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5.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8


드디어 <누동학보>에 도달했다. 내가 맨 처음 글에서 예전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글을 읽어주다가 눈물이 나서(희한한 것은 거의 십몇 년에 걸쳐서 그렇게 여러 번 읽었는데도, 그렇게 매번 눈물이 났다는 것이다. 지금도 생각을 하니 다시 좀 그렇게 된다 ...) 숨기느라 혼났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바로 이 1979년 충남 안면도에 있는 중학교 과정 야학의 학보 <누동학보>의 글 '어느날의 아버지'가 바로 그 글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번 글 역시 찬찬히,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주기를 바란다.




***




 <누동학보>


제29호 1980년 12월 26일, 펴낸이 전영숙, 엮은이 박준엽, 김은주, 한기호, 손영미. 발행처 충남 서산군 안면읍 누동학원. 16절지 31면, 필경 등사.




이 학보는 서해 바다 가운데 있는 안면도의 한 조그만 어촌에서 뜻있는 분들이 모여서 희생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한 학원의 간행물이다. "가정이 어려워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소년소녀들에게 중학과정을 교육"하고 있다는 이 학원에서는 검정고시 준비지도 같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지만 그보다도 인간교육에 더 힘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1978년 6월에 낸 학보 19호에 실린 '설립취지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삶의 가치, 의의, 목적들을 음미하고 관조하며 미를 창조하고 감상하며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무지는 이런 일을 불가늘하게 하며 오염된 사회 풍조와 조류에 감염되기 쉽다. [...] 무지라는 것은 읽고 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성의 마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밝은 이성을 개발하고 다듬어 이성과 도덕률이, 그리고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누동학원은 비록 전체 사회로 볼 때 극히 미소한 부분이지만, 여기 이 자리에 있는 한 개인 개인에게는 자신의 우주 전체이다. 운이 좋아서 더 배울 수 있음을 감사하며, 배운 사람이 어렵고 덜 배운 이웃과 함께 배운 바를 나눈다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사회인으로서의 의무요 책임이어야 할 것이다."


[...]


다음은 이 학교의 교육이 어느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한 학생의 글 일부이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를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나는 제일 싫어한다. 국민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너  어디 고등학교 가니?' 하고 물을 때 나는 웃으면서 안 간다고 말할 수 있다. 고등학교 못가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일까?


나는 여기에 반대하고 싶다. 앞으로도 사회에 나가서 얼마만큼은 배우고 익숙해지면 야간이라도 나갈 생각이다. 하지만 주간은 싫다. 왜 그런지 나는 답답해서 못 다닐 것 같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로 책을 읽으며 살아갈 것이다 ......"


여기서 이 학생이 얼마나 폭 넓게 '공부'란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삶의 태도에까지 발전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 다음은 22호(1978.11)에 나온 글 몇 편을 옮긴 것이다.



* 김 - 이상미(2년)


추운 날, 눈 내리는 날이면 옹기 종기 모여 앉아 김을 뜬다. 손이 시려워도 발이 얼어도 참고 견디어 해질까지 뜬다. 더운 물로 손을 녹여도 또 발이 시려워서 어떤 때는 방에서도 하고 비닐로 만든 집에서 한다. 손이 트고 발이 트고 겨울이 지나야 김을 안 한다. 아이들은 겨울이 오지 말라고 한다. 김밥도 못 먹는다. 한 장이라도 팔려고 못 먹게 한다. 조금 큰 언니들은 김을 빼내어 숨겼다가 장사꾼에게 팔아서 용돈을 쓴다. 한 장도 못 먹는 김을 억지로 찢어, 부모에게 찢어졌다고 하고 김을 구워 김밥을 먹는다. 도시 아이들은, 바닷가 아이들은 김을 많이 먹어서 좋겠다고 하지만, 한 장이라도 팔려고 못 먹는다. 백장이 잇어야 파니까. 시골의 아이들과 부모들은 항상 바쁘다.




