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움직인다. 2000년 2월 3일 수요일 아침 8시 20분. 나는 혼자다. 당신은 지금 프라하에 있다. 이미 지난주에 친구를 만나러 떠난 당신은 어제 전화로 오늘 저녁의 레이지 어겐스트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RATM)의 공연을 보지 못 하게 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다음 주의 펫 샵 보이즈 공연은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두 공연은 모두 파리의 르 제니트(Le Z nith)에서 열린다. 나는 다시 당신을 만나기 이전과 같은 '고독한 여행'에 익숙해지려 노력한다. 바깥의 풍경은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지평선, 포도밭들이 펼쳐진다. 바깥의 기차 복도에는 프랑스의 젊은 남녀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나도 그 사람들을 따라 안에서 바깥으로 나선다. 벌써 두 시간째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아파 왔던 것이다. 창가에 기대서 담배를 꺼내든 나는 기계에 대한 분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들은 이른바 '좌파 그룹·참여 음악'의 전통에 서있다. 나는 점퍼 주머니에서 이전에 한 인터넷 음악 사이트를 위해 써두었던 그들의 3집 앨범 리뷰를 꺼내어 펼쳐든다.
▶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의 3집: 실험적 기타 사운드에 실려 오는 '억압에 대한 분노' - Rage Against The Machine, <The Battle Of Los Angeles>, Epic/Sony, 1999
1. Testify 2. Guerrilla Radio 3. Calm Like A Bomb 4. Mic Check 5. Sleep Now In The Fire 6. Born Of A Broken Man 7. Born As Ghosts 8. Maria 9. Voice Of The Voiceless 10. New Millennium Homes 11. Ashes In The Fall 12. War Within A Breath
90년대 초 새로운 개념의 '진보적' 하드 코어 랩·록 음악을 세계에 알린 미국의 4인조 그룹 '기계에 대한 분노'의 3집 <The Battle Of Los Angeles>가 발매되었다(www.ratm.com). 앨범은 1집 <Rage Against The Machine>(Epic·92), 2집 <Evil Empire>(Epic·96) 이래 3년만의 신보이다. 그들은 이 앨범을 통해 오늘의 록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오늘의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앨범을 들어보건대 그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면하고자 선택한 방식은 (그룹 이름이 말해주듯) - 현재 음악 신의 지배적 담론으로서의 테크노 혹은 인더스트리얼이 아닌 - 인간의 '원초적 소리, 진실로서의 록'이다. 그들이 지지하는 멕시코 치아파스의 차파티스타 농민 혁명군의 경우가 잘 보여주듯 대부분 아는 것이라고는 가족과 농사일이 전부인 이 '오늘의 혁명 전사들'에게 테크노 혹은 인더스트리얼이 '자신의 노래'이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의 음악적 두 원천이라 할 '록'과 '랩'이라는 양식은 그 기원과 수용자의 측면의 양자 공히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온 장르이다. 이를 위해 2집부터 함께 일해온 프로듀서 브렌던 오브라이언(Brendan O'Brien - 그는 최근 콘(Korn)의 신보 <Issues>도 제작했다. 실로 프로듀서 오브라이언의 전성기이다!)은 신서사이저는 물론 어떠한 전자적 음향 효과도 배제하고, 오직 기타, 베이스, 드럼, 보컬로만 원초적 저항의 사운드를 일구어 내었다.
