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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16.

제인 에어 2





 
 
 
 
Charlotte Brontë (1816 –1855)
 









 




"그러나 젊은처럼 외고집을 부리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무경험처럼 맹목적인 게 또 어디 있을까?"(13)



"저를 좋은 부동산 투기나 물색하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로 아시나요?"(49)



"나는 이 조그마한 한 사람의 영국 아가씨를 영양(羚羊)처럼 부드러운 눈을 가지고 있고 극락의 천녀(天女)처럼 아름다운 터키 황제의 후궁들 전부하고도 바꾸지 않겠어.! / 터키 후궁의 비유가 또 내 비위를 건드렸다. 전 터키 후궁의 대역 같은 건 절대로 안 하겠어요. 그러니 결코 그런 것과 똑같이는 보지 마세요."(64)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일기 시작했어요. 어제는 오늘처럼 그렇게 사납고 거친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음울하고 신음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었어요. 저는 당신께서 집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 방에 들어와서 비어 있는 의자와 불기 없는 난로를 보자 소름이 끼쳤어요. 그 뒤 얼마 있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오질 않았어요. 무언지 모르게 꺼림칙한 내심의 설렘이 저를 괴롭히는 거예요. 바람은 점차로 거세지고 제 귀에는 서글픈 낮은 목소리를 감싸고 있는 것같이 들렸어요. 그러나 그게 집 안에서인지 밖에서인지는 처음에는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바람이 문득문득 숨을 죽일 적마다 그 소리는 분명하지 않게 구슬피 들려오는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전 그게 어디 먼 곳에서 개가 짖고 있는 소리라고 판단했어요. 그러니까 그 소리가 멎자 저는 마음이 한결 놓였어요. 잠이 들고서도 꿈속에서 바람 부는 캄캄한 밤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를 가르고 있는 어떤 장애물이 있다는 이상하고도 서운한 느낌을 경험했어요. 첫잠이 들면서 줄곧 저는 꿈속에서 꼬불꼬불한 낯선 길을 걷고 있었어요. 주위는 온통 깜깜하고 비가 저를 후려치고 있었어요. 저는 조그만 어린애를 하나 안고 있었는데,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약하디 약한 어린애였어요. 그 어린애는 싸늘한 제 팔에 안겨 떨면서 제 귀에다 대고 가련한 목소리로 울어대는 것이었어요. 저는 당신께서 저보다 훨씬 앞서서 가신 걸로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쫓아가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썼어요. 그리고 당신을 부르고 가디려달라고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온몸은 꼼짝도 할 수가 없고 목소리도 말이 되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그러는 동안에 당신은 자꾸만 멀리멀리 가버리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86-87)




"나는 하느님이 내려주시고 인간에 의해 인정된 법을 지키리라. 지금과 같이 미치지 않고 바른 정신일 때 내가 받아들이는 원칙대로 살아나가리라. 법이나 원칙은 유혹이 없을 때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지금과 같이 육체와 정신이 그 준엄성에 반기를 들었을 때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법과 원칙은 엄정한 것이며 침범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개인의 편의를 위해 침범되어도 좋은 것이라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것들은 가치 있는 것이다. 나는 항상 그렇게 믿어왔다. 그런데 내가 이제 그것을 믿을 수 없다면, 그건 내 정신이 이상해진 탓이다. 아주 미쳐서, 혈관은 불 같이 달아오르고 심장은 박동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빨리 뛰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전부터 품어온 의견,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결심뿐이다. 나는 거기에 꿋꿋이 발을 디뎌야 하는 것이다."(160)





"이렇게 말하면 좀 지나칠지 모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영국의 농민은 유럽의 어떤 나라의 농민보다도 가장 교육을 많이 받고 가장 예의 바르고 가장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프랑스나 독일의 농촌 부녀자들을 보아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도 내가 가르친 모턴의 소녀들과 비교하면 무지하고 조야하고 어리석어 보였다."(301)




"그녀가 자라남에 따라, 건전한 영국 교육은 그녀의 프랑스적 결점을 많이 교정해 주었다."(423)




***





1권을 읽고 거의 1년이 다 되어 2권을 읽었다. 다시 읽으니, 그녀와 이 소설의 무수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반유대주의자에, 대영 제국주의자, 오리엔탈리스트인 것이 보인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처럼, 카뮈의 모든 소설처럼.


그리고 제인 에어(사실은 샤를로트 브론테) 성격의 결점이 보인다. 물론 치명적인 결점은 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전통 도덕, 영국 성공회 목사의 딸인 그녀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을 진심으로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영국 최초의 낭만주의 연애소설'을 쓴 사람이지만, 사실은 최후의 중세인이다. 그녀는, 니체의 말대로, '낙타'인 것이다. 나는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조금도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소설적으로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특히 그녀의 - 아마도 여성만이 쓸 수 있을(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상하게 여성 화자(話者)가 사랑을 말하는 것이 좋았다) -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슬픔에 대한 간절한 묘사'는 너무도 섬세하다. 아름답다. 그녀가 서른 아홉에 결혼하여 다음 해에 임신한 상태에서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슬픈 느낌으로 남는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1846년에 쓰여 1847년에 발표된 이 소설의 국역본에 근대 혹은 현대라는 번역어가 대략 4-5회(1권 175, 2권 45, 229, 264) 나오는데, 원래 용어가 무엇이었는지 원문을 대조해 확인해 보아야 겠다.













2012. 12. 14.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헤겔, <정신현상학1>(1807), 임석진 옮김, 한길사, 2005.
 
 
 
 

 
 
 
IV. 자기 확신의 진리
 
 
1.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지배와 예속
  
자기의식은 또 하나의 자기의식에 대하여 융통자재(融通自在)하는 가운데 바로 이를 통하여 상생상승(相生相勝)한다. 즉 자기의식이란 오직 인정된 것(ein Anerkanntes)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중화한 의식이 통일된다는, 자기의식 속에 실현되어 있는 무한성의 개념은 다면적이고 다의적으로 착종되어 있어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요소를 정확하게 식별하여 구별된 가운데서도 동시에 구별되지 않는 것, 또는 구별된 것과는 정반대되는 의미를 잡아내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구별된 것이 이중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자기의식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니, 즉 자기의식이란 스스로 무한한 운동을 펴나가는 가운데 일단 정립되고 난 성질과 정반대의 것으로 즉각 전화(轉化)한다. 이렇듯 이중화한 자기의식의 정신적 통일이란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주는 것이 ‘인정’의 운동이다.
  
자기의식에 또 하나의 자기의식이 대치될 때 자기의식은 자기의 밖에 벗어나 있다. 여기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의식이 자기를 상실하여 타자를 두고 자기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를 참다운 자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본다는 식으로 타자를 지양한다는 의미이다.
 
 
이제 자기의식은 자기를 타자로 보는 그런 일은 지양해야만 한다. 이는 지금 얘기된 이중의 의미를 지양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되면서 여기에는 또 다른 이중의 의미가 발생한다. 하나는 자기의식이 자기 이외의 다른 자립적 존재를 지양하고 이로써 자기야말로 본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이 타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므로 이제는 자기 자신을 지양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중의 의미를 지닌 타자의, 이중적인 의미에서의 지양은 동시에 이중의 의미에서 자체 내로의 복귀(eine doppelsinnige Rückkehr in sich)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자기가 타자라고 하는 상태를 벗어나 자기와 일체화된 자기의식은 자기를 되돌려왔기 때문이며, 둘째로 자기의식은 타자 속에 있던 자기의 존재를 지양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완전히 방임함으로써 여기에 다시금 또 하나의 자기의식이 이쪽 편에 대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의식과 다른 자기의식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운동이 여기서는 한쪽 편의 행위로만 표상되어 있지만, 한쪽의 행위라는 것은 이미 한쪽 당사자의 행위인 동시에 또 다른 쪽에서의 행위이기도 하다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타자도 역시 자립적인 완연한 존재이므로, 그 자신 속에 있는 것은 모두가 그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의 자기의식도 단지 욕망(Begierde)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생명체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자존하는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무엇을 하려 하건 간에 상대 쪽에서도 자기가 그에게 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실현될 수가 없다.
 
 
따라서 운동은 어김없이 두 개의 자기의식이 행하는 이중의 운동으로서, 양쪽 모두가 상대방이 자기와 동일한 것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된다. 양쪽 모두가 자기가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을 스스로 행하고 상대방이 그와 동일한 것을 행하는 한에서만 자기도 또한 동일한 것을 해하게 되므로 한쪽에서만의 행위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고, 정말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오직 쌍방의 행위를 통하여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행위는 일차적으로 자기에 대한 행위인 것 못지않게 타자에 대한 행위라는 점에서 이중의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서로가 불가분 한쪽의 행위인 것 못지않게 또한 다른 쪽의 행위라는 점에서도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운동 속에서 우리는 일찍이 힘의 유희로 표현되던 과정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다만 여기서는 그것이 의식 내부에서 행해지고 있다. 힘의 유희에서는 방관자인 우리에게만 보여졌던 것을 여기서는 양극에 위치한 두 개의 자기의식이 바라보고 있다. 이 양쪽 중심에 있는 것도 자기의식으로서, 이것이 양극으로 분열되면서 두 개의 극이 서로의 역할을 교환해가며 저마다 반대의 역할로 무한히 이행한다.
 
 
물론 이것은 의식의 운동인 이상 자기의 밖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자기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동시에 자체로 되돌아와 자기를 고수하는 것이어서 결국 자기가 자기의 밖으로 벗어나 있다는 것이 명확히 의식되어 있다. 자기가 직접 타자의 의식이면서 또한 타자의 의식은 아니라는 것이 자각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타자가 독자적 존재가 되는 데서도 스스로 독자적 존재임을 포기하여 타자의 독자성 속에서 스스로를 자각하는 상태가 이루어져야 한다.
 
 
각자마다가 상대방에 대하여 중간 위치를 차지하고, 이렇듯 중간항을 이루는 상호적인 타자를 매개로 하여 각기 저마다가 자기와의 매개 아래 자기와 합일된다. 결국 각자마다가 자기와 타자에 대하여 직접 독자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로 나타나긴 하지만 이러한 독자성은 동시에 타자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얻어진다. 두 개의 자기의식은 교호적인 인정 상태에 있는 의식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이중화한 자기의식이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 인정의 순수한 개념으로서, 이제 이 인정의 과정이 자기의식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고찰해야만 하겠다. 우선 처음에 타나나는 것은 두 개의 자기의식이 서로 부등한 위치에 있는 경우인데, 여기서는 매개체로서의 중간항이 양극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가운데 한쪽은 인정될 뿐이고 다른 한쪽은 인정하기만 하는 관계가 이루어진다.
 
 
자기의식은 우선 단일한 독자존재로서, 일체의 타자를 배제하는 자기동일성을 지닌다. 이때 자기의식의 본질이며 절대적 대상이 되는 것은 ‘자아’로서, 자기의식은 직접 이 ‘자아’와 어우러진 가운데 ‘자아’라는 독자적 개별자로서 존재한다. 이 개별자는 타자와 맞서 있는데, 이때 타자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성격지어진 비본질적인 대상이다. 그러나 이 타자 역시 자기의식인 까닭에 여기에는 개인과 개인의 대립이 형성된다.
 
