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니체전집 2. 비극의 탄생ㆍ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2. [...] 이 책[『비극의 탄생』]은 온통 너무 때 이르고 조숙한 자기 체험들, 즉 한결같이 거의 전달 가능성의 한계에 놓여 있는 체험들로 건립되었으며, 예술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 왜냐하면 학문의 문제는 학문의 토대 위에서는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 학문은 예술가의 광학으로 바라보지만, 예술은 삶의 광학으로 바라본다 .......
- ‘자기비판에의 시도’, 11-12쪽.
4. 민주주의적 취향의 모든 ‘현대적 이념들’과 편견들에 대항하여, 낙천주의의 승리, 우세해진 합리성,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공리주의, 그리고 공리주의와 함께 나타난 민주주의 자체가 어쩌면 - 약화되는 힘, 다가오는 노쇠, 생리적 피로의 징후인 것은 아닌가?
- 15-16쪽.
5. 비도덕적인 예술가-신 [...] 이러한 반도덕적 경향의 깊이는 이 책 전체에서 기독교를 다룰 때 보이는 태도, 즉 조심스럽고 적대저인 침묵에서 가장 잘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 기독교 교리는 오로지 도덕적일 뿐이며 도덕적이고자 한다. 그리고 절대적 척도로써, 예를 들면 그것이 주장하는 신의 진실성으로써 예술을, 모든 예술을 거짓의 영역으로 추방한다. - 즉 부정하고, 저주하고, 유죄 판결을 내린다. 그것이 실질적이고자 하는 한 예술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그와 같은 종류의 사고방식과 가치 평가의 배후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삶에 적대적인 것과 원한으로 가득 차고 복수심에 불타는 삶에 대한 적의를 느꼈다. 왜냐하면 삶은 가상, 예술, 기만, 광학, 관점적인 것과 오류의 필연성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 도덕 자체는 - 어떠한가? 도덕은 ‘삶의 부정에의 의지’, 감추어진 파괴 본능, 몰락과 비난과 비방의 우너리, 종말의 시작이 아닌가? 그리고 결과적으로 위험들 중의 위험이라고 한다면? ... 그리하여 나의 본능은, 삶을 옹호하는 본능으로서, 당시 이 의심스러운 책을 씀으로써 도덕에 대항하여 등을 돌렸다. 그리고 나의 본능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 이론과 반대 평가, 즉 순수하게 예술가적이고 반기독교적인 반대 이론과 평가를 생각해냈다. 그것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문헌학자이자 낱말의 전문가로서 나는 그것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 반기독교인의 올바른 이름을 누가 알겠는가? - 한 그리스 신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나는 그것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 불렀다. -
- 16-19쪽.
1. 세대가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주기적으로 화합하는 남성과 여성의 이중성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직접적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 우리는 미학을 위한 큰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우리가 그리스인들에게서 빌린 것이다. [...] 그리스 세계에서는 아폴론적 예술가인 조각가의 예술과 디오니소스의 예술인 비(非) 조형적 예술 사이에 그 기원과 목표에 따라 커다란 대립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그들의 두 예술의 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와 결부되어 있다. [...] 그 충동들은 그리스적 ‘의지’의 형이상학적 기적 행위를 통해 마침내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하고 아폴론적이기도 한 아티케의 비극을 산출한다. / 이 두 충동을 더욱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우선 꿈과 도취라는 상호 분리된 예술 세계로 생각해보자. [...] 꿈의 세계의 아름다운 가상은 - 그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완전한 예술가다 - 모든 조형 예술의 전제 조건이다. [...] 그리스인들도 꿈 경험의 이러한 즐거운 필연성을 그들의 아폴로 속에 표현했다. 모든 조형력의 신 아폴론은 동시에 예언하는 신이다. [...] 그러나 꿈의 형상이 병리적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 그렇지 않으면 가상은 졸렬한 현실로서 우리를 기만하게 될 것이다 - 저 민감한 경계선도 아폴론의 모습에서 없어서는 안 된다. 적절한 한계 설정, 고아폭한 격정으로부터의 자유, 조형의 신의 지혜로운 평정이 그것이다. [...] 사람들은 아폴론 자체를 개별화의 원리 principii individuationis 의 장려한 신상(神像)이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 만약 개별화의 원리가 깨졌을 때 인간의 가장 깊은 근저로부터, 즉 자연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환희에 찬 황홀을 이 전율과 함께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이 본질은 다음에서 도취의 비유를 통해 쉽게 설명될 것이다. 모든 원시인이나 원시 민족들이 찬가에서 말하고 있는 마취성 음료의 영향을 통해, 혹은 전체 자연을 흥겹게 관통하는 강력한 봄기운에 의해 저 디오니소스적 격정이 눈뜨게 된다. 이 격정이 고조되면서 주관적인 것은 완전한 자기 망각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 29-33쪽.
2. 우리는 지금까지 아폴론적인 것과 그 대립물인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예술가적인 힘들로 고찰했다. 이 힘들은 자연 자체로부터, 인간 예술가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솟아 나오며, 자연의 예술 충동들은 이 힘들 속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충족된다. 한번은 꿈의 형상 세계로서, 이 세계의 완전성은 개인의 지적 수준이나 예술가적 교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취적 현실로서, 이 현실은 다시금 개인을 존중하지 않으며, 심지어 개인을 파괴하려 하고 또 신비주의적인 일체감을 통해 구제하려고까지 한다. 자연의 이러한 직접적 예술 상태에 대하여 모든 예술가는 ‘모방자’다. 그것도 아폴론적인 꿈의 예술가, 혹은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예술가, 혹은 마지막으로 - 예컨대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 도취와 꿈의 예술가다. 우리는 이 세 번째 예술가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신비주의적 자기 포기의 상태에서 열광하는 합창단으로부터 동떨어져 홀로 쓰러진다. 그리고 아폴론적 꿈의 영향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상태, 즉 세계의 가장 내면적인 근거와 하나가 된 자신의 상태가 이제 비유적인 꿈의 형상 속에서 그에게 나타난다.
- 35-36쪽.
열광적 송가를 부르는 디오니소스 숭배자는 오직 자신과 같은 동류의 사람들에게만 이해된다! 아폴론적 그리스인은 얼마나 놀라서 그를 바라보아야만 했던가! 이 놀라움은, 저 모든 것이 본래는 자신에게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고 또 자신의 아폴론적 의식은 하나의 베일처럼 이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은폐하고 있을 뿐이라는 공포의 전율이 뒤섞일 때 더더욱 커졌다. - 39쪽.
