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1.

알베르 카뮈 - 안과 겉

* 『안과 겉』(책세상, 2010)


 
- 「재판 서문」, 1957




예술가는 저마다 마음속 깊이, 일생 동안 그의 됨됨이와 그가 말하는 것에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유일한 원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나로서는 나의 원천이 『안과 겉』 속에, 내가 오랫동안 몸담아 살아온 그 가난과 빛의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세계의 추억이 지금도, 모든 예술가들을 위협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위험, 즉 원한과 만족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있다. / 우선 가난이 나에게 불해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빛이 그 부(富)를 그 위에 뿌려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의 반항까지도 그 빛으로 밝아졌었다. 나의 반항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위한, 모든 사람들의 삶이 빛 속에서 향상되도록 하기 위한 반항이었다는 것을 나는 거짓 없이 말할 수 있다. [...] 나의 타고난 무관심을 고칠 수 있도록 나는 빈곤과 태양의 중간에 놓인 것이다. 빈곤은 나로 하여금 태양 아래에서라면, 그리고 역사 속에서라면 모든 것이 다 좋다고 믿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태양은 나에게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내게는 신과 같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안 된다. [...] / 아무튼, 나의 어린 시절 위로 내리쬐던 그 아름다운 햇볕 덕분에 나는 원한이라는 감정을 품지 않게 되었다. 나는 빈곤 속에 살고 있었으나 또한 일종의 즐거움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무한한 힘을 나 자신 속에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힘을 쏟을 만한 곳을 발견하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가난은 그러한 나의 힘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바다와 태양은 돈 안 들이고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202-203).
 



그래, 바로 그거야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 즉 그 노파, 말 없는 어머니, 가난, 이탈리아의 올리브나무 위로 쏟아지는 햇빛, 고독하지만 충만한 사랑, 내 눈으로 볼 때 진실을 증언해주고 있다고 믿어지는 모든 것 말이다(211).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이렇게 나는 그 글 속에서 제법 엄숙한 어조로 썼었다. 그 당시에 나는 그 말이 얼마나 옳은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아직 진정한 절망의 시기를 지내보지 못했던 것이다(212).
 



그렇다, 적어도 내 그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나니, 바로 이 유적(流謫)의 시간에일지라도 인간에 의하여 이룩되는 작품이란, 예술이란 우회의 길들을 거쳐서, 처음으로 가슴을 열어보였던 두세 개의 단순하고도 위대한 이미지들을 다시 찾기 위한 기나긴 행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꿈꾸어보지 못하게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216).



  
- 「아이러니」




 
이 모든 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기막힌 진실. 영화 구경을 가느라고 내버려둔 여자,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없어진 노인, 아무런 속죄도 못하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이 세상에 가득한 저 모든 빛. 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세 가지 운명의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그러나 각자에게는 저마다인 죽음. 하여간 그렇기는 해도 역시 태양은 우리의 뼈를 따뜻하게 데워준다(230).
 



- 「긍정과 부정의 사이」
 



단순함이라는 말 속에는 어떤 위험한 힘이 있다. 투명하게 비쳐보이는 정도가 어느 만큼에 이르면 그 어느 것도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자살하고 싶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밤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나이가 고통을 당하며 거듭되는 불행을 겪는다. 그는 그 불행을 참고 자기의 운명 속에 자리를 잡는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다 어느 날 저녁에 모든 것이 허망해진다. 몹시 좋아하던 한 친구를 만난다. 친구는 그에게 아주 무심한 어조로 별 뜻 없이 이야기를 한다. 집으로 돌아오자 사나이는 자살을 한다. 사람들은 무슨 말 못 할 고민거리나 남모를 비극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만약 원인이라는 게 꼭 필요하다면, 한 친구가 그에게 무시한 어조로 별 뜻 없이 말을 했기 때문에 그는 자살한 것이다. 그처럼 세계의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언제나 감동시키는 것은 이 세계의 단순함이다. 오늘 저녁에는 나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그 기이한 무관심(240-241). 사실 이 방 안에 그를 붙들어두는 것은 언제나 차라리 그편이 낫다는 확신, 세계의 모든 ‘부조리한’ 단순성이 이 방 안에 깃들어 있다는 느낌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겠는가?(243)
 