 
그러나 갓 출현했을 때의 이들 개인은 서로가 마주치는 대상일 뿐이어서, 비록 독립된 형태를 띠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의식은 생명(Leben)이라는 존재-여기서는 생명과 대상이 같은 존재이다-속에 매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두 개의 의식은 서로가 직접적인 자기존재를 송두리째 말소해 자기동일적 의식을 지닌 순수한 부정적 존재로서 감당해야 할 절대적인 추상화운동을 행하는 데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어서, 서로가 순수한 독자존재 또는 자기의식으로 대치하고 있지는 않다.
 
 
결국 이들은 저마다 자기존재를 확신하고는 있으면서도 타자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아직 스스로에 대한 자기확신이 진리가 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진리일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독자존재가 자신에게 자립적 대상으로서, 다시 말해서 순수한 자기확신으로서 나타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가 인정 개념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타자가 자기에 대해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타자에 대해서 있고, 또 각기 서로가 자기 자신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타자의 행위를 통해서도 저마다 독자존재일 수 있는 순수 추상화운동(diese reine Abstraktion des Fürsichseins)을 펼쳐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자기의식의 순수한 추상운동으로서 상호간의 행위가 나타날 때, 이들은 각기 자기의 대상적인 양식을 순수하게 부정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일반적인 개별 사안이나 심지어 생명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는 이중의 행위로서, 즉 타자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이 타자의 행위인 한은 각자가 서로 타자의 죽음을 겨냥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둘째로 또한 자기의 행위도 포함되어 있으니, 타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곧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개의 자기의식의 관계는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 각자마다 서로의 존재를 실증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쌍방이 이러한 투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라고 하는 자기확신을 쌍방 모두가 진리로까지 고양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유를 확증하는 데는 오직 생명을 걸고 나서는 길만이 있을 수 있으니, 자기의식에게는 단지 주어진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삶의 나날 속에서 덧없는 세월을 보내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함을 되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도 결코 놓칠 수 없는 순수한 독자성(reine Fürsichseins)을 확보하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마저도 생명을 걸고 나서지 않고서는 확증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생명을 걸고 나서야 할 처지에 있어보지 않은 개인도 인격으로서 인정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개인은 자립적 자기의식으로 인정받는 참다운 인정상태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때 각자는 자기의 생명을 내걸 뿐만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아야만 한다. 타인은 추호도 자기 이상으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본질을 자기 안에 지니지 않고 자기의 밖으로 벗어나 있으니, 밖으로 벗어나 있는 존재는 지양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타자는 다양한 일상사에 매여 있는 그런 의식이지만, 자기의식이 스스로의 타자로서 맞서려고 하는 것은 순수한 독자존재 또는 절대적 부정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타자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의한 이러한 확증을 필경 이로부터 발현되어야 할 진리는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 확신마저도 전적으로 무산시켜버린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의식을 떠받쳐주는 자연적인 기점(基點)이며 절대적 부정성까지는 갖추지 않은 자립적인 힘으로서, 그의 자연적인 부정 상태로서의 죽음은 아무런 자립성도 없는 부정성을 뜻한다는 점에서 여기서 요구되는 바와 같은 인정의 의의를 담보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을 통하여 두 개의 자기의식이 서로 목숨을 걸고 상대방의 생명을 업신여기는 것은 확증되지만, 이러한 확증은 싸움을 견뎌낸 당사자에게 안겨지지는 않는다. 죽음을 걸고 맞서 있는 두 당사자는 자연적 존재라는 생소한 토대에 뿌리내리고 있는 의식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파기하고 자립성을 고수하려는 양극에 자리한 자기의식으로서 서로가 맞서는 경우라고는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개의 자기의식은 교호적인 관계 속에 양극으로 대립해 있다는 본질적인 게기는 상실한 채 다만 죽은 통일체라고나 할 중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니, 이렇게 죽음의 궁지로 내몰린 상태에서는 이 중간 지점도 역시 대립 없는 양극에 묻혀버리게 된다. 양극이 더 이상 의식적으로 대응하면서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물체가 아무런 관련도 맺지 않은 채 거기에 내던져져 있을 뿐이다. 생사를 건 투쟁은 무의미한 부정으로서, 이는 상대를 타파하면서도 또한 그것을 보존하고 유지함으로써 파국을 견뎌내고 살아남는 의식의 부정과는 다른 것이다.
 
 
이 경험의 와중에서 생명이 순수한 자기의식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본질적이라는 것이 자기의식에게 깨우쳐진다. 간신히 자기를 의식하기에 이른 의식에게는 단순한 ‘자아’가 절대적 대상이지만 이 대상은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매개를 거쳐 나타난 것으로서, 자립적 생명을 본질적인 요소로 하고 있다. ‘자아’라는 단순한 통일체는 최초의 경험의 결과로서 와해되고 만다.
 
 
이로 인하여 여기에 순수한 자기의식과 순수히 자립적이 아닌, 타자와 관계하는 의식, 즉 사물의 형태를 띠고 존재하는 의식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의식에게는 모두가 본질적이다. 그러나 일단 이 양자는 서로 부등한 상태에서 대립해 있는 가운데 서로가 통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잡이는 아직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의식형태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쪽이 독자성을 본질로 하는 자립적 의식이고 다른 한쪽은 생명, 즉 타자에 대한 존재를 본질로 하는 비자립적인 의식이다. 여기서 전자가 ‘주인’(der Herr)이고 후자가 ‘노예’(der Knecht)이다.
 
 
주인은 자주ㆍ자립적인 의식으로서, 단지 개념상으로만 그런 존재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형태를 띤 자립적인 존재와 함께 묶여 있는 타자의 의식과 매개된 가운데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이다. 주인은 욕망의 대상인 사물 그 자체와 물성을 본질적으로 여기는 의식이라는 두 개의 요소와 관계한다. 이때 주인으로서의 자기의식은 ① 독자적으로 직접 상대방과 관계하는 측면과 ② 타자를 통하여 비로소 자립적일 수 있는 매개의 측면을 지니는 것과 함께, ① 위의 두 측면과 직접 관계하는 경우와 ② 어느 한쪽을 매개로 하여 타자와 관계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주인은 사물이라는 자립적인 존재를 매개로 하여 노예와 관계한다. 노예는 바로 사물에 속박되어 있다. 노예는 생사를 건 싸움에서 사물에 의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물성(物性)을 띠지 않고는 자립할 수 없는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이에 반하여 주인은 싸움을 치르는 가운데 사물의 존재란 소극적인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주인의 지배 아래 있는 사물은 주인에 대치하는 노예를 지배하는 힘을 지니는 까닭에 이 지배적인 힘의 사슬 속에서 주인은 노예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주인은 노예를 매개로 하여 사물과 관계한다. 노예로서도 자기의식은 갖고 있으므로 사물에 부정적인 힘을 가하여 사물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물은 노예에 대하여 자립적인 존재이므로 노예는 부정의 힘을 가한다 해도 사물을 아예 폐기해버릴 수는 없고 사물을 가공하는 데 그친다. 이에 반하여 노예를 통하여 사물과 관계하는 주인은 사물을 여지없이 부정할 수 있으므로 주인은 마음껏 사물을 향유한다.
 
 
이로써 욕망의 의식으로서는 이루지 못했던 것, 즉 사물을 마음 내키는 대로 처리하고 소비하는 가운데 만족을 누리는 일을 주인은 해낼 수 있게 된다. 결국 사물의 자립성으로 인하여 욕망의 의식에게 그러한 결과가 성취되지 못하던 참에 주인은 사물과 자기 사이에 노예를 개재시킴으로써 사물의 자립성을 미끼로 하여 사물을 고스란히 향유한다. 이때 사물의 자립성이라는 측면은 노예에게 위임되고 노예는 이를 가공하는 것이다.
 
 
위의 두 관계 속에서 주인은 노예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 두 관계 가운데 어느 경우도 노예는 비본질적인 존재로서, 한편으로는 사물을 가공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물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노예로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사물을 지배하고 사물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 쪽에서 보면 노예라는 타자의 의식이 스스로의 자립성을 포기하고 주인인 자기가 상대방인 노예에게 할 일을 노예 자신이 행한다는 의미에서 인정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노예가 행하는 것은 본래는 주인이 행해야 하는 것이므로 노예의 행위는 곧 주인 그 자신의 행위라는 의미에서도 인정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독자성을 지닌 본질적 존재로서의 주인은 사물을 홀대하는 순수한 부정의 힘을 행사함으로써 이 관계 속에서 순수한 본질적 행위자에 해당되는 데 반하여 노예는 자기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비본질적인 행위자이다. 그러나 노예에 의한 주인의 인정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주인이 상대에 대해서 행하는 것을 주인 그 자신에 대해서도 행하고, 또 노예가 그 자신에 대해서 행하는 것을 역시 그의 상대인 주인에 대해서도 행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여기에 조성되어 있는 상태는 일방적인, 부등한 인정의 관계이다.
 
 
이렇게 해서 비본질적 의식이야말로 주인에게 있어서의 대상이며 또한 주인의 자기확신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주는 진리라고 해야만 하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대상은 본질적인 의미의 자기의식이라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주인의 자기실현으로 여겨지는 이 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은 자립적인 의식과는 전혀 별개의 비자립적인 의식이다. 따라서 주인은 의식의 독립성을 객관적 진리로서 확신하는 것은 아니며 거기에 객관적 진리로서 있는 것은 비본질적 의식과 이 의식에 의한 비본질적인 행위이다.
 
 
이렇게 되면 자립적 의식의 진리는 노예의 의식에 있는 것이 된다. 물론 노예의 의식은 일단 자기를 상실한 상태에서 자기의식의 진리를 체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배의 과정에서 바로 이 지배의 본질이 스스로를 지향했던 것과는 반대의 것으로 전도되었듯이 예속의 본질도 역시 그것이 관계가 실현되는 가운데 직접 드러나 보이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도된다. 노예의 의식은 자체 내로 떠밀려 들어가서 자기복귀할 때 참다운 자립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은 지배와의 관계 속에서 예속은 어떤 위상을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속되는 것도 자기의식이므로 이런 점에서 예속이 의미하는 그의 전체적인 실상이 고찰되어야만 하겠다. 우선 예속된 의식에서는 주인이 본질적인 존재이므로 주인 쪽의 자립 자존하는 의식이 예속된 의식에서 객관적 진리를 이루지만 아직도 이 진리는 예속된 의식에서 실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가운데 실은 예속된 의식이야말로 스스로가 부정성을 지닌 독자존재라는 진리를 사무치게 깨우친다고 하겠으니, 노예는 주인의 존재를 몸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예속된 의식이 안고 있는 불안은 단지 우발적으로 나타난 어떤 것에 고나한 불안도 그리고 특정 순간에 닥치는 불안도 아닌, 그야말로 자기의 존재에 흠뻑 닥쳐오는 불안으로서 이것이 무한정한 힘을 지닌 주인에게서 닥쳐오는 죽음의 공포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내면으로부터의 파멸에 직면한 노예는 걷잡을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면서 그를 지탱해왔던 모든 것이 동요를 일으킨다. 도처에 생겨나는 이 순수한 운동, 즉 존립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인 유동화는 자기의식의 단순한 본질인 절대적 부정성의 발로로서, 자기의식의 순수한 자립성이 이러한 모습으로 노예의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주인에게 갖추어져 있는 순수한 독자적 요소도 그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에 노예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도 자립성을 감지하기에 이른다.
 
