 생각되고 보내온 것처럼 해석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이제는 지나갔다. 이러한 것들은 양심에 반(反)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좀 더 섬세한 모든 양심에게는 점잖치 못한 것, 정직하지 못한 것, 기만적인 것, 여성적인 것, 나약함, 비겁함으로 생각된다. - 만일 어떤 무엇으로, 우리가 선량한 유럽인이며 유럽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용기 있는 자기 극복의 계승자라고 한다면, 이 엄격성 때문이다.” ...... 모든 위대한 것은 그 스스로에 의해, 자기 지양의 작용에 의해 몰락해간다 : 생명의 법칙이, 생명의 본질 속에 있는 필연적인 ‘자기 극복’의 법칙이 이러한 것을 원하는 것이다. - “그대 스스로 제정한 법에 복종하라”라는 외침은 언제나 마지막으로는 입법자 자신을 향하게 된다. 그와 같은 교의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자기 자신의 도덕에 의해 몰락했다. 그와 같이 이제 도덕으로서의 그리스도교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 우리는 이러한 사건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리스도교적인 성실성은 하나하나 결론을 이끌어낸 다음, 결국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결론을, 자기 자신에 반하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이 성실성이 “모든 진리를 향한 의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때인 것이다 ...... 여기에서 나는 다시 내가 제기한 문제를, 우리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여(-나는 아직 한 사람의 친구도 모르니까 말이다): 우리 안에서 저 진리에의 의지 자체가 문제로 의식되는 것이 의미가 없다면, 우리의 존재 전체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 진리를 향한 의지가 이와 같이 스스로를 의식하게 될 때, 이제부터 -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도덕은 몰락하게 된다: 이것은 유럽의 다음 2세기를 위해 아껴 남겨둔 100막(幕)의 저 위대한 연극이며, 모든 연극 가운데 가장 무서운, 가장 의심스러운, 아마 가장 희망에 차 있기도 한 연극일 것이다 ...... - 536~539


28.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해보자: 그러면 인간은,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금까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인간의 생존은 아무 목표도 없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 이것은 해답 없는 물음이었다. 인간과 대지를 위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거대한 인간의 운명의 배후에는 더욱 거대한 “헛되도다!”라는 말이 후렴으로 울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어마어마한 균열이 인간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 실로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을 뜻한다. - 인간은 스스로를 변명하고, 설명하고, 긍정할 줄을 몰랐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그 밖의 문제에도 괴로워했다. 인간이란 대체적으로 보아 병든 동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하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해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진다고 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류 위로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류에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는 낫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이상 속에서 고통은 해석되었다. 어마어마한 빈 공간은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모든 자살적 허무주의에 대해 문이 닫혔다. 해석은-의심의 여지없이-새로운 고통을 가져왔고, 좀 더 깊고, 좀 더 내면적인, 좀 더 독이 있는, 삶을 갈아먹는 고통을 가져왔다 : 이 해석은 모든 고통을 라는 관점 아래로 가져갔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 후로 더 이상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불합리나 ‘무의미’의 놀이공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 - 우선 어디를 향해,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인간이 의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 전체가 본래 표현하고자 한 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더욱이 동물적인 것, 더욱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관능에 대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이러한 공포, 모든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소망,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이러한 욕망 - 이 모든 것은, 감히 이것을 이해하고자 시도해볼 때,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있다! ......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 ...... - 539~541




아돌프

 




