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1913-1960) - 젊은 시절의 글들
* 「제앙 릭튀스 - 가난의 시인」, 1932
“가난한 사람, 모든 사람이 다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은 항상 말이 없는, 그 착한 가난뱅이인 누군가에게 마침내 뭔가를 말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시도해 본 것이다. - J.R .”(26)
모모한 현대 작가들의 유식한 수다가 아니라, 비참한 사람들이 영원한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데 쓰는 그런 말투, 고통으로 하여 놀라운 발견들이 솟구쳐 오르는 저 귀족적인 비속어로 말했던 것이다(27). 그는 병적인 불행에 매몰된 인간을 사로잡는, 사랑에 대한 저 병적 굶주림을, 애정에 대한 저 목마름을 뜨거운 언어로 말했다. 그는 편히 쉴 수 있는 사랑의 항구를 갈구하는 불행한 사람들의 막연한 열망들을 모두 다 말했다. 집 없는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떠돌이들에게도 심장이 있고 영혼이 있다. 그 영혼은 누구보다도 더한 욕망으로 부풀어 있어 그만큼 더 아름다운 것이다. / 이 고통의 절규 속에 사실은 어떤 주장 같은 것이 담겨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밝혀보고자 한다. 「가난뱅이의 혼잣말」은 불행한 사람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표현이다. [...]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무나 자주 모진 현실이 그의 꿈을 흩어버린다. 그래서 바로 그때 부당한 운명에 대한 격한 반항이 솟아오른다. 딱하게도 너무나 정당한 반항인 것이다(28).
* 「음악에 대한 시론(試論)」, 1932
니체는 인간(그의 저작에서는 그리스인들)의 천성적인 성향들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결론에 이른다. 사실, 우리는 꿈속에서 마음이 편해지고 현실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상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개체성을 잃어버리고 인류 전체와 동화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니체가 아폴론적인 면, 즉 꿈에 의하여 현실을 변용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부르는 면이다. 그거은 황홀경에 빠진 아폴론으로 상징되는 일종의 희열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찢어질 듯한 고통의 신인 디오니소스로 상징되는 또 하나의 본능에 시달린다. 이 디오니소스적 본능은 우리를 진정한 도취 속에 빠뜨려 결과적으로 우리의 고유한 개체성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이 두 가지 본능이 합쳐진 결과 우리는 삶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 두 가지 본느이 합쳐진 결과 우리는 삶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러한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그리하여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천재의 두 가지 경향을 구분해볼 수 있다. 그리스적 인간은 우선 디오니소스적 세계 속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이고 다음으로 첫 번째 충동을 다스리기 위하여 아폴론적인 것에 호소한다. [...] 차분하게 가라앉은 아름다움, 아폴론적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그 힘은 다른 어떤 종족의 경우보다 그리스 사람들의 마음속에 훨씬 더 깊이 뿌리박은 고통의 감정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 “그리스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의 개념은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니체가 자기 이론의 토대로 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 사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구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투쟁, 야망, 질투, 온갖 종류의 폭력들에 의하여 찢어질 듯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혹자는 다른 민족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특유의 감수성과 다정다감함으로 인하여 그리스 사람들은 가장 큰 고통의 소질을 타고난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참혹하게 삶의 끔찍함을 느꼈고 그렇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야만적인 디오니소스적 고통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그 어떤 민족의 경우보다도 더 아름다운 형식들을, 아니 꿈들을 창조함으로써 사람의 그 사나운 참화들을 타개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꼈던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춤과 음악을 활용했다. 그들은 박자를 통해서 신비적인 도취를 다스렸다. 그래서 그들은 감정과 상상을 다 같이 만족시켜주는 예술을 창조해내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극을 창조한 것이다. / 사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그리스 사상의 밑바탕은 쓰디쓴 비관주의이다. (“최선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라는 그리스의 잠언보다 더 비관적인 어디에 있을까?) 그렇지만 그리스인은 그들의 몽상적 기질로 인하여 삶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보다 더 기분 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꿈을 통하여 삶을 지워버렸다. 그들은 삶을 아름다움과 도취로 대치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적 평온함이다. 그래서 쉴러가 ‘그리스적 순진함’이라고 부른 것은 전혀 순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삶을 지워버리고 꿈을 꿀 수 있는 자질이다. 즉 유일한 생존은 아폴론적인 생존이니 삶은 한갓 환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리스사람들은 항상 삶을 무시하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들은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 잔혹한 벌을 내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독이 든 당근 즙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이렇게 그리스 사람들은 꿈에 힘입어 사람의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이 바친 모든 노력은 바로 고통에서 ‘승리의 의지’를 이끌어내는 데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노력, 이런 삶의 고통에는 오직 음악만이 어떤 표현 방법을 부여할 수 있다(50-52).