 
그뿐만 아니다. 이것은 노예의 의식에 단지 막연한 심정상(心情上)의 자괴감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노예노동 속에서 현실적인 붕괴에 직면하게 한다. 이렇듯 노동을 수행하는 매순간마다 노예는 자기에게 가해진 물리적 속박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뜻에서 사물을 가공하고 변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감정상으로나 공포 속에서 행해지는 개별적인 노예노동에서도 감지되는 주인의 절대권력은 붕괴를 예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바, 비록 주인에 대한 공포가 지혜의 실마리를 이룬다고는 하지만 의식은 여전히 대상에 얽매인 채 독자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결국 의식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데는 노동이 개재해야만 하는 것이다(Durch die Arbeit kommt es aber zu sich sewlbst).
 
 
주인의 의식에서 욕망에 해당하는 것이 노예의 의식에서는 노동이 되는 셈인데, 어쨌든 노동에서 사물의 자립성이 유지되는 이상 노예는 사물에 대하여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듯이 보인다. 욕망이라는 것은 대상을 전적으로 부정하며, 그럼으로써 티 없는 자기 감정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니만큼 또 거기서 얻어지는 만족감은 그대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때 욕망에는 대상의 존립이라는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노동의 경우는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사물이 탕진되고 소멸되는 데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사물의 형성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관계란 대상의 형식을 다듬어가며 그의 존재를 보존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노동하는 노예에게 대상은 어디까지나 자립성을 띤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을 부정하는 가운데 형식을 다듬어가는 행위라는 이 매개적인 중심은 동시에 의식의 개별성 또는 순수한 독자성이 발현되는 장(場)이기도 한데, 결국 의식은 노동하는 가운데 자기 외부에 있는 지속적인 터전(die Element des Bleibens)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동하는 의식은 사물의 자립성을 곧 자기의 자립성으로 직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물의 형성은 봉사하는 의식의 순수한 독자성이 존재하는 모습을 띤다는 긍정적인 의의를 지닐 뿐만 아니라 공포라고 하는 첫째가는 요소를 불식시키는 부정적인 작용도 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봉사하는 의식이 사물을 형성하는 데 따른 그의 자립적 부정성은 당면해 있는 사물의 형식을 타파하는 과정을 거쳐서 대상화되지만, 이 부정되는 대상이야말로 노예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했던 그 낯선 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노예는 이 낯선 부정적인 힘을 파괴하여 스스로가 부정의 힘을 지닌 것으로서 지속적인 터전에 자리를 차지하여 독자존재로서의 자각을 지닌다. 주인에게 봉사할 때 독자적인 존재는 타자로서 자기와 맞서 있다. 말하자면 주인에 대한 공포 속에서 스스로 독자적인 조재임이 몸소 깨우쳐지는 것이다. 사물을 형성하는 가운데 스스로가 도자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면서 마침내 그는 완전무결한 독자존재임을 의식하기에 이른다. 사물의 형식은 외면에 자리 잡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의식과 별개의 것은 아니며, 오직 형식만이 봉사하는 의식의 순수한 독자성을 갖춘 진리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의식은 타율적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노동 속에서 오히려 자력으로 자기를 재발견하는 주체적인 의미(eigner Sinn)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봉사하는 의식이 이렇듯 반성적인 자기복귀를 이루는 데에는 공포와 봉사라는 두 요소와 함께 사물의 형성이라는 또 하나의 요소가 필요하며 더욱이 이들 요소가 노예생활 전반을 뒤덮고 있어야만 한다. 봉사와 복종의 기강이 잡히지 않고서는 공포는 형식적인 데 그칠 뿐, 현실생활에 의식적으로 퍼져나가지는 않는다. 또한 사물의 형성이 없이는 공포는 내면에 잠겨있을 뿐이어서 의식이 이를 명확하게 의식할 리가 없다. 더욱이 최초의 절대적인 공포를 느끼지 않은 채 의식이 사물을 형성하게 된다면 의식은 다만 자기의 허영심을 채우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형식에 나타난 의식의 부정성이 역시 자기마저도 부정하난 힘이었다고 느껴지지 않으며, 따라서 사물을 형성하더라도 이것이 본질적인 자기실현이라고는 의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절대적인 공포를 실감하지 않은 채 다만 어쩌다 불안감에 젖어들 뿐이라면 자기를 부정하는 힘은 자기 밖을 맴도는 데 그치며, 자기의 심혼마저도 뒤흔들어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기의 일상적인 의식이 안주해 있던 스스로의 지반이 여지없이 동요하는 데까지 내몰리지 않는 한 어딘가에 기댈 만한 언덕이 남아 있겠지만, 그런 상태에서 자기존립을 지탱할 수 있다고 지레짐작한다는 것은 속절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자유라는 것도 예속된 상태의 자유에 그칠 뿐이다. 사물의 순수한 형태가 그대로 자기의 본질로 화하지 않는 한, 개개의 사물에 각인된 모습이 의식 전체를 감싸 안는 절대적 개념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사물을 잔재주를 통하여 가공하는 손놀림에 그칠 뿐, 보편적인 자연력이나 대상 세계 전체를 압도하는 것과 같은 그런 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 220~234쪽
 


 

2012. 9. 24.

martin heidegger







 


 
 
1889-1976
 
 
 
 
 
 
 
Heidegger Speaks. Part 1.
 
 
 
 
 
 
The End of Philosophy and The Task of Thinking (English Subtitles)
 
 
 
 
 
Heidegger - life and Philosophy
 
 
 
2
 
 
 
3
 
 
 
4
 
 
 
5
 
 
 
6
 
 
 
 
 
 
Martin Heidegger Biography
Thinking The Unthinkable (BBC)
 
 
 
 
 
Martin Heidegger and Nazism,
"Only A God Can Save Us"
by Jeffrey van Davis
Terrance Edward Davis Producer

An investigation of Heidegger's socalled "flirtation" with Nazism
and his support of Hitler and the National Revolution.
 
 



2012. 7. 28.

유럽적인, 너무나 유럽적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니체전집 7)>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475. 유럽인과 여러 국가의 파멸 - [...] 동양적인 구름층이 유럽 위에 무겁게 덮여 있었던 중세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가혹한 개인적인 압박 하에서도 계몽과 정신적 독립의 깃발을 고수하고 동양에 맞서 유럽을 방언한 것은 유대의 자유사상가, 학자 그리고 의사들이 었다. 좀더 자연적이고 합리적이며 적어도 비신화적인 세계 해석이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과 지금 우리를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화에 의한 계몽과 연결하는 문화의 고리가 단절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노력에 신세진 것이 적지 않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서방을 동양화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다고 한다면, 유대민족은 근본적으로 서구를 다시 서양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서양화하는 것이란 특정한 의미에서는 유럽의 과제와 역사를 그리스적인 것을 계승하는 것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 382쪽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니체전집 8)>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87.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을 배우는 것 - [...]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훌륭하게 유럽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훌륭하게 그리고 점점 더 훌륭하게 글 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 설령 그가, 잘 쓰지 못하는 것이 국민적 특권처럼 취급되는 독일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더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은 동시에 더 훌륭하게 사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것은 항상 전할 가치가 더 큰 것을 창안해내고 그것을 실제로 전할 수 있다는 것 ; 이웃 나라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고 우리의 언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쉬우며 또한 재산은 모두 공유 재산이 되고 자유인에게 모든 것이 개방되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 그리고 마침내 지구의 모든 문화를 인도하고 감독한다는 저 위대한 임무가 훌륭한 유럽인의 손에 쥐어질, 아직도 여전히 먼 미래의 일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 그 반대의 것, 즉 훌륭하게 쓰고 잘 읽는 법 - 이 두 가지 덕은 함께 성장하고 함께 감퇴한다 - 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실제로 어떻게 여전히 더 민족주의적으로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는 셈이다: 즉 그는 이 세기의 질병을 증가시키는 사람이며 훌륭한 유럽인의 적이자 자유정신의 적이다.
- 286-287쪽.


서양철학사 3천년의 제1대 사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 탈레스 / 김인곤



8. 파르메니데스

8. 단편 2. 프로클로스(DK28B2)

자, 이제 내가 말할 터이니, 그대는 이야기(mythos)를 듣고 명심하라,
탐구의 어떤 길들만이 사유를 위해 있는지.
그 중 하나는 있다(estin)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길로서,
페이토(설득)의 길이며(왜냐하면 진리를 따르기 때문에),
[5] 다른 하나는 있지 않다 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라는 길로서,
그 길은 전혀 배움이 없는 길이라고 나는 그대에게 지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있지 않은 것을
그대는 알게 될 수도 없을 것이고(왜냐하면 실행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지적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

9. 단편 3. 클레멘스/플로티노스(DK28B3)

... 왜냐하면 같은 것이 사유함을 위해 또 있음을 위해 있기 때문에. (클레멘스 『학설집』VI.23 / 플로티노스 『엔데아데스』 V.1.8)

12. 단편 6. 심플리키오스(DK28B6)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한 것은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을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그렇지 않으니까. 이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나는 그대에게 명한다. 왜냐하면 그대를 탐구의 이 길로부터 우선 <내가 제지하는데> 그러나 그 다음으로는 죽어야 하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5] 머리가 둘인 채로 헤매는 (왜냐하면 그들의 가슴 속에서 무기력함이 헤매는 누스를 지배하고 있기에) 그 길로부터 [그대를 제지하기에]. 그들은 귀먹고 동시에 눈먼 채로, 어안이 벙벙한 채로, 판가름 못하는 무리로서, 이끌려 다니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있음과 있지 않음이 같은 것으로, 또 같지 않은 것으로 통용되어 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모든 것들의 길이 되돌아가는 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 117)

13. 단편 7. 플라톤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DK28B7)

그 이유는 이렇다. 이것, 즉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 결코 강제되지 않도록 하라. 오히려 그대는 탐구의 이 길로부터 사유를 차단하라. 그리고 습관이 [그대를] 많은 경험을 담은 이 길로 [가도록], 즉 주목하지 못하는 눈과 잡소리 가득한 귀와 혀를 사용하도록 강제하지 [5] 못하게 하라. 다만 나로부터 말해진, 많은 싸움을 담은 테스트를 논변으로 판가름하라. (1-2행: 플라톤 『소피스트』 237a, 258d / 2-6행: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학자들에 대한 반박』VII. 111)

14. 단편 8. 심플리키오스(DK28B8)