* 김 - 오광희(1년)


그날은 추운데다가 얼음까지 얼었다. 아버지는 발이 닳도록 바닷가에 가서 김발을 보고 들어오신다. 그러면 아버지 얼굴은 파랗게 물든 것처럼 추워서 어쩔 줄 몰랐다. 바닷가에 김발이 어떻게 된지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을 때 오빠가 오면서 우리 김발이 다 떠나가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것마저 떠나가게 된다는 말을 듣고 정신을 잃게 되었다. 난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 우리의 재산은 김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 어느 날의 아버지 - 임종란(1년)


나와 아버지는 떼를 타고 발일을 하러 갔다. 아버지와 나는 열심히 노를 저어 갔었다. 떼 위에서 아버지는 일을 하시고 나는 노를 저었다. 아버지는 아한테 "배고픈데 밥 먹어라" 하셨다. 싸늘한 바람결에 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안 잡수셨다. 아버지는 중얼중얼하시며 일을 열심히 하였다. "안 되겠다. 내가 물 속에 들어가야겠다" 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는 담배를 물에 젖지 않게 하라 하셨다. 목까지 차는 물에 들어가신다고 하셨다. 남들은 모두 허리 차는 데였다. 우리는 제일 물 아래였다. 아머지는 한참 하시더니 "도저히 못 하겠다" 하시며 나오셨다. 그 날은 좀 쌀쌀하였다. 아버지는 나오시더니 막 떨으셨다. 말도 못 하셨다. 막 떠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담배를 달라고 하셨다. 옷속에 넣어두었던 담배를 얼른 꺼내 드렸다. 아버지는 계속 떨으셨다. 나는 볼 수가 없었다. 배가 고프다고 하시며 밥 좀 달라고 하셨다. 밥통은 밥이 들은 채 물 속에 굴러 다니었다. 나는 물이 들어가서 못 먹는다고 하였다. 그래도 달라고 하셨다. 나는 풀어보았더니 물은 많이 안 들어 있었다. 차고 짠 밥을 아버지는 떨으시며 잡수셨다. "아버지 잡숫지 마셔요" 하였다. "괜찮다. 너도 먹어라" 하셨다. 떼를 타고 올 때 아버지는 졸으셨다. 어떤 아저씨한테 "물 있나?" 하니 "응, 조금 있네" 하셨다. 달라고 하더니 그 물을 많이 잡수셨다. "짠 밥을 먹었더니" 하시며 ...... 집에 와서 얼른 따뜻한 밥을 지어 드렸다.




***




이 글을 읽으면 1978년에 나보다 한 살 어린(그러나 야학이므로 나와 같거나 혹은 더 많은지도 모른다)종란이가 내가 사는 서울이 아닌 충남 안면도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를 도와 김발 정리하는 것을 도와드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란이네 집은 그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라는 것(김 양식장이 육지에서 가장 먼 곳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매우 키가 작으신 분(남들은 허리 차는 데 였다, 아마도 척추장애인(이른바 '꼽추'라고 부르는)이신 듯 하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우리는 종란이의 아버지가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는 성실한 분인지, 그리고 종란이는 얼마나 착하고 아버지를 생각하는 속깊은 아이인지 알 수 있다.


나는 한 인간, 아니 한 가족의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겨울 한 때의 한 순간을 이렇게도 완전한 문학적 필치로 써내려간 글을 본 적이 없다. 글을 읽으면 누구나 정말 자기가 종란이가 되어 아버지를 걱정하고 마음 아파하고 있게 되지 않는가? 이 글을 읽은 1984년 이래로 나는 때로 나보다 한 살 어린, 내가 모르는,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오랜 친구이자 누이 같은, 종란이가 이 때의 일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았기를, 그리고 아버지도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 있기를 마음 속으로 바라보곤 했다.







* 오래된 친구 - 어떤날, i,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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