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1.

알베르 카뮈 - 시지프 신화

1권 : 젊은 시절의 글. 안과 겉. 행복한 죽음. 결혼. 칼리굴라. (1931~1939)
2권 : 작가수첩1. 시지프 신화. 이방인. (1939~1942)
3권 : 오해.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페스트. (1944~1947)
4권 : 여행일기.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시사평론. (1947~ 1950)
5권 : 작가수첩2. 반항하는 인간. (1950~1951)
6권 : 여름. 전락. 단두대에 대한 성찰. 적지와 왕국. (1951~1957)
7권 : 작가수첩3. 스웨덴 연설. 문학비평 (1957~1959)
 
* 『시지프 신화』, 1942


 
“오, 나의 영혼아,
불멸의 삶을 애써 바라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 핀다로스, <아폴론 축제 경기의 축가 3>
 


I. 부조리의 추론
 


1. 부조리와 자살
 


참으로 진지한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 밖에,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그보다 먼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니체가 주장했듯이, 어떤 철학자가 존중받는 존재가 되려면 마땅히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여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 다음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행동이 뒤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마음속으로 느낄 때는 자명(自明)한 것이지만 막상 이성의 차원에서 분명히 밝히려면 깊이 파고들어가 연구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질문이 다른 질문보다 더 절박하다고 할 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한 사람이 마땅히 뒤이어 실천으로 옮겨 보여주어야 할 행동이야말로 바로 그 판단 기준이라고 말하고 싶다. [...] 그러므로 내가 판단하건대, 삶의 의미야말로 질문들 중에서도 가장 절박한 질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267-268).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장치 사이의 절연(絶緣),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 스스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을 터이므로,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런 감정과 허무에의 갈망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쯤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시론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부조리와 자살 사이의 관계를 밝히고 자살이 어느 만큼이나 부조리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려는데 있다(270-271).
 


2. 부조리의 벽
 



어떤 책의 첫 페이지 속에는 이미 그 마지막 페이지의 암시가 담겨 있는 법이다. 이와 같이 처음과 끝의 관련은 불가피하다(278).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 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ㆍ화ㆍ수ㆍ목ㆍ금ㆍ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 여기서 나는 이 권태가 이로운 것이라고 결론지어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의식에 의하여 시작되며, 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면 그 무엇도 가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건대, 단순한 ‘관심’이 모든 것의 기원인 것이다. / 이와 같은 식으로,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 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 그는 내일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존재를 다 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할 내일을. 이러한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 / [...] 세계의 두꺼움과 낯섦,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279-281).
 


인간들 역시 비인간적인 것을 분비한다. 명철성(lucidité)이 살아나는 어떤 순간에는, 인간들이 하는 행동의 기계적인 면과 의미 없는 무언극으로 인하여 그들 주위의 모든 것이 다 어리석게 보인다(281). / [...] / 영원히 나는 나 자신에게 이방인일 것이다(286). / [...] 그런데 당신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천체계 이야기를 하면서 그 속에서 전자들이 어떤 핵 주위를 회전한다고 설명한다. 결국 당신은 이 세계를 어떤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는 당신이 시(詩)에 이르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287). / [...] / 앞에서 나는 이 세계가 부조리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말이었다. 그 자체로 볼 때 이 세계는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비합리와, 명확함에 이르려는 필사적인 열망의 맞대면인 것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명확함을 얻고자 하는 호소가 메아리치고 있다. 부조리는 인간과 세계에 똑 같이 관련되어 있다. 지금으로서는 부조리만이 그들이 이어주는 유일한 매듭이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 셰스토프, 현상학자들에서 셸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사상들은 그 야심이 어떤 것이든, 어떤 것이었든 간에 모두가 모순과 이율배반과 고뇌, 혹은 무력이 지배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세계로부터 출발했다(291).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러한 비합리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지닌 유일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이 세계는 엄청난 비합리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 [...] / 노력의 단계에서 인간은 비합리와 마주서게 된다. 그는 자신 속에 행복과 합리에의 욕구를 느낀다. 부조리는 바로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바로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꼭 매달려야 한다. 한 일생의 모든 귀결이 송두리째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잇기 때문이다. 비합리, 인간의 열망 , 그리고 양자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드라마지만 말이다(291-296).
 