<아돌프(이삭줍기 2)> - 뱅자맹 콩스탕 / 김석희


       
"일단 이 일에 착수한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들, 게다가 뭔가에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는 몇 가지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무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상대에게 안겨준 고통을 보면 자신도 괴롭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경박하다거나 타락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을 나는 묘사해보고 싶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자기가 자기한테 주는 고뇌의 모습은 마치 쉽게 가로지를 수 있는 구름처럼 희미하게 보인다. 사람들은 흔히 세간의 찬사에 용기를 얻지만, 이 세간이라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여서, 규칙에 따라 주의(主義)를 보충하고 관습에 따라 감동을 보충하고, 추문도 배덕으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번거로운 것으로 미워할 뿐이다. 다시 말해 추문만 없으면 악덕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반성없이 맺어진 관계는 고통 없이 깨질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관계가 깨진 데서 오는 고민이나 배신당한 영혼의 비통한 놀라움이나 완전한 신뢰 뒤에 이어지는 의심, 어떤 한 사람을 의심한 결과가 세간 전체로까지 퍼져가고 스스로 짓밟은 존경을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을 보고서야 사랑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마음 속에는 무엇인가 신성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함께 느끼지 않고 상태한테만 느끼게 했다고 믿는 그 애정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약한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기려면, 우선 마음 속에 있는 관대함을 모두 때려부수고 충실함을 모두 찢어발기고 고상하고 훌륭한 것을 모조리 희생해야 한다. 이 투쟁은 무관한 사람들이나 친구들한테는 갈채를 받지만, 그 승리에서 다시 일어섰을 때는 제 영혼의 일부를 죽이고 남의 동정을 손상시키고 도덕을 자기 냉혹함의 구실로 삼아 능욕해버린 뒤다. 그리고 사람은 자시늬 가장 좋은 성질을 잃어버리고, 이 슬픈 성공으로 얻은 치욕과 타락 속에서 덧없이 살아가게 된다.

이상이 <<아돌프>>에서 내가 묘사하고 싶었던 광경이다. 내가 거기에 성공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만난 독자들 대다수가 자신들도 이 주인공과 똑 같은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어느 정도 진실이라는 가치가 있는 듯하다. 물론 상대에게 준 고통에 대해 그들이 보이는 회한 속에는 무언가 자기 만족 같은 것이 엿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은 일부러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고, 허영심이 그들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들의 양심은 평안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아돌프>>에 관한 것에는 지극히 무덤덤해져 있다."




- 뱅자맹 콩스탕의 3판 서문(9~11)



"옳으신 말씀입니다. 선생님이 돌려보낸 수기를 발행하기로 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선생께서 생각하는 것처럼 유익하리라 여겨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다 고초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기를 읽는 여자들은 모두가 아돌프보다 훌륭한 여자를 만났었고, 자신도 엘레노르보다 훌륭한 여성이라고 생각할테니까요). 하지만 내가 이 수기를 출간하려는 까닭은, 이 수기가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매우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수기가 교훈적인 면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남성들에 대해서입니다. 우리 인간이 자랑하는 재능은 행복을 추구하거나 행복을 베푸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정신력, 성실함, 선량함 따위의 성격은 하늘로부터 타고나는 것이라는 점을 이 수기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순간적인 뉘우침 때문에 채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그 초조감이 다시금 벌려놓는 것을 막지도 못하는, 그 부질없는 연민을 나는 선량함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인생을 통하여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고뇌입니다. 아무리 교묘한 형이상학도 자기를 사랑한 여자의 마음을 짓밟는 남자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해명할 수만 있다면 어떤 실수도 용납될 수 있다고 믿는 그 자만심을 나는 증오합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말하면서도 실은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해 있고, 자신을 얘기하는 의도 속에는 남의 동정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흑심을 숨기고 있으며, 파멸의 한복판에 태연히 서 있으면서도 뉘우치기는커녕 제 자신을 이리저리 따지려드는 그 허영심을 나는 증오합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 들고, 죄악은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 의지박약한 태도를 나는 증오합니다. 아돌프가 벌은 받은 것은 그가 지닌 성격 때문이며, 그가 정처도 없이 떠돌아다녔고 어떤 건실한 직업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것, 일시적인 기분에 일생을 내맡기고, 툭하면 변덕이나 부리면서 재능마저 탕진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은 나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감히 말씀 드리자면, 선생께서 아돌프의 신상에 관해 새삼 상세한 기록을 제공해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처럼 베풀어주신 호의를 이용할지 어떨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환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자신의 성격인 것입니다.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과는 그 관계를 끊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꾼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벗어나고 싶던 고통을 다른 환경 속에 옮겨다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리를 옮기면서도 제 자신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것은 오로지 뉘우침 위에 양심의 가책을 보태고, 고뇌에 과오를 덧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155~157


나의 구원

 