이러한 '실험'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물론 그룹의 가사와 보컬을 전담하는 잭 들 라 로차(Zack De La Rocha)와 음악 감독 격인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Tom Morello)의 뛰어난 작·편곡 및 연주 능력일 것이다(그의 기타 사운드는 만약 앨범의 크레딧에 적혀 있지만 않았다면 실로 '기타 신서사이저를 사용하지 않았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높은 실험성과 완성도를 함께 보여준다). 하지만 드럼-베이스의 리듬 라인을 맡고 있는 브래드 윌크(Brad Wilk)와 Y.팀.K.(Y.tim.K.), 즉 팀 코머포드(Tim Commerford)의 기량 또한 너무도 안정되고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어, 마치 전성기 70년대의 에어로스미스(Aerosmith)나 80년대의 U2의 리듬 파트를 연상케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의 실험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그들이 제도권 상업 음악의 파상 공격으로부터 록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전사'라는 식의 편협한 도덕적 시각 안에 놓여 있지 않다(왜냐하면 당연히 이른바 주류 음악 신으로부터도 얼마든지 의미 있는 중요한 음악적 정치적 효과가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도덕주의적 강박 관념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적합한 '음악적 표현 양식'의 획득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며, 더구나 이 때 그들의 음악이 메시지 전달을 위한 단순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혁명적 감성을 파생시키는 새로운 '음악적 메시지'의 창출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로 그들은 싱글들인 'Guerrilla Radio', 'Sleep Now In The Fire'는 물론 앨범 전반을 통해 메시지와 사운드의 양면에서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이제 3장의 앨범을 통해 보다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농민 혁명군들'뿐 아니라 오늘의 현대 대중 사회 곳곳에 잠복해 있는 '도시 게릴라들'에게도 호소력 있는 록의 한 전형을 창조해 냈다.
RATM은 이 앨범으로 그들이 '음악적 성취를 갖춘 정치적/저항적 록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그룹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그들은 밥 멀레이, MC5, 클래시의 살아있는 현현(顯現)이며, 퍼블릭 에너미, 사이프러스 힐과 절실히 '뜻을 나누는' 동지(同志)이다 - 그들의 앨범 크레딧의 마지막에는 '[국제 사면 위원회]'·'[위민 얼라이브]'를 포함한 13개 인권 단체의 로고와 웹 사이트 주소가 한 페이지 가득 실려 있다.
기차가 선다. 열차는 파리 동역에 선다. 12시 20분이다. 나는 역구내에서 샌드위치로 적당히 점심을 때우고 시내로 나가 CD점들을 방황한 뒤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방을 잡는다. 호텔을 나서 저녁을 먹으며 시계를 보니 6시 반이다. 조금 늦었다. 공연은 7시 반이다. 낮에 시내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서둘러야 한다. 공연장인 '르 제니트'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M tro=메트로)을 타야한다. 호텔이 있는 레퓌블리크(R publique) 역에서 5번선 보비니-파블로 피카소(Bobigny-Pablo Picasso) 방향의 지하철을 타고 포르트 드 팡텡(Porte de Pantin) 역에서 내린다. 한 30분 조금 못 간다. 가는 도중에는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역도 있다. 우리 나라 같은 '반공 국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이름이다. 적어도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1920년대 이후 1989년 소련의 몰락 이전까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이 주류를 점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포르트 드 팡텡 역에 내린 나는 당신에게 이 곳이 우리 나라 서울의 '예술의 전당'처럼 갖가지 클래식, 연극, 팝 전용 공연장들이 모여있는 '문화 콤플렉스 단지'임을 말해 준다. 단지는 잘 조성되어 있고 아늑하다. 우리 나라 예술의 전당이 갖는 피곤한 부담감과 위화감을 주지 않는 이 곳은 프랑스 정부가 세운 문화 콤플렉스이다. 프랑스라는 '문화 제국주의 국가'의 참된 힘은 이런 면에서 드러난다 ... 그 중 가운데 오른쪽 공원길을 따라 한 5분 정도 걸어가면 르 제니트가 보인다. TV 프로그램의 자선공연, 쇼 프로그램 등등이 이곳에서 생중계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냥 보기에도 굉장히 좋은 공연장이었던 것 같다.