... 길에 관한 이야기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있다라는. 이 길에 아주 많은 표지들이 있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이라는.
[5]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부 함께 하나로 연속적인 것으로 있기에. 그것의 어떤 생겨남을 도대체 그대가 찾아낼 것인가?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자라난 것인가? 나는 그대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라고 말하는 것도 사유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있지 않다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필요가
[10] 먼저보다는 오히려 나중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서 자라나도록 강제했겠는가? 따라서 전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 해야 한다. 또 확신의 힘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도대체 어떤 것이 그것 곁에 생겨나도록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디케(정의)는 족쇄를 풀어서 생겨나도록 소멸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15] 오히려 꽉 붙들고 있다. 이것들에 관한 판가름은 다음의 것에 달려 있다. 있거나 아니면 있지 않거나이다. 그런데 필연(아낭케)인 바 그대로, 한 길은 사유될 수 없는 이름 없는 길로 내버려두고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길이 아니므로) 다른 한 길은 있고 진짜이도록 허용한다는 판가름이 내려져 있다. 그런데 있는 것이 나중에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그것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20] 왜냐하면 생겨났다면 그것은 있지 않고, 언젠가 있게 될 것이라면 역시 있지 않기에. 이런 식으로 생성은 꺼져 없어졌고 소멸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가 균일하기에. 또 여기에 조금도 더 많이 있지도 않고(그런 상태는 그것이 함께 이어져 있지 못하도록 막게 될 것이다), 조금도 더 적게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전체가 있는 것으로 꽉 차있다.
[25] 이런 방식으로 전체가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있는 것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속박들의 한계들 안에서 부동(不動)이며 시작이 없으며 그침이 없는 것으로 있다. 왜냐하면 생성과 소멸이 아주 멀리 쫓겨나 떠돌아다니게 되었는데, 참된 확신이 그것들을 밀쳐냈기 때문이다. 같은 것 안에 같은 것이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놓여 있고
[30] 또 그렇게 확고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강한 아낭케(필연)가 그것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한계의 속박들 안에 [그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미완결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결핍된 것이 아니며, 만일 결핍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이 결핍된 것일 테니까. 같은 것이 사유되기 위해 있고 또 그것에 의해 사유가 있다.
[35] 왜냐하면 있는 것 없이 ([사유가] 표현된 한에서는 그것에 의존하는데) 그대는 사유함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왜냐하면 있는 것 밖에 다른 아무 것도 있거나 있게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모이라(운명)가 바로 이것을 온전하고 부동의 것이게끔 속박하였기에 그러하다. 이것에 대해 모든 이름들이 붙여져왔다, 가사자들이 참되다고 확신하고서 놓은 모든 이름들이,
[40] 즉 생겨나고 있음과 소멸되어감, 있음과 있지 않음, 그리고 장소를 바꿈과 밝은 새깔을 맞바꿈 등이. 그러나 맨 바깥에 한계가 있기에, 그것은 완결된 것, 모든 방면으로부터 잘 둥글려진 공의 덩어리와 흡사하며, 중앙으로부터 모든 곳으로 똑 같이 뻗어나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45] 저기보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크다든가 조금이라도 더 작다든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같은 것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만한 있지 않은 것이란 있지 않고, 또한 있는 것은 있는 것 가운데 더 많은 것이 여기에, 그리고 더 적은 것이 저기에 있게 될 길이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것은 전체가 불가침이기에. 왜냐하면 모든 방면으로부터 자신과 동등한 것으로서, 한계들 안에 균일하게 있기에.
[50] 여기서 나는 그대를 위한 확신할 만한 논변과 사유를 멈춘다. 진리에 관해서, 그리고 이제부터는 가시적인 의견들을 배우라, 내 이야기들의 기만적인 질서를 들으면서. 왜냐하면 그들은 이름 붙이기 위해 두 형태를 마음에 놓았는데,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그래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점에서 그들은 헤맸던 것이다.
[55] 그리고 그들은 형체에 있어 정반대인 것들을 구분하였고 그것들 서로 간에 구분되게 표지들을 놓았다. 즉 한편에는 에테르에 속하는 타오르는 불을, 부드럽고, 아주 가벼우며, 모든 방면에서 자신과 동일하되, 다른 하나와 동일한 것이 아닌 [불을 놓았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저것도, 그 자체만으로 정반대인 어두운 밤도, 조밀하고 무거운 형체인 [밤도 놓았다].
[60] 이 배열 전체를 그럴듯한 것으로서 나는 그대에게 설파한다. 도대체 가사자들이 그 어떤 견해도 그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1-52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 145-146 /
50-61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 38-39)

27. 콘포드 단편. 플라톤

그런 부동(不動)의 것은, 전체로서 그것에 대한 이름이 ‘있음(to einai)’이다.
( 『테아이테토스』 180e)




         
* 프리드리히 니체,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니체전집 3.유고(1870~1873년)』,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1.



파르메니데스의 시각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성질들을 서로 비교하여, 이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것들이 아니라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그가 빛과 어둠을 비교하면, 두 번째 특성은 오직 첫 번째 성질의 부정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긍정적 성질과 부정적 성질을 구별하려고 했으며, 자연의 전 영역에서 이 대립을 다시 발견하고 명시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사용된 그의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예를 들면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얇은 것과 두꺼운 것,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같은 몇 가지 대립들을 채택했으며, 이들을 전형적인 대립인 빛과 어둠으로 분류했다. 밝은 것에 상응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었으며, 어두운 것과 일치하는 것은 부정적인 성질이었다. 예를 들어,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선택하면, 가벼운 것은 밝은 것에 해당했고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선택하면, 가벼운 것은 밝은 것에 해당했고 무거운 것은 어두운 것의 편에 속했다. 따라서 무거운 것은 그에게는 단지 가벼운 것의 부정에 지나지 않았으며, 가벼운 것은 긍정적 성질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부터 이미 감각의 간섭을 차단하면서 추상적-논리적 절차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산출된다. 무거운 것은 사실 우리의 감각에 긍정적 성질로 와 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르메니데스는 무거운 것을 부정적으로 낙인찍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마찬가지로 흙을 불과 대립시키고, 차가운 것을 따뜻한 것과 대립시키고, 두꺼운 것을 얇은 것과, 여성적인 것을 남성적인 것과 그리고 수동적인 것을 능동적인 것과 대립시켜 이들 모두를 오직 부정의 형식으로만 표시했다. 그래서 그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의 경험세계는 두 개의 분리된 영역, 즉 - 밝고 불과 같고 따뜻하고 가볍고 얇고 능동적이고 남성적인 성격을 지닌 - 긍정적 성질들의 영역과 부정적 성질들의 영역으로 나뉜다. 후자의 성질들은 오직 다른 긍정적 성질들이 결여되어 있는 영역을 어둡고, 흙과 같고, 차갑고, 무겁고, 두껍고,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성질들로 표현한다. 그는 ‘긍정적’과 ‘부정적’이라는 표현 대신에 ‘존재적’과 ‘비존재적’이라는 확고한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이와 함께 아낙시만드로스와는 모순되는 명제, 즉 우리의 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비존재적인 것도 포함하고 있다는 공식에 이르렀다. 우리는 존재자를 세계의 밖에서 그리고 우리의 지평 너머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바로 앞에, 도처에 그리고 모든 생성 속에는 존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활동 중이다(396~397쪽).

파르메니데스는 공동으로 작용하는 두 개의 대립을 탐색했다. - 이 대립들의 욕망과 증오는 세계와 생성을 구성하고, 존재자와 비존재자 그리고 긍정적 성질들과 부정적 성질들을 구성한다 - 그리고 그는 갑자기 부정적 성질인 비존재자의 개념에 불신의 눈길을 보내면서도 거기에 매달렸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하나의 성질일 수 있는가? 또는 더 근본적으로 질문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즉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낼 수 있고 또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인 유일한 인식의 형식은 ‘A는 A다’라는 동어반복(同語反覆, Tautologie)이다. 그런데 바로 이 동어반복적 인식이 그에게 가차 없이 다음과 같이 외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

그는 갑자기 엄청난 논리적 죄악이 자신의 삶을 압박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부정적 성질들, 간단히 말해 비존재가 존재한다고, 따라서 공식적으로 표현하면 ‘A≠A’라고 아무 주저 없이 가정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이러한 공식을 세운다는 것은 완전히 도착된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 그는 모든 인간 광기의 저편에서 세계의 비밀에 이르는 열쇠, 즉 하나의 원리를 발견했다. 그는 이제 존재에 관한 동어반복적 진리라는 확고하고 가공할 만한 손에 이끌려 사물들의 심연으로 들어간다(401~402쪽. 인용자 강조).

그[파르메니데스]는 이제 경악할 만한 추상적 개념들의 목욕탕에 들어갔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존재 속에 있어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그것이 있었다’ 또는 ‘그것은 있을 것이다’라고 서술될 수 없다. 존재자는 생성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자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생성될 수 있다는 말인가? 비존재로부터란 말인가? 그렇지만 비존재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산출할 수 없다. 존재자로부터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존재자가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소멸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생성처럼, 즉 모든 변화, 증가, 감소와 같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의 명제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 ‘과거에 존재했다’ 또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다’라고 서술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존재자에 대해서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서술될 수 없다. 존재자는 분할될 수 없다. 그것을 분할할 수 있는 제2의 힘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존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도대체 어느 곳으로 움직인다는 말인가? 존재자는 무한히 크지도 또 무한히 작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성된 것이며,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주어진 무한성이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자는 제한[한정]되어 있고, 완성되어 있고, 부동(不動)적이고, 마치 하나의 공처럼 어느 곳에서나 균형을 이루고 어느 지점에서나 완성된 형태로 부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공간은 두 번째 존재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수의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을 분리시키기 위해서는 그 자체의 존재자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하나의 가정이다. 따라서 오직 영원한 통일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 파르메니데스가 예전에는 풍부한 의미의 사상들을 통해 그 실존을 파악하려고 시도했던 생성의 세계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이 생성 일반을 보고 있으며 또 자신의 귀가 생성 일반을 듣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이제 그의 명법은 이렇게 말한다. “저 우둔한 눈을 따르지 말라, 메아리처럼 울리기만 하는 저 귀 또는 혀를 믿지 말라, 오직 사유의 힘만으로 확인해보아라!” 이로써 그는 인식기관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수행했다. 그것이 설령 불충분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는 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추상적 개념들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 즉 이성과 감각을 마치 두 개의 분리된 능력인 것처럼 예리하게 떼어놓음으로써 지성 자체를 파괴했으며, 완전히 그릇된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조장했다. 그런데 이 분리는 특히 플라톤 이래 마치 하나의 저주처럼 철학을 억누르고 있다. 모든 감각적 지각은 오직 착각만을 제공할 뿐이라고 파르메니데스는 판단한다. 그리고 이 지각들의 주된 기만은 그것들이 비존재자 역시 존재하며 또 생성 역시 하나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위장한다는 점이다. 경험적으로 알려진 세계의 다수성과 다양성, 이 세계의 성질들의 변화, 이들의 상승과 하강에서의 질서는 단순한 가상과 공상으로서 가차 없이 폐기처분되었다. 이것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감각에 의해 기만당하고 꾸며진 그래서 철저하게 가치 없는 이 세계에 쏟는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처럼 그렇게 전체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개별적인 것에서는 자연 탐구자이기를 그만둔다. 현상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시들어버리고, 이 감각의 영원한 기만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증오심이 일어난다. 진리는 이제 내용이 다 빠져버려 창백하기 짝이 없는 일반성들 속에서만, 즉 아무것도 규정해주지 않는 말들의 빈 껍데기 속에서만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거미줄로 이루어진 집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바로 이런 ‘진리’의 곁에 이제 철학자가 앉아 있다. 마치 하나의 추상적 개념처럼 핏기 없이 온통 공식들의 거미줄에 갇혀 있는 것처럼. 그렇지만 거미들은 제물의 피를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적 철학자는 바로 이 제물의 피를 증오한다. 그에 의해서 희생된 경험의 피를(403~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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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와 '비존재(결여)' 사이, 혹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사이에 설정한 이러한 이른바 '본질적' 구분을 '서양철학사 3천년의 제1대 사건'이라 부르겠다.