<중용한글역주> - 김용옥
  

   
서양언어, 특히 서양종교에 세뇌된 언어의 용례 때문에 이러한 유교적 본래용법의 함의가 심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얻는단 말인가? 비밀만 지켜진다면 기분이 좀 경감되는 느낌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인간에게서 죄인과 죄사함의 주체가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용』의 ‘자성 自成’(스스로 이루어 나갈 수밖에 없고) ‘자도 自道’(스스로 길지워 나갈 수밖에 없다)의 투철한 논리이다. 『중용』은 이러한 논리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군자의 길과 소인의 길은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에게는 오직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259~260






인간, 폴리스적 동물





<그리스인의 이상과 현실:서양철학의 뿌리> - G.L.디킨슨 / 박만준 외





모든 미적 효과는 윤리적 전제에 의해 제약된다. - 218


       
윤리, 그리고 미적이라는 日本語가 현대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이는 이들 단어를 ethos(성격, 인격, 성품, 태도)를 연구하는 학문인 ethike 그리고 aisthesis로 바꾸어 생각해보라.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 일본인들에 의해 倫理學이라 번역되어 통용되고 있는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는 차라리 性格學으로 번역되었어야 할 것이다 (마치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인 physika가 物理學이 아니라 自然學으로 타당히 번역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통 이른바 정치적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이라 번역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zoon politikon 역시 '폴리스(polis)적 동물'이라는 바로 그 의미이다.
인간의 본질, 성격은 폴리스 안에서만, 곧 그가 속한 폴리스의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사회적인 활동 안에서만 성취가능한 것이다.
오늘날의 자연과 윤리와 사회와 정치와 종교가 이 고대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아직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서의 하나였던 것이다.







       
* G. L. 디킨슨, 『그리스인의 이상과 현실: 서양철학의 뿌리』(1961), 박만준ㆍ이준호 옮김, 서광사, 1989.



