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1.

알베르 카뮈 - 결혼

* 『결혼』, 1938.


- 「티파사에서의 결혼」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낄 것 없이 사랑할 권리. 이 세상에는 사랑이란 단 한 가지뿐이다. 여자의 몸을 껴안다는 것,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오는 신기한 기쁨의 빛을 자신의 몸에 껴안는 것이다. 잠시 후 내 몸속에 그 향기가 스며들게 하기 위하여 내가 압생트 위에 몸을 던지게 되면 나는 모든 선입견을 물리치고 하나의 진실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리라. 그 진실은 태양의 진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나의 주음의 진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지금 도박하고 있는 것은 분명 나 스스로의 삶이다. 뜨거운 돌의 맛이 나는 삶, 바다의 숨결과, 이제 막 노래하기 시작하는 매매 소리로 가득한 삶. 미풍은 서늘하고 하늘은 푸르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이 사람을 사랑한다. 이 삶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보고 싶다. 이 사람은 나의 인간 조건에 대하여 긍지를 갖게 해준다. “뭐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건 없어.”라고 사람들은 흔히 말하지만, 분명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 있다. 이 태양, 이 바다, 젊음이 용솟음치는 이 가슴, 소금 맛이 나는 나의 몸, 그리고 부드러움과 영광이 노란빛과 푸른 빛 속에서 서로 만나는 장대한 무대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것을 정복하기 위하여 나의 힘과 능력을 모두 바쳐야 한다. 여기서는 그 무엇도 내 본연의 모습을 그르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그 어느 부분도 버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는다. 그네들의 모든 처세술 따위에 못지않은 저 어려운 삶의 지혜를 참을성 있게 깨우쳐가면 되는 것이다. / 나는 두 눈을 활짝 열고 본다. 바다 위에는 정오의 엄청난 침묵. 아름다운 존재들은 저마다 제 아름다움에 대한 타고난 긍지를 지니고 있다. 세계는 오늘 온 사방으로 저의 긍지를 스며나게 한다. 이런 세계 안에서 무엇 때문에 내가 삶의 기쁨을 부정하겠는가? 그렇다고 사람의 기쁨 속에만 온통 빠져 있을 것도 아닌 바에는, 행복해진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바보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향락을 두려워하는 자를 나는 바보라고 부른다. .오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귀가 아프도록 얘기 들은 바 있다. “알고 있겠지요. 그건 사탕의 죄악이랍니다. 조심해야 돼요. 그러다가는 탈선을 하게 되고 정력을 낭비하게 된답니다.”라고 사람들은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 나는 오직 내 몸 전체로 살고 내 마음 전체로 증언하면 된다. 티파사를 살고 그것을 증언할 일이다. 예술 작품은 그 뒤에 올 것이다. 거기에 바로 자유가 있는 것이다(500-501).



- 「제밀라의 바람」



포기와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는 거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 내가 이 세상의 모든 ‘훗날에’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나의 눈앞에 있는 현재의 풍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 다음에는 또 다른 삶이 온다고 믿는 것이 내겐 즐겁지 않다. 내게 죽음이란 닫혀버린 문과도 같은 것이다. 죽음이란 그저 내딛어야 할 한 발짝 발걸음이 아니라 끔찍하고 추악한 모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 젊은 사람은 세계를 정면에다 놓고 바라본다. [...] 나는 한 일생의 종말에 가서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인간이라면 그 같은 정대면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서 자시느이 운명을 정면 대좌한 고대인들의 시선 속에서 빛나고 있는 저 무구(無垢)와 진실을 다시 찾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었다. [...] 그 때 나는 문명의 참다운 단 하나의 진보, 한 인간이 이따금씩 마음을 두게 되는 그 진보는 바로 스스로 뚜렷이 의식하는 죽음을 창조하는 것임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508-509).


- 「알제의 여름 - 자크 외르공에게」


“통만드는 공장의 노동자이며 평형의 청년부 챔피언인 내 친구 뱅상은 이 점에 대해 더욱 분명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여자 생각이 나면 같이 잘 여자를 물색하며,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결혼을(그런 사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좀 낫군!” - 이것은 우리가 흡족함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변호를 씩씩하게 요약하는 표현이다.”(516)


인생은 건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연소시켜야 할 대상이다(521).



