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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6.

유럽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 - 하이데거적 어원학의 오류



"로마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람들이 말한 것이 모두 다 옳은 건 아니야."(147)
- 안똔 빠블로비치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오종우













<동일성과 차이> - 마르틴 하이데거 / 신상희
       
필로소피아라는 말은 우리의 서양적-유럽적 역사의 가장 내적인 근본 특징을 규정해주기도 한다. 흔히 듣게 되는 <서양적-유럽적 철학>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동어반복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철학이 그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적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은 그 본질의 근원에 있어서, 스스로를 전개하며 펼쳐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그리스 정신 문화를, 그것도 오직 그리스 정신 문화만을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

철학이 그 본질상 그리스적이라는 명제는, 서양과 유럽이 - 그리고 오직 서양과 유럽만이 - 가장 내적인 역사의 진행 과정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철학적>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이 아니다. 이것은 여러 학문들의 발생과 지배에 의해 증명된다. 왜냐하면 제 학문들은 가장 내적인 서양적-유럽적 역사 과정, 즉 철학적 역사과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오늘날 지구상의 인간의 역사에 특별한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77-78).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한길그레이트북스 026)> - 에드문트 후설 / 이종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럽인에 속하는 다른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인 '학문'이나 '철학'이라는 특수한 문화형태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상론한 바에 따라, 새로운 철학을 근원적으로 건립한 것은 근대유럽의 인간성(Menschentum)을 근원적으로 건립하는 것이며, 게다가 중세의 인간성이나 고대의 인간성인 이제까지의 인간성에 대항해서 근대의 새로운 철학을 통해 그리고 바로 이 철하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자기를 혁신하려는 인간성인 근대유럽의 인간성을 근원적으로 건립하려는 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의 위기는 철학적 보편성의 분과들인 근대학문 모두의 위기를 뜻하며, 이것은 유럽 인간성의 문화적 삶이 지닌 의미심장함 전체, 즉 그의 실존(Existenz) 전체에서 맨 처음에는 잠재적이지만 점차 더욱더 두드러지게 드러난 유럽 인간성 자체의 위기이다(73).


철학 즉 학문은 인간성 그 자체에 '타고난 본래의' 보편적 이성이 계시(Offenbarung)되는 역사적 운동(historische Bewegung)일 것이다. / 만일 오늘까지도 여전히 완결되지 못한 [근대철학의] 운동이 진정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정확히 성취되는 진행에서 일어난 완전한 실현상태로서 입증되었다면, 혹은 만약 이성이 사실상 그 자신에 대해 자기에게 고유한 본질적 형식 즉 정합적인 필증성 통찰을 통해 계속 발달하고 필증적 방법을 통해 자기자신에 의해 규제되는 보편적 철학의 형식에서 충분히 자각하면서 형성되었다면, 이러한 것은 현실적일 것이다. 이것에 의해 비로소 유럽 인간성이 가령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단순한 경험적인 인간학적 유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이념을 자신 속에 갖고 있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그밖의 인간을 유럽화하는(Europaeisierung)하는 각본은 세계의 의미에 속하지 않는 절대적 의미의 지배를 그 자체로 표명하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가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78).


유럽에는 - [유럽 이외의] 다른 모든 인간집단 역시 - 유용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도외시하더라도, 어쨌든 그들이 정신적으로 자기를 보존하려는 불굴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를 끊임없이 유럽화(europaeisieren)하려는 동기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종류의 어떤 것이 있다. / 반면 우리들[유럽인]은, 만역 우리가 스스로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을 결코 인도화(印度化)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우리 유럽의 인간성에는 본래 타고난 어떤 완전한 모습(Entelechie)이 있으며 , 이 완전한 모습은 유럽의 형태들의 변화를 철저히 지배하고 이 형태의 변화에다 어떤 영원한 극(極)으로서의 이상적 생생활형태나 존재형태로 발전하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느낀다(그리고 이것이 매우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이 느낌은 충분히 정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432).