4. 아폴론은 우리에게 다시금 ‘개별화의 원리’의 신격화로 나타난다. 이 개별화의 원리 속에서만 근원적 일자의 영원히 성취된 목표, 즉 가상을 통한 자신의 구원이 실행된다. [...] 이러한 개별화의 신격화는, 만약 그것이 명령하고 규정ㅇ을 지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오로지 하나의 법칙만을 알고 있다. 개인, 즉 개체의 경계를 준수할 것, 그리스적 의미의 절도(節度)가 그것이다. 윤리적 신인 아폴론은 자신의 신도들에게 절도를 요구하고, 이 절도를 준수할 수 있기 위하여 자기 인식을 요구한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미학적 필연성 외에도 ‘너 자신을 알라’와 ‘너무 지나치지 말라!’라는 요구가 나란히 생겨난다. 반면에 자만과 과도함은 비(非) 아폴론적 영역에 속하는 본래 적대적인 악령들로, 따라서 아폴론 시대 이전의 거인 시대와, 아폴론 이외의 세계, 즉 야만 세계의 특성으로 여겨졌다. [...]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영향도 아폴론적 그리스인에게는 ‘거인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 보라! 아폴론은 디오니소스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거인적인 것’과 ‘야만적인 것’은 결국 아폴론덕인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성이다!
- 46-47쪽.
여기까지 이 논고의 들머리에서 언급했던 것이 상세하게 서술되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 항상 서로 뒤이어 새롭게 태어나면서, 그리고 상호 강화시켜나가면서 어떻게 그리스의 본질을 지배해왔는가를 다루었다. 거인들의 투쟁이 있었고 잔혹한 민족 철학을 지녔던 ‘청동기’ 시대로부터 아폴론적 아름다움의 충동의 지배를 받고 어떻게 호메로스의 세계가 발전했으며,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물결이 돌연 다시 밀려와 이 ‘소박한’ 장엄을 어떻게 삼켰으며, 이 새로운 힘에 대항하여 아폴론적인 것이 어떻게 스스로를 도리스 예술과 세계관의 굳건한 위엄으로 고양시켰는지를 다루었다. 이런 방식으로 고대 그리스 역사가 저 적대적인 두 원리의 투쟁 속에서 네 가지 커다란 예술 단계로 분리된다면, 마지막으로 도달한 시기, 즉 도리스 예술의 시기가 저 예술 충동의 정점과 의도로 여겨지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이제 이러한 생성과 활동의 마지막 계획에 관해 계속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숭고하고 높이 찬양받은 아티케 비극과 연극적 디오니소스 주신 찬가라는 예술 작품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것은 두 충동의 공동 목표인데, 앞서 진행된 오랜 싸움 끝에 이루어진 두 충동의 비밀스러운 결혼은 자신의 자식인 - 이것은 안티고네이면서 동시에 카산드라다 - 이 작품 속에서 예찬되었다.
- 48-49쪽.
5. 우리는 이제 연구의 본래 목적에 다가가고 있다. 즉 디오니소스적-아폴론적 수호신과 그의 예술 작품을 인식하고, 적어도 저 통일성의 신비를 예감하려 했던 목표에 다가가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그 후에 비극과 연극적 디오니소스 송가로 발전해갔던 저 새로운 싹이 그리스 세계의 어디에서 처음으로 보였는지를 묻는다. - 49쪽
왜냐하면 실존과 세계는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영원히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 56쪽
6. 우리가 만약 서정 문학을, 형상과 개념을 통해 음악을 통해 모방하는 불꽃으로 보아도 된다면,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음악은 형상과 개념의 거울 속에서 무엇으로서 나타나는가?” 그것은 의지로서 나타난다. 이 의지라는 낱말은 쇼펜하우어의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음악은 미학적이고, 순전히 관조적이며 의지가 없는 분위기의 대립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가능한 한 명확하게 본질의 개념을 현상의 개념과 구별할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그 본질상 의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의지로서의 음악은 예술의 영역에서 완전히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 왜냐하면 의지는 그 자체로는 미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음악은 의지로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음악의 현상을 형상 속에 표현하기 위해서 서정 시인은 애정의 속삭임으로부터 광기의 노여움에 이르기까지 온갖 열정의 충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아폴론적 비유를 통해 음악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충동 하에서 서정시인은 자연 전체와 그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영원히 욕구하는 자, 갈망하는 자, 동경하는 자로 이해한다. 그러나 서정 시인이 음악을 형상 속에서 해석하는 한,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그가 관조하는 모든 것이 그의 주위에서 급박하게 이리저리 격동하고 있을지라도 그 자신은 아폴론적 관조라는 고요한 바다에서 편히 쉰다. 물론 그가 동일한 매개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면, 불만족한 감정의 사태에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보일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의욕, 동경, 신음, 환호가 그에게는, 그가 음악을 해석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의 비유다. 이것이 서정 시인의 현상이다. 그 자신은 의지의 욕구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순수하고 맑은 태양의 눈이지만, 아폴론적 수호신으로서의 그는 음악을 의지의 형상을 통해 해석한다.
이러한 논의 전체는, 음악 자체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완전한 무제약성 때문에 형상과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것이 곁에 있는 것을 오직 참아내고 있다고 할 정도로 서정시가 은악의 정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견지하고 있다. 서정 시인의 문학은 엄청난 일밤ㄴ성과 타당성을 가지고 이미 음악, 즉 서정 시인으로 하여금 형상의 언어를 떠올리도록 강요하는 음악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음악의 세계 상징은 바로 그 때문에 언어로써는 어떤 방식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음악은 근원적 일자의 가슴 속에 있는 근원적 모순과 고통과 상징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현상의 위와 앞에 있는 어떤 영역을 상징화하기 때문이다. 음악에 비하면 모든 현상은 오히려 어떤 비유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상들의 도구이자 상징인 언어는 결코 음악의 가장 깊은 내면을 외부로 돌려놓을 수 없으며, 음악을 모방하는 즉시 언어는 음악과의 피상적인 접촉 상태에만 머무르게 된다. 그러는 동안 음악의 가장 심오한 의미는 아무리 유려한 서정적 표현을 통해서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올 수 없다.
- 59-61쪽.