철학자, 지혜를 추구하는 자

 




<파이드로스> - 플라톤 / 조대호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지혜(sophia)'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을 처음으로 구분한 것은 피타고라스(Pythagoras)였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일컬어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자'라는 뜻에서 'philosophos'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런 뜻에서 플라톤은 <<국가>> 475b에서 '철학자'를 지혜, 특히 '모든 지혜를 욕구하는 자'(pases sophias epithymetes)로 정의한다.



- 151쪽. 역주 428.

올림피아드, 이교도의 축제

 







<고대올림픽> - 양병우

       
올림픽 경기는 기원전 776년에 창설되어 기원후 393년에 종말을 고하기까지 1168년의 역사를 겪었다(147).



* 에필로그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오랜 박해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아니 그 최후의 승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10년 뒤 로마 제국의 단독 지배를 건 결전에서 리키니우스는 고대의 신들에게 의지하고,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의 머리 글자를 그린 깃발 아래 싸웠다. 그 승리는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것이었다.


신들이 죽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짧은 치세(361-363년) 동안에 '신들의 부흥'을 기도한 율리아누스 황제의 노력도 헛된 것이었다. 그가 죽게 되자 "갈리리 사람아, 당신이 이겼다"고 말했다지만, 실은 "태양신이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대의 신은 그를 도울 힘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379년 황제로 추대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최후의 일격이 가해졌다. 카톨릭의 세례를 받은 그는 381년에 신들에게 희생을 바치거나 그것으로 점치는 것을 금지하였다. 신전에 참배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으나, 그때부터 신전의 파괴와 약탈이 시작되었다. 기본은 <<로마제국쇠망사>>에 "로마의 모든 속주에서 광신자의 무리들이 제멋대로 마구 평화로운 주민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고대의 가장 아름다운 건조물들의 폐허가 아직도 야만인들이 파괴한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야만인들만이 그와 같이 힘든 파괴를 할 시간과 성미를 가진다"고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최후의 날이 다가왔다. 제 293회 경기가 열린 393년에 테오도시우스는 올림피아의 제전을 금하였다. 그리고 426년에는 동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모든 신전의 파괴를 명령하고, 올림피아에도 파괴와 약탈의 손이 미쳤다. 그리하여 페이디아스의 걸작인 제우스 신상의 머리를 멀리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천 년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올림픽 경기가 그냥 사라지고 만 것은 아니었다. 아니 사라질 리가 없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다시 금령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 5세기 중엽까지 명맥을 유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래 농민의 제식에서 나온 그 경기는 그때 다시 그들의 제식으로 되돌아가서 그들의 소원인 풍작을 위해 끈질기게 지속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17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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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지식산업사(발행인 김경희)에서 나온 정가 2500원의 이 책을 몇 년 전에던가 1500원에 구입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첫장을 넘기니 내가 살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다음과 같은 헌사가 실려 있었다 ...

"박세직 위원장 혜감 - 김경희 증"



러셀의 기술이론

 

* 거짓말쟁이의 역설 - 위키백과


철학과 논리학에서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 Paradox)은 자기모순적 명제를 지칭한다.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말들은 자기모순적인데, 그 이유는 정확히 참 또는 거짓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이 문장은 거짓이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이 문장이 참이라면, 문장 내용에 의해 이 문장은 거짓이어야 한다.


2) 반대로 이 문장이 거짓이라면, 역시 문장 내용에 의해 이 문장은 반드시 참이 되어야 한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다음처럼 하나의 문장이 아닌, 여러 개의 문장으로 구성할 수도 있다.


이 다음 문장은 참이다. 이 앞의 문장은 거짓이다.


에피메니데스와 에우불리데스


크레타 사람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기원전 6세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모든 크레타 섬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이다.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을 종종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같은 용어로 여기거나, 서로 혼동해서 쓰기도 하지만, 이 둘은 같은 용어가 아니다. 에피메니데스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노리고 글을 썼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며, 이것이 모순된다는 것도 아마도 후세에서야 발견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문장은 문장이 거짓일 경우에는 역설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크레타 섬 사람들 중 진실을 말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 문장은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알려진 거짓말쟁이의 역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우불리데스(Eubulides)의 역설이다. 에우불리데스가 에피메니데스의 글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에우불리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남자가 자기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것은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러셀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집합 이론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러셀의 역설로 알려진 이 역설을 1901년에 발견하였다. 이 역설은 ‘자신을 원소로 가지지 않는 모든 집합을 원소로 포함하는 집합에 자기 자신도 원소로 포함되는지 여부를 고려할 때’ 발생한다. 1) 만약 이 집합에 자신을 원소로 포함한다면, 집합의 정의에 따라 자신은 원소가 되지 않아야 한다. 2) 반대로 만약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면, 역시 집합의 정의에 따라 자신도 원소가 되어야 한다.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은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1901년 발견한 논리적 역설로 프레게의 논리체계와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naïve set theory)이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 예이다. “특정 영역의 개체의 수는 그 개체의 하등계급 수보다 작다”는 칸토어의 법칙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M이라는 집합을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으로 정의하자. 다시 말해, A가 M의 원소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A가 A의 원소가 아닌 것으로 한다.칸토어의 공리체계에서 위와 같은 정의로 집합 M은 문제없이 잘 정의된다. 여기서 M이 자기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는가?란 질문을 던져본다. 만약 포함한다고 가정하면 그 정의에 의해 M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 반대로 M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에도 역시 그 정의에 의해 M은 자신에 포함되어야 한다. 즉 "M은 M의 원소이다"라는 명제와 "M은 M의 원소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둘 다 모순을 도출하여 맞다 혹은 그르다 중에 어떤 답으로 답할 수 없다.”


프레게의 공리체계에서 M은 "자신을 정의하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not fall under its defining concept)"라는 개념(concept)에 해당한다. 따라서, 프레게의 체계 역시 모순을 낳는다. 한편 논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러셀 자신이 그의 역설을 예로 설명한 것이 세비야의 이발사이야기이다.


만약 세비야에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이의 이발만을 해주는 이발사가 있다고 하자. 이 이발사는 이발을 스스로 해야 할까?


만약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전제에 의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야 하고, 역으로 스스로 이발을 한다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바로 러셀의 역설과 동일한 문제에 걸리는 것이다.


알프레드 타르스키


알프레드 타르스키(Alfred Tarski)는 스스로를 다시 참조하지 않는 문장들도 조합할 경우 스스로를 다시 참조하면서 역설적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논하였다. 이러한 조합의 한 예는 다음과 같다.


1) 2번 문장은 참이다.


2) 1번 문장은 거짓이다.


타르스키는 이러한 '거짓말쟁이의 순환(liar cycle)' 문제를 “하나의 문장이 다른 문장의 참/거짓을 참조할 때, 의미상 더 높도록 하여” 해결하였다. 참조되는 문장은 '대상 언어(object language)'의 일부가 되며, 참조하는 문장은 목표 언어에 대한 '메타 언어(meta-language)'의 한 일부로 간주된다. 의미 계층(semantic hierarchy)의 더 높은 '언어들(languages)'에 있는 문장들은 '언어(language)' 계층에 있는 낮은 순위의 문장들을 참고해야 하며, 순서를 거꾸로 바꾸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시스템이 자기 참조가 되는 것을 막는다.
 
 
 
 
 
 
 
* 도올 김용옥, 『중용 한글역주』, 통나무, 2011.
 
 
 
 
 
 
통서: 인문주의 혁명의 여명



존재론의 역사



종교는 본시 존재론(存在論)이 아니다. 존재론이란 존재 일반에 관한 논(로고스, logos), 혹은 존재자에 관한 논을 의미하지만, 이때 “존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존재에 관한 어떠한 논의도 생산적인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서양철학사의 전통에서는 존재를 “~는 있다”라는 사태로 접근하지 않고, 항상 “~이다”라는 사태로 접근하는 성향이 있다. “~이 있다”라는 사태는 너무도 즉각적이고 완정한 사태이며, “존재”라는 수식이나 규정을 따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말에서 “존재”라는 말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서양철학의 개념이 일본사람들의 역어(譯語)를 통하여 우리말로 편입된 것이다.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유명한 명제로부터 출발하여 있는 것, 즉 존재를 불생(不生)ㆍ불멸(不滅)ㆍ불변(不變)ㆍ부동(不動)의 연속충실체(連續充實體)로서 규정하고, 유(有)를 비유(非有)ㆍ생성(生成)에 대립시켰다. 플라톤은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이어받아 참으로 있는 것으로서의 “이데아”론을 성립시켰고, 생성의 세계를 엮어 넣으려는 생물학적 성향의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존재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제1실체를 일체의 질료적 한정을 갖지 않는 순수형상(純粹形相)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변역(變易)의 가능성을 포함하지 않는 “부동(不動)의 사동자(使動者)”, 즉 하나님으로 간주함으로써,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이 하나님에 있어서는 일치한다고 하는 모든 중세 스콜라철학적 사유를 개창하였다. 그러니까 존재의 문제는 “있다”라고 하는 소박한 현실을 떠나 “무엇이 참으로 있는 것인가?”라는 진리의 문제로 비약하게 된다. 그런데 “참으로 있는 것”은 항상 “있는” 것들을 부정하게 되므로, 진리의 존재란 있는 것들을 넘어서서 있는 것이 된다. 그 넘어서서 있는 것들의 궁극에 항상 하나님이 있게 되고, 따라서 존재론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논이 되고 만다. 결국 존재론은 “~ 있다”가 아니라, “진정한 존재는 하나님이다”로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중세신학을 지배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었다.