그리스에는 교회나 교의(敎義), 그리고 지켜야 할 강령조차 없었다. [...] 사제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단지 일정한 종교적 의식을 행하기 위해 임명된 관리에 불과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리스에는 성직자와 속인의 구별이 없었다. 시와 교리의 구별도 없었다(13~14)
사람들은 종교를 가짐으로써 이 세계에서 편안해질 수 있었으며,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이다. [...] 결국 신적인 것, 즉 그리스인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맹목적인 운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접근할 수 있는 것이었다(16~17).
신들과 인간 사이에는 장벽이 없었다. [...]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에는 교회가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결코 국가가 승인하는 종교도 없었다고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종교는 국가의 본질적인 것이었으며, 전반적이고도 세부적으로 국가의 전체 구조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의 의미에 있어서의 교회, 즉 국가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조직으로서의 교ㅚ가 그리스에 없었던 까닭은, 어느 측면에서 국가 그 자체가 하나의 교회였으며 또한 국가는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자연 세계를 주재하고 있는 동일한 신들로부터 승인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리스 종교가 정치적 생활의 정신적 측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21~22).
그리스 종교는 논리적인 문장으로서가 아니라 종교 의식의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에서의 프로테스탄트보다는 로마 가톨릭에 더 가까운 것이다. [...] 불완전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들과 우리의 견해로 추정해보면, 디오니소스 축제는 전형적인 그리스적 종교 축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인의 천재성. [...] 그리스 종교는 종교적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인의 독특한 성격이 고찰된 그 초기에 있어서는 그들의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분리시키 고찰하려는 의도는 잘못된 것이다(25~26).
그리스 신들은 그 형상 면에서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같지만 인간보다 탁월한 존재인데, 그것은 정신적 혹은 무형적 속성에서가 아니라, 힘, 아름다움, 불멸성 등과 같은 외부로 나타나는 재능에서 탁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인과 신의 관계는 내면적ㆍ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외면적ㆍ기계적인 것이었다(30).
인간과 신의 모든 관계는 일종의 계약과 같은 성격을 지닌 관계이다. “만약 너희들이 할 일을 다 한다면, 나도 그렇게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한 쪽에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의미는 도덕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법률적(계약적)인 것이다. 우리들이 말하는 종교적 의미의 죄나 양심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34).
외형적인 의식에 의해 치유될 수 있는 신체적 질병으로서의 죄의 개념(그리스)
오직 은총으로서만 멀리 쫓아낼 수 있는 양심에 대한 질병으로서의 죄의 개념(그리스도교) (37)
아이스퀼로스 비극의 주제는 바로 죄와 그 죄에 대한 벌로 일관한다. [...] 그의 주제는 참된 의미에서 죄를 지은 자의 도덕적 양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은 죄에 가해지는 객관적 결과에 대한 것이다. [...] 흔히 말하는 비극은 “피는 반드시 피를 부른다”는 외면적ㆍ객관적 법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며, 단지 그것이 전부이다. [...]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적 관념은 내적이거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이며 기계적인 것이다(37~40).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 무신론자는 필연적으로 반사회적ㆍ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다는 가정. [...] 이 시의 지은이[아리스테파네스]에 의하면, 이성에 대한 예찬은 사리사욕에 대한 예찬과 동일한 것이다. 그가 뜻하는 바는 곧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가족이나 국가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71).
그리스의 국가 규모가 그 형성 과정에서 극히 우연적인 성격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가 무한정 확장될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국가의 본질적 성격은 유지될 수 있었으리라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 국가의 규모는 바로 국가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80).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공적 생활’이란 [...]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고 불가결한 것이었다. [...] 국가의 이상과 개인의 이상은 결코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거의 구분조차 될 수 없었다. [...] 우리는 개인을 전체를 위해서 희생되는 존재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 속에서(만) 스스로를 실현한다고 보아야 한다(82~84).
이[데모스테네스의 연설]와 같이, 보편적 원리인 법은 개인적 성향으로서의 본성과는 대립되는데, 이러한 대립 속에는 법과 정의는 동일하다는 묵시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85).
고대 그리스 국가는 일차적으로 군사 조직되었으며 또 그렇게 존속되었다. [...] 사실 『국가』 전체를 통해 플라톤이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상인 계급이 아닌 군인 계급이다. [...] 시민에 대한 귀족적 관념. [...] 그리고 우리가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개인의 탁월한 능력에 대한 대체적인 그리스인의 관점이 바로 이러한 귀족적 관념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93).