이 하늘과 그것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있는 이 얼굴들 가운데에 어떤 신화나 문학이나 윤리, 혹은 어떤 종교가 발붙일 곳이라곤 없다. 있는 것은 오직 돌들과 육체와 별들과 손으로 만져보고 느낄 수 있는 이 진실들뿐. / [...] 통일은 여기서는 태양과 바다라는 항으로 표현된다. 나는 세상에 초인적인 행복이란 없다는 것을, 하루 해의 곡선을 초월한 저 너머의 영원이란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 덧없으나 근본적인 부(富), 이 상대적인 진실들만이 나를 감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 삶을 고양시키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나 동시에 삶의 부조리도 증가시키기 마련이다. [...] / [...] 내가 한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죄라는 말이다. [...]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희망은 체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525-527).


- 「사막 - 장 그르니에에게」



가장 강한 혐오감을 자아내는 유물론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죽어버린 생각을 살아있는 현실이라고 믿도록 만들고자 하며 우리들 속에 내재하는 영원히 죽어 없어지게 마련인 것에 대하여 우리가 기울이는 집요하고도 맑은 의식의 관심을 돌려 불모의 신화 쪽으로 쏠리게 하고자 하는 유물론이다. [...] 그러나 아니다. 나의 반항이 옳다. [...]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아니라고 말했다. [...] 그러나 오늘까지도 나는 무용(無用)함으로 인해서 내 반항의 그 무엇이 의미 없어진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사람이 무용하기 때문에 반항은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 하나의 진실, [...]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도원에 핀 철늦은 작은 장미꽃송이들로부터 피렌체의 그 아침나절에 만났던 엷은 옷 속에 젖가슴이 자유롭고 입술이 촉촉한 여인들에 이르는 하나의 진실 말이다. [...] 그 꽃들 속에서나 그 여인들 속에서나 다 같이 어떤 너그러운 풍만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한 쪽에 욕망을 가지는 것이 다른 한쪽에 탐욕을 느끼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쪽에나 마음만 깨끗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한 인간이 자기의 마음이 깨끗하다고 느끼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에는 적어도 자기를 그토록 기묘하게 순화시켜준 그 힘을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의 의무다. 비록 그 진실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떤 독신(瀆神) 행위로 보일지라도. [...] 돌기둥과 꽃들 사이에 갇혀 사는 그 [피렌체] 수도사들의 삶과 알제의 파도바니 해수욕장에서 1년 동안 줄곧 햇볕을 쬐며 지내는 젊은이들의 삶 속에서 나는 어떤 공통된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헐벗은 채 사는 것은 보다 큰 삶을(또 다른 내세의 삶이 아니라) 위한 것이다. 전라 상태라는 것은 언제나 어떤 육체적 자유의 의미를, 손과 꽃들 사이의 일치를, 인간성으로부터 해방된 인간과 대지의 저 연인 같은 공감을 담고 있다. 아! 그 공감이 아직 나의 종교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는 그쪽으로 기꺼이 개종하리라! 아니다. 그것이 독신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 [...] 이 돌과 하늘과 물의 복음서에는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부활하지 못한다고 씌어있다. / [...] 그러나 행복이란 한 존재와 그가 영위하는 삶 사이의 단순한 일치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오래오래 지속되고자 하는 욕망과 반드시 죽어 없어지게 마련인 자신의 운명이라는 이중의 의식 이외에 인간을 그의 삶에 이어주는 더 온당한 통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537-541)