7.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근원을 미로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으며, 미로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논의된 모든 예술 원리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단편적] 전승은 우리에게 비극은 비극적 합창에서 발생했으며, 비극은 근원적으로 합창일 뿐이고 합창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단호하게 말해준다. 우리가 - 비극 합창단은 이상적 관객이라거나, 무대 장면이라는 제후들의 영역에 대해 민중을 대변해야 한다는 - 상투적인 예술의 미사여구에 만족하지 않고, 본래의 원시 연극으로서의 이 비극적 합창의 핵심을 꿰뚫어 보아야 하는 의무가 바로 여기서 생기는 것이다.
- 61쪽.
예술이 그[그리스인]를 구원한다. 그리고 예술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은 - 삶이다. [...] 여기, 이러한 의지의 최고 위험 속에서 예술이 구원과 치료의 마술사로서 다가온다. [...] 디오니소스 송가(頌歌)의 사티로스 합창단은 그리스 예술의 구원하는 행위이다.
- 66-67쪽.
8. 아티케 비극의 관객은 극장 주악석의 합창단에게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결국 근본적으로 청중과 합창단 사이의 대립이 없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춤추고 노래하는 사티로스 사람들로 이루어지거나 혹은 이 사티로스에 의해 대변되는 사람들로 구성된 거대하고 숭고한 합창단이기 때문이다. 슐레겔의 말은 여기서 우리에게 심오한 의미로 해명되어야 한다. 합창단은, 그것이 유일한 관객, 즉 무대의 환상 세계의 관객인 한에서 ‘이상적인 관객’인 것이다. [...] 사티로스 합창단은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적 대중의 환영이며, 무대 위의 세계는 다시금 사티로스 합창단의 환영이다. [...] 근본적으로 미적 현상은 단순하다. 단지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유희를 바라보고 항상 정령의 무리들에 둘러싸여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져보라. 그러면 시인이 될 것이다. 단지 스스로 변신하여 다른 사람의 몸과 영혼으로 말하려는 충동을 느껴보라. 그러면 극작가가 될 것이다. / 디오니소스의 격정은, 그와 같은 정령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들과 내면적으로 하남임을 알고 있는 이러한 예술적 재능을 전체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 비극 합창단의 이러한 과정은 극적인 근원 현상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 앞에서 스스로 변신한 것처럼 생각하고, 마치 실제로 다른 사람의 몸으로, 다른 인물 속으로 들어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연극 발전의 초기에 일어났다. [...] 여기에는 이미 다른 존재 속으로의 몰입을 통한 개체의 포기가 있다. [...] 그렇기 때문에 디오니소스 송가는 다른 모든 합창 가요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 디오니소스 송가의 합창단은 변신한 사람들로 구성된 합창단이며, 이들에게서는 그들의 시민적 과거와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망각된다. [...] / 마법은 모든 극예술의 전제 조건이다. 이러한 마법의 힘 속에서 디오니소스적 도취자는 스스로를 사티로스로 보고, 그리고 그는 사티로스로서 다시금 신을 본다. [...] 이러한 인식에 의하면 우리는 그리스 비극을, 아폴론적 형상의 세계 속에 스스로를 늘 새롭게 표출시키는 디오니소스적 합창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 따라서 연극은 디오니소스적 인식과 효과가 아폴론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며, 그럼으로써 마치 무한한 심연이 벌어지듯 그렇게 서사시와 분리된다.[...] 현대의 무대에서 합창단, 특히 오페라 합창단이 하는 역할과 위치에 익숙해진 우리는 그리스인들의 비극 합창단이 원래의 ‘연기’보다 [...] 더 오래되고, 더 근원적이며,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금 우리는 왜 합창단이 항상 봉사하는 신분이 낮은 존재들, 처음에는 산양 같은 사티로스들로만 구성되어야 하는지, 그런데 왜 그들에게 원래부터 그렇게 높은 의미와 근원적 성격을 부여하는지 동의할 수 없었으며, 무대 앞에 자리한 오케스트라는 우리에게 항상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행위를 포함한 모든 장면은 원래 본질상 하나의 환영으로만 간주되며, 유일한 ‘현실’은 이 환영을 생산하는 합창단, 즉 춤과 음, 말의 상징을 모두 사용하여 이 환영에 관해 말해주는 합창단이었다는 것이다. 합창단은 환영 속에서 자신들의 주인이며 스승인 디오니소스를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봉사하는 합창단이다. 합창단은 신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 어떤 영광을 누리는지를 본다. 그래서 스스로는 행동하지 않는다. 신에게 봉사하는 위치에 있는 합창단이 바로 자연의 가장 숭고한 표현, 즉 자연의 디오니소스적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합창단은 자연처럼 도취 상태에서 신탁과 지혜를 말한다. 그는 함께 고통을 겪는 자로서 동시에 현자이며, 세상의 심장으로부터 널리 진리를 전하는 자다. 그렇게 하여 현명하고 열광적인 사티로스라는, 환상적이지만 혐오스러운 모습의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신과는 반대로 ‘말 못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는 자연의 모사이며 자연의 강력한 충동의 모사다. 그렇다. 그는 자연의 상징인 동시에 자연의 지혜와 예술의 선포자다. 음악가와 시인, 무용가와 예언자가 합쳐 한 사람이 된 것이다. / 이런 인식에 따르면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원래의 무대 주인공이며 환영의 중심인 디오니소스는 처음에, 즉 비극의 초창기에는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었을 뿐이었다. 즉 원래 비극은 ‘합창’이었을 뿐, ‘연극’은 아니었다. 신을 실제 인물로 보여주고 또 환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그것을 둘러싼 후광과 함께 모두의 눈에 보이도록 묘사하게 된 것은 나중에 가서였다. 이로써 좁은 의미의 ‘연극’이 시작된다.
- 70~75쪽.
