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1.

알베르 카뮈 - 페스트

* 『페스트』


 
1947년 6월 10일 출간. 34세.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의하여 대신 표현해보는 것은, 어느 것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의해 표현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당한 일이다.” - 다니엘 디포

  
제1부

  
이 연대기가 주로 다루고 있는 기이한 사건들은 194*년 오랑에서 발생했다. [...] 언뜻 보기에 오랑은 사실 하나의 ‘평범한 도시’로서 알제리 해안에 면한 프랑스의 한 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155).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 [...]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지쳐버렸으면서도 동류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갖고 있으며, 또 자기 딴에는 불의와 타협을 거부하기로 결심한 터인 한 인간의 발언이라고 말했다(164-165)

  
파리에 있는 어떤 큰 신문사에 근무하는 기자로서 아랍인들의 생활조건에 대하여 취재하는 중인 레몽 랑베르, 호인이고 항상 웃는 낯이며 모든 정상적인 쾌락이면 무엇이고 다 좋아하는 듯했지만 그런 것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으며 우리 도시에 있는 수많은 스페인 무용가와 악사들의 집에서 종종 만나곤 했던 서른다섯 살 가량 되어보이는 장 타루, 박식하고 열렬한 제수이트 파 신부인 파늘루 신부, 오랑시 의사회 회장 리샤르, 방문에 ‘들어오시오. 나는 목매달았소’라고 적은 후 자살을 시도한 코타르는 거리에서나 거래처에서나 남의 동정을 얻으려고 줄곧 애를 쓰는 인물, 시청의 서기이자 글을 쓰는 조제프 그랑 ...
 


아들[리외]도 동감이었다. 사실 어머니만 있으면 무슨 일이건 다 수월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167).
 


사실 재앙이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로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왔다. [...] 그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194-199)
 


그랑, 드문 경우이지만, 항상 자기의 착한 마음씨에서 오는 용기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 선의와 애착의 증인, “마음먹은 것을 시원하게 표현할 수 있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카스텔, “중요한 것은 그게 온당한 논리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가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어요.”(205-208)
 


담배가게 여주인이 알제에서 한창 떠들썩하던 당시의 어떤 체포사건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어떤 상사의 젊은 사무원이 바닷가에서 아랍인 한 사람을 죽인 사건이었다. “그런 상놈들을 모조리 감옥에 처넣는다면 정직한 사람들이 좀 숨쉬고 살 수 있을 거예요.”(215)
 



하루 종일, 의사는 페스트 생각을 할 때마다 매번 일어나는 가벼운 현기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218).
 


방 안에는 어둠이 짙어져왔다. 이 변두리 거리가 활기를 띠고, 밖에서 둔탁하면서도 안도감이 섞인 탄성이 들리면서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리외는 발코니로 나섰다. 코타르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 주변의 모든 동네들로부터, 우리 시에 저녁이 올 때마다 볼 수 있듯이, 가벼운 미풍이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와 불고기 냄새와 떠들썩한 젊은이들에게 점령된 거리에 점점 더 부풀어가는 자유의 유쾌하고도 향기로운 소음을 실어 오고 있었다. 어둠, 보이지 않는 선박들의 요란한 아우성, 바다와 흐르는 군중들로부터 올라오고 있는 웅성거리는 소리, 리외가 익히 잘 알고 있으며 전에는 퍽 좋아했던 이 무렵의 시간이 오늘은 그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일들 때문에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219).
 


총독부, 식민지 수도에 보낼 보고서, 총독부에서 보낸 전보공문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224-225).
 


제2부

  
그때부터 페스트는 우리들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229). “그러나 어쨌든.” 랑베르는 말했다. “나는 이 도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249) 랑베르: “페스트에 안 걸린 사람들도 나가지 못한다는 겁니까?” 리외: “그것은 충분한 이유가 못 됩니다. 참 어리석은 이야기지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감수해야 합니다.” 랑베르: “하지만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닌데요!” 리외: “지금부터는 유감입니다만, 선생은 이 고장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 랑베르: “선생님은 이해하지 못하세요. 선생님 말씀은 이성에서 나오는 말씀이지요. 선생님은 추상적이십니다.” 의사는 공화국의 여신상 위로 눈을 치켜떴다. 그러고는 자기의 말이 이성에서 나오는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기는 자명한 이치에서 나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양자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251-252).
 


그러나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추상으로 보이는 것이 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진리로 보이는 것이었다(257). 파늘루 신부의 강론, “여러 형제들, 여러분은 불행을 겪고 계십니다. 여러 형제분들, 여러분은 그 불행을 겪어 마땅합니다.”(259-260) 파늘루 신부로서는 만인에게 베풀어진 신의 구원과 기독교적 희망을 오늘만큼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265).
 