르 제니트 앞에는 이미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무슨 유인물들을 나눠주는 것이 보인다. 나도 다가가 한 장씩 받아본다. 유인물은 여러 가지인데, 특히 미국 필라델피아의 기자이자 흑인 인권단체 '검은 표범'(Black Panthers)의 회원으로 백인 경찰관을 살해한 '혐의로' 92년 사형 선고를 받은 무미아 아부-자말(Mumia Abu-Jamal)의 사면을 요청하는 전단이 많다. 또 전단들 중에는 'RATM, 퍼플릭 에너미 및 스팅에게 보내는 지지 서한'도 있는데, 말미에는 '사형제도 철폐! 죽음의 문화를 타도하자! 무미아를 석방하라! 레너드 펠티어(Leonard Peltier)를 석방하라! 미국의 모든 양심수들에게 정의를!'이라고 적혀있다. 레너드 펠티어는 RATM의 'Freedom' 비디오에 등장하는 인물인데, 그는 미국 인디언들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미국 인디언 운동'(American Indian Movement, AIM) 단체 출신의 인권 운동가로 FBI에 의해 '유도된' 총기 살인 사건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75년이래 현재까지 26년째 복역 중이다(www.freepeltier.org ). 이들에 관한 자료는 RATM의 홈페이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www.ratm.com/action/index.html)
7시 20분이다. 티켓에 적힌 공연 시작 시간은 7시 반이다. 너무 늦었다. 물론 보통 공연은 조금 늦게 시작되고 오프닝 밴드도 있지만 엄청나게 늘어선 사람들의 줄을 보니 심지어 조금 늦을 것 같다. RATM 정도 되면 오프닝 밴드도 상당히 괜찮은 밴드가 나올 것 같다 ... 순서를 기다려 드디어 공연장 안으로 들어선 것은 8시가 거의 다 되어서이다. 이미 '어떤 그룹'이 공연을 하고 있다. 장내는 꽉 차있다. 한 3000-4000석? 모두들 기대와 흥분으로 공연을 기다리는 모습이 겉에서도 느껴진다. 남녀 비율은 8:2 정도, 95% 이상이 백인, 그것도 연령층이 고등학생 정도에서 많아야 20대다. 물론 30대도 약간은 있을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사진이 대형 스피커에 붙어있다. 공연장 중앙에는 아마 세로 10m, 가로 4m 가량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검은 색 천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중앙 가운데에는 붉은 별이 그려져 있다. 보다 작은 같은 그림이 이미 설치되어 있는 그들의 드럼 세트에도 그려져 있다.
그런데 ... 여기까지 살펴보던 나는 이 오프닝 밴드의 음악이 실로 '범상치 않음'을 느낀다. 나는 멤버들을 찬찬히 살펴본다. 무대에는 모두 5명의 멤버들이 이리저리 펄쩍 뛰며 랩·힙합·덥 계열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데, 리더로 보이는 베이스 주자 및 DJ, 기타 주자가 각 한 명이고, 래퍼 한 명, 그리고 키보드와 랩을 겸하는 멤버가 한 명 있다. 그들이 내는 이 라이브 현장의 소리, 특히 베이스와 프로그램된 퍼커션 소리, 즉 리듬 파트의 사운드는 실로 깜짝 놀랄 만큼 뛰어나다. 관중들의 반응도 물론 아주 뜨겁다. 저게 누구지? ... 그리고 잠시 음악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익숙한 리듬 파트 연주에서 드디어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냈다. 그들은 아시안 덥 파운데이션(Asian Dub Foundation)이다! 이들은 영국에서 결성된 파키스탄·인도 계열의 좌파 힙합·록 그룹이다. 가사 및 활동은 실로 RATM 못지 않게 '정치적'이다. 이들의 영국에서의 위상은 재일 교포들로 구성되어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계의 정치적 좌파적 그룹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모르긴 해도 아마 일본에 실제로 이런 그룹이 있을 것이다. 그런 그룹들을 찾아내 지지해 주자!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도 억압받는 소수 동남 아시아 계열의 - 어떤 장르이든 - 음악 그룹이 있을 것이다. 이들도 역시 찾아내어 똑같이 지지해 주자!) 역시 좋은 그룹 공연을 오면 좋은 오프닝 밴드 음악을 듣는구나. 그러나 그들의 공연은 8시 15분 경에 끝이 났다. 좀 더 일찍 오지 못한 것이 다시 한 번 아쉬웠다.
