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22.

박창수 chang-soo park 1





park changsoo - infinite finitude, 2010




프리뮤직 아티스트 박창수와 내가 알게 된지는 한 20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엔 아티스트와 평론가로 만났지만, 나이도 같고 중간에 다른 친구들도 있고 하여 만난 직후에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되었다. 나는 박창수가 한국의 존 존(john zorn)이랄까, 여하튼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아방가르드 음악 계열에서 몇 안 되는 최고의 아티스트들 중 하나라 생각한다. 박창수는 2010년 공식적인 첫 앨범을 내게 되었는데, 나에게 음반 해설지를 부탁하였다. 아래의 글이 이를 위해 작성한 글이다. 이 과정에서 '무한한 유한'이라는 음반의 제명도 제안하여 앨범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정말 박창수는 '유한한 피아노와 자신으로부터 무한한 음률들을 구성해내는' 걸출한 동시대의 탁월한 아티스트, 파곡(破曲)의 아티스트이다. 이 포스팅을 계기로 한 명이라도 더 박창수의 음악에 대해 작은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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破曲 - 불가능한 가능성 혹은 무한한 유한      
                             

  


박창수의 음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한 음악미학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 있어 예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혹은 예술과 우리의 (일상적) 삶을 어떻게 관련지을 것인가라는 보다 광범위한 철학적 혹은 문명사적 문제와 얽혀 있다. 아무런 정보 없이 그의 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극도의 미적 경험과 쾌감 혹은 전율을 선사하는 동시에, 때로는 이에 필적하는 강도의 ‘불안감과 긴장, 그리고 불편함’을 야기하는 이 음악은 다름 아닌 현대음악 혹은 현대예술 일반의 존재론적 혹은 생성론적 조건을 새로이 사유하도록 만든다.



늘 당신이 팜플렛을 들여다보며 당신의 방 안에서 혹은 차 안에서 혹은 작업장에서 홀로 혹은 친구들과 함께 듣고 있는 이 음악은 음반의 발매를 위해 박창수가 2010년 1월 30일 서울의 율 하우스에서 단 한 대의 피아노만을 가지고 라이브로 행한 글자 그대로 완벽한 즉흥음악이다. 1964년에 태어난 한국의 퍼포먼스 아티스트, 작곡가, 피아니스트인 그가 2010년 발매하는 이 음반은 - 개인적으로 제작되었으며 역시 완벽한 피아노 임프로바이제이션 곡들로만 구성된 몇 장의 라이브 앨범을 제외한다면 - 그의 첫번째 공식 앨범이다.



하프시코드로부터 개량된 이래 바흐, 베토벤을 거쳐, 라벨과 존 케이지의 혁명을 거친 후, 오늘 피아노의 가히 ‘온갖’ 가능성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해보여주는 박창수의 음악은 피아노란, 음악이란, 그리하여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실험과 체험의 장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 이미 존 케이지, 백남준과는 무관하게 - 자신만의 ‘퍼포먼스 아트’와 ‘프리페어드 피아노’의 개념에 도달했던 박창수는 지난 20 여년 동안 오직 예술의 무한한 (불)가능성들을 자신의 몸과 피아노에 실현시켜 왔다.



대략의 시간과 이미지만을 구상할 뿐 아무런 사전 약속 혹은 준비도 없이 공연장에 들어선 그가 이 날 공연장에 모인 약 30여명의 관객들 앞에서 선보인 이 실황 음원은 박창수 음악의 정수, 오늘을 보여준다. 때로는 피아노의 현을 손으로 직접 뜯기도 하고, 때로는 냄비 뚜껑과 같은 일상의 다양한 사물들을 사용하며, 또 때로는 건반을 반을 이미 누르고 있는 상태 건반을 치는 그의 공연은 망치로 현을 때리는 피아노의 타악적 특성을 극대화하는 공연이다. 일체의 사전 조율이나 작곡을 거부하는 일체의 정형화를 부정하고 상황과 우연의 역동성이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자신의 음악을 박창수는 프리 피아노라 부른다. 프리 피아노는 현대음악의 모든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을 자신 안에 체현하는 몸과 세계의 공명을 지향한다.


먼 옛날 뒤샹이 서양 미술의 내부에서 미술 혹은 예술이 작가와 관객이 벌이는 하나의 ‘놀이’,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구분이란 예술가의 관념 곧 자기 선언에 온전히 달려있는 하나의 ‘게임’임을 밝혔듯이, 존 케이지가 음악과 음악 아닌 것 곧 침묵과 소음이 ‘둘이 아님’을 밝혔듯이, 박창수의 음악은 오늘 어떤 서양적 음계의 실체적 관념성에도 어떤 동양적 악곡의 정형화된 고답성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우연과 리듬, 비트와 멜로디가 연주자의 몸과 피아노와 공연장과 관객이 하나가 되며 서로서로를 만들어가는 ‘카오스’의 세계, ‘생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박창수의 음악은 이미 오늘날 그 자체가 하나의 ‘양식’이 되어버린 ‘서양 현대 음악’이 아닌,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생성되는 우리 ‘동시대의 음악’을 들려준다. 이러한 점은 그가 이번 앨범에서 전통적인 (서구) 음악에서는 보통 중요하지 않은 것 혹은 배제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는 음의 잔향 곧 음의 파장 혹은 웨이브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것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곧 박창수는 음악의 생성에 있어 그 의도된 ‘음들’만이 아니라, 의도되지 않은 ‘잔향’마저도, 그리고 그들 사이의 ‘간섭 효과’마저도, 의도적으로 발생시키고 끌어안으며, 그 협화음과 불협화음 모두를 포괄하는 자신만의 ‘새로운 공명’의 길을 따라 자신의 음악을 상황론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박창수의 음악에는 작곡(作曲, composition)인 동시에 파곡(破曲, de-composition)이라는 생성론적 과정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창수의 음악은 당신의 간섭, 당신과 그 사이의 소통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모두 껴안는 팽팽히 긴장된 날줄과 씨줄의 얽힘과 풀음을 통하여, 당신과 그의 몸 ‘안/밖’에서 또 한 번 스스로 생성ㆍ소멸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무성영화 프리뮤직




박창수 + 김대환 2002



박창수, 알프레드 하르트, 파브리지오 스페라




박창수 강태환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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