3. 철학적 자살

  
부조리는 인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이와 같은 은유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말이지만), 세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양자가 함께 있는 가운데 있을 뿐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부조리야말로 양자를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 여러 가지 특징 중 으뜸가는 특징은 바로 [인간-부조리-세계의] 삼위일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세 가지 항목 중 어느 한 항목이라도 파괴되면 그것은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인간의 정신 밖으로 벗어나면 부조리는 있을 수 없다. [...]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여건(與件)은 부조리이다. 문제는 어떻게 그 부조리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과연 부조리는 자살로 귀착되어야만 하는가를 알아보는 데 있다. [...] 이 부조리의 논리를 극한까지 밀고 나갈 경우 나는 투쟁이 희망의 전적인 부재(이것을 절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계속적인 거부(이것을 포기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의식적인 불만족(이것을 젊은 시절의 불안과 동일시 할 수는 없을 것이다)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299-301).
 


극히 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자명한 사살이 한 가지 있다. 즉 인간은 항상 자신의 진리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일단 그 진리들을 인정하고 나면 그는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된다(301). 그런데 여러 가지 실존철학들에만 국한하여 고찰해볼 때 나는 그 철학 모두가 한결같이 도피(逃避, évasion)를 권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 강요된 희망의 본질은 종교적인 것이다(302). 그런데 부조리가 희망의 반대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셰스토프의 경우 실존 사상은 부조리를 전제로 하기는 하지만 그 부조리를 증명해 보이는 목적이 오로지 그것을 없애버리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셰스토프(Lev lsakovich Shestov, 1866~1938)가 볼 때, 이성은 헛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성 저 너머에 무엇인가가 있다 부조리의 정신이 볼 때, 이성은 헛된 것이고 이성 저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305-306). 중요한 것은 고난에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더불어 사는 것이라고 갈리아니 신부는 데피네 부인에게 말한 바 있다(309). ‘부조리란 신 없이 존재하고 있는 죄다’. [...] 문제는 부조리의 상태, 그 안에서 사는 일이다(310-311). 철학적 자살이란 철학의 자살이다.
 


실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비합리(irrationalité)의 테마는 정신이 흐려진 이성, 그리하여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해방되는 이성 바로 그것이다. 부조리는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이다. [...] 나의 추론은 추론을 유발시킨 자명함 자체에 충실하고자 원한다. 그 자명함이란 곧 부조리이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주는 세계 사이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양자를 한데 비끄러매놓는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열과 더불어 살고 생각하는 것이며,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다. 자명한 것을 은폐하거나 방정식의 한쪽을 주인함으로써 부조리 자체를 제거해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로 살아갈 수 있는가, 아니면 논리는 부조리로 말미암아 주을 수밖에 없다고 명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철학적 자살이 아니라 그냥 자살 그 자체다. 나는 다만 자살에서 감정적인 내용을 걸러내고 그것의 논리와 정직함을 알고 싶을 뿐이다. [...] 현기증 나는 순간의 모서리 위에서 몸을 지탱할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성실성이다. 그 외의 것은 속임수일 뿐이다(319-321).
 


4. 부조리한 자유
 



어떤 경험, 어떤 운명을 산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려놓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에우리디케의 경우와는 반대로, 부조리는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시하던 눈길을 딴 데로 돌려버릴 때 죽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고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항은 갈망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반항은 짓눌러오는 운명의 확인이다. 그러나 그런 확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한 채의 확인인 것이다. / 바로 여기서 우리는 부조리의 경험이 자살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 자살은 그것 나름의 방식으로 부조리를 해소해버린다. [...] 부조리는 죽음의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에서 벗어난다. [...] 자살자의 반대, 이것은 다름 아닌 사형수이다. [...] 의식과 방항이라는 거부는 포기와는 정반대이다. 인간 가슴속에 깃들인, 환원될 수 없고 정열에 찬 모든 것이 다 함께 그의 삶에 맞서서 거부를 고무한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다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최극단의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매일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서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325-328). 당장은 미래에 대한 무관심과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소진하겠다는 열정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 인간은 과연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가? 이 문제가 바로 나의 관심의 전부다(333).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335) 끊임없이 의식의 날을 세워가지고 있는 영혼 앞에 놓이는 현재, 그리고 줄지어서 지나가는 수많은 현재들, 그것이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이상이다(336).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만을 통해서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337).
 