이제 나는 이러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같은] 수동성의 영광에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 주위를 밝혀주고 있는 능동성의 영광을 대비시켜 보겠다. [...] 그 근본 사상으로 볼 때, 불경(不敬)의 찬가인 프로메테우스 노래에서 가장 멋진 점은 정의를 지향하는 아이스킬로스적 경향이다. [...] 위대한 천재의 훌륭한 ‘능력’, 그 대가로 받을 영원한 고통도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능력, 예술가의 지독한 자부심 - 이것이 바로 아이스킬로스 문학의 내용이자 진수이다. [...]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 되려는 영웅적 충동이 생기면, 즉 개별화의 속박을 넘어서서 하나의 세계 본질 자체가 되려고 하면, 개별적인 것은 사물 속에 감추어진 근원적 모순의 피해를 당하게 된다. 즉 그는 모독의 죄를 짓고 고통받는 것이다. 이렇게 아리아족은 모독을 남성으로, 셈족은 죄를 여성으로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원초적 모독은 남성이, 원초적 죄는 여성이 저지른 것이 된다. 그런데 마녀들의 합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린 그걸 너무 엄격하게 생각지 않아요 / 천 걸음에 여자는 그 정도 갈 수 있지. / 하지만, 여자가 제아무리 서둘러도 / 남자는 한번 훌쩍 뛰면 거기 갈 수 있지.” /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가장 깊은 핵심 - 다시 말하면 거인이 되겠다고 노력하는 개인에게 주어진 모독의 필연성 - 을 이해한 사람은 동시에 이 염세주의 사상의 비(非)아폴론적 성격 또한 반드시 느낄 것이다. 아폴론은 개인들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자기 인식을 하고 절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가장 신성한 세계 법칙으로서의 이 경계선을 거듭 상기시킴으로써 개별 존재들을 안정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는 이런 점에서 디오니소스가 가장한 인물이지만, 아이스킬로스는 앞서 언급한 정의를 향한 깊은 열망 속에 자신의 부계 조상이 개체화의 신이자 정의의 경계와 통찰의 신인 아폴론이라는 점을 은근히 폭로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가 가진 이중성, 즉 디오니소스적이며 동시에 아폴론적인 그의 성격은 - 논리학자 에우리피데스를 놀라게 하는데 - 다음과 같은 공식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정당하며 부당하다. 두 가지 면에서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 79~84쪽
10. 그러나 [다양한 인물들로 나타나는 연극의 진짜] 주인공은 고통스러워하는 비밀의식의 디오니소스이며, 개별화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는 신이다. [...] 앞서 언급한 견해들 속에는 이미 심오한 염세주의적 세계관의 모든 구성 요소가 들어있으며, 이와 함께 비극의 신비스러운 가르침이 들어 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라는 근본 인식, 개별화가 악의 원초적 근거라는 관점, 미와 예술은 기쁨을 주는 희망이며 다시 도래한 일치의 예감이라는 견해 말이다.
11.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관객이 무대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 에우리피데스가 관객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그들이 연극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처음으로, 그리고 진정하게 키워주었다 [...] 에우리피데스는 시인으로서 아마 자신이 대중 위에 있다고 느꼈겠지만, 자신의 청중들 가운데 두 사람보다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90~94쪽
12. 저 근원적이고 전능한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비극에서 분리해, 순수한 형태로 비(非)디오니소스적 예술, 관습과 세계관 위에 새롭게 세우는 것 - 이것이 바로 좀더 밝은 조명 아래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에우리피데스의 경향이다. [...] 하지만 에우리피데스 역시 어떤 점에는 하나의 가면에 불과하다. 그를 통해 말하는 신은 디오니소스가 아니며, 아폴론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 탄생한 마신(魔神), 소크라테스라 불리는 마신이었다. 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소크라테스적인 것의 새로운 대립을 의미한다. 그리스 비극의 예술 작품은 이 대립으로 인해 멸망했다. [...] 이제 에우리피데스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에 맞서 싸우고 결국 승리하는 무기가 되었던 소크라테스적 경향을 살펴보자. / 연극을 비(非)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토대 위에 세우겠다는 에우리피데스의 의도는 [...] 무슨 목적을 이룰 수 있는가? 연극이 음악이라는 모태로부터,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신비스러운 어스름한 빛 속에서 탄생해서는 안 된다면, 어떤 형태의 연극이 가능하겠는가? 단지 연극화된 서사시만이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아폴론적인 예술 영역에서는 비극적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 [비극적-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대비되는] 서사적-아폴론적인 것의 힘 [...] 연극이 이제 서사시의 아폴론적 효과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은 전력을 다하여 디오니소스적 요소들과 결별했고 그래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새로운 감동 수단이 필요했다. 이 새로운 감동 수단은 두 개의 유일한 예술 충동, 즉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의 범위에는 속할 수 없다. 이 감동 수단은 - 아폴론적 관조 대신 - 차가운 역설적 사상이며, - 디오니소스적 무아경 대신 - 불같은 격정이다. [...] / 이상과 같이 연극을 아폴론적 요소 위에만 세우려 했던 에우리피데스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의 아폴론적 경향은 자연주의적이고 비예술적 경향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했다면, 이제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에 한 걸음 더 접근해도 좋을 것이다. 그 최고의 법칙은 대략 다음과 같다. 즉 “아름답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명제 “아는 만이 덕성을 가지고 있다”와 유사하다. [...] 에우리피데스의 서곡은 합리주의적 방식이 가진 생산성의 한 사례가 된다. [...] 에우리피데스에게는 동일한 신적인 진실성이 극의 마지막에 또 한번 필요하다. 주인공들의 미래를 청중에게 보장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저 악명 높은 기계장치 신 deus ex machina 인 것이다. 서사적 회고와 전망 사이에 극적이고 서정적인 현재, 우너래의 ‘연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으로서의 에우리피데스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식적 인식을 반영한 존재였다. [...] 에우리피데스는 비판적이고 생상적인 자신의 작품 활동과 관련하여 종종 아낙사고라스 저서의 서두에 있는 말을 연극에 적용해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모든 것이 혼돈이었다. 그때 이성이 나타나 질서를 창조했다.” 아낙사고라스가 마치 온통 술에 취한 자들 가운데 최초의 말짱한 정신의 소유자처럼 자신의 ‘누스 Nous’를 가지고 철학자들 사이에 등장했듯이, 에우리피데스도 다른 비극 작가들과 자신의 관계를 비슷한 이미지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 에우리피데스는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비이성적’인 시인과 대립되는 시인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준다. “모든 것은 아름답기 위해 의식적이어야 한다”라는 그의 미학적 기본 원칙은 이미 내가 언급한 것처럼, “모든 것은 선하기 위해 의식적이어야 한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에 상응하는 명제다. 따라서 우리는 에우리피데스를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의 시인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 96~103쪽
13. 소크라테스가 그 경향에서 에우리피데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고대에도 간과되지 않았다. 당시 아테네에 떠돌던 소문, 즉 소크라테스가 에우리피데스의 시작(詩作)을 도와주곤 했다는 소문은 이 직감의 정확성을 가장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 근대인들에게는 놀랍게도,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분노와 경멸이 반반씩 섞인 말투로 이 두 사람[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을 이야기했다. 근대인들은 에우리피데스쯤이야 기꺼이 희생하겠지만,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토파네스에게는 최초의, 최상의 소피스트로, 모든 소피스트적 노력의 거울이며 진수로 등장한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지식과 통찰에 대한 전례없는 존중을 가장 예리한 말로 표현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 우리는 ‘단지 본능에 의해’라는 이 표현으로 소크라테스적 경향의 심장부를 건드리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로 기존의 예술이나 윤리 모두를 비판했다. 그가 검토의 눈길을 보내는 곳마다 통찰 부족과 망상의 권세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부족 현상으로부터 기존의 것은 내적으로 전도되어 있고 그래서 배척해야 한다는 결론을 끄집어낸다. 바로 이 한 가지 문제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존재를 수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 ‘소크라테스의 다이몬[daimon, 마신(魔神)]’이라 불리는 저 기이한 현상이 소크라테스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 모든 생산적인 인간에게 본능은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힘이 되며, 의식은 비판적이고 경고하는 태도를 취하는 반면, 소크라테스에게 본능은 비판자가 되고 의식은 창조자가 도니다 - 정말 결함으로 인해 태어난 괴물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모든 신비주의적 성향의 기형적 결함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비(非)신비주의자, 즉 논리적 천성이 과도하게 발달할 비신비주의자처럼 본능적 지혜가 지나치게 발달해 있는 비 신비주의자라 해도 좋을 것이다. [...] 플라톤의 저서에서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향이 지녔던 신적인 소박성과 확실성의 숨결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사람은 논리적 소크라테스주의라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소크라테스의 뒤에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또 그것은 마치 그림자를 통하듯이 소크라테스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아울러 느낄 것이다. [...] 죽음에 임한 소크라테스는 고귀한 그리스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이상이었다.