정신적으로 유럽은 출생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떤 지방에 있는 지리적인 것 - 비록 이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 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국가 또는 그 국가를 구성하는 개별적 인간이나 인간들 집단의 정신적 출생지를 뜻한다. 그거은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의 고대그리스 도시국가이다. 이 도시국가에서 그들의 환경세계에 대한 개별적 인간들의 새로운 종류의 태도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시종일관 수행한 결과 체계적으로 완결된 문화형태로 신속하게 성장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정신적 산물이 출현하였는데,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철학'이라고 불렀다. 이 말을 근원적 의미에서 올바로 번역해보면, 바로 보편적인 학문, 세계 전체에 관한 학문 즉 모든 존재자의 전체적 통일성에 관한 학문을 뜻한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곧바로 전체에 관한 관심 그리고 이와 동시에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생성작용과 이 생성작용 속에 있는 존재에 관한 물음은 존재의 보편적 형식들과 영역들에 따라 특수화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단 하나의 학문인 철학은 다양한 개별과학들로 분파되었다. / 그러므로 모든 학문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철학이 출현한 것에서 나는, 이 사실이 아무리 역설적으로 들리더라도, 정신적 유럽의 근원적 현상(Urphaenomen)을 보게 된다(433-434).


무엇보다도 양측 [동양과 서양] 철학자들의 태도나 그들의 보편적 관심 방향은 확실히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들은 서양이든 동양이든 세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관심은 양측에서, 따라서 인도철학이나 중국철학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동양]철학들의 경우에도 역시 - 어떤 종류의 직업적인 생활상 이해관계 방식에 따라 작용하는 곳이거나, 일반적 유산이 그 속에서 세대로부터 세대로 이어지면서 전승되거나 혹은 명백한 동기를 지니고서 계속 발전되는 직업적 공동체로 이끄는 곳 어디에서나 - 보편적 세계인식으로 이끈다. / 그러나 오직 그리스인의 경우에만 우리는 순수한 이론적 태도라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형태에 관한 보편적(우주론적)인 생활상의 이해관계를 발견하게 된다(438-439).


그리스-유럽의 학문(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철학'이다) - 이것은 이와 동등하게 평가된 동양의 철학들과 원리적으로 구별된다 - 을 보다 깊게 이해해기 위해서는 유럽의 학문에 앞서서 그러한 철학들을 창조하였던 실천적-보편적 태도를 좀더 상세하게 고찰하고, 이러한 태도를 종교적-신화적 동기와 종교적 신화적 실천은 자연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성에 - 그리스철학과, 이와 동시에 학문적 세계고찰이 출현하고 발전하기 이전에 - 함께 속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또한 본질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필연성이다(444).


만일 그리스로부터 창조되었고 근대에 와서도 계속 형성된 학문적 사고방식으로 교육받은 사람이 참으로 인도나 중국의 철학과 과학(천문학, 수학)을 논의하고, 따라서 인도나 바빌로니아, 중국을 유럽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전도된 것이고 하나의[또 다른] 의미왜곡이다(446).


나 역시 '유럽의 위기'는 길을 잘못 들어선 합리주의(sich verirrende Rationalismus)에 뿌리가 있다는 점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합리성 자체가 악이라든가. 인간성의 실존(Existenz) 전체에서 부차적인 사소한 의미라는 견해를 뜻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논의한 그 높은 [차원의] 진정한 의미의 합리성은 그리스철학의 고전적 시대에 이상(理想)이었던, 본원적으로 그리스적 의미의 합리성이다. [...] 오래되었지만 훌륭한 정의(定義)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 심지어 파푸아인 역시 사람이지 동물은 아니다(453-454).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 위르겐 하버마스 / 이진우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탄생된 민주적 헌법 민족국가는 이제까지 세계사적으로 성공한 유일한 정체성의 구성체였다. 이 구성체는 일반적인 것과 특수적인 것의 계기들을 아무런 강제없이 서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 공산당은 민족국가적 정체성을 대변할 수 없었다. 만약 더 이상 민족의 토대 위에 있지 않다면, 오늘날 보편주의적 가치지향성은 도대체 어떤 토대 위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나토로 결정화되는 대서양적 가치공동체는 국방장관들의 선전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아데나우어나 드골의 유럽은 단지 통상연합의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를 제공할 뿐이다. 공동시장으로서의 유럽에 대한 반대로서 최근의 좌파적 지식인들은 전혀 다른 초안을 기획하고 있다.