우리는 스파르타에서 극단적으로 발전한 그리스 정치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 그리스의 독자적인 정치 모형에 가장 근접한다고 볼 수 있겠다. [...] 무조건적인 국가 유지는 곧 개인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목적이 되었다(109).
플라톤이 주장한 이상 국가는 대개 스파르타를 그 전형으로 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파르타 정치 체제의 본질적인 결함은 군사적인 덕만을 배타적으로 고집한 것, 그리고 삶의 조화로운 측면을 지나치게 억압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14).
아테네의 정치 체제는 마지막에 극단적인 민주주의로 끝나는데, 이것은 그리스 국가의 일반적인 정치 체제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118).
“간단히 말해 아테네는 헬라스의 학교이며, 고유의 인격을 갖춘 아테네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최고의 품위와 재능을 갖추고 자신을 다양한 형태의 현실에 적응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하는 헛소리가 아니라 진리이며 사실이다.” - 투키디데스가 전하는 페리클레스의 연설(125)
우리는 그가[플라톤이] 가르친 주제가 바로 정의의 이념을 강한 자의 이해와 동일시하는 것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정의의 이념을 만인의 보편적 이해로 재확인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129).
오늘날 우리가 덕(德, virtue)이라 옮기는 단어[arete, ἀρετή]는 탁월성(excellence)으로 옮겨져야 마땅하며, 또 그것은 영혼에 대한 의미만이 아니라 육체에 대한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 “아름다운 육신 안에 아름다운 영혼” [...] 그리스인에게 훌륭한 육체와 훌륭한 영혼의 상관관계는 필연적이다. 그들이 목표로 삼은 것은 균형과 조화였다. 육신에 영혼의 아름다움이 반영되지 않은 한 그들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거의 믿지 않았다(137~141).
중용. 델포이의 신전. “지나치면 쓸모 없다.” [...] 나쁘다고 여겨지는 것은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균형을 잃거나 그릇된 욕망의 방종이라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분별 있는 사람’(êthos의 학, ethikē)이 “당연한 경우에 적정한 시간 동안 적절한 방식으로 상응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 [절대적 법칙의 기계적 적용이 아닌, 각 개인의 상황에 따르는 유동적 작용 = 실천적 지혜 pronesis] 모든 삶은 그 삶을 사는 인간에 의해 구체화된 예술 작품이다. 그 작품의 질은 예술가 자신의 능력에 일치할 것이며, 모든 경우에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것에 대체될 수 있는 일반적 규칙은 결코 없다. 선은 올바른 비례, 올바른 방식, 올바른 경우이다. 반면 악은 ‘옳음’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구성하는 요소들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선이나 악이 구체화될 수 있는 순수한 소재일 뿐이다. /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은 전적으로 그리스적이다(147~148).
육체의 욕망과 영혼의 정념을 제어하는 이성이라는 마부. 그리스 최고의 금욕주의자 플라톤조차도 우선 그리스인이며 그 다음에야 비로소 금욕주의자인 것이다(149).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의 관계는 연인의 관계인 동시에 친구의 관계였다(159).
우리가 아는 한, 고대 그리스에서 혼인과 관련된 연애는 거의 없거나 전무했다. 데모스테네스는 결혼은 아이를 낳기 위한 합법적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 우리는 [...] 아테네에서 혼인이 당사자의 관심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오직 나이, 재산, 친분 관계 등에 따라 아버지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이 혼인 제도를 명령했다는 크세노폰의 말(164~165).
그리스에서 우정은 하나의 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175). 테베군단. 플라톤에게 있어 사랑은 모든 지혜의 실마리이다. 그리고 모든 사랑의 형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남성이 다른 사람에 대해 느끼는 사랑이고, 정신적 사랑이며, 또 특정한 육체와 영혼에 대한 정열로부터 최고의 아름다움과 지혜와 탁월성에 대한 열광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랑이며, 그 사랑의 완전한 인간적인 형태는 단지 희미하고 불충분한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한 사랑이 보다 고차적인 삶에로의 출발인 동시에 덕과 철학과 종교의 원천이다(180).
인간의 탁월성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간에 그리스 예술이 추구하는 바이다. 그 탁월성은 미학적인 동시에 윤리적이다. 그리고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묘사하는 것은 또한 무엇이 선한가를 묘사한다는 것을 포함한다(201~202).
그리스인의 경우에 조각과 회화는 미학적 쾌락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국가 생활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양식이기도 했다. 조각의 기본적 목적은 신화적 광경을 묘사하는 것이며, 각각의 경우에 순수한 미적 쾌락 또한 종교적 체험을 위한 것이었다. [...] 실제로 조각은 종교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으며, 종교를 통해 국가 생활에 예속된다(202~204).
한 마디로 예술은 윤리적 이상에 종속되었다. 아니 오히려 윤리적 이상과 미학적 이상이 분리되지 않았다(206).
‘음악’ - 좁은 의미로 무용과 서정시를 가리키기도 한다 - 은 그리스 교육의 중심이었으며, 따라서 음악의 도덕적 성격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되었다. [...] 도덕적 성품은 음악이 갖고 있는 감화력에 기인한다는 것, 이것은 그리스인이 일반적으로 윤리적 기준과 미적 기준을 동일시했다는 데 대한 유일하고도 가장 충격적인 설명일 것 같다. [...] 그리스인의 견해에서 성품은 영혼의 다양한 요소들이 구성되어 있는 비율이며, 올바른 성품은 영혼의 다양한 요소들이 올바른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요소들의 상호 관계는 음악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 받는다. [음악과 도덕] 음악은 성격을 형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206~207).