- 104~108쪽
14. 우리는 그[소크라테스]가 알고 있는 유일한 문학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이솝 우화였다. [...] “너는 네게서 보리라, 그것이 어디에 쓰이는지를, /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 비유를 통해 진리를 말하는 것.” / 그런데 비극 예술은 소크라테스에게 결코 ‘진리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비극 예술이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 즉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호소해야 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는 비극 예술을 멀리 해야 할 두 가지 이유인 것이다. [...] 비극과 예술 일반의 단죄에 있어서 분명 스승의 소박한 냉소주의에 뒤떨어지지 않는 그[플라톤]도 전적으로 예술적인 필요 때문에 예술 형식 하나를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 비극이 이전의 모든 예술 장르를 자신 속에 흡수했다고 한다면, 조금 다른 의미에서 똑 같은 말을 플라톤의 대화편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실 플라톤은 후세 전체를 위해서 새로운 예술 형식의 모범을 제공했다. 장편 소설의 모범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무한히 고양된 이솝 우화라고 활 수 있다. [...] 여기서 철학적 사상은 예술을 감시하고 예술로 하여금 변증법의 줄기에 밀착할 것을 강요한다. 아폴론적 경향은 논리적 도식주의로 변질되었다. 우리는 에우리피데스에게서 이와 유사한 상황을 관찰할 수 있으며, 그 밖에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자연주의적 격정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 비극 속으로 한번 침투한 낙천주의적 요소는 비극의 디오니소스 영토를 서서히 잠식하고 결국 그것을 자기 파멸로, 즉 시민극으로의 투신자살로 몰아갈 수밖에 없다. “미덕은 지식이다. 죄는 무지에서 저질러진다. 미덕을 갖춘 자는 행복한 자다”라는 소크라테스 명제의 논리적 결론만 상기하면 된다. 낙천주의의 이 세 근본형식 속에 비극의 죽음이 들어 있다. [...] 이 새로운 소크라테스-낙천주의적 무대 세계에 비해 이제 합창단과 비극의 음악적, 디오니소스적 토대 전체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 그것은 우연적인 것으로, 비극의 기원에 대한 없어도 좋을 추억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합창단을 비극과 비극적인 것 자체의 원인으로 생각할 때에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낙천주의적 변증론은 삼당논법의 채찍을 휘둘러 음악을 비극에서 추방한다. 즉 그것은 비극의 본질, 즉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유일한 표현이며 형상화요, 음악의 가시적 상징화이며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꿈같은 세계로 해석될 수 있는 비극의 본질을 파괴한 것이다. [...] 소크라테스주의와 예술 사이에는 반드시 대립 관계만 존재하는가, 또 “예술가적 소크라테스”의 탄생은 그 자체로 모순된 것인가라는 질문 [...] 옥중에서 친구들에게 말한 것처럼, 종종 그[소크라테스]는 같은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은 항상 “소크라테스, 음악을 울려라!”라는 말만 했다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의 꿈에 나오는 그 말은 논리성의 한계를 우려하는 유일한 징표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했을 것이다.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고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논리학자를 추방해버린 지혜의 왕국이 있지 않을까? 예술은 학문과 상관성이 있으며 혹 그것을 보완하는 것은 아닐까?
109~114쪽
15. [...] 이론적 인간이라는 유형 [...] 우선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통해 처음 알려지게 된 의미심장한 망상 하나가 있다. 그것은 사유는 인과성의 실마리를 따라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 이를 수 있으며, 사유가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수정할 능력까지 있다는 흔들림 없이 확고한 믿음이다. 이 당당한 형이상학적 망상은 학문에 본능적으로 주어진 것인데, 그것은 학문을 그 한계점으로, 즉 학문이 예술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점으로 몰고 간다. 예술은 이런 메커니즘에서 원래 학문이 지향하는 목표인 것이다. [...] 놀라우리만큼 높은 현재의 지식의 피라미드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고려해본 사람이라면 소크라테스가 이른바 세계사의 전환점과 소용돌이를 이룬다는 사실을 목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이론적 낙천주의자의 원형이 된다. 이론적 낙천주의자는 사물의 본성을 규명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지식과 인식에 만병통치약의 힘을 부여하며 오류를 악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물의 근거를 천착하고 가상과 오류에서 진정한 인식을 분리해내는 일이 소크라테스적 인간에게는 가장 고귀한 소명, 그 자체로 하나밖에 없는, 정말이지 인간적인 소명으로 생각된다. 이로써 개념, 판단과 추리의 메커니즘은 소크라테스 이래 다른 어떤 능력보다 더 높이 평가되었고, 최고의 활동, 경탄할 만한 자연의 선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 그러나 이제 학문은 자신의 강력한 환상에 자극받아 쉴 틈 없이 자신의 경계에까지 이른다. 이 경계에서 논리학의 본질 속에 감추어진 학문의 낙천주의는 실패하고 만다. [...] 그가 여기서 논리가 이 한계점에서 빙빙 돌다가 결국 자신의 꼬리를 무는 것을 보고 몸서리칠때, 인식의 새로운 형태, 비극적 인식이 터져 나온다. 비극적 인식은 단지 참고 견디기 위해 예술이라는 보호막과 치료제를 필요로 하게 된다.