* 「직관들」, 1932
“O. 1932. 나는 달리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다는 듯, 오직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 앙드레 지드”(68)
바로 그때 광인이 내 방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내 광기에 귀를 기울여봐. [...] 흔히들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정신의 예속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 알기를 거부하는 것이 해방이며 결정적인 일보 전진이며 영혼의 자유화라는 것.”(69) / “오늘 아침엔 다른 보통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생각에 마구 빠져들었어.”(71) / 무용한 노력들로 낭비되고 수많은 망설임들로 찢어진 나의 삶이 바로 그 망설임들로 - 그 망설임들은 나름대로의 고통들이니까 - 아름다운 것이라고 나는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87).
* 독서노트, 1933년 4월
지드에게 있어서의 정당화 욕구라고 하는 것은 지드가 느끼는, 자신의 명철한 이성의 존재와 정열의 존재를 서로 화해시켜야 할 필요를 말하는 것이다. 그의 명철한 이성의 존재는 자신의 정열의 존재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 그에게 정당화 욕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당화인 것 ......(95-96).
*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 1933
요컨대, 어쩌면 실제로, 우리의 삶은 우리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25).
* 모순들, 1933
인간 조건을 받아들인다? 그게 아니라 반대로, 반항이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 [...] 솔직해야 한다. 한사코 솔직해야 한다. 심지어 자신을 거슬러가면서까지. /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반항하느냐, 이것은 삶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것이다(131).
* 합일 속의 예술, 1933
“그래서 나는 오직 신음하면서 모색하는 사람들에게만 동의할 수 있다. - 파스칼”(137).
그러니까 예술은 신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예술은 신성함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이다. 혹자는 우리가 예술을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함으로써 예술의 가치를 깎아내린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 수단이 목적보다 더 아름답고 탐구가 진리 그 자체보다 더 아름답다(143).
인간에게는 어떤 논리적 태도를 택하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144).
예술의 고유한 본질은 “모호한 겉모습들 속에 떠다니는 것을 영원히 변치 않는 공식들로 고정시키는 것”(쇼펜하우어)이다(145).
* 멜뤼진의 책, 1934
기다림이 사건보다 더 풍성하고 수단이 목적보다 더 확실하다면(157)
나 역시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게만 동조할 수 있으므로 행복하다(159).
* 알베르 카뮈 전집(특별판), 책세상
1권 : 젊은 시절의 글. 안과 겉. 행복한 죽음. 결혼. 칼리굴라. (1931~1939)
2권 : 작가수첩1. 시지프 신화. 이방인. (1939~1942)
3권 : 오해.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페스트. (1944~1947)
4권 : 여행일기.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시사평론. (1947~ 1950)
5권 : 작가수첩2. 반항하는 인간. (1950~1951)
6권 : 여름. 전락. 단두대에 대한 성찰. 적지와 왕국. (1951~1957)
7권 : 작가수첩3. 스웨덴 연설. 문학비평 (1957~1959)
* 가난한 동네의 목소리들 - 나의 아내에게 1934년 12월 25일
우선, 이것은 생각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다(167). / 때에 따라서 그 어머니에게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하고 물으면 어머니는 “아무 생각도 안 해”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렇다. 모든 것이 다 거기 눈앞에 있다. 그러니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이다(169+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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