[...] / 결연히 서양 합리주의의 유산을 받아들이는 이 전혀 다른 서양적 정체성에 관한 꿈은, 국제 연합이 '제2의 미국혁명'이라는 깃발 아래 초기 모더니즘의 환상들로 후퇴하는 시점에서 형성된다. 예전의 국가소설에서 그려진 질서의 유토피아들 속에서는 이성적 생활형식들이 자연의 기술적 지배와 사회적 노동력의 무자비한 동원과 기만적인 공생관계를 맺었다. 행복과 해방을 이렇게 구너력과 생산과 동일시한 것이 처음부터 현대와 자기이해를 혼란시켰다. 즉 현대(성)에 대한 2백년 간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


스스로 야기한 체계적 강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의 비전을 경제성장, 군비경재, '낡은 가치들'의 갈등적 결합에 대립시킬 때에만, 노후한 유럽은 다시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생존 자체를 위해 시장에서 또는 우주에서의 국제적 경쟁력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체계적 강요들이 응축되어 있는 일상적 확실성 중의 하나이다. 마치 힘의 놀이에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회적-다윈주의적 유희규칙이 아닌 것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세력 확장과 간섭을 다른 사람의 세력 확장과 간섭을 들어 정당화한다. 현대적 서양은 이러한 심성이 이성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세계를 위한 정신적 전제조건과 물질적 토대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니체 이래로 실행되고 있는 이성비판의 진정한 핵심이다. 서양이 아니라면 누가 자신의 전통으로부터 비전을 지닌 통찰과 에너지와 용기를 길어낼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들은 체제보존과 체제고양이라는 맹목적 강요의 - 이미 오래전부터 형이상학적이 아닌 - 초생물학적 전제조건들로부터 심성을 형성하는 힘을 얻어내기 위해 필요할지도 모른다.

- 422-423








"제가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 이른바 제가 '서양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라고 이름붙인 부분인데요, 탈 오리엔탈리즘-옥시덴탈리즘적 시각에서 보편성, 합리성, 근대성의 문제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에서 하이데거의 철학 관념에 대한 비판을 다루어 보고 싶습니다. 하이데거는 철학 자체를 그리스어 philosophia와 동일시하고 그 내용과 형식을 본질적으로 모두 그리스적인 것으로 보며 따라서 철학은 오직 그리스와 그 전통을 받은 그리스-로마-유럽적 사유에서만 가능하다는 관점을 명시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다룬 것이 <철학, 그것은 무엇인가>와 <철학입문>입니다. 이 책들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은 오직 그리스 철학이며 이말은 사실상 동어반복(Tautologie)이고 따라서 한국철학은 한국 그리스 철학이라는 말처럼 처음부터 형용모순(contradictio in adjectio)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이러한 관념이 하이데거의 위대성(저는 이십세기 전반기의 위대한 몇 명의 철학자를 고르라면 하이데거와 비트켄슈타인, 러셀과 화이트헤드를 고르겠습니다)이자 한계라고 봅니다.
위대성이라는 부분은 그가 모든 동시대의 서구인들이 느끼고 있지만 다만 파편적으로만 사유하고 있는 것을 명시적인 명제의 형태로 정식화 했다는 점, 그리고 한계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논증이 기본적으로 한 개념의 의미 혹은 본질을 그 개념의 어원학적 분석의 결과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곧 이러한 어원학적 논증은 기본적으로 언어학적 논증이며, 언어학적 논증은 근본적으로 그 언어가 유통되고 작동하는 문화권내에서만 타당한 논증입니다. 물론 저는 어원학적 분석이나 탐구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개념의 의미 혹은 이른바 '본질'을 그 개념의 어원학 분석과 100% 동일시하려는 태도는 한 마디로 오류입니다.
이는 어원학적 곧 궁극적으로 문화적인 단어의 개념 분석을 통해서 보편학을 정립하겠다는 시도로서 근본적으로 자기 모순적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어원학적 분석이 다름 아닌 보편성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하이데거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 철학과 존재, 존재자, 보편성 그리고 근대성 및 합리성 등의 개념은 모두 얽혀 있는 존재들입니다.
결국 하이데거의 논증은 서양에 동양의 道에 완벽히 합치하는 개념이 없으므로 서양철학은 道學 혹은 철학이 아니라는 어느 중국학자의 말과 완전히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최근의 사상가들 거의 모두를 비롯하여 20세기까지의 모든 서양철학자들은 19세기 중반에 아편전쟁에 패하기 전까지의 중국학자들과 동일한 오류에 빠져있습니다.
양자는 모두 자신들의 지역적인 특수한 개념들과 사건, 역사만을 다루면서 그것을 인류 전체에 대해 타당한 것으로 가정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단순한 무지로서, 마르크스의 말대로, 무지는 논증이 아닙니다.
문제는 번역과 개념사 혹은 계보학의 문제를 끌어들이는데, 바로 보편과 철학, 합리성, 근대성 등의 개념 자체가 바로 서구어를 번역한 19세기 일본어라는 사실에서 그러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러한 서구적 보편성과 보편성 자체를 동일시하는 태도, 방금 말씀 드린대로 하이데거가 정식화한 바로 이 태도가 오늘날 참다운 보편성의 정립에 방해가 되고 있으며, 그러한 논변의 철학적 오류를 지적하여 참다운 다문화적 전지구적 글로컬한 복수/다수의 분산적 보편성, 탈경계적 보편성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 제가 쓰고자 하는 논문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잘못된 태도를 '하이데거적 어원학에만 호소하는 오류' 혹은 간단하게 줄여서 '하이데거적 어원학의 오류'라 이름 붙이고, 이를 '서구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라 명명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제가 십여년 전부터 논문에서 종종 밝혀온 생각인데, 이번 기회를 빌어 논문의 제목도 처음부터 <'서구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 - 하이데거적 어원학의 오류>로 정하여 이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배병우





