II. 부조리한 인간
 


그러나 부조리의 인간은 바로 신의 밖에서 살고 있다. [부조리한 인간의] 이 무죄는 무서운 것이다.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이반 카라마조프는 외친다. [...] 부조리는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결박한다. 부조리가 무슨 행동이든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아무 것도 금지되는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부조리는 다만 이러한 행동들의 결과에 한결같은 등가치를 부여할 따름이다. 부조리는 범죄를 저지르라고 권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다만 부조리는 후회에 그것 본래의 무용함을 회복시켜 놓는다(342-343).
 


1. 돈 후안주의
 


어째서 드물게 사랑해야만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인가? [...] 돈 후안은 알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며 결코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예술가들, 그리하여 자신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는 이 덧없는 한시적 공간 속에서도 대가답게 놀라운 넉넉함을 보이는 예술가들을 연상케 한다. 이런 것이 바로 천재, 자신의 한계를 아는 지성인 것이다. [...] 돈 후안은 하늘 자체와 맞서서 내기를 함으로써 이를 입증한다. [...] 파우스트는 지상의 행복을 요구했다. 그 불쌍한 사람은 그냥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기쁘게 해줄 줄 모른다는 것은 이미 그 영혼을 팔아버린 것이나 다름 없다. 그와 반대로 돈 후안은 흡족할 정도의 쾌락을 맛보라고 영혼에게 명한다. 그가 한 여인을 떠나는 것은 꼭 그녀를 더 이상 원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항상 욕망의 대상이니까. 그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다른 여인을 원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 두 가지 이유가 결코 똑 같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348).
 

2. 연극


3. 정복
 


III. 부조리한 창조
 


1. 철학과 소설


2. 키릴로프


3. 내일 없는 창조
 


IV. 시지프 신화
 



호메로스의 말에 의하면 시지프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신중한 자였다. 그러나 또 다른 설화에 의하면 그는 강도가 직업이었다고 전해진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그가 지옥에서 무용한 노동을 하도록 벌 받게 된 원인에 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첫째로, 그는 신들을 대함에 있어서 경솔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신들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이다. 아조프의 딸 에기나는 주피터에게 납치되었다. 딸의 실종에 놀란 그의 아버지는 시지프에게 사정했다. 이 납치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던 그는 코린트 성에 물을 대어 준다면 아조프에게 비밀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하늘의 노여움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물의 혜택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받았다. 호메로스는 또한 시지프가 사신(死神)을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플루톤은 텅 비고 조용하기 만한 그의 왕국의 정경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쟁의 신을 급파하여 사신을 승리자의 손에서 해방시켰다. 또 전하는 이야기로는 시지프는 죽을 때가 가까워 오자 경솔하게도 아내의 사랑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 명하기를, 자신의 시체를 묻지 말고 광장 한복판에 내다 버리라고 했다. 시지프는 지옥에 떨어졌다. 이렇게 되자 인간적 사랑을 저버린 채 시킨 대로 복종한 아내에게 분격한 나머지 시지프는 아내에게 벌하려고 플루톤에게 지상으로 되돌아가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이 세상을 다시 보고 물과 태양, 따뜻한 돌들과 바다의 맛을 보자 그는 지옥의 어둠 속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수차례의 걸친 소환, 분노,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여러 해 동안 그는 둥글게 굽은 만과 눈부신 바다 그리고 미소 짓는 대지를 눈앞에 보며 살았다. 이렇게 되자 신들의 판결이 불가피했다. 메르쿠리우스(주피터의 아들이고 제신의 사자)가 와서 이 뻔뻔스러운 자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그를 쾌락에서 끌어낸 다음 굴려 올릴 바위가 준비된 지옥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409-410). 



 
부록 -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
 
 

문제는 어떻게 그 부조리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과연 부조리는 자살로 귀결되어야만 하는가를 알아보는데 있다. 나의 탐구의 최초의 조건 , 그리고 사실상 유일의 조건은 나를 밟아 뭉갤 듯이 짓누르고 있는 것 자체를 없애버리지 않고 보존하는 일, 따라서 그것 가운데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회피하지 말고 존중하는 일이다(53).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반항은 어떤 불가능한 투명에의 요구다. 반항은 한순간 한 순간마다 세계를 재고할 대상으로 문제 삼는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항은 갈망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반항은 짓눌러오는 운명의 확인이다. 그러나 그런 확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한 채의 확인인 것이다... 정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이 규율, 불속에서 통째로 단련해낸 이의지, 그리고 정면대결 에는 무엇인가 강력하고 비범한 것이 있다(8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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