공연장에는 담배와 하시시 연기가 자욱하고, 모든 청년들은 기계에 대한 분노 때문에 기대와 흥분으로 몸을 떨고 있다. 그리고 바로 나도 그러하다. 사실 공연장의 시설은 기가 막힐 정도로, 한 숨이 나올 정도로 좋다. 록 공연장이 이렇게 최첨단 최신식 설비와 설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문화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의 진면목이다. 잠시 후 갑자기 공연장 정면 위쪽에 매달린 소형 영사막에 광고가 방영된다. 내용은 코카콜라! 모두들 일어나 '우우-'하는 야유를 보낸다. 광고가 지나가자 장내에는 한 장의 라이브 앨범이 그리 크지 않은 소리로 플레이된다. 물론 그들이 직접 선택했을 이 라이브는 <From Here To Eternity>였다. 이는 해산 14년 만인 99년 발매된 영국의 좌파 펑크 그룹 클래시(The Clash)의 라이브 앨범이다. 흘러나오는 곡은 'Train In Vain', 'London Calling', 'I Fought The Law' 그리고 'Career Opportunity' 등이다. 장내의 분위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9시가 되자 다시 장내에 불이 꺼지고 무대를 향해 붉고 흰빛이 쏟아진다.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와 환호로 그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크루인 듯이 보이는 두 사람이 가로 3m, 세로 2m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성조기의 위쪽 양끝을 나란히 잡고 나타난다. 관중들은 물론 열렬한 야유를 보낸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성조기를 스피커 앞에 건다. 거꾸로! 이제 성조기는 왼쪽 위의 별이 아래로 가도록 거꾸로 매달려 있다. 관중들은 가히 광적인 박수와 함성으로 미친 듯이 환호한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다. 잭 들 라 로차가 마이크를 잡고 '안녕하세요. 로스 앤젤리스 전투를 지지하는 기계에 대한 분노입니다'(Good Evening, Rage against the Machine for the Battle of Los Angeles)라고 외치며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첫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나는 정말 놀랐다. 그 곡은 최근 3집의 첫 곡 'Testify'였다.
그러나 내가 놀란 이유는 그 곡 때문이 아니라, 불이 꺼지고 그들이 곡을 시작하자 그때까지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던 장내의 모든 젊은이들이 일어나 헤드 뱅잉과 환호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깜깜한 어둠 속에, 그리고 붉고 흰빛 속에, 그리고 RATM의 음악 속에 3000-4000명의 젊은이들이 동시에 일어나 모두 똑 같이 하나가 되어 그들의 몸을 던지는 광경을! 나는 그 순간 이 공연이 나를 더 이상 평론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참여자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기쁨과 흥분으로 다리가 덜덜 떨렸다. 이것은 축제, 분노와 투쟁의, 삶과 죽음의 축제다! 이 축제는 정말 천국이자 지옥이다! 이것은 나를 살게 한다! 나는 내 머리, 내 귀로 이 라이브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 온 몸으로 이 라이브를 '체험'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바꾼다. 이들의 라이브는 실로 '학교', 그것도 아주 정치적인 학교다. 그리고 나는 이 학교가 아주 마음에 든다. 나는 오늘 저녁 이 학교의 학생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그들은 이어 'Guerrilla Radio', 'Born Of A Broken Man' 등 주로 3집의 노래와 1-2집의 대표곡들을 연주했다. 공연 중 잭 들 라 로차가 뛰어다니며 좌우로 돌다가 톰 모렐로와 부딪히면서 둘이 함께 넘어져 관중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관객들은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일어서 있고, 남자들은 거의 모두 웃통을 벗어 던졌다. 맥주와 하시시와 음악이 자욱하게 흐른다. 심지어 내 앞쪽에는 한쪽 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하고 온 청년 하나가 의자에 앉아 목발을 치켜들어 흔들며 헤드 뱅잉을 하는 모습도 보인다. 영어 못 하기로 소문난 프랑스 청년들이 웬 만한 노래의 후렴 부분은 다 따라서 부르고 있다. 그들의 스테이지 매너는 훌륭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운드는 가히 '흠잡을 데가 없다', 완벽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엮어내는, 특히 잭 들 라 로차와 톰 모렐로가 만들어내는 정치적 저항의 정서는 가히 빠져들 만한 것이다. 그들은 말미에 14번째 곡으로 'Freedom'을, 그리고 마지막 15번째 곡으로 'Killing In The Name'을 연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라졌다. 관중들은 열렬히 환호했지만 앵콜곡은 없었다. 10시 15분, 공연 시작 1시간 15분만이었다.