남정 박노수










































2012. 7. 23.

근세조선정감 上








 
박제형 / 이익성


"정감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책은 철종이 즉위하던 때부터 시작되었고 중점은 대원군의 인물됨과 그의 시정에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수정의 서문을 보면 "일본인 궁천씨가 나에게 조선정감 두 권을 보이면서 서문을 청하는데, 곧 이순이 짓고 배차산이 평한 것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정감은 원래 상하 두 권으로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권은 국내에서는 볼 수 없고, 역자의 과문인지는 모르나 일본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듯하다. 그러므로 정감 저자가 기록한 연대는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알 수가 없다."

- 이익성의 <역자해제>, 4쪽

"조선 근대사에 대한 서적을 얻어 읽을 수가 없다."(朝鮮近代之史 不可得而讀, 119쪽)

- 배차산의 <근세조선정감 서>의 첫문장(11쪽)



***


내가 조사한 바로는 이 책은 '근세'와 '근대'라는 말이 사용된 최초의 국내 문헌이다.

modern의 일어 번역 '신한어'인 '근세'라는 말은 니시 아마네의 1784년 저작 <<백일신론>>에 처음 보이고, 역시 같은 용어를 번역한 '근대'는 오히려 그보다 1년 빠른 1873년 아리마사학교에서 나온 영일사전 <<영화장중자전>>에 처음 나온다.

우선, '근세'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최초의 우리나라 문헌으로은 - 물론 다른 글에서도 앞으로 더 나올 수도 있지만 - 1886년 발간된 이 책이 최초로 보인다.

더욱이 이 글이 발간될 당시 함께 수록된 배차산의 <서문>에는 '근대'라는 말조차 나온다! - 우리말 번역본에 부록으로 실린 원문 119쪽에 나온다.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하여 인터넷에서 찾으니 모두 절판인데 오직 교보에만 아직도 있었다. 당장 주문하여 읽는 중인데 이런 뜻밖의 큰 수확을 얻었다.

이런 때 나는 - 가령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아무도 지나지 않는 어느 시골의 낡은 무덤 안 창고에서 사라진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희극편> 양피지를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러한 작업에 바보같은 그러나 행복한 스릴과 보람을 느낀다.

물론 이보다 이른 근세 혹은 근대의 용례가 박영효 등이 1884년 경부터 적은 국한문 혼용체 혹은 한글일기, 김옥균 혹은 서광범, 박영교 등의 글에 등장할 수도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이런 조사 작업은 국내에서는 이전에 - 글자 그대로 - 아무도 수행한 적이 없는 작업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용례가 등장할 수 있고, 그러한 용례가 보여주는 의미상의 차이에 따라 moderne의 일어 번역어인 근대와 근세의 국내 수용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


2012. 7. 6.