- 115~119쪽
16. 상술한 역사적 예에서 우리는 비극이 음악의 정신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것처럼 음악의 정신이 사라질 때 비극 역시 확실하게 멸망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했다. [...] 나는 시선을 그리스의 저 예술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로 돌리고 그들에게서 그 깊은 본질과 최고의 목적에서 두 개의 상이한 예술 세계의 생생하고 분명한 대표들을 인식한다. 아폴론은 내 앞에 개별화의 원칙을 미화하는 수호자로 서 있다.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진정으로 허구 속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반면 디오니소스의 신비한 환호 아래서 개별화의 족쇄는 산산이 부서지고 존재의 어머니들에게, 사물의 가장 내밀한 핵심에 이르는 길은 열린다. 아폴론적 예술로서의 조형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로서의 음악을 가르는 저 엄청난 대립을 분명하게 본 사람은 위대한 사상가 가운데 유일하게 단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 신들의 상징의 안내를 받지 않고도 다른 예술들과 구분되는 성격과 기원이 음악에 있다고 인정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다른 예술들과는 달리 현상의 모사로서가 아니라 의지의 직접적인 모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모든 물질적인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것을, 모든 현상에 대해 물 자체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310쪽). [...] 우리는 다음의 질문으로 저 근본 문제를 건드리려 한다. 그 자체로 분리된 아폴론의 예술적 힘과 디오니소스의 힘이 서로 나란히 활동하게 되면 어떤 미학적 효과가 발생할까? 좀더 간단히 말해서 음악은 그림과 개념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 “개념들은 관조로부터 추상화된 형식, 즉 사물에서 벗겨낸 겉껍질만을 가지고 있어서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음악은 모든 형체들에 앞서 존재하는 가장 내밀한 핵심, 사물의 심장을 제공한다. 이런 관계는 스콜라 학파의 언어로 잘 표현될 수 있다. 즉 개념들은 사물 이후의 보편 universalia post rem 이지만 음악은 사물 이전의 보편 universalia ante rem 이고 현실은 사물 속의 보편 universalia in re 이다.”(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309쪽) [...]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보통 아폴론적 예술 능력에 두 가지 영향을 미친다. 음악을 디오니소스적 보편성을 비유의 형식으로 관조하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음악은 비유 형식의 형상을 최고의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게 한다. 이처럼 더욱 깊이 있는 관찰이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자명한 사실들로부터 나는 음악의 능력이 가장 의미 있는 본보기인 신화를 낳을 수 있음을 밝혀낸다. 디오니소스의 인식에 고나한 비유를 통해 말하는 비극적 신화를 낳을 수 있는 음악의 능력 말이다. [...] 우리는 음악의 정신으로 개체의 파멸이라는 즐거움을 이해한다. 그런 파멸의 개별 사례들에서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영원한 현상만이 우리에게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개체 원칙의 배후에 있는 전능한 의지, 모든 현상의 피안에서 모든 파멸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을 표현한다. 비극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 기쁨은 무의식적인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형상의 언어로 번역된 것이다.
- 120~127쪽
17. [...] 지식과 학문의 낙천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충동이 고대의 비극을 본 궤도에서 이탈시켰다면, 이런 사실로부터 이론적 세계관과 비극적 세계관 사이의 영원한 투쟁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의 정신이 한계까지 이른 후에야 비로소, 또 보편타당성에 대한 학문의 권리 주장이 이 한계의 증명으로 인해 무효가 된 후에야 비로소 비극의 재탄생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문화 형식에 앞서 설명한 의미에서의 음악을 하는 소크라테스라는 상징을 붙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서로 대조하면서 나는 학문의 정신을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통해 처음으로 드러난 믿음, 자연의 해명 가능성과 지식의 보편적 치유력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해한다. [...] 음악의 신화 창조적 정신은 이제 어디로 갔는가?
- 130~132쪽
18. [...] 혼합률에 따라 우리는 소크라테스적 문화를 가지기도 하고 또는 예술적 문화, 아니면 비극적 문화를 가지기도 한다. 역사적인 보기를 찾아도 좋다면, 알렉산드리아 문화 또는 그리스 문화나 불교 문화가 있다. / 우리의 현대 세계는 알렉산드리아 문화의 그물에 사로잡혀서 최고의 인식 능력을 갖추고 학문을 위해 봉사하는 이론적 인간을 이상으로 알고 있다. 이 이론적 인간의 원형이 바로 소크라테스다.
- 135쪽
19. 소크라테스의 문화를 오페라 문화라 부른다면, 그 내면적 내용을 가장 예리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 오페라가 우리의 알렉산드리아적 문화와 동일한 원칙 위에 세워졌다는 나의 논거를 [...] 완벽히 증명하는 논거를 들겠다. 오페라는 예술가가 아니라 이론적 인간, 즉 비판적인 애호가의 산물이라는 논거를 말이다. [...] 오페라를 파괴하려는 사람은 저 알렉산드리아적 명랑성에 맞서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 [...] 명랑성 본연의 예술 형식이 바로 오페라다. 미학적 영역에서 유래하지 않고 반쯤 도덕적인 영역으로 예술 분야에 몰래 건너와 자신의 잡종적 태생을 여기저기서 숨길 수 있었던 예술 형식이 예술 자체를 위해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 그의 목가적 유혹으로 인해, 그의 알렉산드리아적 아부 예술로 인해 예술에 주어진 - 밤의 공포를 응시한 눈을 구제하고 허상의 치료약으로 주체를 의지 발동의 경련으로부터 구원하는 - 엄숙한 최고 과제가 공허한 오락적 여흥의 경향으로 변질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내가 무대조의 본질로 서술했던 그런 양식의 혼합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 적인 것이라는 영원한 진리는 무엇이 되겠는가? 음악은 하인으로, 가사는 주인으로 여겨지고, 음악은 육체와 그리고 가사는 영혼과 비교되는 곳에서? [...] 우리가 여기서 언급한 실례에서 가장 눈에 띄면서도 이제까지 설명되지 않았던 현상, 즉 그리스 인간의 변신 및 퇴화와 디오니소스적 정신의 소멸을 연관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면, - 이제 가장 확실한 전조 현상이 우리의 현재 세상에서 정반대의 과정, 즉 디오니소스적 정신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음을 보증한다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희망이 솟아오르겠는가! 헤라클레이토스의 신적인 힘이 옴팔레의 힘든 강제 노동에서 영원히 소진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일 정신의 디오니소스적 토대로부터 하나의 힘이 솟아오른다. [...] 그것은 바로 독일 음악, 주로 바흐에서 베토벤, 베토벤에서 바그너로 이어지는 강력한 태양 운행으로 이해해야 할 독일 음악이다. [...]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해보자. 같은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독일 철학의 정신이 칸트와 쇼펜하우어 덕분에 학문적 소크라테스주의의 만족스러운 실존 욕구의 한계를 증명함으로써 그것을 파괴할 수 있었고, 이 증명으로 인해 윤리적 문제와 예술에 대한 무한히 깊고 진지한 고찰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이런 진지한 고찰을 우리는 개념으로 포착된 디오니소스적 지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독일 철학과 독일 음악의 일치라는 신비가 우리에게 새로운 실존 형식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리키고 있단 말인가?