- 「영혼 속의 죽음」





 
그러나 두 도시[프라하와 비첸체]가 다 내게는 귀중한 존재이며, 나는 빛과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을, 내가 묘사하고자 한 그 절망적인 체험에 대한 나의 숨은 애착과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렵다. 독자들은 이미 알겠지만, 나는 그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 「삶에의 사랑」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268).





 
- 「안과 겉」



 
만일 내가 나 자신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햇빛의] 광선 속에서다. 그리고 세계의 비밀을 전해주는 이 미묘한 맛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맛보려고 애를 쓴다면 그때 우주 저 깊숙한 곳에서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나 자신, 다시 말해 나를 무대 장치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이 극도의 감동 말이다(275).
 


중요한 것은 인간적이 되고 단순해지는 일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고 또 잠시 후에는 실제로 그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 지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 즉 인간적인 것도 단순함도 거기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곧 세계일 때보다도 더 진실해지는 때가 과연 언제이겠는가? 나는 갈망하기도 전에 만족되었다. 영원이 눈앞에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바랐던 것이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명철한 의식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 한 사람은 관조하고 한 사람은 자기의 무덤을 판다. 어떻게 그들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들과 그들의 부조리를 어떻게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 그러나 사랑해야 할 사람들의 눈과 목소리가 여기 있다. 나는 나의 모든 몸짓을 통해서 세계에 연결되어 있으며 나의 모든 연민과 감사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연결되어 있다. 세계의 이 안과 겉 중에서 나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고 또 남이 선택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 / 나는 사람들이 속임수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큰 용기란 빛을 향하여서도 죽음을 향하여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일이다. 게다가 삶의 이 치열한 사랑으로부터 이 은밀한 절망으로 인도하는 이 연계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사물들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아이러니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그것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277).
 



* 『안과 겉』(책세상, 2000)
 



"젊은이들은, 경험을 했다는 건 하나의 패배라는 것을, 모든 걸 다 잃고 겨우 뭔가 좀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아이러니, 40)
 



"왜냐하면, 망각의 밑바닥으로부터 내가 건져 올리는 이 시간들 속에는 무엇보다도 어떤 순수한 감동의, 영원 속에 정지하고 있던 한순간의 추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속에서 오직 그것만이 진실한 것인데도, 나는 언제나 그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다. 우리는 어떤 동작의 유연함이라든가 풍경 속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의 알맞은 자태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을 재현시켜보고자 할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은 하찮은 작은 사실뿐이지만 - 너무나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방의 냄새, 길 위에 울리는 야릇한 발걸음 소리 같은 -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 당시 내가 나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사랑에 잠길 수 있었다는 것은 마침내 나는 나 자신일 수 있었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게 해주는 것은 사랑밖에 없기 때문이다."(긍정과 부정의 사이, 52)
 



"나는 저 위험한 비탈길을 이제 더는 내려가고 싶지 않다. 사실 나는 항만과 그 불빛들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에게로 올라오는 것은 보다 나은 날들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나 자신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차분하고 원초적인 무관심이다. 그러나 이 너무나 맥없고 너무나 안이하게 되어가는 마음의 흐름을 깨뜨려야 한다. 그리고 나는 명철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모든 것은 단순하다. 사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들이다. 우리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는 말라. 사형받은 자를 가리켜 "그는 사회에 대하여 죄값을 치르려하고 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의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보기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기의 운명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긍정과 부정의 사이, p.63)
 



"내가 권태를 느끼지 않는 고장은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고장이다."(영혼 속의 죽음, 70)
 