이미 수없이 많은 눈들이 이 풍경을 응시했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데 내게는 그 풍경이 마치 하늘의 첫 번째 미소와도 같이 여겨졌다. 그것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나를 나의 밖으로 끄집어내놓는 것이었다. 나의 사랑과 이 돌의 아름다운 절규가 없다면 모든 것이 다 용하다는 것을 그 풍경은 내게 확신시켜준다. 세계는 아름답다. 이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그 풍경이 내게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위대한 진실은 바로 정신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마음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햇살에 따뜻해진 돌, 혹은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서 흠씬 키가 크듯 위로 솟구치는 시프레나무, 그것이 바로 ‘이치에 맞는다’[=條理]라는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를 금그어주는 경계선이라는 사실이다. 유일한 세계란 다름 아닌 인간이 없는 자연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나를 무화(無化)한다. [...] / 더 이상 나아가지 말고 걸음을 멈추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 균형의 위이다. 정신성이 도덕성을 거부하고, 행복이 희망의 부재에서 태어나며, 정신이 육체에서 근거를 얻는 이 절묘한 순간, 진실은 어느 것이나 그 속에 쓴맛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부정은 어느 것이나 ‘긍정’의 꽃필 날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관조로부터 태어나는 저 희망 없는 사랑의 노래 역시 가장 효과적인 행동 규범을 형상화해줄 수 있다. [...] / 여기서도[이탈리아] 역시 진리가 썩어서 없어질 수밖에 없다니 이보다 더 열광적인 것이 있을까? 비록 내가 진리를 원한다고 한들 결국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진리를 무엇에다 쓸 것인가? 그런 진리는 나의 분수에 맞지 않는다. 그런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가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리라. [...] / 보볼리 공원에는 내 손이 닿을 만한 곳에 금빛의 커다란 감이 여러 개 달려 늘어져 있었는데 껍질이 터진 살에서는 진한 단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가벼운 산 언덕으로부터 단물이 잔뜩 괸 저 과일에까지, 나를 세계와 하나가 되게 해주는 이 은밀한 우정으로부터 내 손 위로 늘어진 저 오렌지빛 과육을 향하여 나를 떠미는 배고픔에까지, 나는 어떤 사람들을 금욕에서 쾌락으로, 헐벗음에서 관능의 풍요로 인도해주는 그 흔들림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인간을 세계와 맺어주는 저 유대와 저 이중의 반영을 찬탄하였고, 지금도 찬탄하고 있다. 그 이중의 반영 속에서는 나의 세계가 인간의 행복을 완성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는 정확한 한계에 이를 때까지, 내 마음이 개입하여 그 행복을 받아 써볼 수 있는 것이다. 피렌체여! 내 반항의 한 가운데에는 어떤 동의가 잠자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 유럽의 몇 안 되는 고장들 중 하나여. 눈물과 태양이 한데 섞인 이 고장 하늘 속에서 나는 이 땅의 뜻을 받아들이고 축제의 어두운 불꽃 속에 훨훨 타오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나는 실감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무슨 무분별을? 사랑과 반항의 일치를 어떻게 축성하면 좋단 말인가? 대지여! 정신들이 황량하게 비워놓고 떠나버린 이 거대한 사원 속에서 나의 모든 우상들의 발은 진흙으로 되어 있다(543-546).



* 『칼리굴라』,


“칼리굴라: 너는 논리적이 되려고 결심했지, 어리석은 놈. 문제는 다만 그게 어느 한계까지 갈 수 있느냐 이거야. (빈정거리며) 달을 따다 주기만 한다면, 모든 게 달라지겠지, 안 그래?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단번에 모든 양상이 달라질 텐데. 칼리굴라는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 누가 알아? (주위를 돌아보며) 내 곁에는 사람들이 차츰 없어져가고 있어, 이상한 일이야. (거울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죽은 사람들이, 그래서 텅 비게 되는 거야. 누가 달을 갖다 준다 할지라도, 이제 나는 그 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어. 설령 죽은 사람들이 따뜻한 햇볕을 받고 되살아나 꿈틀거린다 해도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땅 속으로 사라져 없어져버리지는 않는단 말이야. (노한 어조로) 논리야. 칼리굴라, 끝까지 논리를 밀고 나가는 거야. 권력도 끝까지, 이것저것 다 버리고 끝까지. 안 되지. 뒤돌 되돌아갈 수는 없어. 바닥이 날 때까지 가보는 거야!”(649-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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