『무미예찬』

프랑수아 줄리앙, 『무미예찬』, 산책자, 2010.





 
“고대 중국 사상이 현실에 접근하는 관점은 진실로 '존재'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것(물자체, 이데아)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내재하며 생성에 그 변전의 논리를 부여하는 일관성을 묻는 것이다.”(038)
 
프랑수아 줄리앙(올바른 우리말 표기법은 쥘리앙이나, 일단 인용서 표기를 존중) 책을 유학시절에도 읽었지만 제대로 차분히 전권을 다 읽기는 처음이다. 잘 썼다. 아주 특급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일단 동양의 사유에 대해 헛소리는 거의 전혀 없는 수준이다. 사실은 탁월하다.
 
일본식 서구화가 완료되고도 50년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역설적으로 이른바 동양사상은 이른바 동양인들에게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오묘하다거나, 신비하다거나, 과학적이지 못하다거나, 서양과학을 넘어선다든가 하는, 여하튼 요점은 '한문을 모르거나, 한문만 아는' 괴상한 사람들의 괴상한 이해만이 난무한다(무지는 논증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전을 우리 할아버지들의 용어와 관점이 아니라 서양의 관점과 개념을 통해 해설하고 설명할 때 더 이해가 잘되는 수준에 도달할 정도의 서양화/근대화를 이루었다.
 
'性卽理'를 '性이 곧 理요', 라고 번역(?)하는 것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무의미한 동어반복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이를 "Nature is principle."이라고 옮긴 애매한 영어가 오히려 앞의 번역보다 더 많은 것이 이해하게 해주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각설하여, 줄리앙은 둘 다를 안다. 일단 줄리앙은 불어, 영어, 독어를 하고, 그리스어, 라틴어를 하고, 더하여 중국어와 한문, 일어를 한다(아마 몇 가지 언어를 더 할 줄 알 것이다).
 
한문 문법을 모르고, 동양 고전에 토를 다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는 그저 자기 무지의 고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이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직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사건이다.
 
진중권은 분명 나름 의미도 있었고, 여전히 일정한 의미를 갖는 유능한 학자임에 틀림없지만, 진중권의 책에서 서양 이외의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얻어듣기란, 홍세화의 책에서 프랑스 비판을 찾아내기와 같이 지난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여하튼 이런 점에서 줄리앙은 - 아직까지는 동양이나 서양에서 - 서양과 동양을 둘 다 아는 희귀한 서양 지식인이다(그의 인격에 대해 말이 많은데, 그 부분은 관심 없다).
 
줄리앙은 이 책에서 위에 적은 이 한 마디를 쓰고 있다. 이 말은 이른바 서양의 지식인은 물론, 한국의 지식인에게서도 거의 들어본 바가 없는 적확한 통찰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줄리앙이 하수가 아님을 기꺼이 인정했다. 이 정도라면 우리나라의 독자들이 얻어 배울 바가 있다. 이런 면에서 쥘리앙은 이미 프랑스인 학자 혹은 유럽인 학자, 서양인 학자가 아니라, 그냥 '학자'이다.
 
줄리앙은 '인식론적 오리엔탈리즘'을 거의 완전히 벗어던진 최초의 주요한 서양 사상가인지도 모른다(그렇다고 줄리앙이 라캉이나,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급이라는 말은 전혀 아니고, 일정한 지적 영향력을 갖는 서양 학자들 중 여하튼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초라는 의미에서).
 
다음 학기부터 '줄리앙과 함께 읽는 동양 고전' 같은 시리즈 강의를 한번 해볼까 한다.
 
“참된 군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으니, 옛 병서에서 이르듯이 훌륭한 전술가에 대해 칭찬할 것이 없는 것과도 같다. 훌륭한 전술가는 자신의 덕을 가까이 자신의 가족 가운데 베풀며 극히 일상적인 방식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의 행동의 유익은 결코 이목을 끌지 않으며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는다. 그는 적대적인 상황을 거의 눈치 채지 못하게끔 조금씩 변화시킴으로써, 점차 얻어진 승리가 결코 찬미의 대상이 되거나 공적으로 일컬어지지 못하게 한다. 참된 효능은 항상 은미隱微한 반면, 이목을 끄는 것은 미혹케 한다. 군자와 전술가는 눈에 띄고 피상적인 행동을 거부하고, 오랜 시간 동안 깊은 곳에서 퍼져나가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맛'은 일시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맛없음 淡'은 깊고 널리 퍼져서 그만큼 더 강력히 작용하는 성질이다.”(042)


2012. 7. 1.