그랑, “작품이 완전무결해야 합니다.”(269)
 


리외, “당신도 알다시피, 기독교 신자들은 현실적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가끔 그런 식으로 말을 하더군요. 보기보다는 좋은 사람들이죠. [...] 그러나 그 병으로 해서 겪는 비참과 고통을 볼 때,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타루: “선생님은 신을 믿으시나요?” 리외: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는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뚜렷이 보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295)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주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넋은 맹목적인 것이며, 가능한 한의 초명이 없고서는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302-303).

  
그랑,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한다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했으면 좋으련만!”(305)

  
그랑, “5월의 어느 아름다운 아침나절, 한 날씬한 여인이 굉장한 밤색 털의 암말을 타고 꽃으로 가득 찬 불로뉴 숲의 오솔길을 누비고 있었다.”(307)
 


랑베르: “이것 보십시오, 타루. 당신은 사랑을 위해서 죽을 수 있으세요?” 타루: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마 그럴 수 없을 것 같군요. 지금은 ...” 랑베르: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당신은 하나의 관념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눈에 빤히 보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선 신물이 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살인적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337-338)
 


제3부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집단적인 역사적 사건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 밖에는 없었다(343).
 


검둥이들이 끌고 가는 시체 운반수레(351).
 


제4부
 


랑베르, “나는 떠나지 않겠어요.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있겠어요.” 타루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운전을 하고 있었다. 리외는 피로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 “그럼 부인은요?”하고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 랑베르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는데 자기 생각에 변함은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떠난다면 부끄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남겨두고 온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거북해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외는 몸을 일으켜 세워서 앉으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행복을 택하는 것이 부끄러울 게 무어냐고 말했다. / “그렇습니다.” 랑베르가 말했다. “그러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 볼대로 다 보고 나니, 나는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389-390)
 


리외, “허, 이 애는, 적어도 아무 죄도 없었습니다. 당신도 그것을 알고 계실 거예요!” 파늘루 신부, “그렇지만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 리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힘과 정열을 기울여서 파늘루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 “아닙니다, 신부님.”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파늘루의 얼굴에 당황한 그림자가 스쳤다. / “아, 선생님.” 하고 그는 서글프게 말했다. “이제 방금 나는 은총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 그러나 리외는 다시 벤치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그는 다시 엄습해오는 피로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 “나는 그런 걸 못 가졌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런 문제에 대해 당신과 토론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신성모독이나 기도를 초월해서, 우리를 한데 묶어주고 있는 그 무엇을 위해서 함께 일하고 있어요.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 파늘루가 리외 곁으로 와서 앉았다. 그는 감동한 모양이었다. / “그럼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럼요, 당신도 역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고 계시거든요.” / 리외는 웃는 낯을 하려고 노력했다. / “인간의 구원이란 나에게는 너무 거창한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원대한 포부는 갖지 않았습니다.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인간의 건강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건강이지요.”(400-401)
 


“사제가 의사의 진찰을 받을 수 있는가?”(403)

  
타루, “젊었을 때, 나는 결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말하자면, 전혀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았던 거나 마찬가지죠. 나는 고민하는 성질도 아니었고, 사회의 진출도 적당하게 이루어졌어요. 머리도 괜찮았고, 여자들도 곧잘 따랐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죠. 혹 가다 불안감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내 잊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난 반성하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 /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당신처럼 가난하지는 않았었죠. 우리 아버지는 차장검사로 계셨는데 그만하면 좋은 자리지요.”(432)
 


타루 -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형선고라는 기반 위에 서있으니, 그것과 투쟁함으로써 살인행위와 싸우겠다고 생각했어요. [...] 물론 우리도 역시 때에 따라서는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몇몇 사람의 죽음은, 더 이상 아무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 세계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진실이었으나, 어쨌든 나로서는 그런 종류의 진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주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요구했고, 사형당한] 올빼미 씨 생각을 했고, 언제나 계속할 것 같았어요. 내가 사형집행을 구경한 그날(그것은 헝가리에서의 일이었지요)이 될 때까지는 말입니다. 그날, 어린애였던 나를 휘어잡았었던 그 현기증이 어른이 된 나의 눈을 캄캄하게 만들었어요. / 혹 사람을 총살하는 것을 보신 일이 있으신가요?(437)
 


그때, 나는 그야말로 내가 나의 온 힘과 정신을 기울여 페스트와 싸우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끊임없이 페스트를 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가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인간의 죽음에 동의한다는 것, 숙명적으로 그러한 죽음을 가져오게 했던 그런 행위나 원칙들을 선(善)이라고 인정함으로써 그러한 죽음을 야기시키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그들은 나에게, 붉은 제복이 옳음을 인정하는 태도는 곧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전적으로 일임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일단 한번 양보하게 되면 끝도 없이 양보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역사는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많이 죽이는 자가 승리하는 모양이니 말이에요. 그들은 모두가 살인에 미친 듯이 열중해 있습니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어요. 그래도 최소한 나로서는 그 진저리가 나는 도살 행위에 대해 단 하나라도. 오직 하나라도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절대로 거부하겠다고요. 그렇습니다. 나는 더 뚜렷하게 사리를 깨닫게 될 때까지 고집스럽게 맹목적인 태도를 지켜나갈 것입니다(438-439).
 