존재론(ontology, ontologia)이라는 용어가 서양에서 고대로부터 사용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온톨로기아”라는 말은 17세기 독일 스콜라철학적 논리학자인 고클레니우스(Rudolf Goclenius, 1547-1628)의 용례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哲學辭典』, 1613). 비스한 시기의 칼로비우스(Abraham Calovius, 1612–1686)는 온톨로기아(ontologia)를 메타피지카(metaphysica)라는 말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게 사용하였다. 독일 근대 데카르트학파의 사상가인 클라우베르크(Johannes Clauberg, 1622~1665)는 존재론이란 말 대신에 존재지(存在智, ontosophia)라는 말을 만들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보편학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온톨로기아”를 철학적 술어(philosophical term)로서 정립한 사람이 18세기 초 독일의 합리주의를 대변한 철학자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와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garten, 1714~1762)이었다. [...] 볼프에 의하면 존재론의 방법은 연역적이며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가 말한 충족이유율을 만족시킨다. 우주는 존재들의 총합이며, 그 개개 존재들은 모두 지성이 명석판명한 관념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의심할 바 없는 제1원리로부터 연역된 존재들에 관한 진리는 모두가 필연적 진리이다. 따라서 존재론은 세계의 우연적 질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볼프의 존재론은 현상계와 유리된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론은 칸트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22~25).



칸트의 존재론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이러한 볼프의 존재론을 그의 선험철학으로 대치시켰다. 그러나 칸트의 선험철학은 존재론이라기보다는 인식론적 탐색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며, 그의 선험철학은 비록 선험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상계의 질서 밖으로 이탈하지 않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현상계(現象界, 감성感性의 대상)와 가상계(可想界, 오성悟性의 대상)의 구별은 플라톤적 실재론과 유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플라톤의 실재론적 관념론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가상계를 오성이 인식하는 참 대상이라고 생각한 것은 플라톤의 오류이다. 인간의 오성은 오히려 감성계에만 적응되는 것이다.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라는 것도 감성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계의 궁극적 근거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자체도 현상계와 연속적 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단지 물자체는 불가지(不可知)의 대상일 뿐이다. 물자체가 순전한 가구(假構)일 수는 없다.
 
 
칸트에게 있어서 존재론은 선험적[=초월적] 분석론(Transcendental Analytic)으로 통섭되는 것이다. 칸트는 볼프가 말하는 특수형이상학인 신학과 심리학과 우주론은 선험적[=초월적] 변증론(Transcendental Dialectic)에 귀속시키고 일반형이상학인 존재론은 선험적 분석론으로 귀속시켰다. 따라서 존재론은 선험적 분석론의 주제인 오성의 인식과 관계할 뿐이다. 오성은 감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감성의 한계 내에서 주어지는 대상에만 한정되는 것이다. 오성의 원칙들은 현상을 해명하는 규칙일 뿐이다. 전통적으로 존재론이 마치 사물일반의 종합적인 선천지식을 체계적 이론의 형태로서 제공하는 대단한 이론인 양 떠벌이지만, 이제 소위 존재론이라는 과시적 명칭은 ‘순수 오성의 한갓[된] 분석론’이라는 겸손한 이름으로 대신되어야만 하는 것이다(『순수이성비판』, B303). 따라서 존재론은 사물일반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구체적 대상들과 관계하는 것이다. 칸트의 존재론은 현상론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오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이성의 이상으로서의 최고존재인, 하나님의 관념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도 선험적 분석론에 국한되는 겸손한 존재론의 근거 위에서 그 불가능성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존재(存在)는 현존(現存)과 혼동될 수 없다. 그 무엇이 현존한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그 말은 항상 종합적(=경험적) 판단이다.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proof)이란 하나님이라는 개념 그 자체로부터 연역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하나님이란 개념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존재론적 증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중세기로부터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완전한 존재(a perfect being)는 반드시 존재성을 포괄하는 모든 술어를 소유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완전한 존재라면 존재성을 술어로서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가 하나님의 필연적 속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이다(26~27).
 
 
하이데가의 존재론



아주 쉽게 한 예를 들어보자! 누가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도올 김용옥은 존재한다. 도올 김용옥은 『여자란 무엇인가』를 썼다. 도올 김용옥은 사과를 먹고 있다.” 이 말에서 김용옥에 관한 속성은 둘일 뿐 셋이 될 수가 없다. 도올 김용옥이 존재한다는 것은 도올 김용옥이라는 개념에 아무 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따라서 존재는 술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술어들의 빈 ‘자리’일 뿐이다. 하나님의 현존(現存)이 하나님의 본질 속에 있을 수는 없다. ‘가장 실재적인 존재’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에, 그 존재가 현존한다는 것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개념의 밖으로 나와야(herausgehen) 한다. 감관의 대상의 경우에는, 대상이 경험의 법칙에 따라 나의 어떤 지각과 연결될 때에 이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가장 ‘실재적인 존재’라는 개념은 순수 사고(pure thought)의 대상일 뿐이며, 우리는 그들의 실재를 인식하는 수단이 전혀 없다. 순수 사고의 객관은 전적으로 선천적으로 인식될 뿐이며, 현존이란 경험을 통해서만 확립되어지기 때문이다. 경험의 통일성을 벗어나는 어떠한 존재도 우리가 정당화할 길이 없는 가정에 머물고 만다. 모든 존재론적 명제는 종합적(경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칸트의 존재론은 하이데가의 다자인(Dasein, 現存在)의 존재론으로 발전된다. 하이데가는 철학의 출발점을 데카르트처럼 ‘나(I)’라는 유아론(唯我論)적 실체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나의 의식이 지각된 세계를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인식론도 유아론적 성격이 있다. 하이데가는 ‘나’라는 실체적 존재를 버리고 “거기에 있다”라는 의미에서 ‘다자인’을 새로운 철학적 어휘로서 제시한다. 하이데가는 “~이다”에서 “~있다”로 철저히 귀환한 것이다. ‘거기에 있는’ 다자인은 이미 세계 속에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세계 내의 존재이다. 다자인과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 In-der-Welt-Sein)은 결국 같은 의미가 된다. 다자인이 타존재들과 구분되는 것은 존재하면서 자기의 존재,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다자인은 ‘존재론에 앞서는(pre-ontological)’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다자인은 세계 안에 이미 던져진 존재(被投性, Geworfensein)이다. 자기 및 자기 이외의 것을 이미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미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므로 이러한 의미에서는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는(entwerfen), 즉 미래를 계획하는 존재이다. 이와 같이 던져져 있으면서 미래를 계획하고 ‘본래적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실존의 전정한 모습이다(27~28).
 
 
럿셀의 기술(記述) 이론



여태까지 대강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의 골자를 살펴보았지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존재론의 과제가 존재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을 때는, 그 논의가 항상 ‘있는 것’을 초월하여 현적(玄寂)한 공리(空理)로 달아나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존재’를 운운할 필요가 없다. 횡거(橫渠, 1020 ~ 1077)의 말대로 태허(太虛)가 곧 기(氣)라는 것을 알면, ‘없음’은 있을 수가 없다(無無). 그렇다고 없음에 대한 있음이 불생불멸불변의 동일성을 지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있는 것은 끊임없이 쉬지 않고 변하는 것이다. 지성무식(至誠無息)이다. 서양의 철학전통에는 근원적으로 파르메니데스적인 존재론만 있고,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존재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알츠하이머 목사님의 경우 “예수가 누구여”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의 신앙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예수라는 고유명사는 존재의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신앙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반드시 기술(記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술은 궁극적으로 존재를 해체시킨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다”라는 명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은 단 한 사람이며, 따라서 그것은 한정된 기술(definite description)이다. 그리고 이 문장의 주어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고유명사로서 인식될 수는 없다. 이 기술구(句)는 한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특유한 속성으로써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고유명사적인 어떤 존재를 지칭하지 않는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한(韓) 모인지 오(吳) 모인지를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이순신이다”라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러나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순신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시끄러운 공기의 떨림일 뿐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는 없지만, 무엇을 지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순신 본인을 눈앞에서 곧 바로 지시할 수는 없다. 이순신은 우리의 직접 감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집에 지금 3살 짜리 어린 아들이 있다고 하자. 이 아들은 나를 알아본다.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 그리고 딴 집 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르는 것처럼 나를 ‘도올’이라고 부른다고 하자! 그에게 있어서 ‘도올’은 나를 지시하는 고유명사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똑 같은 말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도올’이라고 부를 때는, 실상 세 살 먹은 아들이 ‘도올’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고유명사이지만 실상 외연만 있고 의미가 없는 순수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라는 고유명사는 수없는 기술의 축약태이다. 그들은 나를 실제로 만난 적도 없고, 나를 세 살 난 아들이 지시하는 것처럼 직접 감관에 의하여 지시해본 적도 없다. ‘KBS에서 『논어』를 강의한 사람’이라든가, ‘MBC 라디오 어느 시간에 어느 코미디언이 흉내를 내는 사람’이라든가, ‘머리를 깎고 한복을 입은 철학자’라든가,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라든가 하는 수없는 기술구들이 ‘도올 김용옥 선생’이라는 말 속에 축약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순결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순결한 고유명사는 그것 자체로 어떤 대상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색한 문법이 되고 만다. 따라서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도올은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서양언어의 신택스(syntax, 統辭論)으로는 타당하지 않다. ‘도올’이 축약된 기술구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기술구로 바꾸어질 때 비로소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럿셀이 말하는 ‘기술(記述)의 이론(the theory of description)’이다.
 
 
이 럿셀의 기술이론은 주어-술어 형식의 서구적 언어에서 파생되는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The golden mountain does not exist)”라고 말했는데, 만약 누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What is it that does not exist?)”라고 묻게 된다면, 나는 “그것은 황금산이다(It is the golden mountain)”라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외견상 매우 자연스러운 대답 같지만,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나는 존재하지 않는 황금산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꼴이 되고 만다. 황금산은 결코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구이며, 그 기술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면 ‘존재’를 운운할 필요가 없게 된다.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실제로 다음과 같은 기술구로서 바꾸어 표현될 수 있다.



“‘x가 금으로 되어 있으며 또 산 같이 생겼다’라는 진술이 x가 c일 때는 참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참이 아닌 그러한 c는 없다



There is no entity c such that 'x is golden and mountainous' is true when x is c, but no otherwise.”
 
 
이렇게 바꾸어 표현하면 ‘황금산’이라는 주어적 존재자는 사라지고 만다.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는 존재한다”라는 진술도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라는 실체의 존재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제가 아니다.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는 존재한다”라는 진술은 “‘x가 『논어한글역주』를 썼다’라는 명제함수가 ‘x는 c이다’라는 진술과 항상 동일한 사태라는 것을 참이게 만드는 그러한 c의 값이 있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때, ‘존재’는 기술된 것에 대해서만 주장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분석되고 보면 변항(變項)의 최소한 하나의 값에 의하여 참이 되는 명제함수의 한 케이스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존재는 근원적으로 해소되고 만다. 고유명사에 대해서도 존재를 말할 수 없으며 기술구에 대해서도 그 기술구를 고유명사로 확정시키는 대상적 실체는 사라지고 만다. ‘이러이러한 것(the so-and-so)’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진술을 올바로 분석하면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문구는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번쇄하고 하찮게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서구인들이 그 얼마나 수천 년을 통하여 허구적인 논리적 구성물의 존재성의 핍박 속에서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그 반박을 위하여 그 얼마나 치열한 논리적 열정에 철학적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가 하는 것을 경복과 감탄 속에서 되새겨 보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 이러한 ‘존재성의 해소’야말로 『중용』을 읽는 이들의 마음가짐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려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여”라고 반문하는 알츠하이머 목사님은 진실한 신앙인으로서의 본래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그 얼마나 생소한 고유명사였을까? 대한민국의 우매한 생령의 거개가 ‘예수’를 존재자로서 믿는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 존재자가 그들의 실존의 내면으로 융합되는 상황이 과연 몇 케이스나 있을까? ‘예수’라는 고유명사의 어색함, 그 존재자의 허구성은 그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위선적 인격의 분열로 그들을 휘몰아가고 있지 아니 한가? 그리하여 모든 정치적ㆍ민족적ㆍ민생적 분열을 조장하고 있지 아니 한가?
 