공연장을 빠져 나온 나는 집으로 갈까 하다가 길 건너편의 호프집에서 맥주를 한 잔 하고 가기로 마음먹는다. 호프집 안은 공연장에서 나온 듯한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그들의 티셔츠를 입거나 포스터를 손에 든 사람들도 있다. 나는 맥주 한 잔을 시키고 담배를 물고는 생각에 빠진다 ... 일단 앵콜곡이 없었던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 한참을 이리저리 생각해보던 나는 그게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항상 앵콜곡이 있는 다른 공연들 사이에서 오히려 쌈빡하고 깔끔하게 공연을 끝냈다'는 쪽으로 느낌을 정리했다. 공연에 대한 느낌은 항상 한 묶음으로 묶여 함께 나에게 '드는 것'이지 내가 조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쌈빡하고 즐거운 투쟁의 체험, 연대의 체험, 축제의 체험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 어, 그리고 또 뭘 생각해봐야 될까 ... 하여튼 혼자 마시는 술은 사람을 빨리 취하게 한다. 겨우 500cc 정도를 마셨을 뿐인데도 무척 피곤하다. 아마도 여행의 피로 등이 겹쳐서 그럴 것이다.
이 곳 프랑스 사람들은 (집에서 혼자 매일 마시는 진짜 알콜 중독자들은 빼고) 술을 절대 많이 마시지 않는다. 한 1-2시간 동안 250cc 짜리 두 잔정도 마시는 게 '끽'이다. 한 자리에서 3잔 이상 마시는 사람은 여기 온 지난 3년 동안 한 명도 못 봤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흔히 - 아니 거의 매일, 매 저녁마다 볼 수 있는 - 길거리에 쓰러져 주정을 하거나 자는 사람도 아직 한 명도 못 봤다(물론 슈퍼마켓이나 역 근처에 상주하는 '거지 아저씨들'은 예외다). 물론 취객들이 싸우는 것도 1년에 한번 정도 구경할까 말까 한 희귀한 구경거리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는 프랑스 인들의 국민성이 갖는 그들만의 특유한 양식 혹은 이면이 있으므로, 또 이걸 보고 '역시 선진국 사람들은 달라' 등등의 무지한 성급한 판단은 내리지 않는 게 좋다 ... 하여튼 나는 외롭고 피곤했다. 벌써 11시 반이다. 나는 돈을 치르고 문 쪽으로 걸어 나간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닌가! 돌아다보니 내 나이 또래의 웬 백인 청년이다. 첫인상에도 선한 눈동자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저기, 너 혹시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 공연 갔다 오는 거 아니니? (프랑스어에도 경어가 있지만 실제로 생활해보면 여기 젊은이들은 비슷한 연배로 보이면 초면에도 바로 '너'(tu)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는 '시비 거는 것'으로 비춰지겠지만, 여기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심지어는 교회에서 하느님도 'Tu'라고 부르므로 다만 친근한 말투 정도의 어감이 된다) 어, 그래, 맞는데 ... 아, 난 아까부터 여기서 널 보고 있었는데 ... 너도 공연 갔다 온 것 같아서 그냥 너한테 말 걸어보려고 생각했거든. 그래? 바쁘지 않으면 나하고 맥주 한 잔 더 마실래? 어 ... 그러지, 뭐. 너도 혼자 공연 봤니? 응 ... 난 스트라스부르 사는데 이 공연 보러 파리에 왔어. 뭐? 스트라스부르에서? 야, 너 음악 정말 좋아하는구나! 나도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의 광팬이야. 그럴지 알았지, 나도 혼자 공연보고 심심해서 사람구경이나 하고 있었는데 네가 혼자 앉아 있는 게 눈에 뜨이 길래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네가 동양인인데 불어를 못할 수도 있고 또 뭔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아서 그냥 있었지. 야, 그럼 말을 하지! 나도 누구하고 얘기하고 싶어서 죽을 뻔했는데!