그 이후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부끄러워했습니다. 아무리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더라도 나 역시 살인자 측에 끼어들었었다는 것이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들조차도, 오늘날의 모든 논리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죽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몸 한 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으며, 우리들은 모두가 페스트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오늘날도 그 평화를 되찾아서,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그 누구에게도 치명적인 원수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나는 다만 다시는 페스트에 전염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를 되찾게 해준다는 것을, 평화가 아니라면 적어도 떳떳한 죽음을 바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며, 비록 인간을 구원해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에게 되도록 해를 덜 끼치며, 때로는 약간의 선까지 행하도록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좋은 이유에서건 나쁜 이유에서건 사람을 죽게 만들거나 또는 죽게 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모든 걸 거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이번 유행병에서 배운 것이라고 하나도 없고, 있다면 당신들 편에 서서 그 병과 싸워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그렇습니다, 리외.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 만사를 다 알고 있지요),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피고 있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리외,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하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시켜줄 것 같지 않은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 죽이는 것을 단념한 순간부터 나는 결정적인 추방을 선고받은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사람들을 표면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성적인 살인자가 될 자격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우월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로 했고 겸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나는 지상에 재앙과 희생자들이 있으니 가능한 재앙과 희생자들이 있으니 가능한 한 재앙의 편을 들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렵니다. 아마 좀 단순하다고 보실지도 모릅니다. 단순한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여러 가지 이론들을 들어서 머리가 돌아버릴 뻔했고 그 이론들 때문에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살인 행위에 동의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도를 걸어가기 위하여 정확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재앙과 희생자가 있다고만 말할 뿐, 그 이상은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내 자신이 재앙 그 자체가 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에 동조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차라리 죄 없는 살인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보시다시피 이건 그리 큰 야심이 아닙니다.
 


물론 제3의 카테고리, 즉 진정한 의사로서의 카테고리가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이런 것은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더구나 그것은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경우에는 희생자들 편에 서서 그 피해를 되도록 줄이기로 마음먹는 것입니다. 희생자들 가운데서 나는 적어도 어떻게 하면 제3의 카테고리, 즉 마음의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탐구할 수는 있습니다(432-444).
 


의사는 몸을 약간 일으키면서 타루에게,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서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본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 “물론 그건 공감이죠.” / [...] / “결국.” 하고 솔직한 어조로 타루가 말했다. “내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신은 안 믿으시면서?” / “바로 그렇기 때문이죠. 오늘날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구체적 문제는 사람이 신이 없이 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 [...] / 의사가 대답했다.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연대의식을 느낍니다. 아마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자 같은 것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 “그럼요,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다만 내가 야심이 덜할 뿐이죠.”(442-443)
 


“우리들이 우정을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아세요?” 하고 그가 물었다. / “좋으실 대로 합시다.” 리외가 말했다. / “해수욕을 하는 거죠. 미래의 성인에게 그것은 어울리는 쾌락입니다.” / 리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우리가 가진 통행증이면 방파제까지 갈 수 있어요. 정말이지 페스트 속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건 너무 바보 같아요. 물론 인간은 희생자들을 위해서 싸워야 하죠. 그러나 사실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게 되고 만다면 투쟁은 해서 뭣하겠어요?”(442-444)
 
 


그리고 리외 자신도 그 늙은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는 이 세계는 죽은 세계와 다를 바 없으며, 사람에게는 반드시 감옥이니 일이니 용기니 하는 것들에 지친 나머지 한 인간의 얼굴과 애정 어린 황홀한 가슴을 요구하게 되는 때가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450-451).
 


리외는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아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슬픔은 리외 자신의 슬픔이었고, 그때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같이 나누고 있는 고통 앞에서 문득 치솟는 견딜 수 없는 분노였다(451).
 


‘나의 사랑스런 잔, 오늘은 크리스마스요 ......’ ‘5월의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어떤 날씬한 여인이 눈부신 밤색 암말에 몸을 싣고, 꽃이 만발한 사이를 뚫고 숲의 오솔길을 누비고 있었다 ......’(453)
 


제5부
 


의사는 결국 타루가 평화를 다시 찾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다시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 또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라든지 친구의 시체를 묻어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다시는 휴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483-484).
 


“그 사람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죄악은, 어린아이들 그리고 인간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옳다고 긍정했다는 점입니다. 그 외의 것은 나도 이해가 가요. 그러니 그 외의 것은 용서하지 않을 수 없어요.”(499)
 


의사 리외는,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기록해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 그러나 그래도 그는 이 연대기가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기록은 다만 공포와 그 공포가 가지고 있는 악착같은 무기에 대항하여 수행해나가야 했던 것, 그리고 성자가 될 수도 없고 재앙을 용납할 수도 없기에 그 대신 의사가 되겠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행해나가야 할 것들에 대한 증언일 뿐이다. /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외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군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 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506-507).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