- 139~148쪽
20. 그리스 고대의 재탄생이 목전에 있다는 우리의 믿음을 어느 누구도 없애버리지 말기를. 우리는 그리스 고대 안에서만 독일 정신이 음악의 불꽃 마법을 통해 새로워지고 깨끗해진다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 내 친구들이여. 나와 함께 디오니소스적 삶과 비극의 부활을 믿자. 소크라테스적 인간의 시대는 지나갔다.
- 151~152쪽
21. [...] 원래 음악과 연극의 관계는 정반대다. 음악은 세계의 진정한 이념이고 연극은 이 이념의 반영, 이 개념의 그림자인 것이다. [...] 인기는 있지만 완전히 피상적인 틀린 대립, 즉 영혼과 육체의 대립으로는 음악과 연극의 어려운 관계를 전혀 설명할 수 없으며, 모든 일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 비극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힘든 관계는 두 신의 의형제 결의를 통해 상징될 수 있다. 디오니소스는 아폴론의 언어로 말하고, 마침내 아폴론도 디오니소스의 언어로 말한다. 그로써 비극과 예술 자체의 최고 목표는 달성된 셈이다.
- 159~161쪽
22. [...] 조각가나 서사 시인들, 다시 말해 진정으로 아폴론적인 예술가들 [...] 이 멋진 자기 분열, 아폴론적 정점의 역전이 디오니소스적 마법에서, 즉 아폴론적 흥분을 거짓으로 극도의 상태까지 자극하면서 그 넘치는 아폴론적 힘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디오니소스적 마법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유래한다고 하겠는가. 비극적 신화는 오로지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아폴론적 예술 수단을 통해 형상화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 그[비극적 예술가 자체]의 엄청난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이 전체 현상 세계를 집어삼켜서 이 현상 세계의 배후에서 이 세계를 파멸시킴으로써 근원적 일자의 품안에 있는 최고의 예술적인 원초적 기쁨을 예감하게 만든다. [...] 비극의 부활과 함께 심미적 청중도 다시 태어났다. 이제까지 극장의 객석을 채우던 것은 기이한 대용품, 반은 도덕적이고 반은 학문적 기대를 품고 앉아 있던 ‘비평가’였다. [...]
- 161~164쪽
23. [...] 신화가 없으면 모든 문화는 건강하고 창조적인 자연의 힘을 상실한다. 신화로 둘러싸인 지평이 비로소 전체 문화 운동을 통일시키고 완성시킨다. 상상력과 아폴론적 꿈의 힘은 신화를 통해 정처 없는 방랑에서 구원된다. 신화의 형상은 눈에 띄지 않지만 어디서나 현존하는 다이몬 같은 파수꾼이어야 한다. [...] / 우리는 이제 그 옆에 신화의 인도를 받지 못한 추상적인 인간, 추상적인 교육, 추상적인 윤리, 추상적인 법, 추상적인 국가를 세운다. [...] 그것이 바로 현재, 신화의 파괴를 지향한 소크라테스주의의 결과인 현재의 모습이다. [...] 우리[독일인]의 모든 희망은 오히려, 이 불안하게 위아래로 경련하듯 움직이는 문화 생활과 교양의 발작 아래에 내적으로 건강하고 멋진 태고의 힘이 숨겨져 있으며, 그것은 중요한 순간에 한번 힘차게 요동치다가 다시 미래에 깨어나기를 꿈꾼다는 점을 인식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뻗어간다. 이 심연으로부터 독일의 종교 개혁이 자라나왔다. 개혁의 합창 속에서 독일 음악의 미래 양식이 가장 먼저 울려 퍼졌다. 루터의 합창은 깊고 용감하고 너무나 훌륭하고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무성하게 자란 덤불로부터 봄이 가까이 있음을 느끼고 솟아오른 최초의 디오니소스적 유혹의 소리이다. 디오니소스 열광자들이 엄숙하고도 들뜬 축제의 행렬을 이루며 이 소리에 경쟁하듯이 응한다. 우리는 독일 음악을 그들 덕분에 얻었고, 독일 신화의 부활도 그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 나는 이제 흥미를 느끼고 따라오는 친구를 고독한 관찰의 높은 고지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는 단지 몇 안 되는 동반자들만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격려하면서 우리의 빛나는 지도자, 그리스인을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한다고 외친다. 그리스인들로부터 우리는 이제까지 미적 인식을 순화하기 위해 저 두 신의 형상을 빌려왔다. 이 신들은 각각 독립된 예술 영역을 지배하고 있으며, 두 신이 서로 접촉하고 서로 고양시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리스 비극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원초적인 두 예술 충동의 기이한 분열로 인해 그리스 비극이 멸망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과정과 그리스 민족성의 타락 및 변화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예술과 민족, 신화와 윤리, 비극과 국가가 얼마나 필연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지 진지하게 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비극의 몰락은 동시에 신화의 몰락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스인은 경험한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곧 신화와 연결시켰다. [...] 한 민족의 가치는 - 인간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 자신의 경험에 영원성의 낙인을 찍을 수 있는 정도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이나 인간은 세속에서 벗어나고, 시간의 상대성 그리고 삶의 진정한, 즉 형이상학적 의미에 대한 자신의 무의식적인 확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 자신을 역사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하고 주변의 신화적 방파제를 파괴하기 시작하면 그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보통 이와 연관하여 결정적인 세속화, 자신의 과거 실존에 대한 무의식적인 형이상학과의 단절, 그리고 모든 윤리적 결과 등이 나타난다. 그리스 예술, 특히 그리스 비극은 무엇보다 신화의 파괴를 저지한다. [...]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신화의 부활을 위해] 독일 정신이 라틴적 요소의 제거를 위한 투쟁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독일 정신은 지난 전쟁의 무적의 용맹성과 피에 젖은 영광을 이 투쟁을 위한 외적 준비와 격려라고 인식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내적 필연성은 이 길을 거친 고귀한 선배 투사들, 루터나 우리의 위대한 예술가와 시인들과 동등해지려는 경쟁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투쟁을 가정의 수호신이나 신화적 고향, 모든 독일적 사물의 ‘부흥’ 없이 치를 수 있다고 믿지 않기를! [...]