그렇다. 이게 (록) 공연 구경 다니는 재미다. 우리는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혹은 받아들이고 찾는 음악이란 때로 말보다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넌 프랑스 사람이냐? 응, 난 프랑스 사람이야, 넌? 난 한국 사람이야. 난 스트라스부르에서 공부하는데 ... 사실 친구들하고 록 음악 잡지를 하거든. 난 잡지에 실을 공연 취재 때문에 여기 온 거야. 내가 '유럽 특파원'이거든. 편집인도 겸하고. 그래? 와, 영광이다, 야! 한국이면, 남한이겠지? 당연하지. 북한 사람이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 공연에 오겠니? 넌 한국에 대해서 좀 아는구나. 수도가 서울이던가? 오 예, 맞아. 난 직업 군인이야. 그리고 태권도를 좀 배웠었거든, 그리고 올림픽 할 때도 봤지. 몇 년이었더라 ...응, 88년이었지. 그런데 태권도도 배웠어? 고맙다, 야. 여기서는 유도나 카라테를 더 많이 하는 것 같던데. 유도는 그렇지.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지. 지난 올림픽에서도 무제한급인가 결승에서 일본 선수하고 붙어서 프랑스가 금메달 땄었지? 맞아. 그런데 카라테보다는 태권도가 더 유명해. 어, 그래? 그건 몰랐는데. 이건 내 생각인데, 동양 무술들, 그러니까 태권도 같은 운동에는 우리 서양 사람들한테 부족한 '자기 통제'(ma tre de soi)의 철학이 있는 것 같아서 난 무척 좋아해. 그가 표현한 자기 통제란 아마도 한문으로 '수신'(修身)의 개념의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극단적 개인주의(모든 사람은 자유롭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이 절대적으로 외롭다)와 히틀러 같은 파시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대중과 역사 속에서 '내'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 대중적 조작의 결과로 나와 다른 '너', 혹은 '내 안의 너'를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제거한다)를 경험한 서구인들로서는 무척 매력적인 개념일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말이야, 넌 오늘 공연 어떻게 봤냐? 어휴, 죽였지, 뭐. 정말 좋았지? 정말 좋았어, 환상이었어 ... 특히 마지막의 'Killing In The Name' 부를 때는 통쾌해서 가슴에서 피가 끓더라! 그 노래는 가사가 '과격해서' 판에 그 노래만 가사가 없지? 맞아, 너도 아는구나. 검열에 걸렸나? ... 미국에도 검열이 있나? 잘 모르겠는데 ... 하긴 가사가 그 쪽에서 보면 좀 지나치게 '진솔하긴' 하겠지 ... 하여튼 콘서트는 '죽이게 좋았어, 좆나게 좋았어'(killing good, fucking good)! 거의 내 일생의 최고의 콘서트들 중 하나였어. 하하! 그랬지? 나도 그랬어 ... 야, 근데 너 이름이 뭐냐? 나, 장-이브 드쌩(Jean-Yves Dessaent)이야. 그냥 이브라고 부르면 돼. 난 경이라고 해 ... 겅? 아니, 경. 귕? 야, 발음하기 되기 어렵구나 ... 하하, 너희들한테는 그렇지.