 
앞서 칸트가 “우리 사유의 대상이 개념에 실재성을 귀속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그 개념의 밖으로 나와야 한다”(『순수이성비판』 B629)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논의의 관점에서 보아도 너무도 정당한 것이다. 하느님은 전지ㆍ전능의 일체만유(一切萬有)를 포섭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만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존재자의 개념은 무제약적인 것(the unconditioned), 무한한 것(the unlimited) 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제약적이고 무한한 것 “밖으로 나갈” 길이 없다. 우리가 그 밖으로 나가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무제약적이고 무한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기 나무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나무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제약되고 한정될 때 비로소 나무는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칸트의 존재론에 의하면 존재를 술부에 귀속시키는 모든 명제는 종합적이다. 존재는 오성의 판단의 대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반드시 우리의 지각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순수 사유의 대상에 대해서는 그것의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 “전지자(全知者)”는 “부분적으로 안다”라는 우리의 현실적 경험의 인식으로부터 추상되어 그 극한점으로서 “모든 것을 안다”라고 상정된 것이다. 이것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순수사유의 대상이며, 경험의 한계를 타파하는 자유로운 순수이성의 장난이다. “부분적으로 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상으로 인식 가능한 것이지만 “만유일체의 모든 것에 능하다”라는 것은 경험에서 상대적으로 추론된 논리적 구성일 뿐이다. 따라서 “전지ㆍ전능자”라고 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체험세계에 대하여 상대적인, 절대자로서 상정된 논리적 구성물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적 구성물은 존재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둥근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우리는 “둥근 사각형”에 존재성을 부여할 수 없지만, 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둥근 사각형이 주어의 자격도 가질 수 없지만, “둥근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우리의 일상언어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둥근 사각형이 의미를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꼭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존재성과 의미성의 충돌을 해결하고 있는 학설이 바로 럿셀의 기술 이론인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다”라는 한국어 문장에서는 우리는 존재의 문제를 찾을 길이 없다. “전능하다”에서 “하다”는 “있다”를 내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장을 영어로 바꾸어 놓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God is omnipotent.” 이 명제는 두 개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God)과 전능(omnipotent)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전능은 “is”라는 연결사(copula, 계사繫辭)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칸트의 말대로 이 연결사는 단지 하나님과 전능을 연결시키는 연결사일 뿐이며, 이 연결사가 하나님의 개념에 새로운 속성을 첨가하지는 않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God is omnipotent.”라는 문장에서 전능이라는 속성을 제거하면 “God is.”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말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깨비방망이처럼 “하나님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인도유러피안어족의 말에 있어서는 “이다”와 “있다”가 항상 혼동되게 마련이다. 중국어에서는 “上帝全能”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며 양자를 연결하는 be 동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上帝全能”이라는 명제를 놓고 존재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럿셀은 기술 이론을 발표하면서, “플라톤의 『테아에테투스』로부터 시작된 존재에 관한 2천 년 동안의 뒤죽박죽된 대가리 속의 엉크러짐을 다 풀어버렸다(This clears up two millennia of muddle-headedness about 'existence,' beginning with Plato's Theaetetus)”라고 시원하게 일성(一聲)을 갈(喝)했지만, 사실 그것은 『테아에테투스』의 문제라기보다는 서구 언어에 내장된 문제이며, 『테아에테투스』의 인식론을 왜곡시킨 중세기독교의 독단의 문제일 것이다. 아마도 알츠하이머 목사님이 “예수가 누구여”라고 말한 것은 일생을 통하여 억지로 주입된 어색한 인도 유러피언어적 언어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매우 자연스러운 모국어의 본질로 회귀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God is omnipotent”라는 말에서 “God”도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omnipotent”도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is”도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God is omnipotent.”라는 명제는 근원적으로 존재를 나타내는 명제일 수가 없다. 단지 무의미하지 않다는 사실만 최종적으로 남을 뿐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전능하다”라는 판단은 순수이성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오성의 범주를 적용하면 이율배반에 빠진다(선험적 변증론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따라서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러한 전칭적인 명제들은 실천이성의 영역 속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중용』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사태는 『중용』에 내재하는 암묵적 체계 속에서는 결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이분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28~34).
 
 
형용사니 동사니 명사니 하는 개념규정 자체가 서구 언어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과연 그 개념지도를 가지고 한문을 문법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지 나는 알 바 없다(41).
 
 
종교란 개인이 자신의 고독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Religion is what the individual does with his solitariness.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78)
 
 
서양언어, 특히 서양종교에 세뇌된 언어의 용례 때문에 이러한 유교적 본래용법의 함의가 심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얻는단 말인가? 비밀만 지켜진다면 기분이 좀 경감되는 느낌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인간에게서 죄인과 죄사함의 주체가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용』의 ‘자성(自成)’(스스로 이루어 나갈 수밖에 없고) ‘자도(自道)’(스스로 길지워 나갈 수밖에 없다)의 투철한 논리이다. 『중용』은 이러한 논리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군자의 길과 소인의 길은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에게는 오직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259~260).

       




 

* 도올 김용옥, 『중용 한글역주』, 통나무, 2011.



인간, 폴리스적 동물





<그리스인의 이상과 현실:서양철학의 뿌리> - G.L.디킨슨 / 박만준 외





모든 미적 효과는 윤리적 전제에 의해 제약된다. - 218


       
윤리, 그리고 미적이라는 日本語가 현대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이는 이들 단어를 ethos(성격, 인격, 성품, 태도)를 연구하는 학문인 ethike 그리고 aisthesis로 바꾸어 생각해보라.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 일본인들에 의해 倫理學이라 번역되어 통용되고 있는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는 차라리 性格學으로 번역되었어야 할 것이다 (마치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인 physika가 物理學이 아니라 自然學으로 타당히 번역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통 이른바 정치적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이라 번역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zoon politikon 역시 '폴리스(polis)적 동물'이라는 바로 그 의미이다.
인간의 본질, 성격은 폴리스 안에서만, 곧 그가 속한 폴리스의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사회적인 활동 안에서만 성취가능한 것이다.
오늘날의 자연과 윤리와 사회와 정치와 종교가 이 고대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아직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서의 하나였던 것이다.







       
* G. L. 디킨슨, 『그리스인의 이상과 현실: 서양철학의 뿌리』(1961), 박만준ㆍ이준호 옮김, 서광사, 1989.