- 167~171쪽
24. [...] 비극적 신화는 아폴론적 예술 영역과는 가상과 관조에 대한 충만한 기쁨을 공유하면서, 동시에 이 기쁨을 부정하고 가시적 세계의 파괴에서 보다 높은 만족을 얻는다. [...] 예술은 무엇보다도 자기 영역에서의 순수성을 바라야 한다. 비극적 신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동정, 공포, 도덕적 숭고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고 신화 고유의 쾌락을 순수한 미학적 영역에서 찾는 일이다. 추한 것과 부조화한 것, 즉 비극적 신화의 내용이 어떻게 미학적 쾌락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 실존과 세계는 오로지 하나의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되어 나타난다. [...] 이러한 의미에서 비극적 신화는 추한 것과 부조화한 것조차 하나의 미적 유희이며 또 이 유희란 의지가 자신의 쾌락이 영원히 충만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과 노는 유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파악하기 어려운 이 근원적 현상은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유일하게 이해되고, 음악적 불협화음의 놀라운 의미 속에서 직접 파악된다. 세계와 나란히 세워진 음악만이 미적 현상으로서의 세계의 정당화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에 대한 개념을 제공할 수 있다. 비극적 신화가 산출하는 쾌락은 음악에서 불협화음에 대해 느끼는 즐거움과 같은 고향에서 유래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통에서 느낀 자신의 근원적 쾌락과 함께 음악과 비극적 신화의 공통의 탄생지다. [...] 분명하게 지각된 현실에 대해 최고의 쾌락을 느끼면서 동시에 무한한 것을 지향하는 동경의 날개짓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그 두 상태에서 디오니소스적 현상을 인식해야만 한다. 디오니소스적 현상은 우리에게 항상 새롭게 반복되는 개체 세계의 유희적 건설과 파괴를 근원적 쾌락의 분출로서 드러낸다. 이는, 신비스러운 사람 헤라클레이토스가, 장난으로 돌을 이리저리 옮겨놓고 모랫더미를 세웠다가 부수는 어린아이를 세계에 형성하는 힘에 비유한 것과 같은 방ㅅ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어떤 민족의 디오니소스적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음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능력의 두 번째 증거로서 그 민족의 비극적 신화에 대해서도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렇게 음악과 신화 사이에는 가장 밀접한 친화관계가 존립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제 어느 하나의 퇴화와 변형이 다른 것의 쇠약과 연결될 것이라고 추측될 수 있다. 그럴 경우, 일반적으로 신화의 쇠약 속에는 디오니소스적 능력의 약화가 표현된다.
- 173~176쪽
25. 음악과 비극적 신화는 똑같은 방식으로 한 민족의 디오니소스적 능력의 표현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양자는 아폴론적인 것의 저편에 놓여 있는 예술 영역에서 유래한다. 양자는 하나의 영역을 미화하는데, 이 영역이 지닌 쾌락의 화음 속에서는 불협화음과 마찬가지로 공포의 세계상이 매력적으로 울려 퍼진다. 양자는 자신의 강력한 마술을 믿으면서 불쾌의 가시를 가지고 유희한다. 양자는 이러한 유희를 통해 ‘가장 나쁜 세계’의 실존조차 정당화한다. 여기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아폴론적인 것과 견주어볼 때, 현상의 세계 전체를 소생케 하는 영원하고도 근원적인 예술의 힘으로 나타난다. 이 현상 세계의 한 가운데에는 소생한 개체화의 세계를 삶 속에 붙잡아두기 위하여 새로운 미화의 가상이 필요하게 된다. 우리가 불협화음의 인간화를 생각할 수 있다면 -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 이 불협화음은 살 수 있기 위하여 훌륭한 환상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 환상은 불협화음이 가진 고유한 본질 아름다움의 베일로 은폐한다. 이것이 아폴론의 진정한 예술 의도다. 우리는 매순간 실존 일반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고 그 다음 순간을 체험해보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가상의 저 수많은 환영들을 아폴론이라는 이름으로 포괄한다. / 이 과정에서 인간 개체는 모든 실존의 기초, 즉 세계의 디오니소스적 기반에 대해 정확하게 아폴론적 미화의 힘에 의해 다시 극복될 수 있는 양만큼만 의식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예술 충동은 영원한 정의의 원칙에 따라 엄격한 상호 균형 속에서 자신의 힘을 발휘해야만 한다. 디오니소스의 힘이 격렬하게 고양되고 있는 곳에선, 우리가 이를 체험하고 있는 것처럼, 아폴론도 구름에 몸을 감추고 이미 우리 곁에 내려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다음 세대쯤에선 아폴론의 이 왕성한 미적 효과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
- 177~178쪽
예술ㆍ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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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ㆍ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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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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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적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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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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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취
|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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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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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자체ㆍ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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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화 원리
(Principii Individuation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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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화ㆍ도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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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직접적 표현으로서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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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적 형상화ㆍ가상ㆍ환영
으로서의 조각ㆍ미술
(아름다움의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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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ㆍ철학ㆍ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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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신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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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신화의)
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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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화ㆍ탈신화화ㆍ세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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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ㆍ르네상스
종교개혁ㆍ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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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플라톤)ㆍ그리스도교
예수(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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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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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ㆍ자유주의ㆍ공리주의
자본주의ㆍ사회주의ㆍ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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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총체예술
(Gesamtkunstwerk)ㆍ 악극(Musikd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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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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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 『비극의 탄생』, 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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