존재에의 용기

 
한 2주 전이던가 제자 하나와 차를 마시는데, 그 학생이 내게 말했다. "저는 제 존재가 무의미한 것 같아요. 제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아요." 나는 그 학생에게 그렇지 않다고, 네가 죽으면 내가 슬플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지난 학기 내 수업을 들은 또 다른 한 제자는 내게 낸 리포트에서 자신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으며, 그리하여 자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을 생각한다고 적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의심으로 이루어진 그 대화의 말미에서,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논리적으로는 나도 몰라, 너를 설득할 수도 없을테고, 아마 가장 정직한 사실은 인간이 존엄하지 않으면 너도 나도 다 죽어버릴테고 그러면 세상이 무너질테니, 그런 걸 발명해 낸 걸꺼야. 난 그런 건 다 모르겠고, 다만 내 제자여,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만, 네가 죽지 말기를, 그러면 내 마음이 아플테니 말이야."
  
리포트를 읽다가 마음이 먹먹해진 나는 그 제자에게 문자로 소크레테스의 마지막 문장을 그대로 옮겨 보내주었다. 잠시 후 제자는 나에게 몇 통의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내왔고, 마지막 문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도 남만 챙기지 마시고, 자기도 챙겨주세요. 자기는 소중하잖아요." 나는 이 문자를 '보호'로 지정하여 지금도 간직하고 종종 클릭하여 보곤 한다. 내 삶은 이제 적어도 학생들과 함께 하는 동안은 무가치하지 않은 걸까? 시간만이 말해 줄 것이다.
  
젊은 시절의 나는 자기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느끼는 것, 자기혐오, 삶의 무의미, 외로움, 고독에 대해 생각했다. 이해받지 못함, 이해받고 싶음. 나, 나도 그랬다. 이십 대 젊은 시절 이후 나는 내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 더 나아가, 이기적이고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기 밖에 모르는 끔찍한 인간, 한 마디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고통 받았다. 나는 끔찍한 자기혐오에 빠져 내 이십 대의 거의 전부를 보냈다.

  
칼 융의 자서전을 보면 자신을 찾아오면 마흔이 넘은 환자들을 어떤 경우에도 예외 없이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 몸과 더불어 마음의 병을 가진 자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정말 탁월한 통찰이다. 다만, 나로서는 그 나이가 마흔 살이 아니라, 한 스무 살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물론 이 존재의 의미, 삶의 의미, 나의 의미는 문제는 철학적인 문제이다. 사람이란 자신이 왜 사는지 그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일상에서 그 의미가 매일매일 실현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내가 수업 시간에 "'보편적 가치에 대한 헌신'(도올의 말이다)이 없는 삶은 가히 무의미하며,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은 진심으로 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가령 한 인간이 생각하기를, 내가 잘 되고, 내가 잘 살고, 내가 좋은 책을 써서 사람들이 나를 칭송하고, 내가 잘 생겼고 아름다우며, 내가 좋은 직장을 갖고, 내가 쿨하고, 내가 돈을 잘 벌고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이 나 이외의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이런 생각이 의미 없는 무의미한 악한 생각이라는 것이 아니라(이러한 자신에 대한 건강한 긍정은 매우 생산적인 것일 수 있다), 단지 그것만에 그친다면,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무의미하게(혹은 오히려 고통의 원천으로서) 느껴진다는 그런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나만의 세계가 지옥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것에 흥미가 없다(이는 물론 자기도 건사 못하고, 경제적 능력도 없는 무능력 상태를 찬양하는 것이 물론 아니다, 그리고 나는 부자도 아니지만, 가난하지도 않다. 지난 20년간 한 눈 팔지 않고 노력한 댓가로 지금 나 쓸 것은 있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과의 대화, 나와의 대화, 소통을 바란다.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가 말하는 저 존재에의 용기, 자기가 되려는 용기. courage to be (yourself).
 
 
 



폴 틸리히에 대한 쉽고 무난한 소개는 다음의 책이다.
 