""그리고 여행에서 그 밖에 어떤 다른 이득을 얻고자 한단 말인가? 이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벌거숭이다. 내가 간판도 읽을 수 없는 도시, 친근감을 주는 아무것도 깃들여 있지 않은 이상한 문자들.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으며 심심풀이도 없다. 낯선 도시의 소음이 들려오는 이 방으로부터 나를 끌어내어 어떤 집이나 어느 정든 곳의 사사로운 빛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람을 부를까? 소리를 질러볼까? 그래봐야 낯선 얼굴들만 내다볼 것이다. 교회당, 황금빛의 제단과 성향(聖香), 모든 것이 나를 일상생활로 떠다밀고 거기서 나의 불안은 모든 사물에 그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제 습관의 장막, 마음을 잠재우는 몸짓과 말들의 편리한 보자기가 서서히 걷히고 마침내 불안의 창백한 얼굴이 노출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 나는 그가 행복할 수 있을지 극히 의문스럽다. 그러나 그렇기에 여행은 인간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하나의 커다란 부조화가 그와 사물들 사이에 생겨난다. 전보다 덜 단단해진 그 마음속으로 세계의 음악이 더 쉽게 흘러든다. 그렇기에 그 커다란 헐벗음 속에서는, 덩그러니 서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한 그루 나무일지라도 가장 부드럽고 가장 진귀한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예술작품과 여인의 미소, 저희 땅 속에 뿌리박은 인종, 수세기의 과거가 요약되어 있는 고적들, 그것은 여행이 마련해주는 감동적이고도 생생한 풍경이다. 그리고 하루가 끝나면 다시금 영혼의 굶주림처럼 무엇인가가 내 마음속에 깊은 공허를 만들어놓는 호텔 방.""(영혼 속의 죽음, 72)
 



"왜냐하면, 여행을 귀중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던 일종의 내면적 무대장치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속임수를 써볼 수가 없다 - 사무실과 작업장에서 일하며 보내는 시간들 뒤에 숨어서 가면을 쓰고 지내는 짓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에 대해 우리는 그토록 심하게 불평을 해대지만, 실은 고독의 괴로움으로부터 그토록 확실하게 우리를 방어해주는 것도 그러한 시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주인공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소설들을 쓰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아내가 죽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내일까지 꾸며야 할 한 무더기의 발송 서류가 잔뜩 남아 있다." 여행은 이 피난처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가고 만 것이다. 우리의 가족 친지와 우리의 언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의지가 되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우리의 가면도 벗겨버린 채(전차의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그런 식이다) 우리는 완전히 우리 자신의 표면 위로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다 또한 우리 자신의 영혼이 앓고 있음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다가 그 기적적인 가치를 회복시켜주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춤추는 여자, 커튼 뒤로 보이는 테이블 위의 술병 - 이미지 하나하나가 제각기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의 인생이 거기에 요약되는 만큼 삶은 거기에 송두리째 반영되는 것같이 생각된다. (삶에의 사랑, 88)
 



"삶에 대한 나의 모든 사랑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내 손에서 빠져 나가버리려고 하는 것에 대한 말없는 정열, 불길 밑에 감추어진 쓰디쓴 맛이다. 매일 나는, 짧은 한순간 동안 이 세상살이의 시간 속에 아로새겨진 채 마치 나 자신에게서 앗겨가듯이, 그 승원을 떠나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왜 그때 내가 도리아 식으로 새겨진 아폴론의 시선 없는 눈, 또는 지오토가 그린 불타는 듯 응결된 인물들을 생각했는지 알고 있다. 그러한 순간에 나는 그러한 나라들이 나에게 갖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중해 연안에서 사람들이 삶의 확신과 규범을 찾아내고 또한 이성을 만족시키며 낙관주의와 사회적 감각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데 감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요컨대, 그 당시 내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인간의 척도에 맞추어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 고장들의 언어가 내 속에서 깊이 울리는 그 무엇과 일치되었던 것은, 그것은 나의 질문들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내 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의 행위들이 아니라 태양에 짓눌린 풍경 앞에서가 아니고는 탄생할 수 없는 그 '나다(nada, 허무)'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삶에의 사랑, 91)"
 