그리스에는 교회나 교의(敎義), 그리고 지켜야 할 강령조차 없었다. [...] 사제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단지 일정한 종교적 의식을 행하기 위해 임명된 관리에 불과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리스에는 성직자와 속인의 구별이 없었다. 시와 교리의 구별도 없었다(13~14)
사람들은 종교를 가짐으로써 이 세계에서 편안해질 수 있었으며,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이다. [...] 결국 신적인 것, 즉 그리스인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맹목적인 운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접근할 수 있는 것이었다(16~17).
신들과 인간 사이에는 장벽이 없었다. [...]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에는 교회가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결코 국가가 승인하는 종교도 없었다고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종교는 국가의 본질적인 것이었으며, 전반적이고도 세부적으로 국가의 전체 구조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의 의미에 있어서의 교회, 즉 국가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조직으로서의 교ㅚ가 그리스에 없었던 까닭은, 어느 측면에서 국가 그 자체가 하나의 교회였으며 또한 국가는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자연 세계를 주재하고 있는 동일한 신들로부터 승인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리스 종교가 정치적 생활의 정신적 측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21~22).
그리스 종교는 논리적인 문장으로서가 아니라 종교 의식의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에서의 프로테스탄트보다는 로마 가톨릭에 더 가까운 것이다. [...] 불완전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들과 우리의 견해로 추정해보면, 디오니소스 축제는 전형적인 그리스적 종교 축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인의 천재성. [...] 그리스 종교는 종교적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인의 독특한 성격이 고찰된 그 초기에 있어서는 그들의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분리시키 고찰하려는 의도는 잘못된 것이다(25~26).
그리스 신들은 그 형상 면에서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같지만 인간보다 탁월한 존재인데, 그것은 정신적 혹은 무형적 속성에서가 아니라, 힘, 아름다움, 불멸성 등과 같은 외부로 나타나는 재능에서 탁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인과 신의 관계는 내면적ㆍ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외면적ㆍ기계적인 것이었다(30).
인간과 신의 모든 관계는 일종의 계약과 같은 성격을 지닌 관계이다. “만약 너희들이 할 일을 다 한다면, 나도 그렇게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한 쪽에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의미는 도덕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법률적(계약적)인 것이다. 우리들이 말하는 종교적 의미의 죄나 양심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34).
외형적인 의식에 의해 치유될 수 있는 신체적 질병으로서의 죄의 개념(그리스)
오직 은총으로서만 멀리 쫓아낼 수 있는 양심에 대한 질병으로서의 죄의 개념(그리스도교) (37)
아이스퀼로스 비극의 주제는 바로 죄와 그 죄에 대한 벌로 일관한다. [...] 그의 주제는 참된 의미에서 죄를 지은 자의 도덕적 양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은 죄에 가해지는 객관적 결과에 대한 것이다. [...] 흔히 말하는 비극은 “피는 반드시 피를 부른다”는 외면적ㆍ객관적 법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며, 단지 그것이 전부이다. [...]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적 관념은 내적이거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이며 기계적인 것이다(37~40).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 무신론자는 필연적으로 반사회적ㆍ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다는 가정. [...] 이 시의 지은이[아리스테파네스]에 의하면, 이성에 대한 예찬은 사리사욕에 대한 예찬과 동일한 것이다. 그가 뜻하는 바는 곧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가족이나 국가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71).
그리스의 국가 규모가 그 형성 과정에서 극히 우연적인 성격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가 무한정 확장될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국가의 본질적 성격은 유지될 수 있었으리라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 국가의 규모는 바로 국가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80).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공적 생활’이란 [...]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고 불가결한 것이었다. [...] 국가의 이상과 개인의 이상은 결코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거의 구분조차 될 수 없었다. [...] 우리는 개인을 전체를 위해서 희생되는 존재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 속에서(만) 스스로를 실현한다고 보아야 한다(82~84).
이[데모스테네스의 연설]와 같이, 보편적 원리인 법은 개인적 성향으로서의 본성과는 대립되는데, 이러한 대립 속에는 법과 정의는 동일하다는 묵시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85).
고대 그리스 국가는 일차적으로 군사 조직되었으며 또 그렇게 존속되었다. [...] 사실 『국가』 전체를 통해 플라톤이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상인 계급이 아닌 군인 계급이다. [...] 시민에 대한 귀족적 관념. [...] 그리고 우리가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개인의 탁월한 능력에 대한 대체적인 그리스인의 관점이 바로 이러한 귀족적 관념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93).
우리는 스파르타에서 극단적으로 발전한 그리스 정치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 그리스의 독자적인 정치 모형에 가장 근접한다고 볼 수 있겠다. [...] 무조건적인 국가 유지는 곧 개인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목적이 되었다(109).
플라톤이 주장한 이상 국가는 대개 스파르타를 그 전형으로 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파르타 정치 체제의 본질적인 결함은 군사적인 덕만을 배타적으로 고집한 것, 그리고 삶의 조화로운 측면을 지나치게 억압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14).
아테네의 정치 체제는 마지막에 극단적인 민주주의로 끝나는데, 이것은 그리스 국가의 일반적인 정치 체제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118).
“간단히 말해 아테네는 헬라스의 학교이며, 고유의 인격을 갖춘 아테네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최고의 품위와 재능을 갖추고 자신을 다양한 형태의 현실에 적응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하는 헛소리가 아니라 진리이며 사실이다.” - 투키디데스가 전하는 페리클레스의 연설(125)
우리는 그가[플라톤이] 가르친 주제가 바로 정의의 이념을 강한 자의 이해와 동일시하는 것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정의의 이념을 만인의 보편적 이해로 재확인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129).
오늘날 우리가 덕(德, virtue)이라 옮기는 단어[arete, ἀρετή]는 탁월성(excellence)으로 옮겨져야 마땅하며, 또 그것은 영혼에 대한 의미만이 아니라 육체에 대한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 “아름다운 육신 안에 아름다운 영혼” [...] 그리스인에게 훌륭한 육체와 훌륭한 영혼의 상관관계는 필연적이다. 그들이 목표로 삼은 것은 균형과 조화였다. 육신에 영혼의 아름다움이 반영되지 않은 한 그들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거의 믿지 않았다(137~141).
중용. 델포이의 신전. “지나치면 쓸모 없다.” [...] 나쁘다고 여겨지는 것은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균형을 잃거나 그릇된 욕망의 방종이라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분별 있는 사람’(êthos의 학, ethikē)이 “당연한 경우에 적정한 시간 동안 적절한 방식으로 상응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 [절대적 법칙의 기계적 적용이 아닌, 각 개인의 상황에 따르는 유동적 작용 = 실천적 지혜 pronesis] 모든 삶은 그 삶을 사는 인간에 의해 구체화된 예술 작품이다. 그 작품의 질은 예술가 자신의 능력에 일치할 것이며, 모든 경우에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것에 대체될 수 있는 일반적 규칙은 결코 없다. 선은 올바른 비례, 올바른 방식, 올바른 경우이다. 반면 악은 ‘옳음’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구성하는 요소들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선이나 악이 구체화될 수 있는 순수한 소재일 뿐이다. /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은 전적으로 그리스적이다(147~148).
육체의 욕망과 영혼의 정념을 제어하는 이성이라는 마부. 그리스 최고의 금욕주의자 플라톤조차도 우선 그리스인이며 그 다음에야 비로소 금욕주의자인 것이다(149).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의 관계는 연인의 관계인 동시에 친구의 관계였다(159).
우리가 아는 한, 고대 그리스에서 혼인과 관련된 연애는 거의 없거나 전무했다. 데모스테네스는 결혼은 아이를 낳기 위한 합법적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 우리는 [...] 아테네에서 혼인이 당사자의 관심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오직 나이, 재산, 친분 관계 등에 따라 아버지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이 혼인 제도를 명령했다는 크세노폰의 말(164~165).
그리스에서 우정은 하나의 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175). 테베군단. 플라톤에게 있어 사랑은 모든 지혜의 실마리이다. 그리고 모든 사랑의 형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남성이 다른 사람에 대해 느끼는 사랑이고, 정신적 사랑이며, 또 특정한 육체와 영혼에 대한 정열로부터 최고의 아름다움과 지혜와 탁월성에 대한 열광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랑이며, 그 사랑의 완전한 인간적인 형태는 단지 희미하고 불충분한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한 사랑이 보다 고차적인 삶에로의 출발인 동시에 덕과 철학과 종교의 원천이다(180).
인간의 탁월성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간에 그리스 예술이 추구하는 바이다. 그 탁월성은 미학적인 동시에 윤리적이다. 그리고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묘사하는 것은 또한 무엇이 선한가를 묘사한다는 것을 포함한다(201~202).
그리스인의 경우에 조각과 회화는 미학적 쾌락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국가 생활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양식이기도 했다. 조각의 기본적 목적은 신화적 광경을 묘사하는 것이며, 각각의 경우에 순수한 미적 쾌락 또한 종교적 체험을 위한 것이었다. [...] 실제로 조각은 종교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으며, 종교를 통해 국가 생활에 예속된다(202~204).
한 마디로 예술은 윤리적 이상에 종속되었다. 아니 오히려 윤리적 이상과 미학적 이상이 분리되지 않았다(206).
‘음악’ - 좁은 의미로 무용과 서정시를 가리키기도 한다 - 은 그리스 교육의 중심이었으며, 따라서 음악의 도덕적 성격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되었다. [...] 도덕적 성품은 음악이 갖고 있는 감화력에 기인한다는 것, 이것은 그리스인이 일반적으로 윤리적 기준과 미적 기준을 동일시했다는 데 대한 유일하고도 가장 충격적인 설명일 것 같다. [...] 그리스인의 견해에서 성품은 영혼의 다양한 요소들이 구성되어 있는 비율이며, 올바른 성품은 영혼의 다양한 요소들이 올바른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요소들의 상호 관계는 음악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 받는다. [음악과 도덕] 음악은 성격을 형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206~207).
이미 지적했듯이 그들의 ‘음악’은 가락과 운문 및 무용의 긴밀한 결합이었으므로, 리듬과 선율이 간직하고 있는 특수한 인간적 의미는 언어와 몸짓을 수반함으로써 완전히 명료해진다(209).
언어에 의해 정신으로 전달되고, 선율에 의해 전달되는 감성적 성격은 이제 몸짓, 자세, 발동작에 의해 눈에까지 이르는 등 훨씬 잘 이해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세 양식이 결합하여, 그리스적 의미의 ‘미메시스’ 예술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음악과 마찬가지로 무용 역시 뚜렷한 윤리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용이 성격, 감정 및 행위를 모방한다”고 했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 국가론에서 무용을 음악과 함께 법률로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9~210).
그들[그리스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윤리적 상태는 음악적 상태이다. 어떤 의미에서 덕이 영혼의 조화(harmonia)라는 것은 비유적인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따라서 음악의 목적은 윤리적 목적과 일치한다.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동시에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음악이며, 또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음악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다. [...] 덕과 아름다움은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이다. 즉 단 하나의 사실을 보는 두 가지 방식이다. [...] 선함과 아름다움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인이 품었던 이상의 전부이다(211~212).
실제로 시인들의 저술, 특히 호메로스의 저술은 그리스인과 우리 모두에게 도덕적 보고서이다. 오늘날은 추상적 용어로 도덕 수업을 받지만, 그들은 오히려 삶에 대한 구체적 묘사로부터 도덕 수업을 받았다(213).
스트라보, “당신은 먼저 훌륭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훌륭한 시인도 되기 어렵다.”(214)
그리스 비극의 성격은 그것이 종교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비극이 공연된 기간은 디오니소스 축제 때였다(216).
아리스토텔레스. 참된 비극의 영웅은 천박하지 않은 본성을 타고나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인간이며, 죄를 범했을 때 자기 행위에 대한 벌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이다(218).
모든 미적 효과는 윤리적 전제에 의해 제약된다. 그리고 이 전제를 파괴하는 것은 곧 비극의 참된 목적을 좌절시키는 것이다(218~219).
* 윤리 그리고 미적이라는 日本語가 현대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이들 단어를 ethos(성격, 인격, 성품, 태도)를 연구하는 학문인 ethike 그리고 aisthesis로 바꾸어 생각해보라.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 일본인들에 의해 倫理學이라 번역되어 통용되고 있는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는 차라리 性格學으로 번역되었어야 할 것이다 (마치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인 physika가 物理學이 아니라 自然學으로 타당히 번역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통 이른바 정치적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이라 번역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zoon politikon 역시 '폴리스(polis)적 동물'이라는 바로 그 의미이다. 인간의 본질, 성격은 폴리스 안에서만, 곧 그가 속한 폴리스의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사회적인 활동 안에서만 성취가능한 것이다. 오늘날의 자연과 윤리와 사회와 정치와 종교가 이 고대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아직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서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성격보다 행위를 강조했다. [...] 그리스 연극의 주제는 보편적 인간이며, 근대 연극의 주제는 개인이다(220~221).
그리스 연극은 음악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오페라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들의 연극은 서정시로부터 발전되었으며, 처음에 서정시의 유일한 요소였던 합창단의 무용과 노래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율동적 동작과 풍부한 멜로디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부담이 덜어졌고 생동적 사실은 답가의 영역으로 분할되었기 때문에 구성의 명석하고도 엄밀한 의미는 절정에 달해서도 흐려지지 않았으며 가슴의 정열은 음악 속에서 자각되므로 이념은 서정적 운문으로 구체화되고 운문은 노래에 의해 이념화되었다. 노래와 운문은 온몸의 몸짓에 의해 거울 같은 눈에 반영되고 눈은 몸짓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연극의 행위를 연출하는 송시(頌詩)의 성격은 지금 말한 바와 같지만, 행위 그 자체는 정열과 지성보다 눈과 귀에 더 호소력이 있다. 공연의 환경 즉 개방된 분위기의 거대한 청중석은 낭송 등에 적합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연극 행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배우는 보통 장화보다도 훨씬 긴 것을 신고 무대에 오르는데, 얼굴은 가면으로 가렸고, 목소리도 가성이다. 이것은 그 연극적 효과를 위해 배우들이 표정 연기, 목소리 혹은 빠른 몸짓의 섬세한 변화가 아니라, 자세의 균형 및 빠른 회화적 말투 때문에 운율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 장엄한 이암보스 시의 단조로운 억양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연은 눈에 대해서는 움직이는 조각이며, 귀에 대해서는 합창단이 부르는 격렬한 간주곡 사이에 있는 음악적 휴지부와 같은 것이다(222).
그리스 희극 역시 비극과 마찬가지로 노래와 무용이 기초이다(229).
전체 속에서만 부분이 실현된다. [...] 덕이라고 정의되는 성질은 오직 폴리스 속에서만 그 의의를 갖는다. 개인은 폴리스의 시민인 한에서만 완전한 한 인간이다(236).
그리스에 대한 이해 없이 니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