그래서 나는 처음 만나는 외국 친구들한테는 내가 만든 프랑스 이름을 가르쳐 준다. 그럼 그냥, 가브리엘(Gabriel)이라고 불러. 그게 훨씬 낫네! 그래, 그래. 근데 나중에 친해지면 '경'이라고 불러야 된다. 근데 가브리엘은 니 이름의 번역이야? 아니, 아니, 여기 애들이 하도 내 이름을 - 나중에 기억하는 건 고사하고 - 발음을 못해서 아예 하나 만들었지. 내가 피터 게이브리얼(Peter Gabriel)을 엄청 좋아하거든, 그래서 불어 식으로 읽어서 가브리엘이 된 거야. 하하, 그래? 그거 재미있는 생각이네. 근데, 그래도 원래 네 이름이 난 더 좋다. 너 편한 대로 해. 그런데 이브, 넌 무슨 음악 좋아하냐? 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데 ... 음 ... 난 사실 우리 아버지가 핑크 플로이드나 지미 헨드릭스, 레드 제플린의 엄청난 팬이었거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그런 음악을 들어서 그런지 아직도 그런 음악들이 제일 좋지. 요즘에는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이 상당히 좋은 것 같아 ... 그렇지? 프로디지, 나인 인치 네일즈도 좋았지만, 데뷔 초기 시절보다는 못한 느낌이야 ... 벌써 12시 반이다. 이브는 헤어지면서 나에게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며 그 밑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적어주었다: "Rage, ils ont la rage everybody transformer. I love you Gabriel"(분노, 그들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분노를 가지고 있다. 사랑한다, 가브리엘).
그리고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전철을 나와 호텔을 향해 밤거리를 걸으며 오늘 그들이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Killing In The Name'의 가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살인 폭력을 야기하는 사람들 중 몇몇이, 바로 우리를 먼저 공격해오는 그 사람들이야. 폭력을 야기하는 사람들 중 몇몇이, 바로 우리를 먼저 공격해오는 그 사람들이야. ...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살인! 그래, 너 지금 그 사람들이 너한테 시킨 대로 하고 있지. 그래, 너 지금 그 사람들이 너한테 시킨 대로 하고 있지. 죽어서 영웅이 될 수 있는 사람들, 훈장을 달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선택받은 백인들 뿐이야. 넌 훈장으로 죽은 사람들을 정당화하지, 하지만 그들은 오직 선택받은 백인들일 뿐이야. ...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살인! 그래, 너 지금 그 사람들이 너한테 시킨 대로 하고 있지. 그래, 너 지금 그 사람들이 너한테 시킨 대로 하고 있지. 그래, 너 지금 그 사람들이 너한테 시킨 대로 하고 있지. 야, 넌 지금 조종당하고 있는 거야! 그래, 너 지금 그 사람들이 너한테 시킨 대로 하고 있지. 야, 넌 지금 조종당하고 있는 거야! 일어나! 자! 일어나! 좆까! 난 니가 시키는 대로 안 해! 좆까! 난 니가 시키는 대로 안 해! 좆까! 난 니가 시키는 대로 안 해! 좆까! 난 니가 시키는 대로 안 해! 좆같은 씨팔 놈!
분노, 기계에 대한 분노. 그들은 아름다웠다. 한 사람의 팬이자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동료'로서, 탈퇴한 잭 들 라 로차와 남아있는 RATM 멤버들 모두의 앞길에 더욱 뛰어난 음악적·정치적 성취가 있기를 바란다.
* 2001년 음악평론가 동료들과 만든 프로그레시브 록음악 잡지 <뮤지컬 박스> 실은 공연 취재기. 원문은 아래.
http://koreanrock.com/wiki.pl?RATM200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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