  
 


틸리히의 책 <<존재의 용기>>에는 '현대의 가장 절박한 위기인 무의미와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이라 부제가 붙어있다. 맞다. 근대성과 현대성을 연구하는 학자인 나는 이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안다.
 








 
 
추체험적으로, 추사유적으로, 적어도 서양의 근대가 데카르트의 "(신이 아닌) 내가 생각함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위대한 인간 선언으로 시작되었다면, 현대는 바로 니체의 "신이 죽었다"는 선언에서 시작된다. 니체의 철학은 데카르트 철학의 필연적 귀결들 중 하나이다. 그것이 그의 <<안티크리스트>>이며,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기독교 도덕에 대한 분석이 <<선악의 저편>>과 위대한 걸작 <<도덕의 계보>>이다.

 
 
  
 






서양에서, 삶과 존재의 의미를 보증해주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던 신이 죽었을 때, 인간이 빠지는 필연적 귀결은 키에르케고어적 '공포와 전율', '죽음에 이르는 병', 즉 '불안'이다.


  
 




  
이것이 하이데거적인 인간, 삶에 단 하나의 확실성이라고는 죽음밖에 없는 존재, 즉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인간, 현존재가 겪는 '불안'이다.




 
 

 
이제 서양인에게 남겨진 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를 '발명'해내는 것이다. 그것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그리고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과제이다.
 
 





 
그리고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그의 자서전이 바로 <<말>>이다. 내가 아는 최고의 자서전이다. 이번에 행복하게도 민음사에서 새 번역이 나왔다.





 
 
 
그리고 내가 젊은 시절 좋아하던 카뮈의 '이방인'은 '여자를 안고, 압쌩트 주를 마시며,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신을 믿지 않고, 자살이 해결책이라 생각하지 않는, 그리고 아직은 친구가 없지만(동료인간으로서의 친구는 <<페스트>>에서 생긴다), '삶을 다 사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하며, 자기 확신에 찬" 인간이다.

 


 

  
‘부조리'는 인간에도 세계에도 속하지 않으며, 다만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의 그 과정 자체에서, 육체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그와 더불어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한다.




 
 
 


이것은 사실상 키에르케고르, 니체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실존주의'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운 나는 내 삶의 무가치함, 무의미함이 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 이 세계, 이 서양, 결국은 인간의 문제임을 안다. 이는 마치 미국에서 자살하는 흑인 자신이 그것을 자신만의 문제로 생각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 그가 속한 사회, 세계의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 제자에게 말한 것처럼, 내가 느끼는 내 삶의 실존적 무가치함으로부터의 구원은 나르시시즘적 자아, 즉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너'로부터 온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나와 너의 대화에서 온다(이것이 또 다른 신학자 마르틴 부버의 <<너와 너>>이다).
 


 
   
 
 
더 나아가 구원은 내가 '우리'라 생각하는 나나 네가 아니라, '그'로부터 온다. 그의 '얼굴', 그의 '눈'을 바라보는 나는 네가 나와 똑 같은 인간임을 안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이 그것이다. 내가 무심한 '그'가, 내가 죽이는 '타인'이 하느님이다.




 
 
학생들은 내가 그들의 고민과 즐거움과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듣고 대화를 나눌 때, 아마도 내가 그들을 '구원'해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물론 그들을 구원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구원은 자신만이 한다. 나는 다만 그들의 말을 '들어줄' 뿐이다. 좋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은 그들이 바로 나를 구원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존재가 나를 구원한다.
 
 
 
많은 사람이 책에서 읽어 알고 있는 것처럼, 참으로, 철학과 일상은 둘이 아니다. 그리고 존재의 무의미, 나의 무의미를 해결하기 위해 오늘도 필사적으로 삶을 사는 나는 이 정도 서양화, 서구화 되었다. 나의 가장 깊은 고민은 공자와 주자와 퇴계와 다산의 것이 아닌 데카르트와 니체와 하이데거와 부버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서양'만이 아닌,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다.
 
 
 
네가, 그가, 이 '관계성'이, 이 대화가, 이 소통이 바로 내 존재의 의미를 구성한다. 네가, 그가 없이는, 나와 나의, 나와 너의, 나의 그의 대화가, 소통이 없이는, 내가 없다.
 




2008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