"나는 말할 수 있고 또 잠시 후에는 실제로 그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 지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 즉 인간적인 것도 단순함도 거기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곧 세계일 때보다도 더 진실해지는 때가 과연 언제이겠는가? 나는 갈망하기도 전에 만족되었다. 영원이 눈앞에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바랐던 것이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명철한 의식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안과 겉, 100-101)
 




"큰 용기란 빛을 향하여서도 죽음을 향하여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일이다."(안과 겉, 101)
 



- 『행복한 죽음』, 1936-1938
 



- 「창작경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죽음마저도 행복한 것이 될만큼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283) / 1937년 8월, “소설: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부자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리하여 그 돈을 손에 넣기 위하여 전력투구하고 끝내 성공하여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사람”(287). / 11월 17일, “‘제대로’ 태어난 한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해진다는 것은 곧, 포기의지를 가지고서가 아니라, 행복의 의지를 가지고서 만인의 운명을 거머쥐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에게 있어서도 행복은 오랜 인내이다. 그런데 우리는 돈의 필요 때문에 시간을 빼앗긴다.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있다. 무엇이건 돈으로 살 수 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행복해질 시간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해질 자격이 있을 때는 말이다”(287-288). / 1937년 8월, “사람들이 흔히 이런 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는 세계(결혼, 출세 등등) 속에서 삶을 모색했던 사람, 그러다가 돌연히 어떤 패션 카탈로그를 뒤적이던 중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삶(패션 카탈로그에서 이것이 사람이라고 간주되는 바의)에 대하여 이방인이었는가를 깨달은 사람”(291). / 원고의 부제는 ‘이방인 혹은 어떤 행복한 인간’(295).

  
- 제1부 자연적인 죽음


 
“난 엄숙하게 말하는 걸 안 좋아해요. 그렇게 말할 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꼭 한 가지밖에 없거든요. 자기 인생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 말입니다. 그럼 난 내 잘라진 다리를 어떻게 정당화시켜야 될지 알 수가 없어요”(332). / “당신의 유일한 의무는 사는 것, 행복해지는 것이라오.”(333) / “나에 대한 남들의 사랑이 나를 속박할 수는 없어요.”(337) / “돈이 없으면 행복해질 수 없어요. 그뿐입니다. 나는 안이함도, 낭만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가만 보면, 소위 엘리트라는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서 돈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종의 속물근성을 갖고 있어요. 그건 바보스럽고 그릇된 생각이에요. 어느 모로 보면 비겁하기도 해요.”(338) / “메르소, 난 스물다섯 살 때 이미 누구든 행복의 감각과 의지와 욕구를 가진 사람은 부자가 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행복의 욕구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되더군요. 그러자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족해요.”(339).
 


- 2부. 의식적인 죽음



 
“카트린,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돼. 너는 내면에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어. 무엇보다 가장 고귀한 것으로, 행복의 감각을 가졌어. 오로지 한 남자에게서만 삶을 기대해서는 안 돼. 그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너 자신에게서 삶을 기대해야 해.”(401) / “카트린, [...] 중요한 것은 말이지, 다만 행복의 의지이고 언제나 뚜렷하게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야. 그 나머지 것들, 여자, 예술작품, 또는 속세의 출세 등은 구실에 지나지 않아.”(421)
 


그리고 운명이 인간 속에서 창조하는 선택을 그는 의식과 용기 속에서 행했던 것이다. 바로 거기에 그의 모든 삶과 죽음의 행복이 있었다. 짐승처럼 미쳐 날뛰면서 그가 바라보았던 죽음, 그는 이제 그 죽음을 겁낸다는 것은 바로 삶을 겁낸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439).
 


의식한다는 것, 그것은 기만하거나 비겁해지지 않은 채 - 자신과 일대일로 자기 육체와 대면하여-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죽음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내들 사이의 문제였다. 아무것도, 사랑도 장식도 없이, 오직 행복과 고독의 끝없는 사막이 있을 뿐이었다(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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