이미 지적했듯이 그들의 ‘음악’은 가락과 운문 및 무용의 긴밀한 결합이었으므로, 리듬과 선율이 간직하고 있는 특수한 인간적 의미는 언어와 몸짓을 수반함으로써 완전히 명료해진다(209).
언어에 의해 정신으로 전달되고, 선율에 의해 전달되는 감성적 성격은 이제 몸짓, 자세, 발동작에 의해 눈에까지 이르는 등 훨씬 잘 이해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세 양식이 결합하여, 그리스적 의미의 ‘미메시스’ 예술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음악과 마찬가지로 무용 역시 뚜렷한 윤리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용이 성격, 감정 및 행위를 모방한다”고 했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 국가론에서 무용을 음악과 함께 법률로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9~210).
그들[그리스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윤리적 상태는 음악적 상태이다. 어떤 의미에서 덕이 영혼의 조화(harmonia)라는 것은 비유적인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따라서 음악의 목적은 윤리적 목적과 일치한다.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동시에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음악이며, 또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음악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다. [...] 덕과 아름다움은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이다. 즉 단 하나의 사실을 보는 두 가지 방식이다. [...] 선함과 아름다움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인이 품었던 이상의 전부이다(211~212).
실제로 시인들의 저술, 특히 호메로스의 저술은 그리스인과 우리 모두에게 도덕적 보고서이다. 오늘날은 추상적 용어로 도덕 수업을 받지만, 그들은 오히려 삶에 대한 구체적 묘사로부터 도덕 수업을 받았다(213).
스트라보, “당신은 먼저 훌륭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훌륭한 시인도 되기 어렵다.”(214)
그리스 비극의 성격은 그것이 종교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비극이 공연된 기간은 디오니소스 축제 때였다(216).
아리스토텔레스. 참된 비극의 영웅은 천박하지 않은 본성을 타고나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인간이며, 죄를 범했을 때 자기 행위에 대한 벌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이다(218).
모든 미적 효과는 윤리적 전제에 의해 제약된다. 그리고 이 전제를 파괴하는 것은 곧 비극의 참된 목적을 좌절시키는 것이다(218~219).
* 윤리 그리고 미적이라는 日本語가 현대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이들 단어를 ethos(성격, 인격, 성품, 태도)를 연구하는 학문인 ethike 그리고 aisthesis로 바꾸어 생각해보라.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 일본인들에 의해 倫理學이라 번역되어 통용되고 있는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는 차라리 性格學으로 번역되었어야 할 것이다 (마치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인 physika가 物理學이 아니라 自然學으로 타당히 번역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통 이른바 정치적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이라 번역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zoon politikon 역시 '폴리스(polis)적 동물'이라는 바로 그 의미이다. 인간의 본질, 성격은 폴리스 안에서만, 곧 그가 속한 폴리스의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사회적인 활동 안에서만 성취가능한 것이다. 오늘날의 자연과 윤리와 사회와 정치와 종교가 이 고대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아직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서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성격보다 행위를 강조했다. [...] 그리스 연극의 주제는 보편적 인간이며, 근대 연극의 주제는 개인이다(220~221).
그리스 연극은 음악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오페라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들의 연극은 서정시로부터 발전되었으며, 처음에 서정시의 유일한 요소였던 합창단의 무용과 노래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율동적 동작과 풍부한 멜로디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부담이 덜어졌고 생동적 사실은 답가의 영역으로 분할되었기 때문에 구성의 명석하고도 엄밀한 의미는 절정에 달해서도 흐려지지 않았으며 가슴의 정열은 음악 속에서 자각되므로 이념은 서정적 운문으로 구체화되고 운문은 노래에 의해 이념화되었다. 노래와 운문은 온몸의 몸짓에 의해 거울 같은 눈에 반영되고 눈은 몸짓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연극의 행위를 연출하는 송시(頌詩)의 성격은 지금 말한 바와 같지만, 행위 그 자체는 정열과 지성보다 눈과 귀에 더 호소력이 있다. 공연의 환경 즉 개방된 분위기의 거대한 청중석은 낭송 등에 적합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연극 행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배우는 보통 장화보다도 훨씬 긴 것을 신고 무대에 오르는데, 얼굴은 가면으로 가렸고, 목소리도 가성이다. 이것은 그 연극적 효과를 위해 배우들이 표정 연기, 목소리 혹은 빠른 몸짓의 섬세한 변화가 아니라, 자세의 균형 및 빠른 회화적 말투 때문에 운율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 장엄한 이암보스 시의 단조로운 억양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연은 눈에 대해서는 움직이는 조각이며, 귀에 대해서는 합창단이 부르는 격렬한 간주곡 사이에 있는 음악적 휴지부와 같은 것이다(222).
그리스 희극 역시 비극과 마찬가지로 노래와 무용이 기초이다(229).
전체 속에서만 부분이 실현된다. [...] 덕이라고 정의되는 성질은 오직 폴리스 속에서만 그 의의를 갖는다. 개인은 폴리스의 시민인 한에서만 완전한 한 인간이다(236).
그리스에 대한 이해 없이 니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